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6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4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다. 자선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주신 성체성사의 나눔의 신비를 체험하게 하는 신앙 행위이다. 오늘 교회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 소외된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특별 헌금을 통하여 자선을 실천한다. 교회는 자선이라는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자선 주일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곧 오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과 기꺼이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하며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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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이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3,10-18)
The crowds asked John the Baptist, “What should we do?” He said to them in reply, “Whoever has two cloaks should share with the person who has none. And whoever has food should do likewise.”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예루살렘을 새롭게 해 주실 것이며, 예루살렘은 환성을 올리며 기뻐할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고 선포하면서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라고 당부한다. 감사하고 기뻐하는 생활이 근심과 걱정을 이겨 내게 한다(제2독서). 군중과 세리들과 군사들은 요한 세례자에게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를 메시아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을 낮추며 자기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실 것이라고 말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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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기뻐해야 한다. 두려움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없기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제1독서). 기쁨은 은총이다. 주님께서 주셔야 참기쁨에 닿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은총 안에 살아가면 늘 기뻐할 수 있다. 걱정한다고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걱정은 습관일 뿐이다. 감사와 기쁨의 생활이 걱정을 극복하게 한다(제2독서). 요한은 자선을 가르친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라는 것이다. 세리들에게는 속이지 말라고 한다. 군인들에게는 빼앗지 말라고 했다.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요한은 이야기한 것이다. 자선은 어렵지 않다. 실행이 어려울 뿐이다. 위대한 요한이건만 주님 앞에서는 자신을 낮추고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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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바실리오 성인은 나눔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먹지 않는 빵은 굶주린 사람들의 빵이고, 너희의 옷장에 걸어 둔 입지 않는 옷은 헐벗은 사람들의 옷이다. 너희가 신지 않는 신은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의 신이고, 너희가 금고에 깊이 넣어 둔 돈은 가난한 사람들의 돈이다. 너희가 실천하지 않은 자선 행위는 너희가 범하게 되는 수많은 불의(不義)이다.” 성인의 이 말씀은 저의 폐부를 아프게 찌릅니다. 옷장을 열어 보면 일 년 동안 입지 않고 보관만 해 온 옷들이 많고, 책장을 바라보면 읽지 않고 먼지만 쌓여 있는 책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제 지갑의 두께는 두툼합니다. 생각해 보니, 한 해 동안 땀 흘리는 일 별로 없는 가운데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신자들에게는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가세요.”, “서로 사랑하세요.” 하면서 제 자신을 속였습니다. 이제 중독이 되어서 그런지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도 마비된 것 같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은 실천에서 완성이 된다고 하였는데(2,14-26 참조), 실천에 이르지 못하고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저의 믿음은 언제 완성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던 한 해를 조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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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은 베푸는 생활입니다. 남모르게 베풀 때 진정한 의미의 자선이 됩니다. 온 동네에 알리며 나누었다면 자선이 아니라 자랑입니다. 군중은 요한에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은 단순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라고 합니다. 세리들에게는 속이거나 협박하지 말라고 합니다. 모두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선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베풀라고’ 하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물질을 먼저 연상합니다. 있어야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많이 가졌다고 쉽게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라도 물질이 자선을 좌우해서는 안 됩니다. 물질은 나눔의 수단일 뿐입니다. 언제라도 중심은 마음입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다정한 눈빛’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선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희망하며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신앙의 기쁨으로 ‘사는 이들’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원인’이 돈과 물질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신앙인 외에 누가 이런 삶을 드러낼 수 있을는지요? 이 한 주간에 ‘쉬운 자선’부터 실천해 봐야겠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배광하신부-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뻐하십시오
옛날 금슬이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두 분은 적적할 때면 아이들처럼 술래잡기를 하셨습니다. 어느날 할머니가 술래가 되고 할아버지는 숨으셨는데, 할머니가 한참을 찾다가 항아리 속에 숨어있는 할아버지를 찾아내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 숨었소? 영감”“그리 숨었소?”“크리숨었스”“크리스마스”크리스마스를 부르게된 어원이라고 합니다??? 오늘 사도 성 바오로는 성탄의 기쁨을 앞둔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분부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립 4,4)
우리는 복음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을 들은 우리는 기쁨을 살아야 합니다. 기쁨을 살고 있는 사람들만이 기쁨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사의 고달픈 일들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떤 이들은 긍정적으로 잘 받아들여 기쁨으로 승화시키고, 어떤 이들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스스로에게도 상처를 주고 남들에게도 상처를 주어 절망을 살게끔 만듭니다. 기왕에 받아들여야 한다면 진정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옛말에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라는 말이 있듯 웃는 이들을 미워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 찡그린 얼굴로 불평불만하며 살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대부분 우리네 삶에서 짜증이 나고 분이 치밀어 오르는 경우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옵니다. 인간(人間)이라는 한자의 뜻도 사람과 사람 사이입니다. 우리는 어떻든 모든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였던‘최재천’교수는 당신의 책<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서문에 이 같은 글을 썼습니다.
“어떨 때는 정말 우리가 동물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위선의 탈을 벗고 지극히 동물적으로 살아도 이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울화가 치밀 때가 언뜻 언뜻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소박한 신념이 하나 있습니다. ‘알면 사랑한다’는 믿음입니다. 서로 잘 모르기 때문에 미워하고 시기한다고 믿습니다. 아무리 돌에 맞아 싼 사람도 왜 그런 일을 저질러야만 했는지를 알고 나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들 심성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분명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 모두에게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보이시기 위하여 오십니다.
즐거워하십시오
어떤 할머니께서 장날 장에 가셨는데, 웬 젊은 남자가 할머니 뒤를 따라오며, “같이 가 처녀!”라고 외치더랍니다. 할머니는 민망해서, “저 젊은 놈이 이 늙은이에게 웬 처녀…”하며 종종걸음을 걸으시는데, 그 젊은이는 계속 따라오며 “같이가 처녀!”를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부끄러워 빨리 걷던 할머니가 귀에 걸은 보청기를 제대로 끼었더니 그 젊은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갈치가 천 원!”이라고요…??? 이 같은 멋진 글이 있습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희로애락의 인생이지만 고단한 삶 한가운데에서도 끝없이 우리네 삶이 기쁨인 까닭은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분명 기쁨을 우리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를 오늘 스바니야 예언자는 이렇듯 분명히 밝힙니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스바 3,17) 우리는 분명 아기 예수님, 우리의 승리자이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살이에서 겪게 될 온갖 시련과 고통을 아시기에 또다시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승리의 임금이신 주님께서 또다시 우리에게 오십니다. 슬프고 외롭고 맥이 다 빠져버린, 비참하고 억눌린 가련한 우리에게 또다시 힘과 용기와 희망과 기쁨을 주시기 위하여 오십니다. 그때문에 우리는 우울할 수가 없습니다.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슬퍼하며 좌절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진정 기쁨을 살아야 하고 그 기쁨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세리와 군사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3,14)
오늘 우리 또한 이 같은 질문에 분명히 대답해야 합니다. 진정 기쁨의 성탄을 목전에 둔 우리는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
-홍승모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심판의 말씀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회개를 행실로 보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라고 권고합니다. 그러자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질문합니다.
첫째, 군중입니다. 군중에게는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분배의 정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로서의 형제애를 말합니다. 어떤 형제들에게는 없고 나에게는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나에게 은총으로 주신 것이기에 나눌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주신 것을 형제들이 나누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형제애에서 나오는 나눔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과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세리들입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루카 3,13)고 말합니다. 세리는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선한 이와 악한 이가 따로 구분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완벽한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보다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완전한 것을 요구하지만,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스스로 느끼는 사람은 완벽하지 않더라도 자비를 베풀어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군사들입니다.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 3, 14)하고 말합니다. 이것은 군대 조직과 같은 집단이나 게토화된 그룹 이름으로, 또는 자기들 이익을 위해 하느님이나 정의의 이름을 빌어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형제애를 통한 나눔, 마음에 차지 않고 부족한 이들에게 베푸는 자비, 자기들만이라는 집단 이기심에서 벗어나 선행의 열매를 맺는 일이 바로 주님의 기다림을 준비하는 신앙인의 열매가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열매를 맺기 위해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우리가 청원하는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꼭 들어 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11). 그러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응답을 받지 못한 경우를 여러 번 경험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위로를 해 봅니다. 나의 믿음이 약하구나, 또는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옳지 않은 것을 바랬구나, 또는 내가 청한 것을 다른 방법으로 이미 주셨는데 나는 모르고 있구나, 또는 주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으셨다면 어떤 깊은 속뜻이 있으시겠지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위로들이 주님께 청원한 기도가 응답을 받지 못한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문제는 주님께 청원의 기도를 올렸다면, 그 기도가 실현되기 위해 '어떻게 했는가'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혼자 하는 독백이 아닙니다. 주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를 통해 청하는 바를 스스로도 책임을 지고 응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이 있다면,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도와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이 있다면 실제로 대화하고 용서하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들끼리 만이라는 집단 이기심에서 벗어나도록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구체적으로 희생과 봉사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 오신다고 선포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이제 모든 것을 묻고 새로운 시기를 맞을 희망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살과 피를 지닌 사람이 되셨듯이, 우리도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살과 피를 담는 방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이것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는 질문에 응답이 돼야 합니다.
의인(義人) 안에 태어나시는 주님 - 구요비 신부-
오 늘은 전례력으로‘장미주일’이어서 사제의 제의색은 연분홍 장밋빛으로 1년 중 가장 화사하고 아름답습니다. 장미는‘기쁨’을 상징하니 말씀의 전례 안에서 메아리치는‘기쁨’과 상통합니다.
성경 안에서 기쁨은 먼저 하느님 안에서 용솟음치는 기쁨입니다(필리 4,4). 불어성경은 제1독서를‘주님은 축제의 날처럼 기쁨으로 환성 올리며 너를 위하여 춤을 추시리라! ’(스바 3,18) 로 표현합니다. 동방 교회의 한 교부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며 하느님의 내적 생명 안에 순환운동(perichoresis)이 있다고 통찰하셨는데, 이 단어는 희랍어로‘윤무(舞)’혹은‘둥글게 춤추다’에 해당하는 perichoreuo와 통한다고 합니다.
성경 원문에 비추어 볼 때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과 더불어 춤추시며 당신의 신적 생명인 기쁨을 통교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이 먼저 인간과의 만남에 가슴 설레이며 기뻐하십니다. 사실‘기쁨’이란 우리가 혼용하는 즐거움, 쾌락과는 달리 인간이 높은 정신적인 상태에서 맛보는 행복을 뜻하는말입니다.“ 인간은보다 높은 능력의 단계에서 자기가 알고 소망하는 선(善)을 소유했을 때에 평온과 만족을 느끼며, 그런 기쁨의 상태를 행복이라고 부른다. 이 행복에는 다소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고상한
표현이 기쁨이며, 엄밀히 말하면 이 또한 행복을 가리킨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불변하는 최고선(最高善)으로 알고 소망하는 하느님을 인간 이성으로 깨달을 때 그는 영적 기쁨 또는 영적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토마스아퀴나스).
이렇듯이 하느님의 생명인 기쁨은 온 누리에 용약하고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이미 우리 가운데에 와 계신 것입니다. 문제는
가까이 계신 이 주님이 내 안에서 탄생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 각자 안에 주님의 태어나심이 가능할까요?
주님은 의인(義人) 안에서 탄생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볼때 더욱 그러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과 모습은 의인의 전형(典型)입니다. 제가 사목하면서 비신자들로부터 들어온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들의 전통적인 좋은 이미지는‘좀 고지식하지만, 강직하고, 정직한 사람, 법 없이도 사는 사람’입니다. 이점이 오늘 복음의 의로운 삶과 밀접히 연결되지
않을까요? 군중과 세리와 군인들의 한결같은 질문인‘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요한의 답변은 시종일관 정의(正義)로운 삶입니다(11절-14절).
우리가 하느님의 정의(正義)를 말한다면 곧바로 인간의불의와 죄를 엄격하게 벌하시는 무서운 심판관인 하느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복음이 계시하는 하느님의정의는 이와 반대로 하느님 자신이 당신의 의로움(義)을 인간에게 내려주시고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인간의 죄와 불의를 속량해 주시는 구속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16절).
하느님은 정의를 실천하며 살려는 사람들 안에서 탄생하십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강선남-
요한의 말은 천둥과도 같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죄를 용서받으라고 질타하며 회개를 권고하고 세례를 베푸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합니다. 자신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마르 6, 18)라고 당당하게 지적하던 요한을 헤로데가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다는(6, 20)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요한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회개는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 라는 물음을 던지게 합니다. 군중이 요한에게 와서 묻습니다. 구원받으려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루카 3, 10) 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에게 자기 것을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는 부자 청년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주신 답과 같습니다.(마르 10, 17 – 27과 병행구절)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부의 불균형으로 인한 문제를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나누는 것’ 을 강조하며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 전체를 대상으로 한 문제에서 세리와 군인들로 당시 지배계층의 문제를 암시하며 구체적 사안으로 넘어갑니다. 구원의 길은 세리들한테도 열려 있습니다. 그들은 회개를 요구하는 요한의 말을 받아들이고 삶의 태도를 바꾸고자 합니다. 세리들이 와서 묻습니다.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루카 3, 12) 요한을 ‘스승님’ 이라고 부르는 이 물음에서 요한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을 알 수 있습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13절) 그들은 때로 지배 세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동족에게 부당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의 원성을 사고 질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요한은 그들이 직업을 이용해 사람들을 착취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말고 정직하게 살라고 합니다.
이제 군인들이 요한에게 옵니다.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14절) 곧 폭력을 사용해 사람들을 강탈하거나 허위 명목으로 갈취하지 말고, 할당된 임금에 만족하라는 것이지요. 세리들에게 주어진 대답과 일맥상통합니다. 지위와 힘을 악용해 힘없는 백성을 괴롭히지 말고 주어진 정당한 대가에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세리와 군인들에 대한 요한의 대답에는 기존제도를 인정하면서 직권남용에 따른 부정과 착취를 금지하는 공통점이 엿보입니다. 이 요한의 대답에는 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르짖던 ‘정의와 공평’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가까웠음에도(9절), 요한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세리와 군인들에게 그들의 직업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특별한 금욕을 실천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합니까 ? … 내 죄를 벗으려면 내 맏아들을, 내 죄악을 갚으려면 이 몸의 소생을 내놓아야 합니까 ?” (미카 6, 6 – 7) 하고 묻는 백성에게 미카 예언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아, …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 (6, 8)
이야기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 으로 넘어갑니다. 나라가 멸망하고 팔레스티나 지역의 외국 통치세력 밑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국을 재건하고 다윗 왕국의 영화를 회복시켜 줄 ‘메시아(기름부음받은이)’ 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요한의 선포는 사람들의 이러한 희망을 더욱 강화했고, 어떤 이들은 이 사람이 혹시 우리가 기다려 온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잘 알고 있었고, 결코 그 선을 뛰어넘는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1, 20)에서처럼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라고 부인하는 표현이 이곳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메시아가 아님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분을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 그리고 ‘알곡과 가라지를 심판하실 분’ 이라고 묘사하며 자신과 메시아의 모습을 대조시켜 설명합니다. 요한은 ‘그분보다 작고’, ‘물로 세례를 주며’, ‘심판을 예고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어 자신이 메시아인 양 행세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대로 놔둘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요한을 두고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고 칭송하셨습니다.(루카 7, 28)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알고 그대로 실천한 사람 요한 ! 자신의 위치를 넘어서지 않고 주어진 역할을 정확하게 수행한 사람, 요한 ! ‘세례자’ 이면서 ‘선구자’ 인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세례를 베풀면서 오실 메시아인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며 그분에 관한 ‘기쁜 소식’ 을 전했습니다.(루카 3, 18)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스바 3, 14 – 15)
어떤 소년이 학교에 지각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소년에게 지각 사유를 물었지요. 그랬더니 소년은 학교에 오는 도중 어떤 아저씨가 동전을 떨어뜨려서 그걸 함께 찾느라고 늦었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물론 동전을 같이 찾아드리는 일도 좋지만, 학교에 오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아저씩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지각하지 않게 와야 한다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이 소년은 그럴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다시 그 이유를 물었지요.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그 동전을 밟고 서 있어서 빨리 학교에 올 수 없었어요.”
소년은 동전을 떨어뜨린 아저씨가 찾기를 포기하고 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야 자기 발밑에 있는 동전을 주워서 학교에 올 수 있으니까요. 이때 아이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한쪽 발로는 동전을 밟고 서서 다른 발로 빙빙 돌면서 동전 찾는 시늉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자세도 불편했겠지만, 마음도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불편한 몸과 마음을 간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즉, 이 소년처럼 무언가를 밟은 채 한쪽 발로만 움직이면서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정치인들은 떳떳하지 못한 정치자금이라는 동전을 밟고 서 있고, 부패 관리들은 뇌물이라는 동전을 밟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술이라는 동전, 쾌락이라는 동전, 허영이라는 동전 등을 밟고 있으면서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꽉 움켜잡으려는 것, 이것 없이는 안 된다고 생각을 갖게 하는 욕심들이 나를 불편하게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오늘 복음말씀을 통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줍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 먹을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고,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해서도 안 되며,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것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나눔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대림 제3주일인 오늘을 자선주일로 지냅니다. 고통 받고 소외당하는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날입니다. 내 것을 내어 주는 것이지만, 사실 내가 더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욕심에서 벗어나게 됨으로 인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지금은 여유가 없기 때문에, 나중에 여유가 생길 때 완벽한 자선을 베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완벽한 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함께 생각해 봐요.
목표에 37% 달성했다면 성공일까요? 실패일까요? 겨우 37%라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성공입니다. 올해 프로야구 정규리그 타격 순위를 보면 1위가 박용택 선수입니다. 이 선수의 타율은 10할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두 번 중에 한 번의 안타는 쳤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고작 37%에 해당하는 3할7푼2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말합니다.
아직 완벽한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자선을 뒤로 미루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100% 완벽한 때는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100% 완벽한 때는 환상일 뿐입니다. 대신 37%면 되어도 완벽한 때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모습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아기 예수님을 잘 준비하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어는 위대한 기업이든지 보라. 그들은 모두 한 가지 생각을 가진 한 사람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잘 실천했다(어빈 로빈스).
조연의 아름다움
-양승국 신부
학력위조 파문이 우리 사회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주변인’에서 벗어나 주류세력으로 편입하고픈 과도한 욕망의 결과, 그 뒷맛이 씁쓸하기만 했습니다. 보란 듯이 한번 높이 솟구쳐보고 싶은 욕구,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싶은 욕구, 주전선수가 되고 싶은 욕구,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 욕구, 주연·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구는 인간으로서 누구나 지니게 되는 기본적인 욕구일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조연으로서의 삶, 주변인으로서의 삶, 선구자로서의 삶, 예언자로서의 삶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알게 되면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의 역할은 철저하게도 조연이었습니다. 구세사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부각되도록, 인류 구원이란 예수님의 작품이 잘 되기만을 바라며 묵묵히 헌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미리 닦는 일,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선포하는 일, 그리고 마침내 임무를 완수하고는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일이 세례자 요한에게 맡겨진 일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정말 완벽했습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조연으로서의 삶이 조금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의 광에는 무엇이?
-김찬선신부-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누구나 알 수 있게 하십시오. 대림 세 번째 주, 자선 주일에 듣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며 세례자 요한이 세례 운동을 펼칠 때 세례의 표시로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하고 가르칩니다.
세례란 죄로부터의 회개라고 할 수 있는데 죄란 주님을 소유하지 않은 죄이고, 주님 대신 재물을 소유한 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상 대림이라는 말은 오심을 기다린다는 말이고,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오실 분이 현재는 안 계신다는 말이니 대림은 먼저 주님 不在의 그 죄부터 깨달아야 되고 이런 깨달음이 있은 다음에 이제 우리는 주님 대신 내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청소하는, 세례를 거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 대신 재물이 나를 차지하고 있음을 깨닫고, 주님을 모시기 위해 재물을 비워낸다고 해도 이것이 이웃에게 나눠주는 자선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이때의 상태는 주님을 모시기 위해 아까운 것을 억지로 포기하는, 그래서 안간힘을 쓰는 상태이지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 수 있는, 여유롭고 너그러운 상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 우리가 자선을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모신 다음입니다. 광에서 인심이 난다고 하지요. 자캐오처럼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신 다음에야 스스로 자기 재산을 떼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주님을 모신 다음에야 너그러움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그럽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며, 주님을 모시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광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삼용신부-
오늘 어떤 수녀님께 메일을 받았는데, 또 하나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유가 바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 손바닥이란 것입니다. 정말 죄만 짓는 나의 손바닥 위에 놓여 지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니 손도 더 깨끗하게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손이 가장 깨끗한 손일까요? 연예인들의 아기 피부와 같은 가늘고 긴 예쁜 손일까요, 아니면 평생 가난한 이들의 더러운 것들을 깨끗이 닦아준 쪼글쪼글해졌던 마더 데레사의 손일까요?
그러고 보니 오늘 복음도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만족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부족함이 없이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고, 또 사랑으로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안에 태어나실 그리스도를 위해 가장 좋은 구유를 준비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모처럼 정말 내면적으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잘 준비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와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나누라는 말입니다. 내가 비워지지 않으면 주님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또 세리와 군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또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라고 하시며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에 만족하라고 일러줍니다.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어느 것 하나도 주님의 허락 없이 가지게 된 것이 없습니다. 자꾸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려고 해서 문제인 것입니다.
몇 백억을 손쉽게 벌고 또 예쁜 아내와 아이들까지 둔 부러울 것이 없는 타이거 우즈가 왜 힘들어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아내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여자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믿음으로가 아니면 세상 모든 것을 얻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자기 통제의 한계를 넘어선 상태입니다. 그 다음 날 후회가 없기 위해서는 수시로 지금 더 마실 수 있는지, 그만 마셔야하는지를 수없이 자신에게 물어보며 마셔야 합니다. 따라서 ‘지금 이래도 되나?’를 물어보는 것 자체가 이미 커다란 회개입니다. 왜냐하면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물어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라고 했던 질문을 우리는 매 순간 던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한 번은 저녁을 먹다가 티모르 신부님이 재밌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해서 말을 주고받는데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슬람교도 이야기가 재미있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코란이 구약성경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티모르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이슬람교 신자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가면 돼지고기를 시켜 슬쩍 이슬람교도들에게 준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시켰으면서도 굳이 이슬람교도 사람들에게 그것이 돼지고기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슬람교도 신도들도 그것이 돼지고기인 것을 눈치 챘으면서도 굳이 그것이 돼지고기가 아니냐고 물어보지 않고 그냥 맛있게 먹는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이런 일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매우 자주 일어납니다. 물어보아서 귀찮아지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에 알면서도 물어보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물어보는 것 자체가 이미 커다란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신도가 진정한 이슬람교도였다면 반드시 이렇게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이거 돼지고기 아니지?”, “내가 이거 먹어도 되는 고기야?”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혹은 “이럴 땐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라고 수시로 하느님께 혹은 사제나 수녀님께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매 순간 이렇게 물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죄를 짓지 않으려는 ‘의지’가 투철한 사람입니다.
사실 사랑은 ‘의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의지는 결단이고 그 결단은 자신과 하느님 안에서 내린 것이기 때문에 외적인 환경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완전한 의지를 지니고 계심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 분도 의지의 한계를 느끼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의지적으로 끝까지 가보려 했지만 힘이 드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결국 의지가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이 의지가 인간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예수님도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겟세마니에서도 아버지께 던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뜻을 버리기 위해서 이렇게 끝없이 하느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성탄 때 태어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자리가 마련되면 그 안에 언제든 태어나십니다. 따라서 매 순간이 선택이고 종말이고 심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태어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심판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지옥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곳입니다.
오빠가 아빠가 되기도 하는데, 오빠 동생 하며 지내던 사람 중에 한 명이 “사랑해요!”라고 고백하면 다른 한 명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결단을 내리도록 강요받습니다.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지, 아니면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정리를 하든지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이런 면에서 애매한 사이일 때는 사랑고백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영 어정쩡한 사이로 지낼 수는 없기에 하느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시기에 사랑고백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시간은 너무 이른 시간도 아닌 너무 늦은 시간도 아닌 가장 완전한 시간의 충만한 때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고백 받은 우리들이 적당히 죄를 지으면서 신앙생활 한다는 식의 어정쩡한 자세는 더 이상 사랑을 고백하신 하느님께 용납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신 세례자 요한이 과격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몰래 카메라에서 한 유명한 가수가 공연을 하는데 관객들이 하나 둘 일어나 모두 나가버리게 했습니다. 노래는 끝까지 불렀으나 목소리는 물론이고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가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수가 관객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데 관객이 나가버린다는 것은 가수에 대한 커다란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말대꾸하는 것보다 부모가 하는 말들을 못들은 척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커다란 공격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매 순간 우리 마음 안에 태어나시기 위해 준비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그 분은 태어나시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도 합니다. 내가 산다면 그 분이 죽고 내가 죽는다면 그 분이 태어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순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 지금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라며 내 뜻이 아니라 그 분의 뜻을 물어야합니다. 그 분의 뜻이 내 안에서 실현될 때 내 안에 그 분이 태어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 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그 분과 한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우리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 순간 실현될 수 있는 성탄의 의미일 것입니다.
<잘 나가던 시절>
-양승국신부-
축구시합 때 나름대로 열심히 뛰는 선수, 그라운드에 적응도 되어 시원한 골도 넣고 기가 살아 펄펄 나는 선수를 감독이 교체하겠다면 참으로 억울할 것입니다.
벤치로 돌아오는 선수는 속이 상할 대로 상해 아이들 표현대로 꼭지가 돌아버릴 것이며, 괜히 애꿎은 쓰레기통이나 물통만 발길질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무렵, 세례자 요한의 인생은 그야말로 황금기였습니다.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적극 추종하는 유능한 제자 그룹이 형성되어 있었고, 수많은 추종자들의 수효는 언제라도 정치 세력화할 수 있을 정도였기에 영주 헤로데 마저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가장 잘 나가던 시절, 끗발 좋던 시절, 메시아께서 도래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물러 나야할 때가 왔음을 직감합니다.
즉시 오랜 기간 공들여 갈고 닦은 자신의 지역구를 한치의 미련도 없이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또 자기 뒤에 오시는 그분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의 겸손이 참으로 돋보입니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가장 에너지가 넘치던 시절, 소나기 골을 마구 터트릴 수 있는 절정기의 순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멤버체인지가 됩니다. 일말의 아쉬움이나 아무런 미련도 없이 말입니다.
때가 왔음을 알게된 세례자 요한은 망설이는 법이 없습니다. 확실하게도 뒤로 물러섭니다.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감춥니다. 주님께서 확실하게 뜨도록, 주님께서 활짝 꽃피어나도록 철저하게도 자신을 낮춥니다.
세례자 요한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이런 그의 겸손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매일 나 자신이 조금씩 사라지길 바랍니다. 내 안에서 매일 나 자신이 죽길 바랍니다. 나 자신이 사라지고 죽은 그 자리에 주님께서 현존하시길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서 점점 성장해나가길 기원합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 아침에 우리 본당 관할 구역을 이곳저곳 걸어 다녀 보았습니다. 사실 이 동네는 제가 어렸을 때, 놀던 곳이었답니다. 즉,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이 동네에서 보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잘 아는 지역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걸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이 바뀌었더군요. 불과 2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우선 제가 살았던 집을 찾아보았습니다. 집이 커서 눈 쓸기가 무척 힘들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집. 그런데 그 집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더군요. 대신 그 자리에는 빌라 건물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시간만 나면 동네 아이들과 함께 야구를 하면서 뛰놀았던 공터를 찾아가보았습니다. 역시 그 넓은 공터는 사라진지 오래고 대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습니다. 또한 학교 여학생들 놀려준다고 개구리를 잡던 늪지 역시 높은 아파트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더군요.
조금 서운하더군요. 어렸을 때의 나의 흔적들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하니까 말이지요. 이제는 단지 내 기억의 한 자리로만 있을 뿐, 직접 내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공간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서운한 감정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정말로 빨리 세상이 바뀌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불과 20년 전의 이야기인데…….
어쩌면 이렇게 바뀌는 속도는 앞으로 더 빨라질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사람들도 참 빨리 변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것은 변해서는 안 됩니다. 즉,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우리 역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은 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조차 변하려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나의 첫 번째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을 첫 번째 자리에 위치시켰을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예수님보다 세례자 요한이 더 유명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따랐고, 이 정도의 인기라면 충분히 어떤 세력을 만들기에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그런 세력을 만들지 않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자기 본연의 임무인 예수님을 준비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세례자 요한의 위치에 서 있다고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메시아라고 구세주라고 생각하면서 따르고 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아니다.”라고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바로 그런 겸손의 모습이, 그리고 자신의 임무에 끝까지 충실한 그 항구함이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요?
겸손하지 않은 모습, 세상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불안한 나의 모습들이 예수님과의 간격을 더욱 더 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빠름에 너무나 쉽게 변하는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주님께 대한 사랑은 변하지 말도록 합시다.
빠다킹신부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민경철 신부-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언젠가 만나게 될 그날은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날은 예고 없이 급작스럽게 찾아오기에 매일을 의미 있게 살라는 것이었지요. 그 답이 회개라는 것이었습니다. 설교를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사실 조금만?생각해보면 그 답을 찾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 참 이상하지요?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만을 위해서 살아왔고, 삶을 점검하지 않고 그저 흘러버리고 마는 시간에 몸뚱아리를 내맡기는 삶이었기에 뭔가를 하긴 해야겠는데 도대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한동안 쉬던 교우가 고해성사를 하면서 냉담했던 시간 외에는 무얼 말해야 될지도 모르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무엇을 하기에 앞서 무엇을 잘못하고 살았는지를 알아야 새로운 삶을 시작 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의 길을 가는 것이 새로운 삶을 향한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분수대로
-오영숙 수녀-
자기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게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왕자병’이니, ‘공주병’이니 하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고 허황된 꿈속에 사는 사람들을 일컬어 하는 말들이지요.
세례?요한에게도 그런 유혹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으니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와 세례를 받고 삶의 방향을 물었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혹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수군대기도 했지만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장차 오실 메시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재물이 있거나 명예가 있거나 권력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것들이 마치 자기 자신인 듯 착각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재물도 명예도 권력도 다 너희의 것이 아니니 너희의 분수를 알고 그 분수대로 살라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가 분수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함께, 더불어 살아가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 것이어서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니 함께 나누며 사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승님, 저희는 어찌 해야 합니까 ?
-이기양 신부-
조용하던 요르단 강변이 날마다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 10)하고 묻습니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나서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 11)고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일 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여기에 재미난 현상이 발견됩니다. 오로지 돈과 힘만을 믿었던 세리와 군사들이 군중의 무리에 섞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재물과 권력으로 채울 수 없는 인간 실존의 불안 때문인지 그들 또한 요한을 찾습니다. 재산과 권력이 인간 내면의 공허를 달래주지 못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 12)하고 세리들과 군사들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의식해서인지 그들은 특별한 가르침을 청하지요. 요한은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루카 3, 13)고 이르고,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 3,14)라고 기대와는 달리 너무나도 평범한 지침을 내립니다.
요한은 스스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깊이 반성하며 찾아온 세리와 군사들에게 유혹이 많은 직업을 버리라고 강요하지 않고 그곳에서 정직하게 살아갈 것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몰려든 사람들에게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옷과 음식을 나누는 자선을 실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구체적으로 회개의 방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내려진 요한의 처방은 각자 자기 자리에서 "물은 타오르는 불을 끄고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 3, 30)는 성경 말씀을 실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대림 제3주일인 오늘을 자선주일로 정해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과 나눔의 삶을 권고합니다. 예수님 역시 굶주리고 헐벗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중심에 두시며 3년의 공생활을 보내셨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고 자선이 모든 믿는 자들의 의무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 역시 헐벗고 굶주리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 17)고 실천 신앙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돼지가 암소를 찾아와서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너는 고작 우유만 주는데도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고, 나는 목숨을 바쳐 고기를 주고 심지어 다리까지 아주 좋은 요리가 되어 주는데 사람들은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지?"
암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습니다.
"글쎄, 아마 나는 비록 작은 것이라도 살아 있는 동안 해주고 너는 죽은 뒤에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유다인 속담에 "건강할 때 자선하는 것은 금이요, 병이 났을 때 하는 것은 은이요, 죽은 뒤에 하는 것은 납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선은 돈 많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거나, 동정심이 많은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나중에 하겠다고 미뤄서는 더욱 안 되지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찾아야할 첫 번째 친구는 굶주리고 헐벗고 절망에 우는 사람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실 주님을 맞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외쳤고 새 마음을 회복한 이들에게 지금 바로 한 그릇의 음식과 한 벌의 옷을 나누라고 가르쳤습니다. 요한이 우리 시대에 다시 온다 하더라도 회개의 세례와 자선을 요구할 것입니다. 요한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고통 받는 이들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잊지 맙시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기락 신부-
성경을 한참 읽다 보면 성경의 어느 곳, 어느 장을 펼치더라도 같은 말, 같은 단어가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현상은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또 성경에서 누가 이야기하고, 누구에게 말하든 상관없이 나타납니다.
‘반복어법(反復語法)’ 하느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지, 또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애가 타시는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연인을 앞에 두고 아니, 어떤 때는 당신 사랑을 잘 알지도 못하는 연인 앞에서 으르고 달래고 한숨쉬고 안타까워하시는 이런 마음들이 아주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어 때로는 대중가요 노랫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생각하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애절하고 간절한 마음은 오히려 말로 옮기기가 더 힘이 들겠지요.
오늘 독서와 복음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대림시기 내내 반복되는 주제라 할까요. 아니면 올 한 해의 독서와 복음이 모두 그러하겠지요. 어디선가 들었던 단어와 내용이 조금씩 다르게 변주되면서 같은 주제, 같은 내용을 들려줍니다.
한 해는 이렇게 서서히 저물어 가는데 우리는 성당에서 주님이 오실 날을 기다리면서 이런 주제의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반복해서 들리는 멜로디에서 주님의 사랑이 부드럽고 편안하게 흘러갑니다. 그 속에 우리의 한 해도 함께 했겠지요. 그리고 다음 해도 같은 사랑이 우리에게 말을 걸겠지요.
생각하면 한 해의 마침과 또 다른 시작은 ‘끝과 시작’이라는 단절 개념이 아니라 끝없는 시간 속에 순환하며 주님께로 회귀하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보았던 연극처럼 말입니다.
객석에서 공연을 보고 있노라면 성경의 장면들이 하나씩 무대 위에 올려지지요. 거기에는 가나의 혼인 잔치가 있고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백인대장의 종도 살리시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지요. 아! 나이 든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젊은 성모님도 계시네요.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또 감옥에 갇혀있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도 보입니다.
신약의 장면들뿐이겠습니까. 우리가 1년 내내 들었던 독서와 복음 장면들이 무대 위에 올려지고 그 장면들은 마치 회전목마처럼 반복됩니다.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우리도 낯익은 장면들에 또 다시 흥분하고 설레고 탄식하지요.
당신이 들려주시는 이야기, 반복되는 똑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말입니다. 때로는 읊조리며 아기를 재우는 자장가 같기도 하고 먼 나라의 전설 같기도 한 노래이면서 이야기인 성경의 말씀들 속에서 우리의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신다는 말씀처럼 들리고 “널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아가서의 연가는 내게 쓰신 연서로만 느껴집니다. 그렇게 우리를 애타게 사랑하시는 임이 이제 곧 오실 것입니다. 등잔과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아니, 오피르의 금으로 단장한 왕후처럼 주님을 맞아야 하겠지요.
기다리는 대상이 있고 기다리는 시간도 이제 손에 잡힐 듯합니다. 행복하다는 말은 굳이 더할 필요가 없겠군요. 여러분도 행복하십니까?!
그런데 기다림의 시기가 절정에 다다른 듯한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어떤 ‘때’를 암시합니다.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스바 3,16) 사도 바오로는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하고 권고합니다. 회개의 세례를 베풀던 세례자 요한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루카 3,16) 주님을 예고하면서 그분께서 오실 때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오늘 말씀들은 환희와 기쁨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사제도 오늘 화려한 색상의 장미색 제의를 입고 미사를 봉헌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절제와 속죄, 기도와 자선을 하는 것이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기쁘게 하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아울러 대림절 동안 계속 이어지는 긴 속죄 행위의 중간 휴식처럼 잠시 쉬면서 머지않아 아주 구체적으로 성취될 그 기다림을 기억하면서 기뻐하라고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를 초대합니다.
주님의 이 ‘때’를 준비하는 자세를 오늘 복음은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 하는 군중의 질문에 우선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라고 세례자 요한은 대답합니다. 세리들의 질문에는 직업윤리를 지켜 당연한 정의를 실천하고 군사들의 질문에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라”고 대답합니다.
이제 우리 역시 요한을 찾아가서 개별적으로 세례자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조욱현 신부-
오늘의 전례는 모두가 ‘기쁨’에의 초대의 내용이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필립 4,4)라는 기뻐해야 하는 내용이 두 독서에서 강조되고 있고 복음에서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루가 3,10)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답하는 세례자 요한의 권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하느님은 마음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복음을 선포”(루가 3,18절)하고 있다. 이러한 기쁨을 주제로 하기 때문에 ‘기쁨의 주일’, 혹은 ‘장미주일’이라고 한다. 이러한 날 우리는 또한 우리보다 어렵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생각하는 자선주일이기도 하다.
제1독서: 스바 3,14-17: 주님께서 너를 보고 기뻐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1독서에서는 이미 기쁨의 분위기로 들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내적인 쇄신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원수인 사탄에게 끌려가 죄의 노예생활을 하던 것으로부터 하느님의 전(예루살렘)인 하느님의 뜻으로 되돌아오는 것 자체가 구원이라고 하였다. 이같이 우리에게 오신 야훼께서 ‘당신 백성을 벌하던 자들을 몰아내시고’ ‘원수들을 쫓아내시어’(15절) 구원을 주시고 영원한 구원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음을 전하고 있다(17절). 그리고 그분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시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에서는 이분을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고 하고 있다(마태 1,21).
그러므로 기쁨의 동기는 하느님께서 항구히 당신 백성들 가운데 계시며 그들을 도와주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데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요한 1,14) 강생의 신비에서 입증된다. 바로 세례자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더 훌륭한 분에 대해 말하고 그분의 오심에 대하여 준비시키고 있다.
복음: 루카 3,10-18: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음에서는 기쁨이라는 주제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지는 않으나, 세례자 요한은 엄격한 권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시키면서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즉 오시는 분은 세례자 요한보다 ‘더 훌륭한 분’(16절)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16절)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구원을 베푸시는 그분을 맞이하는 것이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17절) 심판하시는 ‘심판관’이시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심판이란 말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야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이다(참조: 요한 3,17).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엄한 윤리적인 경고를 포함하고 있지만, 사실은 구원이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 그리고 많든 적든 우리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능력 속에 있다고 한다.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11절). 군인이든 세리이든 어떤 사람이건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행동하느냐, 특히 사랑으로 행동하느냐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매일 행동하고 말하는 가운데 항상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마음을 밝혀주고 있다.
“회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매 순간의 생활에서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드러냄으로써 순수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무슨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며 활동하는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즉 그분의 대림은 바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제2독서: 필립 4,4-7: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이 기쁨이라는 주제는 2독서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필립비서는 처음부터 함께 사는 기쁨, 복음을 전하는데 협력하는 기쁨, 그리고 믿음에 관한 기쁨 등에 대한 주제가 계속 이어진다(필립 1,4.18.25; 2,2.17.18.28.29; 3,1; 4,1.4,10 참조). 그리고 여기에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5절) 때문에 우리의 삶의 모든 슬픔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주님께서 ‘오심’이 내가 당하는 고통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통’안에 이미 와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고통 중에 있는 바로 그 때가 내 옆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고통과 궁핍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우리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뢸 때”(6절),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7절)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스며들어 우리의 정신적 긴장과 고통과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육체의 본능적 거부반응을 진정시켜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쉽게 얻어지는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극적인 사건이나 고통을 통해 그리고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자신을 잊어버릴 줄 아는 능력에서 생겨난다. 특히 고통 속에서 우리는 그 때를 바로 은총의 때로 체험하는 경우가 많다. 그 때가 은총의 때이기 때문에 고통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례를 받고 성당에는 다닌다고 하여도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다는 말만 한다. 성당에서 또 피정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강론을 많이 듣는다고 하여도 그래서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을 온통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고 해도 구체적인 나의 삶 속에서 그것이 의미를 갖고 실천되지 못하면 우리의 귀는 한없이 수준이 높아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 똑같은 모습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기쁨을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쁨이나 행복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줄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이 만들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항상 기쁨을 만들려 노력하고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눌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기쁨은 기도이고 굳셈이고 사랑이며 사랑에 대한 갈증이다. 기쁨으로 우리는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베푸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기쁘게 베푸는 분은 더 많이 베푸십시오. 하느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사의 표시의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은 마음이 사랑으로 타오를 때 자연히 생겨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을 망각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슬픔도 여러분 안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십시오.”
대림 제3주일 독서・복음 해설 및 묵상
-우리신학연구소 제공-
▶ 제1독서(스바 3,14-18) 해설
하느님께서 우리 한가운데 능하신 구원자로 계시니 우리 마음은 기쁨에 넘친다
스바니야 예언서는 복된 미래를 그윽이 바라보는 것으로 끝난다. 그 날이 오면 이방인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거만을 떨며 흥청거리는 자들은 쓸려나가고 기를 못 펴는 가난한 사람, 거짓말을 할 줄도 모르고 간사한 혀로 사기 칠 줄도 모르며 남을 억울하게 속일 줄도 모르는 사람이 대우를 받으며 편히 쉬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그 때문에 새로운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은총과 호의를 드러내실 적에 그 위대하심에 기뻐하고 축제를 지내도록 초대받고 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특히 당신 백성 가운데서 주님께서 강력한 힘으로 현존하신다는 생각으로 기뻐하며 환성을 올리라고 초대한다(참조. 이사 12,1-6). 이 기쁨과 환희는 장차 새로운 예루살렘 안에서 살게 될 사람들의 마음속에 넘칠 것이다(참조. 이사 54,1-5; 60,1-5; 62,3-5). 그 날이 오면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떨 필요가 없게 되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사랑을 새롭게 쏟으신 까닭에 평온함과 평화가 가득 찬 속에서 축제를 지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사(12) 해설
너희 가운데에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는 위대하시도다
감사드리는 이 노래로써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 기쁨을 표현한다. 하느님이야말로 우리 힘, 우리 굳셈, 우리 구원이시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풍성히 받게 되며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온갖 좋은 것을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놀라운 모든 업적들을 만방에 알리고 뭇 민족에게 알릴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 제2독서(필리 4,4-7) 해설
바오로 사도 역시 주님께서 계시므로 기뻐하라고 초대한다
기쁨(4절): 사도 바오로의 마음은 기쁨에 넘쳐 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도우심과 필리피 신자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고 또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필리피 신자공동체 안에서 당신 업적을 펼치셨기 때문이다(1,4-5.25;2,16-18;4,1).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에게도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행하신 업적 때문에 기뻐하고 춤추라고 초대한다. 이 기쁨이야말로 메시아 시대의 특징이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신다(5-7절): 바오로는 또한 주님께서 가까이 饔챰?때문에 기뻐하라고 말한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온 데 그치지 않고 주님 자신이 당신께 간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다는 것이다(6절). 주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뜻은 시간이 없다거나 아니면 여유가 없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마지막에 다시 오실 그 날까지 매 순간마다 모든 사람의 생활 가운데서 활동하고 계신다.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모시고 마음 든든한 평화와 기쁨을 느껴야 한다.
평화와 기쁨은 옳은 일을 실천하고 실행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진실과 정의를 마음속에 굳게 간직하고 실행에 옮길 때에 평화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는 참된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된다.
▶ 복음(루카 3,10-18) 해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가 오신다고 예고하면서 각자 자기 생활을 변혁시켜 진심으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라고 촉구한다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10-14절): 세례자 요한은 생활을 바꿔 회개하는 세례를 설파했다. 마음으로 회개했으면 반드시 회개한 사람다운 행실을 보여야 한다(8절). 그의 거친 외침은 사회 각계각층 착한 마음을 가진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사람들은 요한에게서 자기 직책과 신분에 알맞은 권고를 받는다. 요한은 그들에게 생활 자체를 바꾸라고 촉구한다. 요한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고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지 말라고 촉구한다.
메시아가 오신다고 예고한다(15-18절): 모두 사람이 혹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는 메시아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자기는 오로지 메시아가 오신다는 사실을 선언할 뿐이라고 말한다. 메시아는 자기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며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베푸시어 사람의 마음과 영과 혼을 속속들이 깨끗하게 하시리라고 말한다. 메시아가 오시면 당신 초대를 받아들이는가의 여부에 따라 사람들을 심판하리라고,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가려내어,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들의 전통에 따라(아모 9,9-12; 이사 44,3; 에제 36,25-27 등) 메시아의 나라가 오리라고 예고한다.
사랑 안에서 맛보는 기쁨
이번 주일 전례는 특히 기쁨을 나타내는 전례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의 첫째 독서는 주님께로부터 구원을 받아 환희에 넘치는 사람과 백성의 기쁨만을 말하지 않고 구원을 받은 당신 백성을 보고 환희에 넘쳐 기뻐하시는 하느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18절). 하느님께서는 단지 ‘구원하시는 용사’로서 당신 백성 가운데 거처하시는 승리자이실 뿐 아니라 당신 사랑으로써 예루살렘을 새롭게 하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당신 생명을 보고서 환호하는 신랑이시다.
화답송과 제2독서는 또 다시 우리에게 사람이 기뻐할 수 있고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하고 참되며 가장 심오한 원천이신 주님 안에서 언제나 기뻐하고 춤추라고 권한다.
오늘 복음도 일단 회개하라는 복음이지만 회개를 통하여 참되고 오래 가는 기쁨을 얻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스바니야서에 의한 제1독서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서 이루신 정화사업과 구원업적을 두고 환성을 올리는 것처럼, 오늘 복음도 회개하여 깨끗해진 당신 백성을 주님께서 기쁨으로 인도하려 하신다고 말한다.
당신 백성을 위하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성경적 계시 전체가 오늘 읽은 스바니야서 몇 구절에 가장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사실 사람이 구원자이신 하느님 안에서 자기 기쁨을 발견한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으며 영원한 절대자이신 하느님께서 사람 안에서 당신 기쁨을 느끼고, 기뻐하시며 환성을 올리신다는 말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이 보인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고자 터뜨리신 분노도 체험했으며, 마침내 구원받은 당신 백성을 두고 환희를 느끼시는 하느님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었다. 적들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난 백성들의 행복만이 아니라(15절), 또한 자기를 악과 두려움과 파탄에서 늘 구해 주시는 주님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예루살렘의 기쁨만이 아니라(16-17ㄱ절), 하느님 자신의 기쁨, 신랑과 신부를 하나 되게 하시는 주님의 축제, 또한 신랑과 신부가 함께 맛보는 혼인 잔치의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인류의 신랑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사랑 안에서 거룩하게 하신다.
혼인잔치 비유에 비추어서 해석하는 오늘의 복음
요한은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는 백성에게 자기보다 훨씬 훌륭하고 강한 분이 와서(15절),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리라고 예고한다(16절). 인류가 마음속으로 늘 고대하고 있는 분, 자기를 속박으로부터 구출해 줄 가장 강력한 분이 오면 인류를 당신 사랑으로써 거룩하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우리를 당신께 이끌어 하느님 아버지의 똑같이 귀중한 자녀로 만들어 주신다. 사람을 그토록 사랑하시기에 동시에 그 사람으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는 하느님, 태워 집어삼키는 불같은 하느님(신명 4,24)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즉 우리를 영원한 사랑 속에 잠기게 하실 것이다. 그 영원한 사랑은 우리를 악으로부터 깨끗하게 하고, 우리를 하느님의 측량할 수 없는 신비 속으로 들여보내 태워 버리는 불과 같다. 거룩하게 하는 불같으신 성령 속에 잠기지 않고서는 결코 강력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 다가설 수도 없고 나아갈 수도 없다.
인류가 자기 신랑과 만나고 그 만남이 가득해지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몸소 땅 위에 오시어 우리 안에서 정화작업을 해야 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에게 몰려오는 군중에게 행한 설교와 세례는 하느님 홀로 이루어 주실 수 있는 세례와 정화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게 된 것이다. 그분은 죄지은 인류를 깨끗하게 하며 당신의 빛나는 신부로 만들고 순결하고 빛나는 옷을 입혀 주어 하느님 자신의 영광으로 감싸 주신다(참조. 묵시 19,7-8; 21,9-11).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 날뛰는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오신다고 선포하는 자기 사명을 수행한다. ‘신랑’에게 길을 열어 놓은 다음 자기는 사라지겠지만, 신랑은 세상 속으로 오시어 당신 사랑으로써 인류를 정복하여 당신 백성으로 삼고, 인류를 당신의 영원한 기쁨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회개는 자선을 지향해야 한다
- 유영봉 신부-
묵상길잡이 : 경제가 수렁으로 빠져든다고 온 나라가 어수선하다. 서로의 책임공방이 한창이다. 우리들이 자제와 자기분수를 모르고 흥청댄 결과가 아니겠는가? 회개 없이 건실한 성장도 없음을 알자. 참된 회개는 자선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1. 인기영합주의의 소신 없는 정책이 나라를 망친다.
우리나라의 경제구조는 지난 한 해 동안 세계에서 백만장자가 가장 많이 생겨난 나라이고, 반면에 극빈 계층이 그만큼 불어났다고 한다. 한마디로 중산층은 줄어들고 부(富)의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다. 십여 년째 1만 불 언저리를 맴돌던 국민소득이 갑자기 16,000불을 넘었다해서 놀랐더니, 환율의 요술이라니 재미있는 세상이다 싶다.
지난 정권은 '신용사회 건설'이라는 아름다운 슬로건을 내걸고 길거리와 학교 앞에서 회사마다 경쟁적으로 '카드'발급을 하였다. 수입이 한푼도 없는 대학생도 몇 개씩 카드를 발급 받을 수 있었다. 무책임한 과소비 조장은 정부의 시책에서 나왔다. 그러더니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카드 빚으로 인한 신용불량자가 350만이라나? 신용불량자 딱지가 붙으면 사회생활은 끝장이다. 카드 빚 때문에 강도질하고 살인하고, 개인이나 가족들이 자살하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참여정부'라는 새 정부는 '지방분권', '수도이전'을 부르짖더니, 전국의 혁신도시 건설로 전국적인 투기바람을 몰고 왔고, 온 국민을 땅 투기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적당한 소비는 경제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검절약(勤儉節約)은 간 데 없고, 대책 없는 소비를 부추기는 것은 정책을 추진하는 이들이 할 일은 아니다. 그러고는 카드사의 부실을 국민의 세금으로 모두 막아주었다. 결국 흥청망청 무책임하게 돈을 쓴 이들의 빚을 선의의 사람들이 다 메우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세금인 공적자금은 '공짜 자금'인양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는 식으로 쓰였다. 참으로 이해 못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또 하나 '경제 정의'가 서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수십 수백 억을 부당하게 꿀꺽 하고 나서도 몇 개월만 살고 나면 석방이니, 누구나 기회가 있을 때 크게 한탕하고 잠시 살면 된다는 유혹을 받지 않겠는가? 그리고 요즘은 석방되면 장관자리까지 챙겨주고 있다. 수천 억을 해 먹었다는 전직 대통령도 자기 재산이라고는 30만원 밖에 없다고 오리발 내미는 세상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대졸 실업자는 끝없이 늘어나 '구직 난'에 허덕이고, 중소기업은 일손을 못 구해 '구인난'에 시달린다. 귀족 노조는 정치 파업을 일삼고, 기업들은 해외로, 해외로 떠나고 너도나도 해외 이민을 꿈꾼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파산인가? 돈이 돈을 벌도록 하는 구조를 부추기는 투기 공화국이다. 부동산 투기 하나 못 잡는 정책부재의 나라인 셈이다. 그래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서러움과 아픔은 더욱 깊고 심각해져만 가는 것이다.
2. 내 자신에게 돌을 던지자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세리와 군인 그리고 모여 온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각자의 처지에서 어떻게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설파하고 있다. 대림(待臨)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기이며, 회개의 시기이다. 자기 빚이 얼마인지를 모르면 갚을 수 없듯이,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르면 회개도 불가능하다. 부동산 거품이 가라앉으면, '장기 불황의 늪'이 올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위기는 기회라고도 한다. 우리는 모처럼 "우리가 달라져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할 좋은 기회를 맞았다.
나아가 나는 신앙(信仰)인으로서, 직장인으로서,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학생으로서, 좀더 새로워지기 위해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를 반성해봐야 한다. 가장 완전한 거울인 하느님 앞에 조용히 자신을 비추어 보자. 우리의 내면에 아직도 "내 것을 내가 쓰는데 왜?"라는 식의 극단적 이기주의, "위화감 따윈 내가 알 바 아니다."는 비뚤어진 특권의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대개의 경우 내가 새로워지기 위해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 다만 그 문제를 정면으로 대면할, 자신에게 돌을 던질 용기가 없을 뿐이다. 그래서 회개는 은총이다. 나의 문제와 맞설 수 있는 은총을 겸손되이 그리고 간절히 청하자. 그리하여 알찬 판공성사가 되게 하자.
3. 회개는 자선(慈善)에로 나아가야 한다
오늘은 자선(慈善)주일 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기도'와 '단식(고행)'과 '자선'을 회개의 중요한 방법으로 여겨왔다. 교회가 회개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시기에 자선주일을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회개와 보속은 자연스레 자선에로 나아가야 한다. 사랑이 담긴 자선은 회개와 보속의 증거인 셈이다. 사랑이 없는 자선은 거짓 자선이다. 그래서 자기과시로 하는 자선은 회개와 보속이 되기보다는 받는 이에게 아픔을 주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때가 되면 나도 큰 자선을 하겠다."는 생각은 금물이라는 점이다. '지금, 여기서'자선을 하지 못하면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욕심은 항상 우리의 형편보다 앞서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푼다는 것은 평소의 연습 없이는 못하는 것임을 명심하자.
대림 제3주일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가르친 회개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삶을 바꾸라고 요구합니다. 군중에게는 옷과 먹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라고 권하고, 세리에게는 정한 것만 징수하라고 말하며, 군인에게는 사람들을 협박하여 남의 물건을 빼앗지 말고 받는 급료에 만족하라고 타이릅니다. 요한의 가르침은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의 것과는 다릅니다. 율법을 잘 지키라고 말하지도 않고, 성전에 십일조와 제물을 충실히 바치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모세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의 신앙은 하느님이 사람과 함께 계신다는 자각을 그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하느님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분”(출애 33,19)이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제물봉헌이 있는 것은 바로 이 하느님의 일을 사람이 실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실천하는 데에 필요한 지침입니다. 제물봉헌은 인간이 생산한 것을 하느님 앞에 가져와 바치면서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의 시선으로 자기의 소출을 새롭게 보고 이웃과 나누게 하는 상징적 의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삶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골몰한 삶을 버리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군중과 세리와 군인이 삶을 바꾸는 구체적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의식주(衣食住)만을 생각하지 않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의 선한 일을 실천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요한의 설교에는 다소 위협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그분은...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와 같은 말씀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보내진 요한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그것은 요한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복음 사이에 어떤 동질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하느님은 엄한 심판자였지만, 예수님에게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사랑하시지 위협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율법을 어긴 사람도, 성전에 제물 봉헌을 하지 못한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가련히 여기셨다, 측은히 여기셨다고 자주 말합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이고 인간과 함께 계시는 그분의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실세인 대제관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당신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마태 21,31). 대제관과 백성의 원로들은 율법과 제물봉헌에는 충실하지만,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도, 가련히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인이라고 단죄하는 세리와 창녀들은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실천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가르침을 연장하여 발전시킨 것은 하느님 앞에 자기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시대 다른 세례운동가들과는 달리 요한은 하느님 앞에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 점을 취하여 발전시키셨습니다. 다만 요한이 엄하게 심판하실 하느님을 전제하고 있는 반면,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 자비롭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믿고 계십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협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고 자기 스스로를 자녀에게 내어주면서 삶을 가르칩니다. 자녀는 부모의 삶을 배워서 사람이 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배워 실천하면서 그분의 자녀로 삽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꽃을 보면서(마태 6,26-28) 하느님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지를 깨달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먹을 것과 입을 것에 집착하여 삶의 은혜로움을 보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사람을 삶의 잔치에 초대하신 분입니다.(루가 14,15-24 참조). 우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초대받아 태어났으며 세상의 삶에 입장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우는 이도, 고통당하는 이도, 굶주리고 헐벗은 이도 많습니다. 초대받은 우리가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야 하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을 배우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데에 있습니다. 그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는 선한 분이십니다. 우리도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면서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 실천을 모범적으로 하셔서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십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분개하게 하는, 의롭지 못한 일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의롭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만 바라보고 초대 받은 우리의 인생을 원망과 저주로 만들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죽음을 넘어 살려놓으신다는 것이 부활입니다. 불행을 넘어서 은혜로움을 찾아 살라는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삶을 바꾸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삶을 바꾸되 하느님의 엄한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그분의 생명을 살기 위해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생명에 초대받은 우리의 과제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가련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우리 주변을 보고, 우리의 삶을 초대받은 잔치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이 초대는 이웃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사력을 다 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초대하신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그분의 베풂에 참여하고 이웃에게도 나누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억누르고, 빼앗고, 죽이는 이야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그 안에 태어난 우리도 휩쓸려서 즐겨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구원이라 말하는 것은 억누르고, 빼앗고, 죽이는 삶에서 베풀고 용서하는 자비의 삶에로 옮겨가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가르친 엄한 심판을 아버지이신 하느님으로 바꾸셨습니다. 베푸시는 하느님에 준해서 우리의 삶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키고 바치는 데에 있지 않고 베풀고 용서하는 데에 있습니다.
어둡고 우울한 현실에서도 우리의 삶이 지닌 은혜로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받은 우리의 삶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쁘고 즐겁기만 한 세상이 아니지만, 어두운 우리의 삶을 기쁨과 너그러움으로 채색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눔의 기쁨으로 오는 축제의 날 -배광하 신부-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
해마다 맞이하는 성탄의 축제이건만 언제나 성탄은 가슴 설렘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독생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다는 사실은 진정 가슴 뛰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맞이하는 성탄의 기쁨이 온 세상 모든 이들을 이토록 설레고 가슴 뛰게 만드니, 훗날 우리들이 천상에서 맞이하게 되는 참 성탄은 얼마나 우리를 기쁘게 할 것인가를 자주 묵상하여 봅니다. 바야흐로 성탄의 막바지에 다다른 교회는 그 기쁨을 스바니야 예언서를 통하여 환희로 노래합니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스바 3, 17~18)
이 지상에서의 성탄도 기쁘게 맞이해야 하겠지만 저 영원한 천상의 기쁜 성탄을 위하여 우리가 지상에서 살아야 할 몫을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돌아가야 할 곳이 있는 신앙인입니다.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은 분명 은총입니다.
그러나 그 영원한 천상 성탄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지상에서 얼마나 많은 불쌍한 이들을 예수님으로 알고 사랑을 나누었느냐가 심판의 열쇠가 된다고 복음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시기를 뺀 연중 모든 장례미사의 전례에서 듣게 되는 ‘최후의 심판’ 복음 내용(마태 25, 31~46 참조)입니다.
이 같은 성경 말씀을 교회가 장례미사의 복음으로 읽고 있는 까닭은 죽은 망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장례미사에 참례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죽은 망자의 시신을 곁에 두고 살아있는 이들 역시 곧 그 길을 따라갈 터인데, 그때 가서야 후회하지 말고 마지막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잘 새겨들으라는 경고요, 깨우침인 것입니다.
교회는 오시는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며 대림 제3주일을 자선주일로 보내고 있습니다. 이는 2천년 전 탄생하신 예수님의 성탄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전례의 의미도 있겠지만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있는 교회가 참으로 준비해야 할 내용을 일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나눔이 성탄을 준비하는 길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해마다 12월이 되면 거리에 성탄 노래가 울려 퍼지고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등장하게 됩니다. 성탄과 함께 불우이웃을 돕겠다며 한겨울 추위에 애쓰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애씀으로 많은 가난한 이들이 가슴 따뜻한 겨울과 성탄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에 오시는 아기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해 봅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는 1891년 성탄이 가까워 오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첫 종소리를 울리게 됩니다.
그때 도시의 빈민 천여 명이 슬픈 성탄을 맞이하며 먹을 것이 없자, 구세군의 ‘죠셉 맥피’라는 사람이 부두로 나가 근처 식당 주방에서 사용하던 큰 쇠솥에 다리를 연결하여 세운 뒤 거리에 내걸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
얼마 되지 않아 성탄절에 불우한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충분한 기금이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전 세계 100여 개국이 해마다 성탄절 즈음에 실시되는 자선냄비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작은 나눔이 큰 기적을 이룬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군중은 세례자 요한에게 자신들이 심판의 날을 준비하고 징벌을 피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근심어린 얼굴로 묻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대답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능히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 11)
예수님께서 병자와 불구자들을 보실 때 언제나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고 복음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측은지심이 드셨다는 것인데, 그리스 원문의 신약성경은 가엾은 마음을 ‘창자가 찢어질듯 한 아픔’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고 합니다.
가슴 아픈 이들을 만날 때 우리의 마음이 아프지 않거나, 갈가리 찢겨지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전혀 미동하지 않는다면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신들만의 축제인 것이며 그 축제에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는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필리 4, 5)
-이재민신부(http://www.rijemin.com)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푼다. 사람들은 요한이 혹시 기다리던 구세주가 아닐까 생각하며 세례를 받으러 와서는 질문한다.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구원되기 위하여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시대를 초월하여 행복을 바라는 이라면 누구나 다 한 번씩은 던지는 질문이다. 행복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돈을 벌고 재물을 모으고 화려한 아파트를 짓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도 궁극에 가서는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행복은 평온함과 기쁨으로 남에게 전달된다. 많은 재물을 모으고 화려한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면 그들의 얼굴에서는 그 누구의 것에서보다 많은 기쁨이 넘쳐야 한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은 늘 기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초조함과 불평이 표출되기도 하고 불만스런 그들의 얼굴은 남에게 혐오감과 짜증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헛부자가 된 것이다. 행복과 기쁨 그리고 평온함은 소유에서 오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소유에서 오는 기쁨은 상대적이어서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선물을 받으면 기쁘고 흐뭇하지만 남이 나보다 더 큰 선물을 받으면 내가 받은 선물에 대한 고마움은 사라지고 시기와 질투와 미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받는데서 오는 기쁨은 내 존재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언제라도 변질 될 수 있다. 욕심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행복하기 위하여, 기쁘게 살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은 말한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 11) 옷을 벗어 준다는 것은 단순히 내 몸에 걸친 것을 벗어주는 것이 아니다. 두 벌밖에 없는 옷에서 한 벌을 주는 것은 내 존재를 떼어 내어 주는 행위이다. 요한은 받는 기쁨이 아니라 주는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세리나 군인들에게 한 조언도 주는 기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주는 기쁨은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 가장 기뻤던가를 생각해보라. 아마 받았을 때보다 자기의 소중한 것을 남에게 주었을 때가 아닐까? 그런 기쁨을 우리는 다 한번쯤은 가져 보았을 것이다. 주는 기쁨은 은은하다. 이 기쁨은 시끄럽지 않고 내 존재 깊은 곳으로부터 은은하게 흘러나온다. 우리는 이 기쁨을 마음속에 파묻어두어서는 안 된다. 성탄에 오는 아기 예수는 우리에게 이 기쁨을 다시 느끼게 해 준다. 아기의 얼굴에 피어나는 기쁨은 ‘주는 기쁨이다. 자기의 존재를 다 내어 준 발가벗은 기쁨.
성탄을 얼마 앞두지 않은 대림 3주의 미사 독서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단어가 있다. 기쁨이라는 단어이다. 주는 자만이 이 기쁨의 맛을 알 것이다. 제 1 독서: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스바 3,14)화답송: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이사 12,3)제 2 독서: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립 4,5) 복음 환호송: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도다.(루카 4,18)복음: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루카 3,18) 행복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는 ‘주는 기쁨’을 몸에 익혀야 한다. ‘주는 기쁨’으로 자기의 존재를 변화시킨 자만이 구유에 오신 그리스도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기쁨을 선포하는 대림 3주를 자선주일로 정한다면 이는 신자들에게 ‘주는 기쁨’을 선사하기 위해서이다. 자선은 단순히 불쌍한 사람들에게 동전 몇 닢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말구유에 누운 불쌍한 아기는 단순히 부자들의 몸에 붙어 있는 부에서 떨어지는 먼지를 받아먹는 ‘불쌍한’ 존재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주는 기쁨’을 선사하는 위대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우리들의 ‘받는 기쁨’을 치유해주는 구세주이다.
부자의 금덩이
-박상대신부-
금덩이를 무지하게 좋아하는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재산을 모아 금덩이를 사 모으는 것이 인생의 최대 기쁨이라고 생각했다. 부자는 아무도 모르게 그 동안 모은 재산을 팔아 금덩이 하나를 쌌다. 부자는 금덩이를 어디에다 둘까하고 고민한 끝에 자기 집 뒷산 땅속에 묻어두고 표해놓았다. 부자는 참으로 기뻤다. 부자는 금덩이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자기 하인들은 물론 부인과 자식들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겼다. 그 후 부자는 어떤 일 있어도 매일 하루에 세 번씩 그곳에 가서 금덩이를 파내어 가슴에 안고 기뻐하고는 다시 파묻어 놓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부자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지만 혹시 누가 훔쳐 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항상 그를 불안케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김없이 매일 세 번씩 뒷산에 갔다 오는 주인을 수상하게 생각한 하인 하나가 주인의 행동을 훔쳐보게 되었다. 황금 덩어리를 땅에서 파내어 어루만지면서 기뻐하는 얼빠진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하인은 아무런 내색 없이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뒷산으로 갔다. 하인은 재빠른 동작으로 황금을 파내고 그 속에 금덩이만큼 큼직한 돌덩이 하나를 집어넣고 다시 파묻었다. 하인은 그날 밤으로 파낸 금덩이를 가지고 멀리 도망쳐 버렸다. 다음날 아침 부자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뒷산으로 갔다. 자기의 모든 것인 황금을 만지면서 기뻐하기 위해서였다. 숙달된 솜씨로 땅을 파던 부자는 그만 비명을 지르면서 넋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정신을 차린 부자는 돌덩이를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했다. 땅이 내려앉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마침 난데없이 나타난 백발의 노인이 이 광경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여보시오, 말짱한 양반 같은데 왜 돌덩이를 들고 울고 있소? 당신은 금덩이를 파묻어 놓았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소. 당신은 그 돌이 금덩이라 해도 다시 땅에 묻어두었을 것이니, 그 돌덩이를 금덩이라 생각하고 묻어 두고 돌아가시오. 다시는 재산을 팔아 금덩이를 사서 묻어 두지 말고, 가진 재산을 유용하게 쓰도록 하시오." 말을 마친 백발 노인은 순식간에 부자의 눈에서 사라졌다.
오늘 우리는 대림 제 3 주일을 맞이하여 대림환의 세 번째 장밋빛 초에 불을 밝혔다. 마지막 남은 네 번째 초를 바라보면, 머지않아 성탄이 올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성탄과 새해를 앞두고 서로 축하하며, 작은 소망들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할 것이다. 오시는 아기 예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생애를 걸어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로 행복일 것이다. 행복의 한 가지 비결은 바로 기쁨이다. 기쁨이란 강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주어지는 것이며 또 자유롭게 얻어져야 한다. 참다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인간은 기쁨의 이유를 깨달아야 한다. 진정한 기쁨의 이유를 깨닫지 못할 때 그 기쁨은 참다운 기쁨이 되지 못할 것이며, 이는 오래 갈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자들이 기쁨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 기쁨은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자유에 속한다. 여기에는 세리도 군인도 아무도 열외가 없다. 따라서 기쁨은 정한대로 받는데 있으며, 어떠한 협박이나 속임수나 착취함이 없이 정당하게 자기 것을 추구하는데 있으며, 이렇게 가진 바를 서로 나누는데 있다. 이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정당한 실천을 통하여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비는 그런 말이다. 서로 나누지 않을 때 참다운 기쁨이 있기란 어렵다. 금덩이를 좋아하는 부자의 이야기에서 부자는 금덩이를 가슴에 안고 기뻐하였지만, 그것은 자기만의 기쁨이었고, 자기만족이었으며, 자기 욕심에 도취된 환상이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기쁨의 방법을 가르쳐 준다 해도 바로 나 자신이 그 뜻을 깨닫고 실천하지 않는 이상 인생에 참다운 기쁨은 있을 수 없다.
한국교회는 1984년부터 오늘 대림 제3주일을 자선주일로 정하여 모든 신자들이 자신의 가진 바를 나눔으로써 구세주의 탄생을 준비하고 또한 이로써 기쁨의 성탄이 되기를 촉구한다. 우리는 자신의 전생애와 마지막 목숨까지도 우리 인간에게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성체성사의 신비를 깊이 깨닫고, 가난한 이를 위해 서로 나누자는 자선의 종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요즘 조국의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어려운 이유가 다 다르다. 정말 어려운 서민들만 점점 어려워져 간다. 부당한 자금거래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속임수와 부정은 가난한 서민들을 더 어렵게 만들뿐 아니라 서민의 희망을 앗아가는 죄악이다. 희망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된다. 제발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함께 노력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나의 가진 것을 나누자. 없다면 빈손으로라도 악수를 청하여 따뜻한 삶의 온정과 격려를 나누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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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