[82회] 막장으로 가는 권력, ‘보안법 파동’
독재자 이승만 평전/[12장] 권력말기현상 드러내고 국정파탄 2012/05/06 08:00 김삼웅이승만과 추종자들에게 1960년 상반기로 예정된 제4대 정ㆍ부통령 선거는 피할 수 없는 건널목이었다.
독재자나 추종자들에게 가장 못마땅한 것은 “왠 세월이 이리 빠른가”일 것이고, 또한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독재자의 ‘만수무강’일 터이다. 세월이야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지만, ‘만수무강’은 세월을 넘어서지 못한다.
5ㆍ2총선에서 개헌선을 확보하지 못한 채 지지기반을 상실해간 자유당은 1960년대의 대격전을 앞두고 대안을 찾아 부심하였다. 야당은 점차 거세어지고, 일부 신문은 비판의 강도가 날로 심해졌다. 이승만 측근들은 야당의 발을 묶고 비판 언론에 재갈을 물릴 목적으로 국가보안법을 강화하는 데 눈을 돌렸다. 민심을 잃은 한국의 독재 세력이 비판세력을 제거하고 국민을 현혹시키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안보ㆍ간첩ㆍ좌경ㆍ용공ㆍ종북주의 따위의 붉은 딱지를 붙이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권부 내에는 일제강점기부터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여 고문해온 기술자가 여전히 많았고, 노하우도 축적돼 있었다. 조봉암과 진보당은 이런 수법으로 이미 감옥에 집어넣었다. 나머지 야당과 언론에 겁을 주는 일이 시급한 과제였다.
자유당은 이와 같은 숨겨진 목표 아래 간첩을 색출하고 좌경세력을 발본색원한다는 명분을 들어 그해 8월 11일 국가보안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자유당 지도부가 정부와 사전협의를 거쳐 전문 3장 40조, 부칙 2조로 된 국가보안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간첩행위를 극형에 처하게 하는 조항에서,
① 간첩활동의 방조행위에 대해 범죄구성의 요건을 명백히 하며
② 간첩죄 피고인의 변호사 접견을 금지하며
③ 상고심 제도를 폐지한다는, ‘3대원칙’의 정략이 숨겨져 있었다.
자유당의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민주당과 일부 무소속 의원들은 “간첩개념의 확대규정은 정ㆍ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언론인의 활동을 제약하고 탄압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다”고 지적하고, “변호사의 접견금지와 3심제의 폐지는 명백한 헌법위반”이라며 강력히 반대에 나섰다.
민주당과 무소속 의원 95명은 ‘국가보안법개정 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백남훈, 지도위원에 조병옥ㆍ곽상훈ㆍ장택상 의원을 추대하여 범야 연합전선으로 저지투쟁에 나섰다. 자유당도 ‘반공투쟁위원회’를 구성, 장택상 의원을 회유하여 위원장으로 추대함으로써 범야 연합전선의 분열을 기도하면서 강행통과를 서둘렀다.
이승만 정권은 그동안 무리수를 거듭하면서 이승만의 3선에까지 이르렀는데, 4선을 위해 또 다시 보안법으로 억압통치의 장치를 만들어 영구집권하려는 책략이었다.
1960년의 목표를 오로지 ‘재집권’으로 설정한 이승만과 자유당은 신보안법의 강행통과도 불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12월 19일 법사위에 상정하여, 야당 의원들이 식사하러 간 사이에 자유당 의원만으로 3분 만에 날치기 처리하는 변칙을 보였다.
자유당 의원들의 기습작전으로 법사위에서 허점을 찔린 야당 의원들은 법사위의 변칙통과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의사당 안에서 농성투쟁에 들어갔다. 그 사이에 두 당에서는 협상을 벌였지만 무위에 그치고, 헌정사에 길이 오점을 남기게 되는 12월 24일이 다가왔다.
자유당 국회는 강행통과를 위해 내무부와 은밀한 협의를 거쳐 극비리에 전국 각지의 경찰서에서 유도와 태권도 유단자인 무술경찰관 3백 명을 임시로 특채하여 3일 동안 국회경위의 역할을 담당할 훈련을 시켰다.
이날 상오 10시를 기해 무술경위들은 사회를 맡을 자유당 소속 한희석 부의장을 에워싸고 본회의장에 난입하여 연 6일 째의 철야농성으로 지칠 대로 지친 야당의원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일부는 지하실에 감금시켰다.
본회의장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무술경위들의 폭행으로 야당의원들의 비명이 의사당 안팎에 메아리쳤다. 무술경위들에게 저항하다가 많은 야당의원들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박순천ㆍ김상돈ㆍ허윤수ㆍ유성권ㆍ윤택중ㆍ김응주ㆍ김재건 의원 등이 중경상을 입고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응급치료를 받았다.
야당의원들을 폭행한 무술경위들이 의사당의 모든 출입문을 봉쇄하고 있는 가운데 한희석 부의장의 사회로 자유당 의원들만으로 본회의가 열렸다. 이들은 법절차를 무시한 채 순식간에 보안법을 처리한 데 이어 새해예산안과 12개의 세법개정안 등을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보안법이 처리된 후 지하실 한 구석에 감금돼 있던 야당의원들의 ‘금족령’이 풀렸다. 이들은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보안법 무효”,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지만 ‘기차’는 이미 떠나고 말았다.
야당탄압과 언론규제를 목표로 하는 이른바 신보안법을 통과시킨 자유당 정권은 법의 효력이 발생한 지 20일 만인 1959년 2월 5일 서울지방법원으로 하여금 야당지인 <경향신문>에 대해 압수수색영장을 내게 하고 미군정법령 88호를 적용, 폐간명령을 내리는 등 정권말기의 횡포를 서슴치 않았다.
이승만의 국가보안법개정의 폭력사태와 관련, <뉴욕타임즈>는 다음과 같은 서울발 기사를 보도했다 .
주한 미국대사 월터 C. 다올링 씨는 점차 심각해지고 있는 한국의 정치분쟁에 관해 미국무성 관리들과 협의하기 위해 오늘 워싱턴을 향해 서울을 떠났다. 그는 지난 수요일 국무성으로부터 소환령을 받았었다. 관측통들은 한국의 신국가보안법에 대한 국내외의 반응에 비추어 볼 때 한ㆍ미관계의 재평가는 곧 있게 될 것으로 믿고 있다. 한국의 야당과 신문들은 이 법이 언론의 자유와 기본 인권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해 왔다. 서울에 주재하는 미국 관리들은 만일 방첩 및 반란방지법이 반공정책의 구실 아래 정부에 대한 언론의 비판을 침묵시키고, 야당의 정치활동을 억제하는 데 이용될 경우 그에 대한 국민의 반발이 매우 심각할 것임을 공공연히 우려해 왔다. (주석 13)
주석
13> <뉴욕타임즈>, 1959년 1월 17일.
독재자나 추종자들에게 가장 못마땅한 것은 “왠 세월이 이리 빠른가”일 것이고, 또한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독재자의 ‘만수무강’일 터이다. 세월이야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지만, ‘만수무강’은 세월을 넘어서지 못한다.
5ㆍ2총선에서 개헌선을 확보하지 못한 채 지지기반을 상실해간 자유당은 1960년대의 대격전을 앞두고 대안을 찾아 부심하였다. 야당은 점차 거세어지고, 일부 신문은 비판의 강도가 날로 심해졌다. 이승만 측근들은 야당의 발을 묶고 비판 언론에 재갈을 물릴 목적으로 국가보안법을 강화하는 데 눈을 돌렸다. 민심을 잃은 한국의 독재 세력이 비판세력을 제거하고 국민을 현혹시키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안보ㆍ간첩ㆍ좌경ㆍ용공ㆍ종북주의 따위의 붉은 딱지를 붙이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권부 내에는 일제강점기부터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여 고문해온 기술자가 여전히 많았고, 노하우도 축적돼 있었다. 조봉암과 진보당은 이런 수법으로 이미 감옥에 집어넣었다. 나머지 야당과 언론에 겁을 주는 일이 시급한 과제였다.
자유당은 이와 같은 숨겨진 목표 아래 간첩을 색출하고 좌경세력을 발본색원한다는 명분을 들어 그해 8월 11일 국가보안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자유당 지도부가 정부와 사전협의를 거쳐 전문 3장 40조, 부칙 2조로 된 국가보안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간첩행위를 극형에 처하게 하는 조항에서,
① 간첩활동의 방조행위에 대해 범죄구성의 요건을 명백히 하며
② 간첩죄 피고인의 변호사 접견을 금지하며
③ 상고심 제도를 폐지한다는, ‘3대원칙’의 정략이 숨겨져 있었다.
자유당의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민주당과 일부 무소속 의원들은 “간첩개념의 확대규정은 정ㆍ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언론인의 활동을 제약하고 탄압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다”고 지적하고, “변호사의 접견금지와 3심제의 폐지는 명백한 헌법위반”이라며 강력히 반대에 나섰다.
민주당과 무소속 의원 95명은 ‘국가보안법개정 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백남훈, 지도위원에 조병옥ㆍ곽상훈ㆍ장택상 의원을 추대하여 범야 연합전선으로 저지투쟁에 나섰다. 자유당도 ‘반공투쟁위원회’를 구성, 장택상 의원을 회유하여 위원장으로 추대함으로써 범야 연합전선의 분열을 기도하면서 강행통과를 서둘렀다.
이승만 정권은 그동안 무리수를 거듭하면서 이승만의 3선에까지 이르렀는데, 4선을 위해 또 다시 보안법으로 억압통치의 장치를 만들어 영구집권하려는 책략이었다.
1960년의 목표를 오로지 ‘재집권’으로 설정한 이승만과 자유당은 신보안법의 강행통과도 불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12월 19일 법사위에 상정하여, 야당 의원들이 식사하러 간 사이에 자유당 의원만으로 3분 만에 날치기 처리하는 변칙을 보였다.
자유당 의원들의 기습작전으로 법사위에서 허점을 찔린 야당 의원들은 법사위의 변칙통과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의사당 안에서 농성투쟁에 들어갔다. 그 사이에 두 당에서는 협상을 벌였지만 무위에 그치고, 헌정사에 길이 오점을 남기게 되는 12월 24일이 다가왔다.
자유당 국회는 강행통과를 위해 내무부와 은밀한 협의를 거쳐 극비리에 전국 각지의 경찰서에서 유도와 태권도 유단자인 무술경찰관 3백 명을 임시로 특채하여 3일 동안 국회경위의 역할을 담당할 훈련을 시켰다.
이날 상오 10시를 기해 무술경위들은 사회를 맡을 자유당 소속 한희석 부의장을 에워싸고 본회의장에 난입하여 연 6일 째의 철야농성으로 지칠 대로 지친 야당의원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일부는 지하실에 감금시켰다.
본회의장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무술경위들의 폭행으로 야당의원들의 비명이 의사당 안팎에 메아리쳤다. 무술경위들에게 저항하다가 많은 야당의원들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박순천ㆍ김상돈ㆍ허윤수ㆍ유성권ㆍ윤택중ㆍ김응주ㆍ김재건 의원 등이 중경상을 입고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응급치료를 받았다.
야당의원들을 폭행한 무술경위들이 의사당의 모든 출입문을 봉쇄하고 있는 가운데 한희석 부의장의 사회로 자유당 의원들만으로 본회의가 열렸다. 이들은 법절차를 무시한 채 순식간에 보안법을 처리한 데 이어 새해예산안과 12개의 세법개정안 등을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보안법이 처리된 후 지하실 한 구석에 감금돼 있던 야당의원들의 ‘금족령’이 풀렸다. 이들은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보안법 무효”,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지만 ‘기차’는 이미 떠나고 말았다.
야당탄압과 언론규제를 목표로 하는 이른바 신보안법을 통과시킨 자유당 정권은 법의 효력이 발생한 지 20일 만인 1959년 2월 5일 서울지방법원으로 하여금 야당지인 <경향신문>에 대해 압수수색영장을 내게 하고 미군정법령 88호를 적용, 폐간명령을 내리는 등 정권말기의 횡포를 서슴치 않았다.
이승만의 국가보안법개정의 폭력사태와 관련, <뉴욕타임즈>는 다음과 같은 서울발 기사를 보도했다 .
주한 미국대사 월터 C. 다올링 씨는 점차 심각해지고 있는 한국의 정치분쟁에 관해 미국무성 관리들과 협의하기 위해 오늘 워싱턴을 향해 서울을 떠났다. 그는 지난 수요일 국무성으로부터 소환령을 받았었다. 관측통들은 한국의 신국가보안법에 대한 국내외의 반응에 비추어 볼 때 한ㆍ미관계의 재평가는 곧 있게 될 것으로 믿고 있다. 한국의 야당과 신문들은 이 법이 언론의 자유와 기본 인권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해 왔다. 서울에 주재하는 미국 관리들은 만일 방첩 및 반란방지법이 반공정책의 구실 아래 정부에 대한 언론의 비판을 침묵시키고, 야당의 정치활동을 억제하는 데 이용될 경우 그에 대한 국민의 반발이 매우 심각할 것임을 공공연히 우려해 왔다. (주석 13)
주석
13> <뉴욕타임즈>, 1959년 1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