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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읽는 단편 교리] 성모님의 달, 성모 성월
5월은 성모 성월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매년 5월 신자들이 매일 성모님을 더욱 공경하고 그분의 모범을 따라 기도와 은총의 삶을 살아갈 것을 권장합니다.
서방 가톨릭교회에서 성모 성월의 역사는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일반 민중들의 봄 축제나 5월 축제가 서서히 그리스도교화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5월과 성모님을 처음으로 연결한 사람은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10세(1221~1284)입니다. 그는 5월이 주는 자연의 풍성함을 노래하면서 영적으로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시는 마리아께 기도하도록 했습니다. 성 필립보 네리(1515~1562)는 젊은이들에게 5월 한 달 동안 성모님께 꽃다발을 바치고 찬미 노래를 부르며 선행으로 마리아를 공경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성모 성월 신심 행사는 18세기 이탈리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725년 예수회원 디오니시가 『마리아 성월』이라는 책을 출간하자 금세 로마와 밀라노 등지로 퍼져나갔습니다. 이 책에는 성당뿐 아니라 집과 일터에서 성모 성월에 실천할 내용들이 제시되고 있고, 마지막 날에는 성모님께 자신의 마음을 봉헌하라고 나와 있습니다. 훗날 제노바의 주교가 되는 사포리니는 1747년 『성모성월』이라는 책을 냈고, 1758년에는 여러 저자들에 의해 또 다른 『성모성월』이란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이러한 책들은 성모 성월의 정착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854년 12월 8일, 복자 비오 9세 교황(1846~1878 재위)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선포하면서 교회 내 성모님에 대한 공경은 절정에 달합니다. 이후, 성모 성월 행사가 공식으로 거행되었고, 많은 교황은 성모 성월 신심을 잘 간직하도록 여러 차례 권고하였습니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 재위)는 “성모 성월 신심이 엄격한 의미에서는 전례에 속하지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전례적 예배 행위로 간주할 만한 신심”이라며 그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1963~1978 재위)은 “성모 성월이 세계 곳곳의 신자들이 하늘의 여왕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달”이라며 “교회와 가정 공동체 그리고 개인은 한 달 동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마리아께 드리고,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성모님의 숭고한 사랑을 찬양해야 한다.”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성모 성월 신심을 위해 교회가 공식적으로 규정한 전례 예식은 없습니다. 단, 성모상을 아름답게 꾸미고 말씀 전례의 양식을 빌어 새롭게 구성한 ‘성모의 밤’을 거행하거나 매일 성모상 앞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는 등 자체적으로 마련한 기도를 봉헌하도록 권장합니다. 그리고 성모의 밤에선 성모님께 바치는 글, 성모 호칭 기도, 꽃과 촛불 봉헌을 통해 그 의미를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성모 성월을 정한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하여 간구하시는 성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모든 성인 성녀가 성모님을 공경했던 것처럼 하느님께 대한 성모님의 순명과 사랑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성모 성월에도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선행과 기도로써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봉헌하도록 합시다.
[신학이 뭡미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과 만남의 자리: 성경 (1)
지난번에 신학은 ‘내 삶 안에서 존재하시는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알아가면서, 그분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지를 묻고 답하며, 자신을 성찰하는 여정(旅程)’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정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길잡이는 무엇이 있을까요? 여러 길잡이 중 중요한 하나는 바로 “성경(聖經)”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신학과 신앙의 교과서이자 안내서이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 백성의 책’입니다. 이런 성경을 여러분은 어떻게 간직하고 계시나요?
어떤 주교님께서는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안타까운 모습을 이렇게 꼬집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먼지가 많이 쌓인 책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여러분에게 성경은 무엇(의미)인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은 책의 형태로 우리 곁에 있지만, 분명한 것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며, 소설책은 더더욱 아닙니다. 성경 속에는 말씀하시는 하느님 자신에 관해 그리고 당신의 우리 인간에 대한 구원 계획에 관해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세상을 창조하시며 보존하시는 하느님,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여정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지혜를 드러내시는 하느님, 성조들과 예언자들의 입으로 당신 말씀의 진리를 전달하는 하느님 등등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다정하신 정말이지 참 다양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인 복음 선포를 통해 말씀하시고, 당신의 구원 의지와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신화적인 서술에서부터, 역사, 율법, 시, 예언, 묵시록, 복음, 편지 등등 왜 이런 다양한 장으로 기록되었을까? 단지 시대의 문학적인 형식에 불과할까, 아니면 어떤 다른 의도가 있을까? 예를 들어 시편은 하느님을 찬미 찬양하면서 왜 시詩라는 장르를 사용했을까?
시편 저자는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인간 자신의 감정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 당신 말씀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초월성) 영원히 존재하지만(영원성)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우리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그 말씀을 들음으로써 다양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아무리 다양한 모습으로 체험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체험하는 하느님은 동일한 한 분이신 하느님입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탈출 3,6)이시며,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 존재하시나 동일한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양한 장르를 통해 우리가 다양한 모습의 하느님과 그분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을 만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교회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물론 성경 속 말씀 하나하나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는 말씀이기에 그 자체로 성경을 읽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성경 안에서 인간의 방식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셨기에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성경 저자들이 정말로 뜻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며, 하느님께서 그들의 말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주의 깊게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9항」 참고)
그래야 지금 여기 우리의 성경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해주는 자리이자, 성경을 읽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간직하게 해주는 중요한 만남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에 적힌 내용만이 아니라, 그 내용에 담긴 하느님의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일 성경의 한두 구절을 읽읍시다. … 성경을 펼쳐 놓읍시다. … 매일 성경에서 영감을 얻읍시다. 큰 사랑으로 우리 삶을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는 것을 발견합시다.”(프란치스코 교황님의 2020년 1월 26일 하느님 말씀 주일 강론 中)
[신학이 뭡미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과 만남의 자리: 성경 (2)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제자들을 양성하셨듯이, 신학교에서는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통해 신학생들이 성경을 학문적 영역에서만 탐구하여 그 안에서 자구적 의미만을 찾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말씀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게 하여 그 삶 한가운데에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주님을 모시고 살 수 있게 양성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학과 신앙의 교과서이자 안내서이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 백성의 책’인 성경을 읽을 때 혹시 생길 수 있는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고, 그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만나는 성경이 품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이야기를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 공부를 단순히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일로만 생각한다면, 이는 단순히 성경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한 것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은 후에는 이해를 위해서 묵상(Meditatio), 즉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 내 삶에 어떤 빛을 비추는지를 살펴보는 것’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묵상 시간은 성경 속 하느님 말씀이 당시 시대와 문화를 넘어 성경을 읽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다가와 내 삶의 의미를 해석해 줍니다. 그래서 성경을 내 뜻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신앙을 일으키고 하느님의 지혜를 갈망하며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이끌어 주시는 성령께서 원하시는 의미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실은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슬기, 통달, 용기, 효경 그리고 경외심의 삶(이사 11,2-3)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신학을 공부하고 공부한 것을 토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나의 삶을 이해할 때,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고, 이를 통해 내 삶 안에서 존재하시는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답하며, 그분의 뜻을 내 삶의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의 여정(旅程)은 성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지금의 언어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성경 속 이야기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야기, 예수님에게서 치유와 자유 그리고 해방을 얻은 병자들의 이야기, 창녀와 세리들의 이야기, 심지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이야기 등등이 단순히 예수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내 인생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느님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 주는 장소이자, 신학하기의 시작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입니다.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이사야서 주해』 서문; CCL 73,1ff.)
성경은 믿음에 의해 쓰여졌으며, 동시에 그 믿음을 다시 가르쳐 줍니다. 그러니 믿음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성경을 읽고 알아가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에는 믿음을 얻기 위한 구원의 선포를 담은 말씀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듣거나 읽은 것이 없어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은 말할 것도 당연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인간의 깨달음이나 지혜에서 온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진리가 우리에게 계시된 것입니다. 순명과 겸손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신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그 말씀을 우리 안에 모신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것에 익숙해지면, 하느님에 대한 이해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곧, 하느님을 그저 내 현세의 삶을 축복하시고, 내세의 삶에 영원한 생명을 주실 분으로만 여기는 기복신앙(祈福信仰)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를 참으로 살게 하는 영혼의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나에게 있는 성경을 집어 천천히 읽고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 삶의 바탕이 되는 모든 진리가 성경에 충만히 담겨 있기에, 우리는 성경을 자주 읽고 또 묵상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과 친숙해지고, 말씀에 맛들이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15.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49항)
평화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그리스도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권위로써 말합니다. 모든 폭력의 생각을 떨쳐야 합니다. 갈등과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자아내는 활동, 결정, 증오의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비극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파괴가 아니라 건설을, 분열이 아니라 일치를, 눈물이 아니라 고용과 안전을 제공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성 요한 23세 교황, 1961년 주님 성탄 대축일 담화문)
홀로코스트, 인류의 상처
‘벤허’, ‘왕중왕’,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침략과 전쟁, 그 안타까운 역사 속에서 수많은 무고한 이들이 겪은 고통과 죽음, 홀로코스트(유다인 학살)에 대한 묘사입니다. 현대의 이스라엘과 다르게 성서시대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는 모진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둘째, 영화의 유다인 주인공들은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모든 것을 빼앗겼음에도 극적으로 살아남았다는 겁니다.
2002년 작 영화 ‘피아니스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폴란드 태생 유다인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1943년 폴란드 바르샤바에 살던 그의 가족은 나치에 의해 강제 이주명령과 탄압을 받습니다. 슈필만은 천운으로 죽음의 수용소로 가는 건 면했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하늘나라로 보내야만 했고 강제노동과 무참한 폭력을 당해야 했으며, 비참한 도피 생활을 합니다.
선과 악이 뒤섞인 현실
작품에서 묘사되는 폭력은 무척 참혹합니다. 독일군은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학대하며 심지어 휠체어를 탄 노인을 창밖으로 던져 버립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은 어디 있냐며 울부짖고 어떤 이들은 무력으로 대항해야 한다고 소리칩니다. 슈필만은 그 속에서 목숨을 부지해 갑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도우신 걸까요? 조력자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는 실존 인물인 빌헬름 호젠펠트라는 독일군 고위 장교도 있는데 그는 수많은 유다인을 구했다고 전해집니다.
종전 후 그는 소련군 수용소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했고 슈필만은 그를 구하지 못한 것을 너무나 아쉬워했다 합니다. 호젠펠트는 2009년 홀로코스트 기념관인 야드 바솀에 유다인을 구한 의인으로 등록됩니다. 나치가 만행을 저질렀으나 독일사람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듯, 이처럼 영화에는 선과 악이 뒤섞여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란
자신을 구해 준 호젠펠트에게 슈필만이 묻습니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요?” 호젠펠트가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뜻이겠지요.” 영화는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난 평화를 묘사합니다. 그것은 어떤 평화일까요? 바로 하느님의 평화입니다. 하느님의 평화는 인간이 벌이는 전쟁과 그 속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악순환, 무자비한 복수를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 주며 저주와 증오마저도 치유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세상에는 크고 작은 아픔이 많습니다. 그래서 평화가 늘 절실하며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그 평화는 폭력과 죽음의 한복판에서 사랑과 용서라는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행동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한 우리의 행동이 이웃과 세상을 살립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 사실 모든 사람에게 평화에 대한 기쁜 소식인 복음을 선포하는 일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평화의 복음의 중심에는 십자가의 신비가 깃들어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493항)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15. 일곱째 계명 ① (「가톨릭교회 교리서」 2401~2418항)
도둑이 되지 않으려면 집사가 되어야!
십계명의 일곱째는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입니다. 교회는 재물에 관하여 태초부터 ‘인류의 공동 관리’(2402)로 맡기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는 것일까요? 교회도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2404)를 인정합니다. 사유재산이 존중되지 않으면 도둑질도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남의 것을 상대의 의사를 거슬러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이 도둑질입니다.(2408 참조)
그런데 빵을 훔친 장 발장의 경우는 어떨까요? 그것도 죄일까요? 교리서는 “타인의 재물을 차지하고 사용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 되는 분명한 위급 상황의 경우”는 “절도가 아니다”(2408)라고 규정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타인의 곡식에 손을 댄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죄 없는 이들”(마태 12,7)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사도들은 남의 곡물을 마음대로 취했는데도 죄가 없을까요?
도둑질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봉헌되어야 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우리 첫 조상이 차지하였습니다. 주님은 “땅의 십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 주님에게 바쳐진 거룩한 것이다”(레위 27,30)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말라키서에서 “너희는 나를 약탈하면서 ‘저희가 어떻게 당신을 약탈하였습니까?’ 하고 말한다. 십일조와 예물이 아니냐!”(말라 3,8)라고 꾸짖으십니다. 결국 모든 것을 하느님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가 약탈이고 도둑질이 됩니다.
여기에서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재물 자체는 죄가 없습니다. 죄는 재물 자체가 아니라 재물을 좋아하는 인간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예수님은 ‘약은 집사의 비유’(루카 16,1-15)를 통해 그 해답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약은 집사처럼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라”(루카 16,9)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본래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불의한 재물”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나의 것처럼 사용하기에 의롭지 못한 재물입니다. 종이 주인의 것을 탐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받은 현세의 모든 재물이 하느님의 것임을 믿는 일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것임을 고백하는 이는 사유재산권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 자체로 도둑질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도둑질은 타인의 것을 ‘나의 것’으로 삼는 일인데 자신의 처지가 청지기라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도둑질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니 당연히 어떤 것도 나의 것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또한 하느님 뜻대로 하느님과 형제적 사랑을 위해 사용하면서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2401 참조) 종은 주인의 재물을 주인의 의도대로 사용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곧,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당신의 가난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주님의 너그러우심을 본받아”(2407) 우리의 재물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유익하도록 주의하며 살아야 합니다.”(2405) 결국 하느님과 이웃에게 도둑이 되지 않으려면 자신이 ‘하느님의 관리인’(2404)임을 믿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