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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書畵)의 성지 추사 과지초당(瓜地草堂)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184번지
추사(秋史) 과지초당(瓜地草堂)은 추사(秋史)의 부친(父親) 김노경(金魯敬1766~1837)이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내던 1824년 과천에 마련한 별서(別墅)이다.
과지초당(瓜地草堂)의 뜻은
과지(瓜地)란 글자 의미대로 오이밭을 일컫는 말이겠으나, 과천 주암동은 예나 지금이나 참외밭이 많은 것으로 보아 어쩌면 참외밭을 일컫는 것일지도 모른다.
참외밭이 있는 초가집 !
과지초당은 경관이 빼어난 정원과 숲, 그리고 아름다운 연못을 갖추어 추사 가문의 절정을 상징하는 곳이다. 1837년(헌종3년)에 김노경이 별세하자 추사는 부친의 묘역을 과지초당 인근 옥녀봉(玉女峰) 중턱 검단에 모시고 과지초당에서 보내는 시일이 늘어났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은 제주 및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1852년(철종3년)8월 이후 1856년 10월 10일 서거(逝去)하기까지 말년 4년을 과지초당에서 지내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다.
돌아가시기 3일전에 쓴 글씨가 봉은사의 “판전(板殿)” 편액이다.
추사(秋史) 선생은 4년간 과지초당에 머물면서 직접 우물에서 물을 길러 마셨다고 한다.
“독우물”은 독(항아리)을 묻어 우물을 만들었기에 독우물, 또는 옹정(甕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독우물은 과지초당과 더불어 과천 소재 추사 관련 유적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이상 과천시 표지판 내용)
지금 과지초당(瓜地草堂) 옆에는 추사기념관이 공사 중이고 과지초당도 보수를 하는지 정리가 안 되어 있다.
그리고 “독우물” 장소도 공사관계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눈에 덮여서 위치도 알 수가 없었다.
다음에 정리가 되면 다시 답사를 해야 걷다.
추사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나라의 위인이다.
유홍준(명지대 교수) 선생님의 “완당 평전”에 의하면
조조, 유비, 손권의 삼국지가 등장하는 후한(後漢) 이후 서법과 서체가 처음 등장한 진나라때의 왕희지 서체 이후 당나라의 구양순서체→ 송나라의 소동파서체→ 원나라의 조맹부서체 → 명나라의 동기창서체→ 청나라 때에 정판교서체를 들 수 있겠지만,
청(淸) 시대를 대표하는 서체는 단연 추사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우리만의 주장이 아니라 청조학 연구의 선구자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인 후지즈카 지카시도 주장한 말이다.
추사는 입고출신(入古出新옛 것을 통해 새 것을 창조한다.)의 정신으로 전한(前漢)시대의 예서체 비문 글씨나 청동 거울 뒷면에 새겨진 전서체와 예서체 글자를 수없이 임서(臨書)하여 독특한 추사체를 창조하였다.
글씨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던지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글씨가 비록 족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서예가는 모름지기 팔뚝 아래에 309개의 옛 비문 글씨를 완전히 익혀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서 추사의 노력을 알 수 있다.
아쉬운 것은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위대한 추사의 작품가운데 명품은 간송미술관, 삼성 리움 미술관을 비롯하여 개인 소장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고 과천시의 추사 기념관에는 추사와 추사체 연구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의 후지즈카 지카시 후손이 몇 년전에 과천시에 기증했던 추사 작품 (주로 서찰)만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바라는 것은 과천시가 과지초당 옆에 추사 기념관과 간송미술관을 함께 두고 이곳을 한국의 모네의 집으로 꾸미고 간송 미술관과 추사 기념관이 합동으로 매년 명품 전시회를 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다.
문화예술이 빈약한 국민은 추한 국민이다.
추사가 마지막 생을 마감한 과천의 과지초당은 문화예술계의 성지(聖地)라 할 수 있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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