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3부 - 노아 방주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 6:13~15,17)
하나님께서 홍수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대의 의인이었던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신 기록이 창세기 6장에 나온다. 전 지구를 덮은 홍수에서 노아의 가족을 구한, 산꼭대기에 지어졌던 방주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의 입에 회자하고 있다. 방주에 관한 모든 것들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
1) 노아 대홍수의 증거물인 방주는 존재하는가?
성경의 많은 기록이 역사적인 사실로 확인된 것과 마찬가지로 아라랏 산(Mt. Ararat)에 방주가 안착 되었다는 기록은 단순한 우화나 일화가 아니며, 방주는 지금까지도 실존하고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방주가 아라랏 산 의 산상에 안착 되었다는 성경의 기록은 기독교 세계에서는 2천 년 가깝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으며, 그보다 몇 세기 이전부터 헤브라이, 아르메니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등을 포함한 문화 지역에서도 인정되고 있다.
성경학자들이나 탐험가들에 의해 오랜 시간 동안 시도된 아라랏 산의 방주에 대한 탐사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보고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종종 그 산에 올라가 방주를 보고 만졌으며 내부에 들어가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체험담과 또 아라랏 산정 부근을 비행 중에 그것을 보았다는 조종사들의 보고들이 흘려지곤 하는 중, 1972년 미국의 지구 자원 인공위성(ERTS) 이 포착한 것이나, 정찰기인 U-2기에 촬영되었다고 하는 사진도 있어, 방주가 아라랏 산상에 존재할 가능성을 가일층 높여 주고 있다.
1. 아라랏 산 - 아라랏 산은 터키와 러시아 경계에 놓여 있다. 아라랏 산의 높이는 17,000피트(5,165m 정도)라고 한다. 터키족은 이 산을 방주의 산(Mountain of the Ark) 혹은 고통의 산(Mountain of Pain) 이라고 부르고, 쿠르드족은 이 산을 오르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재앙이 따르기 때문에 재난의 산(Mountain of Evil) 으로 부르며, 미국인들은 세계의 어머니(The Mother of the World) , 페르시아인들은 노아의 산(Mountain of Noah) 으로 부른다.
창조과학연구소의 존 모리스 박사(Dr. John Morris)는 아라랏 산을 13번에 걸쳐 탐험했으며, 오르기 매우 어려운 산이었다고 설명한다. 암석과 눈사태의 위험, 독뱀과 늑대개가 있으며, 보호를 위한 나무와 물은 없다. 그 산은 빙하로 덮여 있기 때문에, 수증기가 응결하여 매일 오후에 맹렬한 번개를 동반한 뇌우가 발생한다. 아라랏 산에 있는 방주의 정확한 탐사를 위하여는 터키 정부의 협조가 더 필요한 실정이다.
방주 탐험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산 위의 얼음 덩어리들은 강설량이 적은 해에, 그것도 짧은 기간만 녹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은 올라가기가 매우 어렵고, 그 지역은 터키-러시아-이란의 접경 지역으로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위험한 지역이다. 산을 돌아다니는 총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위험성을 더하고 있으며, 지난 수년 동안 탐사를 희망하는 다른 여러 탐사대가, 마지막 순간에 결정을 번복하는 변덕스러운 지방 관청의 허가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
2. 고대와 중세 사람들이 보았던 방주 - 고대와 중세의 역사가들은 아라랏 산의 방주 이야기를 할 때 그들은 그 존재 사실을 일반 상식과 같이 당연하게 취급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누구라도 산에 올라가 볼 수가 있었으며, 때로는 평지에서도 빙하의 눈과 얼음을 배경으로 방주가 새까맣게 보였기 때문이다.
BC 3세기 바빌로니아의 신관(神官)이며 저술가인 베롯소스에 의하면, 방주까지 올라간 사람은 언제나 배의 측면에서 송진을 깎아 내서 귀신을 몰아내는 부적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명한 아르메니아의 왕자로 나중에 프랑스의 수도승이 된 제한 하이슨은 13세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라랏 산의 정상에는 언제나 거대한 검은 물체가 보인다. & 사람들은 그것을 노아의 방주 라고 말들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저명한 탐험가 마르코 폴로(AD 1234~1324)는 그의 여행 도중 아라랏 산을 지나칠 무렵에 그의 저서 『동방견문록』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산봉우리, 만년설로 뒤덮인 이곳에는 노아의 방주가 있다.
3. 영국의 조사위원이 보았던 방주 - 1883년 5월에 지진으로 아라랏 산 일부가 입을 벌리고 목조의 배로 보이는 것이 노출된 것이, 지진의 피해 상황을 관찰하기 위해 온 터키 관리들의 눈에 포착되었다. 관리들은 빙하에 돌출한 거대한 목조 구조물을 발견하였다고 보고하면서, 높이는 12m~15m라고 추정하였는데, 물체의 나머지 부분은 빙하 깊이 묻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길이인가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영국의 조사위원이 포함된 조사대는 내부로 들어가 보았다. 그 일부는 높이 4.6m 구획이 된 칸막이를 한 것같이 보였다. 산중에서 뜻밖에 얼어붙은 배를 본 조사위원회는 노아의 방주를 드디어 발견했다. 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아라랏 산에서 터키의 관리들에게 발견된 물체는 얼마 뒤에 다시 얼음에 덮여 밑으로 자취를 감춰 버렸고, 20세기 과학 문명의 발달에 힘입어 최초로 이 산의 상공을 비행한 조종사에 의해 얼음의 위와 아래에 배 모양의 물체가 사진에 찍히게 될 때까지 1, 2차 세계대전을 겪어야만 했다.
4. 수차례 목격된 방주 - 프랑스의 등산가 훼루난 나바라 는 아라랏 산상의 눈 밑에서 파낸 사람의 손에 의해 다듬어진 흔적이 있는 대들보용 목재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후에 이것을 엄밀한 방사선 탄소측정법(C14)에 의해 측정해 본 결과, BC 5000년이라고 하는 연대 측정이 나왔다. 나바라 이후로 또 다른 탐험대들과 2차대전 후 비약적으로 신장한 첨단 항공 기구에 의해 방주는 수차례나 목격되었다.
2) 90년대 초 미국 백악관에까지 보고된 방주 탐사
인사이트 매거진(Insight Magazine)의 보고에 의하면, 미국 CIA는 백악관까지 보고되었던 노아의 방주 탐색을 가리키는 2종의 새로운 문서를 공개했다. Insight 지와 한팀이었던 우주 촬영팀이 IKONOS 위성의 줌 렌즈를 사용하여 촬영한 사진에는 터키 지역의 북위 39도 42분, 동경 44도 16분에 있는 비정상적인 물체가 찍혔다. 이것이 몇몇 사람들이 노아의 방주라고 말하는 물체의 고해상도의 사진 중에 대중에게 공개되는 첫 번째 모습이었다.
Insight는 의문의 물체가 인공 구조물인지 자연의 바위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아라랏 산의 사진들을 검사하기 위한 한 팀의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고용했었다. 전문가 중 4명은 그것이 인공 구조물이라고 주장하였고, 2명은 바위라고 하였으며, 1명은 증거가 결정적이지 않다고 하였다. 최근에 공개된 CIA의 문서에는 미스터리에 관한 어떠한 입장도 취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탐색 작업에 어느 정도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 되었다.
3) 고해상도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아라랏 산의 비정상적 물체
터키의 아라랏 산 4,600m 고도에 있는 아라랏 산의 비정상적 물체(Ararat anomaly) 가 2007년부터 고해상도의 위성 영상으로 자세히 조사되고 있는 중이다. Satellite Imaging Corporation 의 포쳐 테일러 씨는 이코노스 인공위성 자료로부터 그 장소에 대한 3-D 항공 영상을 만들고 있다고 Live Science에서 보도하였다. 그리고 2008년에 발사된 Geo-Eye I 위성은 픽셀 당 0.4m로 그 장소의 해상도를 두 배 증가시킬 것이다.
4) 노아의 방주에 대한 기록들을 찾아서
노아의 방주를 실제로 봤거나, 가서 본 많은 사람의 목격 증언에 대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거나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원전 700년에, 터키인들은 성스러운 징조로 신성시되는 노아의 배에서 타르를 벗겨 내기 위해서 산 위로 순례 여행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 위험해지자 이러한 관습을 그만두게 되었다.
기원전 300년에, 한 바벨론 제사장은 부적으로 방주 일부분을 사용한 것에 대해 말했다. 상형문자로 써 놓은 것으로부터 판독된 한 이야기는 기원전 30년에 노아의 방주와 그것의 나무 조각들을 본 헤로니무스(Heronimus)에 대해 들려준다. 또한, 기원전 30년에, 헤롯 대왕의 전기 작가였던 다마스쿠스(Damascus)의 니콜라스의 기록도 방주와 그 유물에 대해 들려준다. AD 380년에, 에피포누스(Epiphonus)라고 불리던 한 남자는 방주의 나무를 보여 줬다. AD 1254년에, 하이폰(Hyphon)은 노아의 방주를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가 1269년에 방주를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1829년에, 프랑스인인 프레드릭 패럿 박사(Dr. Fredrich Parrot)는 방주의 성스러운 나무로 만든 아르메니아 십자가를 봤다. 패럿 박사는 암적색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기술했다. 그는 노아의 많은 고대 유물과 심지어 사본(manuscripts)까지 가지고 있었던 수도원을 방문했다. 그런데 1840년 6월에, 거대한 지진으로 수도원과 그 주변 마을이 파괴되자, 터키 정부는 다가올 재앙을 막기 위한 사태 보호대를 세우려고 산 위로 원정대를 보냈다. 한 팀이 빙하 밖으로 돌출한 매우 오래된 배 의 앞부분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고도 약 14,000피트(4,200m)에 있었다. 그들은 그 배를 많은 마구간과 새장을 가진 3층으로 묘사했다. 이 발견은 전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다른 원정대들도 보내졌다.
1883년에, 터키의 위원회는 노아의 방주를 보았다고 발표했다. 그 보고서에는 빙하로부터 튀어나와 있는 매우 짙은 색의 나무로 된 거대한 구조물 을 봤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과학계에서는 이 이야기를 비웃었기 때문에, 다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후속적인 탐험을 하지 않았다.
1902년에, 1937년에서 1947년까지, 러시아에서는 매년 방주의 사진을 촬영하고 스케치를 하도록 탐험대들을 보냈다. 그들은 약 80피트(24m) 되는 앞부분이 노출된 채, 해발 고도 14,000피트에 자리한 방주를 보여 주는 스케치를 가지고 있다. 1952년에, 미국의 파이프라인 기술자인 조지 제퍼슨 그린(George Jefferson Greene)은 헬리콥터로 방주 위를 날아갈 때 6장의 사진을 찍은 것이 남아 있다. 1972년 7월에, 랜드샛(LANDSAT) 위성도 또한 아라랏 산 위에 있는 노아의 방주에 대한 증거를 사진상으로 보여 줬다. <1974년 9월에, 텍사스에서 온 한 탐험대는 15,000피트에 있는 방주 사진을 가지고 돌아갔다. 이 사진들 가운데는 배의 측면에 있는 판자들이 뚜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이것은 지진으로 방주가 부서졌을 때, 위쪽에 남아 있었던 방주 일부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터키 정부는 그 지역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아라랏 산으로의 모든 탐험을 금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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