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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4세 교황 성하의
제34차 세계 병자의 날 담화
(2026년 2월 11일)
사마리아인의 연민: 타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사랑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제34차 세계 병자의 날을 2026년 2월 11일에 페루 치클라요에서 장엄하게 기념할 것입니다. 저는 이날을 맞아,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성찰하도록 다시 한번 권유하고자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사랑의 아름다움과 연민의 사회적 차원을 재발견하는 데에 여전히 의미 있고 필수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성찰을 통하여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이와 고통받는 모든 이, 특히 병자들을 향하여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감동적인 이야기(루카 10,25-37 참조)를 우리는 모두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묻는 율법 교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응답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던 어떤 사람이 강도들에게 습격당하여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한 사제와 레위인은 그를 지나쳤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이 여겨 상처를 싸매 주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저의 선임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쓰신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에 비추어 이 성경 구절을 성찰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회칙에 따르면,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연민과 자비는 개인의 노력으로만 축소되지 않고 관계들을 통하여 실현됩니다. 곧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들과 맺는 관계, 그들을 돌보는 이들과 맺는 관계,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 만남의 선물: 친밀함과 존재를 내어 주는 기쁨
우리는 빠르고 즉각적이며 서두르는 문화 안에, 곧 ‘버림’과 무관심의 문화 안에 깊이 잠겨 살아갑니다. 이러한 문화는 우리가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필요와 고통을 인식할 수 없도록 방해합니다. 그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상처 입은 사람을 보고 ‘지나가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 주의 깊게, 바로 예수님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인은 인간적이고 연민 어린 친밀함으로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멈추어 서고 다친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몸소 돌보아 줍니다. 심지어 그는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다친 사람을 위하여 씁니다. …… (무엇보다도) 자기 시간을 다친 사람에게 준 것입니다.”1)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저 누가 우리 이웃인지를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 주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2) 이에 관하여 우리는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함께 다음과 같은 확신에 이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누가 이웃인지가 아니라,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실제로, 자유 의지로 다른 이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참된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웃이 된 사람은 바로 자비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3)
사랑은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른 이를 만나러 나가는 것입니다. 이웃이 되는 것은 물리적, 사회적 근접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로 한 결심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상처 입은 인류에게 가까이 다가가신 참으로 거룩한 사마리아인이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고통받는 이들의 이웃이 됩니다. 이는 그저 자선 행위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인격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표징입니다. 이는 단순히 필요의 충족을 넘어, 우리 자신이 선물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형태의 애덕은 우리를 위하여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반드시 자양분을 얻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한센병 환자들과의 만남을 언급하며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저를 그들 가운데로 이끌어 주셨습니다.”5) 프란치스코 성인은 한센병 환자들을 통하여 사랑의 감미로운 기쁨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만남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에서 흘러나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주신 착한 사마리아인이심을 알아봅니다. 또한 우리가 상처 입은 형제자매에게 손을 내밀 때마다 그분을 현존하시게 합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해 주신 분보다 더 참된 이웃은 없으니, 그분을 주님으로 또 이웃으로 사랑합시다. 머리보다 자기 지체들과 더 가까운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이들 또한 사랑합시다. 몸의 일치를 위하여 다른 이의 가난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을 사랑합시다.”6) 친밀함과 존재, 그리고 주고받는 사랑을 통하여 ‘한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러하였듯 주님을 만난 감미로움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2. 공동의 사명인 병자 돌봄
이어서 루카 성인은 사마리아인이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연민이란 우리가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이끄는 깊은 감정을 의미합니다. 이는 내면에서 솟아나 타인의 고통에 헌신적으로 응답하도록 이끄는 감정입니다. 이 비유에서 연민은 실천적 사랑의 본질적인 특징입니다. 연민은 이론적이지도 그저 감성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사마리아인은 가까이 다가가 상처를 치료해 주었고, 책임지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그가 자기 혼자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다친 사람을 보살펴 줄 여관 주인을 찾았습니다. 우리도 작은 개개인의 총합보다 강한 ‘우리’ 안으로 초대하고 그 안에서 함께 만나라고 부름받습니다.”7) 저는 페루에서 선교사와 주교로 활동하며, 사마리아인과 여관 주인의 마음으로 자비와 연민을 보여 주는 많은 이를 직접 보았습니다. 가족, 이웃, 의료 종사자, 보건 사목 관련자 그리고 다른 많은 이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가던 길을 멈추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보살피고 지원하며 동반합니다. 가진 것을 내어 줌으로써 그들은 연민에 사회적 차원을 부여합니다. 관계망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경험은 단순한 개인적 헌신을 넘어섭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교황 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에서 병자 돌봄이 교회의 사명에서 “중요한 일부”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교회적 행위”(49항)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측면이 건강한 사회의 척도임을 설명하고자 치프리아노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끔찍하고 치명적으로 보이는 이 흑사병의 유행은 개개인의 의로움을 점검하고 인간의 마음을 시험합니다! 건강한 이들이 아픈 이들을 돕는지, 친척들이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주인들이 감염된 종들에게 연민을 보이는지, 의사들이 도움을 청하는 병자들을 버려두지 않는지, 이 흑사병이 알려 주는 것입니다.”8)
‘한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은 우리가 고유한 소명에 따라 모든 이의 고통에 주님의 연민을 전하는 한 몸의 지체임을 참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9) 더욱이 우리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고통은 낯선 이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몸,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신 바로 그 몸을 이루는 지체들의 고통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의 선을 위하여 그 몸을 돌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고통은 그리스도 자신의 고통과 동일시되고,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봉헌될 때 구세주께서 모든 이의 일치를 위하여 바치신 기도의 성취를 앞당깁니다.10)
3. 언제나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이끌려 우리 자신과 이웃을 만나기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 이 이중의 계명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수위성과 그것이 인간 사랑과 관계의 모든 차원에 미치는 직접적인 결과를 인식합니다. “요한 사도가 증언한 대로 이웃 사랑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진정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2.16).”11) 이 사랑은 그 대상이 하느님, 이웃, 자기 자신으로 각각 다르고 서로 구별되는 사랑으로 이해될 수 있더라도, 그 사랑을 근본적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12) 하느님 사랑의 수위성은, 인간의 행동이 자신의 이익이나 보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의례적인 규범을 초월하여 참된 예배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의 드러남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웃을 섬기는 것은 행동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13)
이러한 관점은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의 참된 의미도 이해하게 해 줍니다. 이는 우리의 자존감이나 존엄성의 기반을 성공, 경력, 지위, 집안 배경14)과 같은 세속적 고정관념에 두려는 온갖 시도를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우리의 고유한 자리를 되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상호 관계 안에서 완전해집니다. 인간이 참다운 상호 관계를 이루며 살아갈수록 인간의 정체성은 더욱 완전해집니다.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하느님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15)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인류가 입은 상처의 참된 치료제는 하느님 사랑에 뿌리내린 형제애에 기반한 삶의 방식입니다.”16) 환대와 용기와 헌신과 지지의 정신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뿌리를 둔 이 형제애의 정신, 곧 ‘사마리아인’의 정신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에 언제나 반영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오를 때, 우리는 고통받는 모든 이, 특히 아픈 이들과 노인들과 시련을 겪는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내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 중에서 연민과 경청과 위로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를 도와주시기를 청하며 병자의 치유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기도드립시다. 질병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하여 가정에서 바쳐 온 이 오랜 기도로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시다.
우리의 기쁨이신 성모님,
저를 떠나지 마시고,
저를 외면하지 마소서.
어디에서나 저와 함께하시고
저를 홀로 버려두지 마소서.
성모님께서는 참어머니이시며
언제나 저를 지켜 주시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저에게
복을 내리시도록 빌어 주소서.
모든 병자와 그 가족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의료 종사자와 보건 사목 관련자들, 특히 세계 병자의 날에 참여하는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저의 교황 강복을 보냅니다.
바티칸에서 2026년 1월 13일
레오 14세 교황
레오 14세 교황 성하의
2026년 사순 시기 담화
경청과 단식: 회개의 때인 사순 시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순 시기는 교회가 모성적 돌봄의 마음으로, 하느님 신비를 다시 한번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도록 초대하는 때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믿음을 새롭게 하고 일상생활의 불안과 분심이 우리 마음을 잠식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회개로 향하는 모든 길은, 우리가 하느님 말씀의 자리를 마련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일 때 시작됩니다. 따라서 하느님 말씀의 선물과 우리가 그 말씀에 내어 드리는 환대의 자리, 그리고 그 말씀이 불러오는 변화는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사순 여정은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며,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가 완성될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기쁜 때입니다.
경청
올해 저는 우선 경청을 통하여 말씀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성찰하고자 합니다. 기꺼이 경청하려는 자세는 다른 이와 관계를 시작하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을 드러내는 첫 번째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불타는 떨기 속에서 당신 자신을 모세에게 계시하시면서 경청이 당신을 정의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임을 몸소 일러 주십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탈출 3,7). 주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보내시어 종살이하던 당신 자녀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해방 이야기는 바로 억눌린 이들의 울부짖음을 귀여겨들으신 데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동참을 이끌어 내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마음속 생각들을 우리와 나누십니다. 그러한 까닭에,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말씀의 경청은 우리에게 현실 속 진실에도 귀 기울이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성경의 도움으로 우리는 저마다의 삶과 사회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목소리 가운데에서도 고통과 고난을 겪는 이들의 울부짖음을 알아듣고 이에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경청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가짐을 기르려면, 하느님께서 당신처럼 경청하는 법을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처지는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우리의 삶과 사회, 정치 경제 체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외침”1)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단식
사순 시기가 경청의 때라면, 단식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구체적인 길입니다. 음식의 절제는 고대의 수덕(修德) 실천이었으며, 회개의 여정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단식은 바로 육체와 연관되기에 우리가 무엇에 ‘굶주리는지’ 그리고 우리가 생명 유지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인식하게 해 줍니다. 더 나아가 단식은 우리가 정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생생히 느끼게 하고 안주하지 않게 하며 우리의 ‘욕구’를 인식하고 조절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러하기에 단식은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도록 우리를 가르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영적 통찰을 통하여, 마음을 지키는 이 방식을 특징짓는 것, 곧 현재의 상황과 미래의 성취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이해하게 해 줍니다.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인간은 지상 삶의 여정 안에서 정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느끼게 되지만, 그 충족은 내세에 속합니다. 천사들은 이 빵, 이 양식으로 만족합니다. 반면에 인류는 이에 대한 굶주림을 느끼기에, 우리 모두는 갈망하면서 이에 이끌립니다. 이처럼 갈망하며 나아가는 것은 영혼을 확장시키고 그 능력을 키워 줍니다.”2)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되는 단식은 우리의 욕구를 다스리고 정화하며 자유롭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확장하여 하느님과 선행을 향하게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에 따라 단식을 실천하고, 단식이 자만심으로 이어지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를 믿음과 겸손 안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단식은 주님과 이루는 친교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살찌우지 못하는 이들은 올바르게 단식하지 않는 것이기”3) 때문입니다. 단식은 은총에 힘입어 죄와 악에서 돌아서겠다는 우리의 내적 다짐의 가시적 표지로서, 더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는 또 다른 형태의 자기 절제를 수반해야 합니다. “절제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하고 참되게 만들기”4)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점에서 더욱 구체적이면서도 종종 간과되곤 하는 절제의 한 형태를 여러분에게 제안합니다. 곧, 우리 이웃을 불쾌하게 하고 상처 주는 말을 삼가는 것입니다. 같은 자리에 없어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한 거친 말과 성급한 판단을 피하고 비방과 험담을 삼감으로써, 우리의 언어를 무장 해제하는 일부터 시작합시다. 우리의 가정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일터에서, 소셜 미디어에서, 정치적 담론에서, 매체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말을 헤아려 보고 친절과 존중을 기르도록 노력합시다. 이렇게 함으로써 증오의 말들은 희망과 평화의 말들로 대체될 것입니다.
함께
마지막으로, 사순 시기는 말씀 경청과 단식의 공동체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성경도 여러 방식으로 이 차원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느헤미야서는 백성들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새롭게 하려고 모여서 함께 율법서 봉독을 듣고 단식에 참여함으로써 신앙 고백과 하느님 경배를 준비하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느헤 9,1-3 참조).
우리 본당, 가정, 교회 단체, 수도 공동체도 이와 마찬가지로 사순 시기 동안 공동의 여정에 나서도록 부름받습니다. 이 공동 여정에서는,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가난한 이들과 땅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는 것이 우리 공동체 삶의 일부가 되고, 단식이 진실한 참회의 바탕이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회개는 개인의 양심만이 아니라 우리의 관계와 대화의 질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기꺼이 현실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우리 교회 공동체들 안에서뿐만 아니라 정의와 화해에 대한 인류의 목마름과 관련해서도 무엇이 참으로 우리의 갈망을 이끄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께 그리고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에게 더욱 귀 기울이게 해 주는 사순 시기의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의 언어 사용도 아우르는 그러한 단식의 힘을 청합시다. 그리하여 상처 주는 말이 줄어들고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는 더 넓은 자리를 만들어 나갑시다. 우리 공동체들이 고통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리가 되고, 경청을 통하여 해방의 길들이 열리는 자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준비된 마음과 열정으로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는 데에 이바지합시다.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의 사순 여정에 진심으로 저의 교황 강복을 보냅니다.
바티칸에서
2026년 2월 5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레오 14세 교황
레오 14세 교황 성하의
제60차 홍보 주일 담화
(2026년 5월 17일)
인간의 목소리와 얼굴 지키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독자적이고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는 것은 얼굴과 목소리 때문입니다. 얼굴과 목소리는 저마다가 지닌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정체성을 나타내며,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옛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을 정의하면서 ‘얼굴’(prosopon)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어원에 따르면 얼굴은 눈앞에 있는 무엇인가를, 곧 현존과 관계의 자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반면, (‘통하여 소리 남’을 뜻하는 페르소나레[per-sonare]에서 유래한) 라틴어 낱말 ‘페르소나’(persona, 개인)에는 소리라는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의 불특정한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독특한 목소리 말입니다.
얼굴과 목소리는 거룩한 것입니다. 당신과 비슷하게 당신 모습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전하신 당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시며 얼굴과 목소리를 주셨습니다. 여러 세기에 걸쳐 이 말씀은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통하여 울려 퍼졌고 이윽고 때가 차자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 말씀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이 소통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목소리와 얼굴로 우리에게 알려졌기에 이 말씀을 직접 듣고 볼 수 있었습니다(1요한 1,1-3 참조).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순간부터 인간이 당신의 대화 상대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오 성인의 말처럼,1) 그분께서는 우리의 얼굴에 하느님 사랑을 반영하는 모습을 새겨 주셨으니, 이는 우리가 사랑을 통하여 우리의 인간 본성을 온전히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얼굴과 목소리를 지키는 일은 이 인장(印章), 곧 이 지울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반영을 보존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미리 정해진 생화학적 알고리즘으로 이루어진 종(種)이 아닙니다. 우리는 저마다 대신할 수도 따라 할 수도 없는 고유한 소명을 지닙니다. 우리의 소명은 우리 자신의 생생한 체험에서 비롯되고 다른 이들과의 소통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우리가 인간의 얼굴과 목소리를 지키는 이 임무를 다하지 못할 때, 때로는 당연하게 여겨 온 인간 문명의 중요한 기둥들 가운데 일부를 디지털 기술이 완전히 바꾸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인공 지능 시스템은 인간의 목소리와 얼굴, 지혜와 지식, 인식과 책임감, 공감과 우정을 흉내 냄으로써 정보 생태계를 교란할 뿐만 아니라 가장 깊은 차원의 소통인 인간관계에까지 침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도전은 기술적인 도전이 아니라 인간학적인 도전입니다. 얼굴과 목소리를 지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디지털 기술과 인공 지능이 제공하는 기회를 용기와 결단력을 지니고 식별하며 받아들이는 일은 우리가 중대한 문제, 복합적 요인, 위험을 외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힘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소셜 미디어 참여를 극대화하고자 –플랫폼의 수익성을 위하여- 설계된 알고리즘은 즉각적 감정에는 보상을 주지만, 이해와 성찰을 위한 노력처럼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인간적 반응에는 불이익을 준다는 사실이 오래전부터 충분히 증명되었습니다. 이러한 알고리즘은 손쉬운 동의와 분노의 버블(bubbles)*에 따라 사람들을 무리 지어, 경청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우리의 능력을 약화하고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인공 지능을 모르는 것이 없는 전지적인 ‘친구’, 모든 지식의 원천, 모든 기억의 보관소, 온갖 조언을 주는 ‘신탁’처럼 여기는 순진하고 무비판적인 의존 때문에 더 만연하게 됩니다. 이 모두가 분석적이고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의미를 이해하며 형식과 의미를 구분 짓는 우리의 능력을 더욱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인공 지능이 커뮤니케이션에 관계된 임무 수행을 돕고 지원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기로 하고 인위적 통계 모음에 안주한다면 결국 우리의 인지, 정서, 소통 역량은 저하되고 말 것입니다.최근 들어 인공 지능 시스템은 글, 음악, 영상 제작에서 점점 더 통제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상당수 인간의 창의적인 산업이 해체되어 ‘인공 지능 기반’(powered by AI) 제작이라는 표지로 대체될 위험에 놓이며, 사람들은 자기 머릿속 생각이 아닌 생각들과 익명의 저작물들을 주인 의식이나 사랑 없이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존재로 탈바꿈됩니다. 그러는 사이에 음악, 미술, 문학 분야에서 인간의 천재성이 빚어낸 걸작들은 그저 기계들의 훈련을 위한 기초 자료로 평가절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기계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또는 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강력한 도구들을 우리에게 도움이 되도록 현명하게 사용하여 인간성과 지식을 증진함으로써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사람은 헌신과 연구와 개인 책임이 수반되는 노력 없이도 지식의 열매를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하는 유혹에 늘 빠지곤 합니다. 그렇지만 창의성을 포기하고 우리의 두뇌 역량과 상상력을 기계에 맡겨 버리면 우리 개개인이 하느님과 또 다른 이들과 이루는 관계 안에서 성장하도록 받은 재능은 사장되고 맙니다. 이는 우리의 얼굴을 가리고 우리의 목소리를 침묵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존재인가 아니면 존재하는 척인가: 관계와 실재의 시뮬레이션
피드(feed)를 스크롤 할 때에 우리는 다른 인간 존재와 소통하고 있는지 아니면 소셜 미디어의 ‘봇’이나 ‘가상 인플루언서’와 소통하고 있는지 식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이러한 자동화된 주체들의 투명성 떨어지는 개입이 공공의 논의와 대중의 선택에 영향을 끼칩니다. 대규모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s: LLMs)에 기반한 챗봇은 개인 맞춤식 상호 작용의 끊임없는 최적화를 통하여 은밀한 설득에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판명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 모델이 지닌 대화하고 각색하며 모방하는 구조는 인간의 감정들을 따라하여 관계를 시뮬레이션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인화는 재미를 줄 수 있지만, 특히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는 기만적일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정다운’ 챗봇들은 언제나 곁에 있어 다가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감정 상태의 숨은 설계자가 되어 우리의 내밀한 영역을 침범하고 점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관계의 욕구를 악용하는 기술은 개개인의 삶에 고통스러운 결과를 불러올 뿐만 아니라 사회의 정치, 문화, 사회 조직 전반에도 해악을 끼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바로 우리가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를 인공 지능 시스템으로 대체해 버릴 때 일어납니다. 인공 지능 시스템은 우리의 생각들을 분류하여 우리 주변에 거울 같은 세상을 창조합니다. 그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의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언제나 우리와 구분되는 타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빼앗겨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함께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울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포용하지 않으면 그 어떤 관계나 우정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새롭게 떠오르는 이 시스템이 제기한 또 다른 중대한 도전은 편향의 문제입니다. 이는 현실을 다르게 인식하고 전하게 이끕니다. 인공 지능 모델은 그 설계자들의 세계관에 따라 형성되고, 나아가 활용 데이터에 담긴 고정관념과 편견을 재생산하여 똑같은 사고방식을 강요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대표성을 띠기에는 부적절한 데이터뿐만 아니라 알고리즘 설계 때의 투명성 부족 때문에 우리는 기존의 사회 불평등과 불의를 지속시키고 심화하며 우리의 사고를 조종하는 네트워크 안에 갇히곤 합니다.
그 위험성은 실로 막대합니다. 시뮬레이션의 위력은, 인공 지능이 우리의 얼굴과 목소리를 조작한 평행 ‘현실’을 만들어 우리를 현혹할 수 있을 만큼 큽니다.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다차원 환경의 세계 안에 우리는 매몰되어 있습니다.
부정확성은 이 문제를 키우기만 합니다. 통계적 확률을 지식이라고 제시하는 시스템은 기껏해야 진실에 대한 근사치만을 우리에게 제공하며, 때로는 우리를 명백히 기만합니다. 출처 검증 실패가 사건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꾸준한 정보 수집과 검증을 포함한 현장 조사의 위기와 맞물리면 허위 정보의 확산을 더욱더 부채질하고 불신과 혼란과 불안의 감정이 자라나도록 부추길 수 있습니다.
동맹의 가능성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의 배후에는 극소수의 기업들이 있습니다. 최근 들어, 그러한 기업 설립자들은 ‘2025년 올해의 인물’에 이름을 올린 크리에이터로, 곧 인공 지능의 설계자로 소개되었습니다. 이러한 실태는 알고리즘 시스템과 인공 지능의 독점적 장악에 관한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킵니다. 흔히 우리가 실제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이러한 시스템과 인공 지능은 인간 행동에 미묘하게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교회사는 물론 인류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디지털 혁신을 멈추는 일이 아니라 그 혁신을 잘 인도하고 그 양면성을 분명히 인식하는 일입니다. 인간 개개인의 보호를 위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우리 저마다의 몫입니다. 그래야만 이 도구들을 참으로 우리의 동맹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동맹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는 책임과 협력과 교육이라는 세 기둥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첫째는 책임입니다. 책임은 우리가 수행하는 역할에 따라 정직, 투명성, 용기, 혜안, 지식 공유의 의무, 알 권리 등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그 누구도 우리가 건설해 나가고 있는 미래에 대한 개인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는 온라인 플랫폼의 최고 책임자들이, 저마다 자녀들의 안녕을 돌보듯이, 그들의 기업 전략도 분명 이윤 극대화라는 기준만이 아니라 공동선을 고려하는 미래 지향적인 전망에 따라 계획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공 지능 모델을 제작하고 개발하는 이들은 그들이 개발하는 알고리즘과 모델들의 바탕이 되는 설계 원칙과 조정 시스템과 관련하여 투명성을 실천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사용자들이 동의 과정에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인간 존엄성이 존중되도록 보장하는 임무를 맡은 국가 입법자들과 초국가적 규정 결정을 맡은 이들에게도 같은 책임이 요구됩니다. 적절한 규제는 챗봇에 대한 정서적 의존 관계를 형성하지 않도록 개인을 보호하고, 거짓되거나 조종하거나 호도하는 콘텐츠의 확산을 막아 기만적인 시뮬레이션에 맞서 정보의 진정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매체와 커뮤니케이션 기업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몇 초 더 시선을 끌려고 고안된 알고리즘들이 진실 추구라는 기업들의 직업적 가치보다 우세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공공의 신뢰는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게 유도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정확성과 투명성으로 얻는 것입니다. 인공 지능이 생성하거나 조작한 콘텐츠는 명확하게 표시되어 사람이 만든 콘텐츠와 구분되어야 합니다. 언론인과 그 밖의 콘텐츠 창작자의 작품에 대한 저작권과 소유권은 보호받아야 합니다. 정보는 공공재입니다. 건설적이고 의미 있는 공공 서비스는 출처의 투명성, 관련자들의 참여, 그리고 높은 품질 기준에 기반하는 것이지 불투명성에 기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협력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어떤 부문도 단독으로는 디지털 혁신과 인공 지능 거버넌스(AI Governance)*의 운영이라는 도전을 다룰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안전장치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모든 이해 당사자가 -기술 산업부터 입법자까지, 창작 기업부터 학계까지, 예술가부터 언론인과 교육자까지- 충분한 정보에 기반한 책임감 있는 디지털 시민 의식을 함양하고 실천하는 데에 참여해야 합니다.
교육의 목표는 바로 이것입니다. 개인의 비판적 사고력을 증진하는 것, 출처가 믿을 만한지 그리고 우리가 접근하는 정보의 선택 뒤에 숨은 이해관계가 있는지를 평가하는 것, 이와 관련된 심리적 기제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가정, 공동체, 단체들이 더 건강하고 책임감 있는 소통의 문화를 위한 실질적 기준을 발전시키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이미 몇몇 시민 단체에서 추진하고 있듯이, 교육 체계 전반에 매체와 정보와 인공 지능에 대한 문해력(literacy) 교육을 도입하는 일이 점점 더 시급해집니다. 우리는 가톨릭 신자로서 이러한 노력에 이바지할 수 있고 또 이바지하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개개인들 특히 젊은이들이 비판적 사고 능력을 얻고 더 큰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해력 교육은 그 폭을 넓혀 평생 교육 사업에도 포함되어, 급격한 기술 변화 앞에서 흔히 배척당하고 무력하다고 느끼는 노년층과 사회의 소외 계층에도 제공되어야 합니다.
매체와 정보와 인공 지능에 대한 문해력은, 개개인이 인공 지능 시스템의 의인화 추세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도구로 다루며, 언제나 인공 지능 시스템이 제공하는 부정확하거나 틀릴 가능성이 있는 출처에 대하여 외부 검증을 활용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또한 문해력은 보안 기준과 불만 제기 옵션들에 관한 인식을 증진함으로써 사생활과 데이터를 더욱 잘 보호하게 해 줄 것입니다. 인공 지능을 의도에 맞게 사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을 교육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동의 없이 사생활이나 친밀한 관계를 침해하는 디지털 사기, 사이버 폭력(cyberbulling), 딥페이크 등의 유해 콘텐츠 제작이나 행위에 이용당하지 않게 하려면 우리의 이미지(사진과 음성), 얼굴과 목소리를 보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을 새로운 발전에 발맞추게 할 기초 문해력을 산업 혁명이 요구했듯이, 디지털 혁명 또한 (인간적, 문화적 소양과 함께) 디지털 문해력을 요구합니다. 디지털 문해력을 통하여 우리는 알고리즘이 어떻게 우리의 현실 인식을 형성하는지, 인공 지능의 편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작동 기제 때문에 우리의 피드에 특정 콘텐츠가 보이는 것인지, 인공 지능 경제에 어떤 경제 원칙과 모델이 존재하고 그것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얼굴과 목소리가 다시 한번 사람을 대변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의 선물을 인간의 가장 심오한 진리로서 소중히 지켜 나가야 합니다. 모든 기술 혁신도 그러한 진리를 향해야 합니다.저는 이와 같은 성찰을 제시하며, 앞서 말한 목적들을 위하여 일하는 모든 이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또한 매체를 통하여 공동선에 봉사하는 모든 이에게 진심 어린 교황 강복을 전합니다.
바티칸에서
2026년 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레오 14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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