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55,1-3; 로마 8,35.37-39; 마태 14,13-21
+ 오소서, 성령님
지난 한 주간 안녕하셨어요? 따뜻한 날씨 속에서 한 주 지내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박재욱 율리아노 새 신부님의 첫 미사가 있었는데요, 교중미사와 축하식 영상이 본당 유튜브 채널에 올라와 있습니다. 신부님 위해서 기도와 정성을 봉헌해 주심에 감사드리고, 또 행사 준비를 위해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난 3주간 동안, 마태오 복음 13장의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 말씀을 들었는데요, 이번 주일에는 14장으로 넘어가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지만,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십니다.
저녁때가 되자, 군중을 돌려보내자고 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말씀드리니, 예수님께서는 그것으로 기적을 베푸시는데요, 이어지는 구절들은 최후의 만찬 장면과 비슷합니다.
우선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시는데, 이는 비스듬히 눕는 당시의 식사 자세로서,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자세와 같습니다. 이어 빵을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시고, 빵을 떼어, 그것을 주시는데, 이는 모두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행동과 같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네 복음서 모두에 전해지고,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 전해지는데요, 이 여섯 이야기와 최후의 만찬에 대한 말씀 모두에서 같은 동사들이 순차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이 식사들이 모두 최후의 만찬 때에 제정하신 성체성사와 연관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하신 첫 번째 일은 이처럼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이었고, 그 다음은 군중을 먹이신 일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병자성사와 성체성사로 이어집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돈이 없는데 어떻게 사 먹을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값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 몸으로 값을 치르셨기에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화답송에서 우리는 노래했습니다.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먹을 것이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당신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심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느님 사랑이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이 미사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는 인간이 신에게 잘못을 빌기 위해 속죄의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교만이 반대로 말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속죄의 제물을 마련하시는데, 그 제물이란 바로 당신 자신이십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엄청난 신비가 거행되는 현장이 바로 우리가 봉헌하고 있는 미사인 것입니다.
편찮으셔서 미사에 나오실 수 없는 분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성체를 모시고 가서 ‘봉성체’를 해 드리고 있습니다. 저와 보좌신부님이 번갈아 가며, 수녀님과 봉사자, 또 구역장님들과 함께 봉성체를 가는데요, 3년 전 1월, 저는 본당에 부임한 지 일주일 만에 처음 봉성체를 가면서 무척 설레었습니다.
저를 기다리고 계신 분들을 만난다는 일도 설렜지만, 편찮으신 분을 방문하여 성체를 전해드리는 일이야말로, 오늘 복음 말씀처럼 먼저 아픈 이들을 돌보시고, 양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본받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간 댁이 11구역의 로사 자매님 댁이었습니다. 로사 자매님은 우리 본당에서 반장과 독서를 하시고, 레지오를 비롯하여 여러 활동과 봉사를 하셨는데, 희귀병을 앓으시면서 온몸이 마비되어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계셔야했습니다. 처음 뵌 날, 반짝반짝한 눈망울로 저를 바라보시는데, 아무런 말씀도 하실 수 없으셨지만, 저를 기다려 왔다고 눈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봉성체를 갈 때도 한 집, 한 집 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13분이나 되는 분들에게 봉성체를 해 드리려면, 시간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빨리 나와야 하는 상황이 늘 아쉽고 죄송했습니다.
작년에서야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제가 사제 서품 받을 때, 저의 출신 본당인 월평동 본당에서 로사 자매님이 성모회 임원으로 활동하셨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왜 제가 처음 봉성체 간 날부터 빛나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셨는지 깨달았습니다. 23년 만에 만나셨으니 얼마나 반가우셨을까요? 제가 진작 알아뵙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제가 첫 미사를 드릴 때, 성모회에서 전 신자 식사 준비를 하시느라 고생하셨기 때문에, 틈틈이 성모회원들을 위해 기도드려왔는데, 그렇게 모르는 사이에 서로 기도 안에서 만나왔던 것입니다.
어느 날부터, 로사 자매님께서 봉쇄 수도자와 같은 삶을 살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봉쇄 수도원 담장 안에서 평생을 봉헌하고 계신 수도자들처럼, 자매님 역시 이 노은동이라는 도심 한가운데 당신의 침상이라는 봉쇄 구역 안에서 당신의 고통과 기도를 바치며 봉헌 생활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분들의 기도와 영적 희생 덕분에 우리가 하루하루 큰 탈 없이 지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너희가 가장 작은 내 형제자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복음 말씀을 인용하시며, “우리는 아프신 분들, 고통받는 분들의 몸을 만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만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해 왔던 것이 아니라, 침상에 누워 계신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움직이시지 못하는 가운데에도 묵묵히 당신의 고통을 봉헌하고 계신 예수님을 만나왔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또한, 성인은 성인전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옆집에 살고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어머니, 할머니가 성인이고, 옆집에서 오늘도 묵묵히 당신의 희생을 봉헌하며 기도하고 계신 우리 이웃들이 바로 성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성인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 내 옆에서, 앞뒤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열흘 전, 로사 자매님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장례미사를 드리면서, ‘옆집의 성인들’이라는 교황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외치십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최종적으로 갈라놓는 것이 죽음이라고, 많은 이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죽음도 삶도, 그 외 이 우주의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죽음과 삶을 넘어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미사를 통해 거행하고 있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부활하신 분, 영원한 생명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체 앞에서 우리는 동등합니다. 누구는 더 좋은 것을, 누구는 덜 좋은 것을 받는 세상의 논리는 성체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내가 영하는 성체는, 세상을 떠나신 영혼이 영하시던 성체와 꼭 같은 성체입니다. 그분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영성체를 통해 내 안에 계시니, 영성체는 우리를 다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이 하나됨을, 죽음도 삶도 갈라놓지 못합니다.
때로 우리는 미사에 나갈지 말지 고민하게 되는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지금도 병상에서 단 한 번이라도 미사에 참례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하고 계시고, 침상에서 성체를 기다리며 한 달을 지내고 계십니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구하고 있기에, 무엇이 이 성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저울질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내가 미사에 나올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은총이 아닐까요?
제1독서의 말씀에 다시금 귀 기울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 …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https://youtu.be/cH8ArGN9ebQ?si=HyPGkWXp1QYI3soa
주 예수와 바꿀 수는 없네 (가톨릭성가 61번)
무리요, 빵과 물고기의 기적, 1667-1682년
출처: The Miracle of the Loaves and Fishes (Murillo, Edinburgh)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