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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요가
티벳불교 수행의 진수는 구루요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루요가란 참된 스승을 찾아서 스승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진리의 가르침대로 따라 사는 것이다. 즉 구루의 본성과 하나가 되기 위한 수행법으로 이 수행을 통해서 스승의 깨달은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계합되는 방법을 얻게 되는 것이다. 티벳의 많은 성취자들은 현재 자신이 많은 제자들의 스승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위대한 스승들의 제자로 남아 있다. 그들은 그러한 스승에 대한 온전한 헌신을 통해서 구경의 성취에 오른다. 구루요가도 기초 사가행중에 한 부분이지만 티베트 불교 수행의 핵심이라 할 수있다. 구루에 대한 진정한 신심과 헌신이 마음에서 일어나 스승의 존재가 부처의 화현이라 믿어지고 모든 불보살님의 존재와 위신력을 한 몸에 구족하신 분이라고 저절로 마음에서 깨달아 질 때 내 안에 있는 자신인 법신의 구루와 대면케 되는 것이다. 즉 외적인 스승의 존재에 대한 신심과 헌신의 마음이 생겨났을 때 내 안에 본래 구족한 스승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소걀린포체는 말씀하셨다.
ꡒ우리의 불성은 능동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우리를 가르켜 일깨우고 진리로 되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내적인 스승의 모습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여 미혹에 빠지려는 순간 자신의 참된 모습과 영광스런 광명의 길로 되돌리기 위해 애쓴다. 우리가 오랫동안 수많은 삶을 통해서 진리를 염원하고 갈망해왔을 때 우리의 업장이 충분히 정화되었을 때 우리와 언제나 함께 있었던 내적인 스승이 어느 날 갑자기 외적인 스승의 모습으로 자신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 외적인 스승은 다름 아닌 자신의 내적인 스승이 몸과 목소리를 얻어 밖으로 형체를 드러낸 것이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그 어떤 사람보다 사랑하는 스승, 인간의 형상과 목소리를 지닌 우리의 외적인 스승은 바로 우리 자신의 내적 진리의 신비가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ꡓ
인도에 처음으로 배낭여행을 왔을 때 잠자는 성자, 즉 슬리핑 라마로 불리워지는 닝마파의 최고성취자이신 민링틴진린포체를 찾아뵈었다. 제가 언제쯤 구루를 만날 수 있겠느냐고 여쭈었더니 머지않아 네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스승을 만날 것인데 그 분이 곧 너의 구루이다 하셨다. 그 당시 나는 그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 후 나는 전생의 구루인 듯 느껴지는 세속의 나이로 일곱살되신 까루린포체의 환생자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 그 분을 뵙자마자 마치 마법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의 온 영혼이 눈물로써 환희하고 모든 것을 다 바치고자하는 헌신의 마음이 저절로 우러났다. 그래서 두달간 린포체의 법회를 오직 헌신과 환희심으로 모시고 다녔는 데 그 때에 무한한 가피의 힘이 내게 새로운 영적인 세계를 체험케 해주었고 현재 티베트 불교 수행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도록 가호하심을 체험하고는 비로소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티벳에서는 모든 깨달음의 근원을 스승이라고 여긴다. 스승은 부처의 화현으로서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나투신 존재로 인간의 얼굴을 한 절대자이며 자신이 원한다면 모든 붓다와 깨달은 존재들과 대화하도록 만들어 주는 매개체이며, 모든 붓다가 지니고 있는 지혜의 결정체이며, 언제나 자신을 향하고 있는 붓다의 자비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현현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부처님의 자비와 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지만, 미혹 때문에 우리는 부처와 직접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스승을 직접 만날 수 있다. 스승은 우리에게 진리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 함께 살고 숨쉬고 말하고 행동한다.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이 마음에서 생겨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불의 문턱에 이른 것이다. 근대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셨던 딩고켄체린포체께서 말씀하셨다.
헌신이야말로 道의 정수이다. 만일 우리가 오직 구루만을 마음에 두고 열정적으 로 헌신한다면, 무슨일이 일어나든 그것을 스승의 축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렇게 계속해서 헌신하는 마음으로 수행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기도이다.
구루에 대한 헌신이 모든 생각에 스며들면, 무슨일이 일어나든지 그가 보살피고 있으리라고 믿게 된다. 자기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구루를 지향하게 되고 상스럽 고 음흉한 모든 생각이 헌신으로 가득하게 된다. 그때 모든 것은 마치 하늘에서 매듭이 풀려나듯 저절로 그 절대적인 본성 가운데에서 풀려나게 되리라.
티베트 사람들이 늘 하는 이야기 중에 혼자 열심히 노력 정진하는 사람이 이 생에 성취를 할 수 있을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으나 구루에 대한 온전한 헌신을 내는 사람은 금생에 반드시 성취할 수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 있다. <열렬한 헌신의 햇살이 스승의 눈덮인 산 위에서 빛날 때, 축복의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 제자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준다>고 말한다. 그러한 축북의 물줄기 속에는 각 파의 전승에서 그 수행을 성취하시고 전수하신 전승조사들의 가피도 또한 포함된다. 티베트의 스승들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스승의 제자로서 남아 있으면서 항상 스승에게 가피를 청하는 기도를 하기 때문에 그 들의 머리 위에는 스승들의 전승이 황금의 염주가 되어 가피의 물줄기를 쏟아 내리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스승을 정수리에 관상하고 아래와 같이 기도한다.
모든 불보살님을 한 몸에 구족하신 근본상사시여!!
신구의 삼문을 다 바쳐서 간절히 기원하옵나니
자신의 본래면목을 인지케하시고
금생에 성불할 수 있도록 가피하소서.
아울러 항상 <아버지시여!! 당신과 같이 될 수 있도록 가피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구루에 대해 온전한 신심과 헌신의 마음을 일으키기란 말처럼 쉽지는 않다. 살아 숨쉬는 어느 한 존재를 부처의 존재로 인식하고 헌신의 마음을 일으키려면 그 만큼 그 사람이 정화되어 있고 충분히 준비되어 있을 때 구루와의 만남과 계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헌신이란 어떤 것인가. 맹목적이고 지각없는 숭배가 아닌 경건한 마음에 뿌리를 둔 명쾌하면서도 지성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한 내적인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스승이 내 자신의 존재 안에 깨달음과 지혜의 마음을 체현하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될 때 터질 듯한 감사의 물결이 파도처럼 일어나 헌신이라는 말로 스승을 향해 흘러갈 것이다. 딜고켄제 린포체는 말했다.
처음에 이러한 헌신은 자연스럽거나 자발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제나 스승의 뛰어난 점, 특히 그의 자비롭고 자상함을 기억해야 한다. 믿음, 스승에 대 한 존중, 그리고 그를 향한 헌신을 반복함으로써 그의 이름이 언급되거나 그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기만 해도 우리의 모든 일상적 행위가 멈춰질 때가 올 것이 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를 부처 자체로 보게 될 것이다.
스승을 인간이 아닌 부처로서 보게되면 가장 온전한 가피를 얻게 되는 것이다. 티벳불교에서는 말한다. 스승을 부처로 대하면 부처의 축복을 얻게되고, 스승을 인간으로 대하면 인간의 축복을 얻게 된다고. 스승을 부처로 대하기만하면 부처의 지혜로 충만한 스승의 마음이 그대로 자신에게 흘러들어올 것이라는 것이다. 스승에게 헌신의 마음을 낼수록 가르침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열리게 되고 마음이 열릴수록 그 가르침이 마음과 정신을 꿰뚫어 완벽한 영적인 변화를 일으키기가 쉬워진다고 말한다.
제자의 마음을 정화시켜 헌신의 마음을 일으켜 스승님과 계합하고 뜻이 상응케 하는 방편수행이 구루요가이다. 닝마파의 현존하시는 성취자이신 쟈달린포체께서는 제자들에게 구루요가 만트라만 천만독씩 하도록 하신다. 천주교 신자가 많은 아르헨티나에서 온 한 청년이 그 린포체의 제자가 되어 구루요가 만트라를 백만독씩 열 번해야 한다며 두문불출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도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까규파의 성취자인 나로바께서 나란다대학의 승정의 위치를 사임하고 구루 틸로빠를 찾아 나섰다. 그는 먼저 헤루까 만트라를 칠십만번 하고 나서 간절히 구루를 만날 수 있기를 염원하면서 길을 떠났다. 도중에 많은 어려움과 강도와 거렁뱅이들에 시달리면서 몇 년을 헤메었으나 결국 구루와의 만남은 기약이 없게 되자 자신이 얼마나 박복하고 업장이 두터운가를 한탄하면서 자살을 결심한다. 벼랑에서 몸을 강물로 던졌을 때 띨로빠가 나타나 구해주신다. 나로바가 띨로빠임을 알고 원망을하니, 띨로바께서 <네가 나를 찾아 나선 그 순간부터 나는 너를 잠시도 떠난 적이 없다. 다만 네가 네 아상에 가려서 나를 보지 못했을 뿐이다. 네가 도중에 만났던 거지와 강도들이 다 나의 화신이였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 나로바는 띨로바에게서 열세차례에 걸친 아상을 없애는 혹독한 시련을 거친 후 수행을 성취하여 까규파의 주 수행법인 <나로바 육성취법>을 남긴다. 지금도 까규파의 무문관에서는 이 수행법을 위주로 전수하고 있다.
나는 대만에서 티벳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우연히 나로바 육성취법에 대한 서적을 몇권 발견했다. 본래부터 기공이나 무술에 관심이 많았던터 인지라 몸과 마음을 함께 닦는 논리 정연하고 구체적인 수행법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이 수행법이 아직도 전수되고 있는지 실제로 성취자가 존재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매일 나름대로 열심히 책도 보고 기도도 하면서 이 수행을 전수하는 도량과 성취자와 인연만 된다면 이 한 생을 다 바쳐서라도 그 수행을 해보고자 합니다라고 간절히 염했다. 나로바 육성취법을 전수해 주실 구루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확실한 기대도 없이 인도에 있는 티벳의 임시정부 소재지인 다람살라로 갔다. 티벳불교 도서관에서 티벳어 연수를 하던 중 따시종에 위치한 까규파의 전통수행도량인 캄바카 사원을 방문케되었는 데 그 곳의 책임자이신 도종린포체를 통해서 나로바 육성취법을 전수하는 무문관이 그 도량 내에 시설되어 있고 성취자이신 독덴 암틴께서 지도를 해주신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선지식을 뵙게 해달라고 청을 드렸다.
그러나 지금 무문관 중이시라며 좀처럼 쉽게 뵙기가 어려운 듯했다. 한 달 남짓 후에 이 사원에 제일 큰 행사인 파드마삼바바의 기도법회와 함께 라마댄싱이 열렸다. 그 때에 성취자이신 독댄 암틴께서도 밖으로 나오셔서 라마댄싱을 참관하시면서 손에는 티벳사람들이 거의 매일 손에 들고 돌리는 만트라와 경전이 든 마니륜이라는 통을 돌리고 계셨다. 마을 사람들 중에 하나가 저 분이 무문관을 지도하시는 성취자이시고 지금 행사 중에 비가 오지 못하도록 진언을 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다른 티벳인과는 달리 유난히 피부가 희고 빛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누구에게나 유쾌한 느낌을 주는 힘찬 모습은 칠십 노인이라 믿기 어려웠다. 뵙기를 청해서 처소로 찾아뵈었다. 너무도 누추한 좁은 방에 낮으막한 나무의자 놓고 두 사람과 통역 한사람 앉으니 방안이 가득찼다. 암틴은 꾀좨좨한 어깨 런링에 흰치마를 걸치신 모습이 첫 눈에 우리 시골집 할아버지를 방불케 했다. 밖에서 가사에 법복을 다 갖추신 여법한 모습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나는 그 곳에 오게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아무 것도 모르지만 나로바 육성취법을 수행하기를 원한다고 말씀드렸다. 의외로 수월케 법에 이르는 차제가 있는 데 먼저 네가지 기초수행을 십만번씩 다 마치고 본존 관정을 거쳐서 무문관을 하고 나면 나로육법을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아직도 업장이 두터운 나는 법을 주실 수 있다는 말씀과 그 예비단계에 대한 말씀을 듣긴 했지만 왠지 좀 싱거웠다. 티벳의 성취자라면 좀더 신비롭고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어떤 비범함이 있어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기초수행에 대한 법을 청하기를 차일피일 미루고 다른 사원에 혹시 더 좋은 환경과 선지식이 있는 지를 찾아다녔다. 마침 한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세라부링이라는 마을에 다른 까규파 사원이 있는 데 비구니들을 위한 무문관이 시설되어 있고 나로육법도 전수하고 있다고 했다.
그 곳에서 티베트 비구니 스님들 무문관을 지도하신다는 밍귤린포체를 찾아뵈었다. 이제 겨우 스물한살의 나이와는 달리 태산같이 묵중하고 말씀을 하실 때는 강물처럼 부드럽고 자상하셨다. 그야말로 비범하신 환생자요 연꽃 속에 보석같이 빛나는 모습이셨다. 나는 두 생각도 없이 그곳으로 옮겨와 수행코저 한다는 말씀드렸다. 린포체께서는 캄바카사원에는 독댄이라는 성취자들이 아주 훌륭하시고 보배로운 존재라면서 그 곳에서 수행하기를 권하셨다. 나는 막무가내로 그 곳으로 옮겨와서 린포체를 모시고 수행하고 싶다며 받아주시기를 청했다. 린포체께서는 더 이상 말리지를 않으셨다. 그 곳에서 수행할 수 있는 외국인을 위한 집 한 채를 예약해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따시종으로 돌아왔다.
산 어귀에 이르렀을 때 이웃집에 사는 외국인 여자가 무덤에서 금방 일어난 듯한 창백한 얼굴을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는 당신에게 아주 나쁜 소식을 알려주어야만 한다고 했다. 내가 거주하고 있던 집이 불에 다 타버렸다는 것이였다. 나는 순간 멍청해졌다. 아침에 멀쩡하던 집이 몇 시간 나갔다 온 사이에 다 타버리다니.... 믿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많은 인도 사람들과 몇 명의 라마들이 타다 남은 물건들을 쌓아놓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함께 나간 도반스님은 자신의 돈지갑부터 찾았다. 적어도 이삼년간 공부하고자 준비해온 전재산을 방안에 두고 나갔던 것이었다. 백 불 짜리 육십 여장이나 넣어놓았던 전대는 다 타버리고 허리끈부분만 약간 남아있었다. 물건을 챙겨놓았던 이십 여개나 되는 가방들과 히말라야 트레킹을 위해 준비했던 오리털 파카와 슬리핑백 등산화등이 불에 타다 말은 찌꺼기만 남아있었다. 불을 꺼준 마을 사람들에게 사례를 해서 돌려보내고 도반스님과 둘만 남았다. 우선 옆에 있는 겨우 한사람 살 수 있는 작은 토굴로 쓸 수 있는 짐만 옮겼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려하니 이불이 다 타버리고 없었다. 서글프고 처량한 마음에 말문이 막혔다. 얼마나 두터운 업장이 있길레 이역 만리 낯선 인도 땅까지 와서 남의 집까지 다 태워먹는단 말인가! 아직까지 이 따시종 마을에서 그렇게 큰 화재는 없었다한다. 아르헨티나 사람이 겨울철에 와서 수행하기 위해서 지어놓은 집이 여름에는 비어있으므로 잠시 빌려들어 갔던 것인데 남의 집에 불을 내어 훼손을 시켜놓았으니 고쳐주어야 했다. 마침 라마가 슬리핑백과 담요 하나를 들고 왔다. 영국 비구니스님 하나가 T셔츠 두 개도 갖다 주었다. 잠을 청하고 누웠으나 눈 앞에 불길이 활활 타는 영상과 함께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만감이 교차하고 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어지럽혔다. 부처님께서 제행이 무상하다하셨던가! 아침까지 멀쩡하고 많은 인도인들과 티베트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좋은 물건들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지금은 이불하나 헌 옷가지를 얻어 입어야하는 신세가 되다니.... 먼저 남의 집을 태웠으니 수리를 해주어야 했다. 일단 세라부링으로 거처를 옮기고저 했던 계획을 미루고 화재의 뒷수습을 하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밤새 뜬 눈으로 새우고는 아침에 독댄 암틴을 찾아뵈었다. 내게 남아있던 딸러 이천오백불중에서 이천불을 봉투에 넣어 올리고는 말씀드렸다. <제가 업장이 두터워 법을 구하러왔다가는 불만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잿더미를 보고 모든 것이 무상함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방황하고 분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제가 업장이 두텁고 근기가 약해서 법을 받기 어렵다면 더 많은 공양을 준비해 올리고 참회기도를 하고저 하오니 빠른 시일내에 수행의 길에 들어서도록 인도해 주십시요.>했다. 암틴노장님께서 만면에 자상한 미소를 띠우시며 너희가 이미 火供으로써 많은 공양물을 불 속에 태워 올렸으니 그보다 많은 공양이 어찌 필요하겠느냐하시며 다음날부터 법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 다음날부터 한편으로는 불에 탄 집을 티베트사람들의 도움으로 보수하면서 한편으로는 구루 암틴으로 부터 기초수행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둡고 좁은 방에 쭈그리고 앉아서 구루께서 한 마디 한 마디 윤회의 고통에 대해 세세히 일러주시고 염리심을 일으켜서 마음이 법을 향해 성숙해져야 한다고 노파심절하게 말씀하실 때마다 가슴깊은 곳에서부터 무한한 환희와 감동이 용솟음쳤다. 인도의 오월은 그야말로 숨조차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더웠다. 게다가 따시종은 물이 부족하여 몸 안에 수분이 부족해서 오는 풍토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줌소태에 걸린다. 그 무더운 인도에서의 첫 여름을 구루 암틴의 좁은 방에서 가르침을 받으면서 비록 풍토병과 탈수로 고생하긴 했지만 오체투지 십만번을 환희심과 간절함으로 마칠 수가 있었다. 그 사이에 육개월만 돌아보고 대만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마음이 어느 새 사라지고 더 이상 방황하고 헐덕이는 마음을 쉬고 내생을 위해 이생을 포기하고 수행만을 위해 매진하기로 마음이 굳혀져 갔다.
어느 날 구루의 좁은 방에서 대만에서 온 제자 두 사람과 놀이가 벌어져 있었다. 그것은 <미라레바 십만송>이라는 책을 놓고 제자가 마음대로 책을 펼치면 스승님께서 읽어주시면서 인연도 보고 때에 맞는 법문도 해주시는 놀이였다. 때마침 내가 들어가니 나한테도 책을 주며 펼쳐 보라 했다. 내가 임의로 펼쳐서 스승님께 드리니 구루와 통역자이신 라마가 박장대소하며 너무도 딱 맞는 구절이라 하시며 즐거워 하셨다. 나는 영문을 몰라 통역을 청하니 그 대목은 미라레바와 두 번째 수제자인 레충바에 얽힌 고사였다. 레충바는 스승 미라레바를 떠나 인도로 법을 구하러 떠났다. 인도에서 많은 스승들을 만나 논리학등 많은 학문을 익히고 많은 서적들을 구해 돌아왔다. 내심 스승이신 미라레바는 무식한데 자신이 더욱 박식해진 것을 은근히 자만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물을 길러 가지고 오는 데 종이 타는 냄새가 났다. 아마 스승님께서 공양을 짓고 있는가 보다 생각하고 들어가니 미라레바는 레충바가 인도에서 가져온 서적들을 다 태우고 있었다. 레충바가 미친 듯이 분노하여 항의를 하니 미라레바는 너무나 가벼운 마음으로 웃으시면서 이 책들을 다 보려면 네가 죽을 때까지 보아야 함으로 나는 네가 죽었다 생각하고 너를 위해 이 책들을 다 태우는 것이다 하셨다. 그리고는 레충바의 헐덕이는 마음을 쉬도록 해주기 위해서 많은 신통력을 보이시는 대목이었다. 그 내용과 나에게 일어난 화재가 같은 상황이라면서 너무도 즐거워하셨다. 나는 불이 난 덕분에 헐덕하는 마음을 쉬고 법으로 마음이 향하게 되어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스승님께서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시면서 정색을 하시고는<한 번 더 태울까?> 하고 물으셨다. 그 말씀은 순간 나를 멍하게 했다. 그렇다면 그 화재는 우연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 날 이후 어쩌면 그 사건은 스승님께서 나를 법으로 인도하시고저 자비로 내리신 가장 큰 가피 일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신심을 갖게 되었다. 구루께서는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다 스승님께서 나를 성불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가피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따시종에 찾아 오는 다른 나라의 외국인들이 가끔 부러운 눈으로 내게 묻곤 한다. 외국인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티베트 불교 수행에 깊이 들어 올 수 있었느냐고... 나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로케트나 원자탄이 빨리 멀리 날 수 있는 것은 꽁무니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라고....
티벳불교에서 구루의 존재는 그 제자에게 있어 가피의 근본인 부처요 가장 자애로운 의지처인 아버지시며 모든 번뇌와 장애를 없애어 성취를 내리시는 수호본존이며 고통과 슬픔을 어루만져주시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현장스님의 염불선 이야기에서 이런 글귀를 본 적이 있다.
ꡒ고향을 생각하고 어머니를 생각할 때 인간은 안온함을 느끼듯이 그러한 자연의 품에 안길 때 평안함을 얻게 된다. 번뇌의 인간이 침묵의 대자연 속에서 평안을 느끼듯이 내면의 공을 체험하고 침묵의 공간을 간직한 선지식의 존재는 우리를 근원적인 평안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청정승보는 번뇌와 죄업으로 오염된 중생들에게 최상의 복전이요, 으뜸가는 보배라고 부르는 것이다. 침묵의 공간을 성취한 선지식은 끝없는 자비의 파동으로 중생의 번뇌를 흡수하는 자석과 같은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ꡓ
내면의 공성을 체득하여 태양과 같은 자비와 지혜광명을 구족하신 구루께서는 끝없는 자비와 방편으로서 제자의 번뇌를 정화하여 불과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한 구루를 만났을 때 제자는 다만 신심으로 고무되어 수행만 하면 되는 것이다.
소걀린포체는 말씀하신다. ꡒ스승을 만나기란 그리 어렵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승을 참으로 믿고 따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르침 또는 스승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본질적인 것은 자기 자신 안에서 통찰력을 발견하고 그 가르침과 스승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따르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다. 어떠한 어려움과 좌절, 모순과 결함에 직면하더라도 굴복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유치한 감정에 속지 말고 자신의 선택을 위하여 그 길을 끝까지 따르는 인내, 지혜, 용기, 겸양을 길러야 한다. 더더구나 조급하게 굴어 진리와 멀어져서도 않된다. 빨리 가고자 하다가 도달치 못하는 사람들이 흔히 있다. ꡓ
티베트에서는 물론 역대의 불교선종사에서 기록에 남은 많은 성취자들이 오랜 시간동안 스승 곁에서 헌신의 마음으로 시봉을 하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도의 위대한 스승 사라하는 말했다.
마음 속에 스승의 말씀이 들어 간 사람은
손 안에 보물처럼 진리를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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