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 대해서/김정환
자동차 헤드라이트 눈도 없고 코도 없고
발설의 입도 없고
다만 나는 아직도 어두운 밤 뒷골목길에서
뒤에서(혹은 앞에서) 오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두고 차분히
걷지 못한다
돌아보면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왜소한 그림자를 삽시간에 삼켜 버리고
다시 토해내고, 토해낸 그림자는 갑자기 산더미만해지고
헤드라이트와 내 그림자는
골목 저편 끝으로 아주 조그많게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게가 된다. 담벼락 끝으로 설설 기어오르는
헤드라이트는 다만 번쩍거릴 뿐인데
뻔뻔스레 번쩍거릴 뿐인데
헤드라이트의 절망과
내 몸 속, 그립고 또한 아주 왜소한 나의 절망이
그리고 절망의 절망이
일순의 거대한 시대를 지나
골목 저편으로 어둠을 몰고 사라져가는 것을
나는 다만 한 마리 비겁한 게처럼 설설 기면서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아직도 어두운 밤 뒷골목길에서
뒤에서(혹은 아무데서) 오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그대로 두고
안심하지 못한다. 참지 못한다.
<시 읽기> 절망에 대해서/김정환
조성환은 일 년 선배였다. 『수호지』에 나오는 무송의 작고 못생긴 형 ‘무대’를 떠올리게 하는 까불이였다. 어른이 된 후에 예비군 훈련장에서 본 적이 있다. 여전히 아이처럼 까불고 사람들을 잘 웃겨서 아직 어른이 다 되지 못한 것 같았으며,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결코 어른이 되지 못할 것 같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죽음이라는 말이 참 이상하게 들렸다. 누구나 다 죽는 죽음이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참 더 성장해야 할 어린이에게 노인에게나 어울이는 죽음이라니!
그는 자주 맞으며 자랐다. 매는 어린 그에게 일용할 양식이었다. 왜 맞아야 하는지 잘 모르는 채 맞는 매 앞에서 그는 무대 위에서 공연하듯이 연기를 곧잘 하였다. 매를 든 어른이나 주먹을 쥔 선배 앞에서 리얼하게 나동그라지거나 생애의 가장 큰 은인이라고 여길 것 같은 표정으로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용서를 빌었다. 그렇게 애원한 만큼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닌데도 매를 피하기 위한 연기는 필사적이고도 감동적이었다. 그의 연기는 때리는 사람이 잘못하다가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거나. 실제로 때리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잔인하게 때리고 있다는 느낌을 주어 폭력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켜주었다. 그 연기는 어려서 폭력에 대한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은 아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을 것이다. 매 맞는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언제나 바보같이 얼굴에 그려져 있었던 웃음, 코나 입처럼 얼굴에 붙박여 있었던 웃음. 울거나 찡그릴 때조차도 멈추지 않았던 웃음”(「조성환의 죽음」)을 웃으며 까불곤했다.
그에게 죽음도 어릴 때 맞았던 매와 같았을까. 매를 피하던 그 잔꾀로 죽음에게도 빌었을까? 저승사자의 몽둥이에는 눈도 귀도 달려 있지 않았을 것이고 동정심도 없었을 테니 그 연기가 참으로 딱했을 것이다. 조성환이 맞았을 때, 나도 거의 그 매를 함께 맞았다. 나는 그 애처럼 영리하게 매를 피하지 못했다. 그때는 착하게 사는 것만이 조금이라도 매를 피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는데, 몽둥이 앞에서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내 시를 보며 나도 조성환처럼 삶의 폭력과 고통 앞에서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잘못했다고, 다음부터는 안 그럴 테니 딱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요번만 살려주면 정말 말 잘 듣겠다고…….” 만일 내가 시를 잘 쓴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건 매를 피하기 위한 나의 연기력이 그만큼 잘 먹혀들어갔다는 뜻일지 모른다.
「절망에 대하여」를 읽으면서, 폭력은 “눈도 없고 귀도 없고/발설의 입도 없”이 밤 뒷골목을 거대한 속도의 덩어리가 되어 달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닮았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달리는 헤드라이트에 비친, 담벼락을 설설 기며 지나가는 자의 그림자의 춤을 보라. 산더미만 해졌다가 점점 짧아지고 작아져서 사라지고 마는 춤. 그 춤은 처음엔 두려움에 크게 놀라 심장이 덜컥 떨어질 것 같다가 점점 콩알만 해지는 소시민의 심리 상태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슬픔이여 보라./네 리듬에 맞추어/내가 춤을 추느니/이 유연한 팔과 다리./평생토록 내 몸이/얼마나 잘/네 리듬에 길들여졌느냐.(최승자, 「고통의 춤」) 부분
폭력과 고통과 절망과 체념은 우리 몸에 스며들어 우리를 길들인다. 우리는 그것들이 시키는 대로 하루 종일, 평생 동안 춤을 춘다.
―김기택,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 다산북스, 2016.
첫댓글 “눈도 없고 귀도 없고/발설의 입도 없”이 밤 뒷골목을 거대한 속도의 덩어리가 되어 달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같은 '한 마리 비겁한 게처럼 설설 기면서 지켜볼 수 있을 뿐'인 '안심하지 못하고 참지 못하는' 절망을 표현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용기를 내서 나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