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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1 묵상글 ( 사순 제1주간 금요일. - 손잡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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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1. 사순 제1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손잡고
"너희의 의로움이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인정하시기는 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의롭고 실제로 상당히 의로운 존재들이며
의로움의 기준이 다를 뿐 그들도 의로운 것입니다.
그들의 의로움은 기준이 율법입니다.
그들의 의로움은 법적인 의로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능가하라고 하시는 의로움,
곧 주님의 의로움은 그 기준이 무엇이고 어떤 의로움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 기준이고
그러니 사랑의 의로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씀도 있으니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을 살라고 하신 것도
율법을 능가하여 사랑을 살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랑의 한 예로 용서와 화해의 사랑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율법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조목이 있고 그것이 사랑 아닌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성조차 내지 않고 바보 멍청이라고 하지 않는 것보다는 덜 완전하지요.
살인은 1% 미만의 사람이 저지르는 죄악이고 반反 사랑인 데 반해
성내지 않고 바보 멍청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1%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지요.
그러니 이렇게 성도 내지 않고 바보 멍청이라고도 하지 않는
1% 미만의 사랑을 할 수 없어서 성을 내고 욕을 해 형제를 마음 아프게 했다면
그 다음 사랑으로서 용서를 청하고 화해를 하는 사랑 정도는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요.
사랑에 있어서 아예 성을 내지 않거나
바보 멍청이라는 말은 입에 담지도 못하는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라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이 못 되고 그래서 형제에게 잘못했다면 화해는 하라는 말씀이고,
화해하지 않은 채 하느님 당신께 오는 사람은 받아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사랑의 의로움이 없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오늘 주님의 말씀은
사랑하지 않고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형제와 손잡지 않고 외로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생각일랑
아예 하지를 말라는 말씀이요 형제를 일부러 떼어놓고
들어갈 생각은 더더욱 하지 말라는 말씀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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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1. 사순 제1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3월 11일 금요일
✝️ 1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4)
죄지으려는 마음을 잘라 버려라
죄짓기로 마음먹었다면 실제로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이미 완전한 악입니다. 우리의 구원자께서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죄의 근원으로부터 멀리 던져 버리시며 죄를 완전히 잘라 버리고자 하십니다.
우리 영혼 안에 죄지으려는 뜻이 없으면, 그런 뜻에 따라오는 행동도 일어나지 않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오리게네스-
✝️ 1성인 / 영적 글 묵상✝️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모든 것을 휩쓸어 가는 강
많은 시편들이 다윗의 구체적인 삶의 정황과 연결되어 있듯이 우리 역시 성경의 각 구절을, 그 구절의 의미를
실존적으로 깨닫게 해준 삶의 어떤 순간. 어떤 체험. 혹은 어떤 정황들과 연결시킬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성경은 우리를 위해 정녕 하나의 시간 전례 책이 되어서 삶에 리듬을 부여하고 동시에 삶을 통해
리듬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동산은 그 안으로 들어가도록 허락된 모든 이에게 자체로는 같다.
그러나 각자는 거기에서 전대미문의 꿀맛, 그리고 이후로도 다시 똑같이 만들어지지는 못할 그런 독특한
꿀맛을 만들어낸다.(91)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3월 영적 수련 성월 1주간 회개/겸손 ✝️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13-17장
✝️ 1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디오그넷 편지
“사랑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 감”
만약 자네가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열성을 다하여 듣는다면, 하느님께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선사하시는지 알게 될 걸세.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은 기쁨으로 가득 찬 천국, 대단한 힘으로 꽃을 피워 갖가지
열매를 가득히 맺은 나무가 될 걸세. 바로 이 자리에 인식의 나무와 생명의 나무가 심어졌다네.
인식이 죽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바로 불순종이 죽음을 가져왔네. 하느님께서 태초에 낙원의 한 중간에 인식의
나무와 생명의 나무를 동시에 심어 놓으신 것은 공연히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네.
인식을 통해 생명을 알아 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네. 그러나 원조들은 인식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뱀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네그려. 인식 없이는 생명도 없고, 참된 생명 없이는 참된 인식도 없다네.
그렇기때문에 이 두 나무들이 가까이 함께 심어졌던 것일세. 이들이 공동으로 작용하는 것을 알고 있던 바오로 사도는
참된 인식을 생명에 활용하지 않은것에 대해 꾸지람을 하셨네. 그는 “인식은 자랑하나 사랑은 건셜한다”고 말했네.
참된 인식을 모르면서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뱀의 꼬임에 쉽게 넘어간다네.
그러한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지도 않는 자이네. 이 참된 인식을 위해서 생명이 증거를 제시한 바 있네.
두려움으로 인식하면서 생명을 찾는 사람은 희망을 심는 자이고. 열매를 기대해도 되는 사람일쎄.
자네의 마음속에 인식과 생명이 있기를 바라네. 자네도 참된 말씀이 자네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마음의 공간을 내어 드리게.
참된 말씀의 나무를 가지고 그 열매들도 잡게나. 그러면 자네가 하느님으로부터 간절히 바라던 것을 수확할 수 있고,
뱀이 잔꾀로 자네가 손을 대지 못하도록 그토록 막으려 했던 것도 함께 얻을 수 있을 걸세.
그러면 하와도 더 이상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숫처녀로서 믿음에 나아갈 걸세. 구원이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네.
사도들이 그것을 붙잡네. 주님의 파스카가 준비되어 있네. 시간의 충만이 다가오고 있네. 세상의 질서가 회복되고 있네.
로고스가 성인들을 가르치면서 기뻐하네. 그를 통해 아버지께서 찬양을 받으시네.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이 영원하소서. 아멘!(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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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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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1.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형제님께서 명절 제사를 지내고서는 아내와의 관계가 나빠져서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제사 지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자기가 솔선수범해서 도와줬지만, 그런데도 힘들다며 형식적인 이 제사를 매번 치러야 하냐면서
푸념하는 아내가 너무 미워서 멀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웃으면서 “얼마나 도와주셨는데요?”라고 묻자, “제가 밤도 까고 전도 부치고 청소와 음식물 분리수거도 해줬습니다.
이 정도면 많이 도왔다고 생각하는데요?”라고 답하십니다. 정말로 많이 도와주신 것인가요? 그러나 제사의 주체가 누구일까요?
제사 지내는 이 조상님은 형제님의 조상님이었습니다. 아내는 형제님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아무 상관 없는 조상님입니다.
따라서 엄격히 따지면 남편이 돕는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아내가 도와주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즉, 아내의 일이 아닌,
남편의 일입니다.
남편은 돕는다는 마음이 아니라, ‘내 일’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해야 했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서 당연히 아내의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미워할 일이 아니라, 감사할 일입니다. 미움이 생기면 얼른 사랑의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율법 완성의 첫 대목으로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을 제시합니다. 율법을 없애러 오셨다면,
이 계명은 폐기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계명을 더 확장하십니다. 사랑의 법을 우리 마음에 심기 위해,
악한 마음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긴 살인은 악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악한 마음이 뿌리 뽑혀 사라진다면, 굳이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이 등장할 필요도 없게 될 것입니다.
악한 마음을 뿌리 뽑기 위해,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진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바보, 멍청이’는 종교적인 뜻이 있는 단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느님을 모른다고 하는 자,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 하느님께 불경스러운 자를 가리킵니다.
스스로 형제를 판단하고 단죄해서 아주 못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미움을 어떻게 사랑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늘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니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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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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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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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1. 사순 제1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어나 더, 먼저, 서둘러 사랑하자!♣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4)
우리는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웬만한 것은 다 갖추어져 있고, 필요한 것들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현세생활 뿐 아니라 영성생활도 유행처럼 새로운 것이 떴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영성생활의 항구함과 열정, 치열한 도전이 사라진 채 안일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듯하다. 오늘의 말씀들은 이런 우리에게 강렬한 도전을 던진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비극적인 제1차 바빌론 유배를 전후하여 어려움 중에 있는 유다 백성을 향하여 경고한다. 예언자는 그들에게 개인적으로는 회개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과 집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위험, 선과 악 사이의 치열한 투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위험에 대해 경고한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1) 당시 유다는 이집트와 바빌론 양대 세력이 서로 견제하고 있으므로 전쟁의 위협은 적다고 믿었고, 한편이 침략해 오면 반대편 세력이 구출해주리라 믿었다. 이런 방심과 예루살렘은 안전하리라는 무사 안일함 때문에 회개를 외치는 예언자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결국 예루살렘은 587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한편 오늘 복음말씀도 영성생활의 안일함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 예수님께서는 계명과 신자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만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는 ‘안일함’을 버리고 ‘더’ 사랑하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며, ‘서둘러’ 타협하라’는 좀 더 근본적이고 폭넓은 삶을 요구하신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의 삶보다 ‘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마태 5,20). 옛 정의는 살인을 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했으나, 새로운 정의는 형제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하는 것조차 금한다(5,22).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다 살인자이다.”(1요한 3,15). 화해를 촉진시키는 형제적 사랑은 하느님께 바친 희생제물을 보다 풍성하고 가치 있게 해준다.
나의 삶을 돌아보자! 나는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지금까지 신자로서, 수도자로서,가족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국가와 지역사회의 시민으로서 할 만큼은 하고 살아왔다. 나 정도만 살아도 잘 사는 것 아닌가’ 하고 만족스럽게 여기지는 않는가? “지금 나는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으니 오늘만 같아라!”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틈날 때 하는 기도나 영적독서, 물질적인 약간의 희사나 시간 날 때 하는 봉사로 신앙인으로서의 도리는 다하고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가?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나 영성생활은 늘 ‘아직도 더’만 있을 뿐이다.
이제부터라도 ‘더’, ‘먼저’, ‘서둘러’를 내 마음과 몸과 영혼의 지렛대로 삼고 사랑의 춤을 추어보면 어떨지. 지금까지 해오던 것보다 ‘더’ 열정을 불태우고, ‘더’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경청하며,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자! 그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갈망하고,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내놓고, 기도나 성경공부나 봉사에 앞서 ‘먼저’ 찾아가 화해하며, ‘먼저’ 받아들이도록 하자! 하느님과의 관계, 형제자매들과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꼬이고 맺힌 매듭을 미루지 말고 ‘서둘러’ 풀도록 하자! 우리 모두 눈을 뜨고 있으나 잠자고 있는 영혼과 의식을 일깨워 어떤 상황이나 어떤 관계에서도 주님의 영을 품고 ‘더’, ‘먼저’, ‘서둘러’ 사랑하는 우리가 되도록 하자!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사람답게 어정쩡한 태도를 버리고 철저하고 치열하게 살아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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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1.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회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참된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0)
대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대당명제로 제시하십니다.
‘대당 명제’란 한 명제를 먼저 내세우고, 그 다음에 그에 대한 반명제를 내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 라고 이르는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를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까지도 ‘살인’에 포함시키십니다.
곧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언어폭력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혀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
(집회 28,18)
또한 이는 '혀'의 살인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인 내면적인 면도 살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1요한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는 것이 본질인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화해하면 살인하지 않게 되지만 살인하지 않는다고 화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화해하는 일입니다.
먼저 화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바칠 때 ‘먼저 화해하라’ 고 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니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곧 예물입니다.
마치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창세 4,4)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바로 ‘예물’로 삼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제단의 예물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것이 의로움인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6,24)
그리고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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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1.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바보, 멍청이」
저는 지옥을 갔어도 벌써 몇 번은 갔어야 할 사람입니다. 짧은 생을 살아 오면서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를 보거나 접하면서 ‘바보, 멍청이 같은 이’라고!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살아있는 것은 분명 주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주님께서 죄에 대한 마땅한 처벌을 내리셨다면 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덕을 입었으니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하였지만, 오히려 말로 상처를 주고 일을 어렵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다재다능한 사람이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말이 많으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습니다”(알베리오네). 성녀 데레사는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말을 적게 하십시오! 말 많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을 골라서 하고 모든 이에게 후회되지 않을 말을 찾으십시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다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면 욕과 미움은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혹시라도 뜻하지 않은 말로 상처를 주고 서먹해진 관계가 있다면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지녔으면 선한 것이 나오고, 그렇지 못한 미움과 분노를 담고 있으면 화가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사지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신을 삼켜 버립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시작은 어리석음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은 불행을 초래하는 우둔함이다”(코헬10,13). 아무리 조심을 해도 마음 한 번 흔들리면 안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성 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라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치료하기보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제 입술이 내는 소출로 배부르게 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18,20-21).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좋은 글이 있어 함께 나눕니다
침묵의 소중함 -토마스 머튼-
침묵은 양선함 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함 입니다.
침묵은 자비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 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변호해 줄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 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바로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추어졌을 때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든
내버려둘 때 바로 침묵을 겸손입니다.
침묵은 신앙(믿음)입니다.
그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신앙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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