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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둘/셋 : 모이/쁘이/빠이 |
감사합니다 : 어꾼 |
앉으세요 : 앙끄이(끄이) |
정말 감사합니다 : 어꾼치란 |
몇 살입니까? : 네악 아유쁜 마안? |
죄송합니다 : 씀똫 |
이름이 무엇입니까? : 츠무아이? |
좋아요! : 러어! |
이리오세요 : 마 |
정말 잘 했어요! : 트붜(v) 반 러어! |
빨리빨리! : 른른! |
예, 맞아요 : 자 |
잠시만요 : 짬띡 |
안되요, 아니요 : 어떼 |
저를 따라해 보세요 : 쓰옴 트워으 따암 크뇸 |
제 이름은 ~입니다. : 츠무오르 엇크뇸~ |
이쁘다 : 싸앗 |
사랑해요 : 쓰롤랭 |
학교에서 아이들을 집중시키기 위해 모이, 쁘이, 빠이를 외치면서 박수를 치면 아이들이 많이 해본 경험이 있는 듯 따라서 박수를 치며 집중했다. 나의 경우 나를 먼저 소개한 후 이름을 묻고 나이를 묻는 식으로 아이들과 짧은 대화를 나눴다.
이후는 아이들이 사진 찍는 것을 신기하고 좋아하여 많은 사진을 찍었다. 또한 다른 친구를 때리는 등 옳지 못한 행동을 하면 ‘어떼’라고 말하며 제지하는 것으로 아이들을 진정시켰고 수업을 하면서 자주 썼던 단어는 ‘짬띡’과 ‘쓰옴 트워으 따암 크뇸’, ‘러어’였다.
2일째의 오전 교육은 처음하는 만들기 수업으로 색종이로 목걸이 만들기와 팝업카드 만들기였는데 특히 저학년 아이들은 손놀림이 미숙해 잘 따라 만들지 못해 너도나도 만들어 달라며 색종이와 카드를 우리에게 내밀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짬띡’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고학년 아이들은 따라하는 것으로 수업을 잘 따라하는 편이었다. 그런 방법으로 수업을 진행하여 수업시간에 만든 것들이 모든 아이들 손에 들려지면 정말 뿌듯하다. 아이들이 만들기를 완성하면 우리는 기쁘게 웃어주며 ‘러어!’를 외쳐주었다.
우리가 따스나에 초등학교에 노력봉사로 만들어주기로 한 것은 씨름장이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큰 나무 밑에 모이자 전날 A조원들이 열심히 자리잡아놓은 씨름장의 틀이 보였다. 바로 전날 햇볕이 뜨거운 캄보디아에서 그것도 오후에 씨름장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삽질했던 A조원들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했다. 그만큼 씨름장은 대부분의 큰 틀이 잡혀있었다. 우리도 열심히 포대자루 안에 흙을 담아 묶고 틀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캄보디아는 기본적으로 흙이 고와 먼지가 많이 날린다. 작업 시 마스크는 필수였다. 또 개미들이 한국 개미들과는 달라 매우 공격적이었다. 나는 운이 좋아 물린 적이 없지만 많은 조원들이 여기저기 달라붙어 물어뜯는 개미들로 곤혹을 치렀다.
따스나에 초등학교 – 3일째
따스나에 초등학교에서의 생활이 적응된 3일째 우리는 추위에 몸을 떨며 일어났다. 전날 밤 불어 닥친 바람으로 밤사이 온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 식사 후 우리는 전날 마무리 못했던 씨름장 완성을 목표로 오전 봉사를 시작했다. 작업은 순조로웠다. 남은 작업량은 많지 않았고 우리는 금세 씨름장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를 힘들게 한 복병은 다름 아닌 오후 교육봉사 프로그램 레크댄스였다. 아이들을 줄 맞춰 세운 후 준비해간 개구리송과 곰세마리를 보여준 후 춤 동작을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정말 잘 따라했다. 잘 따라하고 재미있어하는 아이들을 보게 되면 힘이 들어도 더 열심히 춤추게 되고 웃음이 나는 법이다. 하지만 나무가 거의 없는 운동장 한복판에서 햇볕을 받으며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한번도 쉬지 않고 춤을 추니, 그날의 교육봉사는 노력봉사를 했던 것보다 더 힘들었다.
생각보다 아이들이 씨름장을 좋아해줘서 고마웠다. 우리가 씨름하는 모습을 본 아이들이 씨름을 곧잘 따라했다.
나는 사진을 검사하면서 한 장도 못 찍었다는 것은 확인하고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아이들이 배우는 속도가 빨라 프로그램 진행에 변화를 주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천으로 팔을 둘러주고 참여한 놀이 수만큼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도 캄보디아의 놀이를 배웠다. 신호와 함께 나뭇가지를 던지면 각 팀의 한사람씩 나와 나뭇가지를 가져와 팀으로 돌아오는 놀이었는데 나뭇가지를 집은 사람을 터치하면 터치한 사람이 이기는 고도의 신경전이 필요한 놀이었다. 실제로 참여한 아이들의 눈빛은 승부사의 눈빛이었다. 이날의 나는 굉장히 지치고 바빴던 모양인지 아쉽게도 사진이 거의 없다. 그래도 통역사 ‘헤잉’이 정말 즐거웠다고 말해줘서 나도 덩달아 기뻤다.
오후 봉사까지 마친 우리는 대망의 삼겹살 파티를 즐겼다. 이후 삼겹살 파티는 저녁 늦게 까지 이어졌는데 컴컴한 와중에 교문으로 차가 한 대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이어진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국왕의 서거 소식에 잠시 숙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우리의 앞으로의 일정에도 변화가 생겼다. 춤과 노래를 금지함에 따라 다음날의 일정에 있던 flea마켓에서의 공연이 취소되었고, 학교들이 휴교를 하게 되었다. 우리 조는 그날 초저녁까지도 열심히 준비했던 공연이 취소되어 허탈했고 앞으로 수상마을 및 빈민촌에서의 수업이 걱정되었다. 그런 걱정들을 안고 우리는 취침에 들어갔다.
따스나에 초등학교 – 4일째(마지막)
우리가 다음날 일어나자 마자한 것은 어젯밤의 뒤처리와 텐트를 거두는 작업이었다. 마지막 교육봉사는 A,B조가 함께 하는 운동회였다. 아이들의 복장은 자유복이었고 우리는 그런 모습의 아이들을 모아 준비체조로 우리조가 준비했던 레크댄스를 췄다. 이후 이어진 첫 종목은 놋다리 밟기였다. 아이들은 생경한 종목에 처음엔 당황했지만 막상 시작하지 서로 뛰어와 주자에게 등을 대어주었다.
두 번째로는 줄다리기였다. 이 줄다리기에서는 선생님들도 참여해 힘을 보태주었다. 준비된 줄이 새것이라 아이들이 이후에 손이 까져 아파해서 나도 안타까웠다. 마지막은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로 나누어 남자아이들은 씨름장에서 씨름을, 여자아이들은 피구를 했다. 나는 피구를 하는 쪽에서 아이들을 봤는데 전날 했던 캄보디아 놀이에서 볼 수 있었던 승부사들의 눈빛을 또 한 번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굉장히 진지하고 강력한 힘을 주고받았다.
운동회까지 마치고 아이들은 작별인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아이들의 귀가를 지켜보았다. 이후 우리는 주변을 정리하고 따스나에 초등학교에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기 위한 교통수단을 기다렸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굉장히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 같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정들었던 따스나에 초등학교를 둘러보았다. 우리가 설거지와 씻을 수 있는 물을 얻었던 펌프, 아이들이 쉬는 시간마다 들리던 문방구겸 매점, 그리고 항상 학교 안에서 지내던 탓에 자세히 보지 못했던 학교 정문. 학교를 둘러보며 쉬고 있자 마침내 차가 도착했다.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해 짐을 정리한 우리는 첫 자유 시간을 받을 수 있었다. Night Market에 도착한 우리는 뭐에 홀린 듯 시장 안을 돌아다녔던 것 같다. 이후 우리는 일정 동안 자유시간이 생기면 야시장을 자주 들렸다. 시엠립 자체가 큰 장소는 아니고 발달된 상권이 그 부근이다 보니 그것은 어쩔 수 없던 것 같다.
똔레삽 호수의 수상마을
우리가 시엠립에 도착한 지 6일째 되는 날, 우리는 다음 봉사지인 수상마을로 향했다. 국왕 서거이후의 교육 봉사일정이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수상마을은 캄보디아의 영향을 덜 받는 곳이었고 다음날부터 갈 빈민촌의 학교는 사립학교이기 때문에 선생님의 재량으로 수업이 가능해 교육봉사를 차질 없이 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상마을은 버스를 타고 강까지, 강에서 배를 타고 오랫동안 들어가야 도착할 수 있다. 오래 걸리는 왕복시간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움직여야했다. 수상마을을 향해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의 흙은 정말 붉었다. 곱고 붉은 흙이 날려 나무들을 뒤덮었고, 그 때문에 풍경은 온통 붉은 빛이었다. 호수로 가는 강가에 도착하니 온통 민물고기 냄새였다. 스텝분들은 수상마을의 사람들이 오히려 따스나에 초등학교 학생들 보다 잘 살고 있다고 알려주셨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똔레삽 호수의 민물고기 수확량은 손에 꼽히기 때문이다. 우리 조는 그 사실을 듣고 교육프로그램을 좀 더 상향의 것으로 조정했다.
우리는 수상마을에 도착해서 우선 점심부터 해결해야했다. 이동시간이 꽤 걸려 오전중에 출발했음에도 점심시간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아이들이 수업시간이 시작되기까지 기다리면서 우리는 기둥 높이 세워져 있는 학교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기둥의 2/3가 검은 것을 지적하니 우기 때의 수상마을의 수심이 그 정도로 올라오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셨다.
수상마을에서는 교육봉사로만 2시간을 진행했다. 우리는 레크댄스와 수수깡으로 안경만들기를 준비했다. 레크댄스를 집어넣은 것은 따스나에에서의 반응이 좋았기 때문에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서의 생각도 있어 집어넣었지만 웬걸, 아이들의 반응은 따스나에보다 좋지 않았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있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아이들은 팔짱까지 끼어가며 비웃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학년이 저학년과 고학년이 섞여있어 고학년인 아이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우리는 수업시간 전, 아이들이 강남스타일을 불러대며 K-POP을 좋아하는 것을 생각하고 고학년들을 위해 플리마켓 공연으로 준비했던 ‘노바디’를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너무 어려워 잘 따라하질 못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번 수업이 성공적이 못했던 것을 인정했다. 따스나에의 아이들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바로 이어진 수수깡으로 안경 만들기 수업으로 만회하고자 우리는 아이들과 붙어 작업을 도와주었다. 수수깡으로 공작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에 따스나에 초등학교에서 교육하지 못했던 수업이었다. 역시나 고학년을 대상으로 한 수업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손재주가 모자라는 아이들은 우리가 도움을 주었고, 모든 아이들이 안경 만들기에 성공하는 것으로 수업이 끝났다.
수상마을에서의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봉사가 끝나고 우리는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이동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렸지만 버스가 오지 않아 로비에서 50분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다. 국장님이 계속 전화를 해도 버스기사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결국 버스가 오지 않아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걸어서 이동해야했다. 다음날 그 원인을 알게 되지만 그 부분은 WFP와 버스회사간의 문제이므로 말을 아끼도록 하겠다. 대략 1시간이라는 시간을 허비하게 되자 결국 우리는 저녁을 먹은 이후 하려고 계획했던 플리마켓을 다음날로 옮겨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꽤나 오래 걸어 저녁을 먹으러 갔고, 저녁을 먹은 뒤 플리마켓이 취소되어 생긴 자유시간으로 Pub Street에 도착했다.
기본적으로 시엠립에는 관광객이 굉장히 많다. 특히 한국인이 많은데, 교통수단중 하나인 ‘뚝뚝’기사들은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사랑해요’, ‘강남스타일’, ‘뚝뚝타세요’ 등 한국어로 외칠 정도다. Pub Street에는 아무래도 백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음식점들이 서양적인 곳들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곳에서 나름의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물가가 한국에 싸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유 시간 동안 자주 가게 된 곳은 ‘블루펌킨‘이라는 가게였던 것 같다. 아이스크림을 비롯해 여러 음료를 마실 수 있다. 시엠립에서 가게를 이용할 때는 주로 영어를 이용했다. 직원들과는 기본적인 간단한 회화가 가능하다.
빈민촌 야학당 – 1일째
우리의 봉사 마지막 장소는 빈민촌의 야학당이었다. 야학당에서는 총 2일에 걸쳐 아이들을 교육했다. 아침을 먹고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데 걸린 이동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분이 놀라웠던 것 같다. 도심과 빈민촌의 거리가 버스로 10분정도 밖에 되지 않다니, 마치 예전에 방문 했던 북경이 생각났다. 그곳에서도 높은 벽을 두고 한 쪽은 높은 빌딩들이 서 있고 다른 한 쪽은 판잣집들이 늘어서 있다. 마치 그런 상황과 비슷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도착한 빈민촌은 이상하게도 아이들이 별로 없었다. 스텝들도 이상해 아이들을 모으고 마을을 둘러 볼 겸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얼마 안 되어 그 원인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국제 태권도 협회에서 봉사차원으로 빈민촌에서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태권도를 가르치고,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그들을 뒤로 하고 마을을 돌면서 아이들을 모았다. 내가 빈민촌에 와서 놀란 점은 아이들이 굉장히 우리를, 아니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이다. 아이들 모두가 처음 보는 우리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손을 잡아달라고 하고 업어달라고 한다. 교수님께서는 아이들이 정이 부족해 그런 것 이라고 지나가듯이 말하셨는데 괜히 맘이 짠해졌다. 나도 남자애를 한명 업어줬는데 이름까지 외웠다. 내가 살면서 그렇게 큰 애를 업은 경험은 그 때가 처음이다. 덕분에 좋지 않던 허리가 더 안 좋아진 기분이지만 애가 좋아하는데 내리라고 할 수도 없고 난감했다. ‘쟌타’는 절대 잊지 못한다. 이튿날 쟌타를 다시 만났는데 나를 기억 못하기에 어부바 행동을 취했더니 부끄러워 했고 나는 즐겁게 웃었다.
오후교육으로는 색종이로 목걸이 만들기와 팝업카드 만들기를 수업했다. 생각해보니 가장 정이 많이 갔던 곳은 따스나에 초등학교이고 가장 많은 아이들의 이름을 외웠던 곳이 야학당인 것 같다.
특히 색종이 목걸이를 만들면서 늦게 도착한 동생을 위해 자신의 색종이로 목걸이를 만들어준 엘라바가 기억난다. 나는 그 모습이 기특해 엘라바의 목걸이를 만들어주었다.
빈민촌 야학당 – 2일째
우리는 선생님의 요구에 따라 다음날의 수업을 한글 교육을 모두 바꿨다. 빈민촌에서 아이들의 언어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아이들이 자라서 빈민촌을 벗어나 성공할 수 있는 직업이 통역사와 가이드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우리조는 원래부터 프로그램에 들어있던 한글교육을 좀 더 세심하게 다듬었다. 야학당 첫날 본 교실에 일본 히라가나어 교구를 보고 우리도 오랫동안 아이들이 보면서 공부 할 수 있도록 전지에 한글과 단어를 적어 준비해갔다. 야학당을 도착하자 전날 A조에서 수업했던 이름표를 아이들이 차고 있었다. 나와 우리조원 두 명은 다른 조원들이 수업을 하고 있는 동안 통역사 헤잉과 교구 번역작업을 했다. 아이들이 가장 알아둬야 할 단어들을 생각해 교구를 만들었고, 오후 수업에서 아이들이 교구를 보면서 한글을 따라하는 모습이 대견했다. 아이들이 교육열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크누부라는 아이가 가장 기억나는데, 크누부는 우리가 가르치면서 가장 열심히 하면서도 똑똑한 아이었다. 내가 크누부가 한글을 배우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었을 정도로 열정적인 눈빛으로 수업을 받은 아이로 모두를 대표해서 자기소개를 하고 우리들의 ‘러어!’를 가장 많이 받았다. 우리 모두 이런 데에서 있을 아이가 아닌데 하며 안타까워했다.
마침내 야학당에서의 모든 수업이 끝났고 이와 동시에 우리의 교육봉사활동도 종료되었다. 그런 아쉬운 마음에 야학당에서 아이들과 가장 많은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우리의 교육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어줬으면 하고 아이들이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야학당의 아이들이 커서 누구나 자신 있게 다녀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야학당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런 마음을 담아 손을 흔들어 줬다.
우리는 봉사활동이 끝나는 날 밤, 마지막으로 플리마켓을 열었다. 다만 춤과 음악은 금지였고 판매행위만 할 수 있어 아쉬웠다.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열심히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총 벌어들인 액수는 얼마 안 되었다. 하지만 옷을 팔면서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었다. 한 외국인은 우리가 외치는 2달러를 같이 외치며 즐거워 해줬고, 도네이션을 위한 마켓이라고 하니 물건을 사주기도 했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도네이션 물품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야 물건을 사기도 했고, 얼토당토도 않는 가격으로 물건을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힘들게 많은 물건을 팔았지만 기대했던 액수가 나오지 않아서 서운했지만 그 돈으로 따스나에 초등학교엔 공과 줄넘기들을 사줄 수 있었고, 야학당의 교실비를 보태줄 수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아쉬움을 달랬다. 마지막 봉사활동을 마쳤다.
시엠립 문화탐방
우리는 오후동안 공정여행을 다녔는데 스텝들이 준 지도를 보면서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 날 나는 더위를 먹어 호텔에서 게스트하우스로 오기까지 힘들었다. 그리고 자전거에 익숙하지 않은 조원이 있어 지도를 들고 가고 싶은 곳을 걸어 다니거나 뚝뚝을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시엠립의 모습
시엠립에서 자주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은 주로 쌀국수와 볶음밥, 고기와 과일을 이용해 덮밥처럼 먹을 수 있었던 식단들이다. 아무래도 태국과 음식이 비슷해 현지식으로 밥을 먹게 되면 아래의 사진과 비슷한 음식들을 먹게 될 것이다.
음식점에서는 차를 주는데 시원하게 먹을 수 있도록 유리컵에 얼음을 담아 준다.
또한 현지식들보단 비싸지만 한국음식점들도 많았다.
하지만 저녁에는 뚝뚝을 타지 않도록 스텝들이 지도했다. 아무래도 안전장치가 미비하고 불법 기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귀국
앙코르와트를 뒤로하고 우리는 귀국을 위해 버스로 공항까지 이동했다. 공항입구에서 헤어지는 스텝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공항으로 들어왔고 출국 시와 마찬가지로 수하물을 부쳤고 표를 받았다. 이 과정까지 스텝이 인솔했었더라면 완벽한 마무리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후의 귀국과정은 일사천리였다. 이미 많이 지쳤던 터라 다들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휴식을 취했다. 워낙 새벽 비행기인터라 대기시간도 길었는데 자칫 한국이 폭설로 인해 결항되거나 지연된 비행기가 많아 걱정도 많았다. 다행히 비행기는 지연되지 않았고 우리는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의 수면은 불편했지만 아침에 일어나 착륙준비를 하면서 두꺼운 옷을 입고, 창밖으로 쌓인 눈들이 보이자 드디어 돌아왔구나 생각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공항에서는 교수님의 인솔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왔다.
기타 참고사항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지사제와 화상연고를 준비했다. 출국 전부터 캄보디아에서 물갈이를 할 수 있다는 얘기에 장티푸스를 접종했고 파상풍예방 주사를 함께 접종했다. 말라리아의 경우 시엠립은 말라리아 위험지역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접종하지 않았다. 다만 모기는 많기 때문에 버물리는 가져가는 것이 좋다. 또한 노력봉사를 하면서 마스크와 손수건은 필요하므로 준비해가는 것이 작업 시의 불편함을 덜 수 있을 것이다.
남기는 말
시엠립으로 봉사를 위해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르는 분들에게 내가 경험한 시엠립은 봉사지로서도 문화탐방지로서도 훌륭한 곳으로 추천해주고 싶다. 환경은 생각보다 깨끗해 물만 조심한다면 식사는 걱정이 없었고, 시엠립 자체의 교통역시 관광지다 보니 나쁘지 않다.
아이들은 순수해 우리를 잘 따라주었고 그 모습에 우리 역시 더욱 열심히 봉사해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해외봉사에 참여하고 싶다.
그 기회가 학교일지 타기관의 것일지 아직은 모르지만 이번 봉사를 다녀온 모두는 한 번 더 해외봉사를 가고 싶다 생각했다. 후배들도 해외봉사를 무사히 다녀와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