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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에 보이는 두 컵은, 짐제네와 혼인하기 전 이미 세상 뜨신(무신 저승길이 그리 바쁘다고), 그래서 직접 배알한 적은 도저 없고 오직 집안 어디 앨범 어느 한 갈피 속에 영면해 계시는, 영정사진으로만 잠깐 뵈었던 장모님, 내 거튼 잘난 사위 찾아오면 버선발로 뛰어나와 두 손 잡으시며 대추/황기 두루두루 넣어 씨암탉 잡아 주셨을 그분,
그분 ‘이주이(李周伊)여사’께서 1970년 언저리, 장인어른은 이미 이 세상 아니 계셨고, 2남 2녀 홀몸으로 거두어 키우느라 혼과 신을 다해 동분서주, 애걸복걸, 친정집 신세까지 져가며 그러구러 아들 둘은 S대 보내고 장녀는 핵조 선생시키고(그 그늘에 치인 차녀 짐제네만 팔자 드럽게 혹독한 남자("Bebe--"Malo"의 그 부랑 사내), 한 화상과 만나 초빼이치고(뼈 빠지게 고생하고)있지만,) 이러거나저러거나, 그 한 맺힌 일평생, 공들여 키운 자식들 장성하여 뜨억하니 조은 직장(공중파 언론사 M본부 무신 부장, 무신 대학조 교수)꿰 찬 자식들로부터 돌려받을 지극효성 제대로 누리지 못하시고 다음 세상, 내 장모님의 아부지/엄니가 외할머니가 도솔천 건너 편, “오너라, 오너라, 그 세상은 타고난 니 팔자가 상그럽다(나쁘다, 싱송생송하다?), 한 세상 건너 뛰거라,” 하는 부름에 마지못해 2남2녀 버리고 서둘러 못 돌아올 다리를 허위허위 건너가신 그분, 쌀 씻은 뜨물도 아까워 버리기 오금 저리며 한 목숨 사셨던 그분, 그분이 일천 구백 칠십년 대, 그 엄혹한 생활고에 씨달키면서 보릿고개 하나 넘기에도 턱까지 숨이 차던 그 시절, 만연했던 <계모임>에 대해서 잠시 느스레를 떨까한다. “사진의 두 컵은 뭐냐고? 잠시잠깐 기다리바라, 고마회 모임 때마다 내 한 번 제대로 마이쿠 잡은 적 업다,” 계모임, 계주, 계원이 있었다. 일종의 ‘사설 금융시스템'이엇재, 잘 들어 바라, 이를테면 곗꾼이 10명이라 치자, 1번은 계주다, 2번부터 10번까지는 계원이다, 한 달 불입액이 기준 10만 원이다, 그런데 순번에 따라 불입 금액이 달라진다, 첫 달 계금을 찾아 묵는 계주는 매달 20만원을 붓고(20만X10달=200만원), 100만원 목돈 타고(왜? 서방님이 사업을 하거나 해서 당장 목돈이 필요), 끝번 계원은 매달 10만원 부어(10만X10달=100만) 물경 200만원을 타고(서방이 공무원이라 고정/안정적 수입원이 보장된), 가운데 번호 5, 6번은 100만원 붓고 그냥 100만원 타묵고, 그래서 그 본전치기 5,6번들은 2,3,4번, 또는 7,8,9,10번에 중복해서 들기도 한다, 셈본에 약한 용주야/수서가/하키야/식아/룡아, 알아묵건나? (Do U follow me?) “아, 유리컵 사진가꼬 와 사람을 뺑빠꾸시키냐꼬?” “성질도 디기 급하고 드럽네.....” 다시 이주이 장모님과 1970년이다, 장남 하키가 경고 가고 장녀 김희선 여사가 부산교대로 진학해서 뒷수발, 부산으로 이사했던 70년대 초반 어느 어름, 그전 마산 계실 때도 계가 빵꾸나서 계주 튀고 본전도 못건진 전례가 수타이(여러 번) 있었다나(차녀 짐제네의 법정(밥상) 증언), 부산 가셔서 하숙치고 머시기머시기, 2남2녀 목구녕 풀칠이라도 시킬라꼬 온 몸 땀범벅이던 그 때도 목돈이 아숩고 하여 또 계를 들었는데, 혹시나 하였더니 역시나 또 계주가 어느 날 곗돈을 차고 어디로 날라뿐기라, 허겁지겁, 장모님, 증발한 계주 집을 찾아가니 집은 이미 터엉~~ 비었고, 그 계주 신랑이 야매(불법)로 수입품을 거래하던 작자였다나? 텅 빈 계주집에 딸랑, 못다 판 수입품 몇 박스가 눈에 보이더래, 열어보니 바로 위 사진의 그 유리컵이 들었더래, (내 이바구가 결론에 가까워진다,) ‘우짜까 마까’ 하다가 떼인 곗돈 본전이 아까바서 자식들 포도청 목구녕.... 냉큼 그 박스 중 세 박스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고, 그 유리잔, 장녀 시집갈 때 없는 혼수감 사이에 몇 나 찡가주고, 다시 장녀 김희선 여사가 짐제네 내한테 시집 올 때 그 중 몇 나를 또 찡가 준, 그 유리컵이라쿠더라, 휴우~~~ 와아 입 무급고 사리 밝근 짐제네가 이런 상산 짐씨 집안의 비사를 내게 공개햇건노? 봉다리 여사(짐제네: 남은 음식이나 또 무슨 물건을 장기 보관해야것다 시프모 꼭 그 물건을 봉다리에 쌀 필요도 업는데 그걸 봉다리봉다리, 두겹으로 싸 두어서 내가 ‘오사마리’, ‘미수꾸리’, ‘봉다리’ 여사라 쿠능기라) 지캉 내캉 단 둘이 밥상자리 마주앉아, 우짜다가 우리 진양 정씨 양반 집안에 있었던 비사를 내가 먼저 자사서 발설한 것으로 촉발이 된기라, 1971년 여름, 정확히 기억한다, 내 고등핵조 2학년, 우리 옴마 권묘순 여사도 역시나 계모임에 여러 군데, 여러 구좌를 드셨어, 혹시나니 역시나라, 그 모임 계주가 야반도주, 얼척이 업는 옴마는 우시두시 그 년 집에 가보니 먼지 한 톨도 안남기고 사라진 거라, (참고: 울 엄마 학력은 국퇴다. 한글은 독해 가능.) 자아, 옴마보다도 더 거금을 떼인 계꾼도 있었더래, 늘푼성 없는 꾀재재 접장 남편 벌어다 주는 쥐꼬리 월급으로 2남 3녀 밑가림하기도 바쁜데 세상 물정을 우찌 헤아릴 수 있었건노? 그 학력에? 무식하면 용감하다꼬, 늦장마 빗줄기 끄러 붓는 폭우를 촐촐 맞고 다녀오시더니, 일갈, “범아, 짐 싸라, 딴 사람 먼저 그 년 집이라도 잡아야것다.” 장남인 내가 이 긴급 상황에 어무이께서 내리시는 지엄한 미션에 즉각 작전 돌입, 일단 빗속을 달려 그 집 담부랑을 넘어서 대문부터 깨라노코, 무거운 가구부터, 비에 젖어도 괜차는 살림부터 왔다갔다 나르기 시작했다, 반나절 여 걸려 가재도구 거진 전부를 빗속 이사했다. 그 이후, 국퇴인 옴마는, 돈 떼인 계꾼들끼리의 빚잔치, 본전 찾기 멱살 다짐, 고성, 거쳐, 채무관계로 채무인의 집을 무단 점거한 뒷감당, 갱찰, 금찰 소환/출두/소명/지장찍고/업던 도장 파서 인장찍고 우찌저찌 홀몸으로 헤치시어 깔삼하게 단칼에 해결하시었더라,
“아나, 아까부터 깔짝대던 김학장 니, 마이쿠 잡아라,” https://www.youtube.com/watch?v=KJSXolyj4DM Hyungdon&Daejune _ The Gloomy Song(안좋을때 들으면 더 안좋은 노래) M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