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백모씨가 올해 초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돼 모스크바로 이송됐다.
러시아 국영 타스 통신은 11일 사법 당국자를 인용, "러시아 연방보안국(FSB가) 올해 초 한국인 백원순(러시아어 표기는 Пэк Вон Сун)씨를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감첩 혐의로 체포, 추가 조사를 위해 지난달 말 모스크바로 데려와 레포르토보 구치소에 구금했다"고 전했다.
타스와 rbc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백씨는 러시아 형법 제 276조(간첩 행위에 관한 조항)에 의해 체포됐다. 이어 모스크바 레포르토보 법원에 의해 그의 체포 영장이 3개월(6월 15일까지) 연장됐다. 한국인이 러시아에서 간첩 혐의로 구속된 것은 처음이다.
백씨가 구금된 모스크바 레포로토보 구치소. 원래 KGB, FSB 산하 구치소였으나 2005년 운영이 법무부로 넘어갔다/사진출처:위키피디아
러시아 형법 276조는 국가 기밀 정보나 러시아 안보를 위협하는 정보를 외국 정보기관의 지시에 따라 수집할 경우, 또 이를 취득 및 저장한 혐의가 있는 외국 시민권자와 무국적자에게 적용되는 조항이다. 또 우크라이나에서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중이어서 무력 충돌 상황, 군사작전 또는 러시아 사용 무기 및 군사 장비에 관한 정보 수집 등도 대상이다. 유죄가 인정될 경우 10년~20년의 징역형이 선고된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백씨는 민간인으로 지난 1월 중국에서 육로로 블라디보스토크로 입국한 뒤 며칠간 체류하던 중 FSB에 체포됐다. 그는 종교 관련 종사자로 알려졌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함께 온 백씨 아내도 FSB에 체포됐으나 풀려나 현재는 한국에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FSB는 한국 측에 백씨 체포 사실을 알리지 않다가 지난달 문서로 통보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르바트 거리 모습/바이러 자료사진
백씨가 모스크바도, 우크라이나 전선도 아닌, '극동 러시아'에서 무슨 간첩 행위를 했는지는 알려진 게 전혀 없다.
우리 외교부 당국자도 "체포 사실을 인지한 직후부터 필요한 영사 조력을 제공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내용은 현재 조사 중인 사안이어서 언급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백씨의 정확한 직업이나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러시아의 체류 목적에 대해서도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현지 언론도 간첩 행위에 관한 한, 언론 보도에 나온 사건은 항상 '비밀'로 취급된다고 전했다. 타스 통신은 백씨가 국가 기밀 정보를 외국 정보기관에 넘긴 혐의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을 뿐이다. 그의 혐의는 조사가 끝난 뒤 재판에 넘겨진 뒤에야 비로소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백씨가 구금된 레포르토보 구치소는 악명 높은 'KGB(FSB의 전신) 감옥'(2005년 러시아 법무부 산하로 변경/편집자)으로 알려져 있다. 거의 모든 수감자가 독방에서 지내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3월 미국 정보당국의 지시에 따라 러시아 군산 복합 기업 중 한 곳의 활동에 대한 기밀 정보를 수집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미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에반 게르시코비치도 이 구치소에 있다. 게르시코비치 기자에게서 보듯, 러시아가 외국인을 구금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다목적 카드로 쓰기 위해서다. 푸틴 대통령도 전 미 폭스뉴스 앵커 터커 칼슨과 인터뷰에서 그를 미국의 간첩과 맞교환하기 위한 협의가 진행중이라고 인정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와는 서로 교환할 수감자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러시아의 백씨 체포 이유가 궁금하다. 러시아는 특수 군사작전 이후 한국이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비우호국으로 지정한 바 있다.
민간인 자격으로는 백씨가 간첩혐의를 받은 첫 경우이지만, 외교계에서는 한-러간에 여러 차례 스파이 사건이 일어났다. 정보기관(우리의 경우 국가안전기획부) 소속 직원이 외교관 여권을 갖고 정보 수집 당사국의 대사관(주러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는 게 오랜 관행이다. 통상 이를 백색스파이라 부른다. 외교관 신분을 지니지 않고 현지에서 암약하는 스파이는 흑색스파이다. 존재 자체나 숫자 모두 특급 비밀이다.
2010년 6월 미국과 러시아가 맞교환했던 스파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흑색스파이다. 이들은 나중에 통상 맞교환을 통해 고국으로 돌아간다. 백색스파이는 이미 신분이 노출돼 있기 때문에 현지에서 스파이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모스크바에 근무한 국정원(국가안전기획부 전신) 출신 외교관들은 러시아 정보 당국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사히고 있기 때문에, 통상적인 협력관계 구축 외에 은밀하게 활동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스파이 활동에는 또 국방부에서 나온 파견인이 간여하기도 한다. 특히 북한 관련 동향 파악에 국방부 출신 외교관이 적격이다.
한-러시아간 스파이 추방 역사를 보더라도, 국정원 직원과 국방부 파견 외교관이 대부분이다.
모스크바에 있는 한국대사관 모습/사진출처:김석기 의원
2009년 7월 주러시아 대사관 무관실 소속의 해군 중령이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스파이 혐의를 받고 추방당했다. 이때 우리 정부는 맞추방같은 외교적 보복을 강행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통상 자국 외교관이 주재국으로부터 '비우호적 인물'(persona non grata)로 지정돼 추방될 경우 그 나라 외교관도 맞추방하는 것이 관례다.
2008년에는 러시아관에 외교관 신분으로 파견됐던 4명의 국정원 직원이 추방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그 해 11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이 내용이 거론되자 "공개적으로 답하기 곤란하다"며 사실상 이를 인정했다.
1998년 7월엔 우리나라와 러시아가 외교관을 맞추방하며 외교 단절 위기를 맞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의 한국통인 발렌틴 모이셰프 전 러시아 외무부 아태1국 부국장은 한국대사관의 조 모참사관으로부터 돈을 받고 무기 수출 관련 문건 등 국가 기밀을 넘겨준 혐의를 받았다. 러시아 정부는 즉각 조 참사관을 추방했고, 모이셰프 부국장은 체포돼 4년6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당시 우리 정부도 주한 러시아 대사관의 올레그 아브람킨 참사관을 맞추방했고, 러시아는 다시 이에 대한 추가 대응으로 러시아 주재 한국 외교관 5명을 추방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박정수 외교부장관이 재임 5개월만에 사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