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평안도 평양 동쪽에 있는 성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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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23:13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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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동쪽에 있는 성천군
『택리지』에 “평양 동쪽은 성천부다. 곧 송양왕국(松讓王國, 고려 초 압록강 비류수 지방에 있던 작은 나라. 송양왕의 딸이 유리왕의 비가 되었다)이었는데, 주몽에게 합병된 지역이며, 고을 관아는 강가에 있다.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부중(府中)에 와서 피난하였다. 광해가 임금이 되자 부사 박엽을 시켜 객관 옆의 강선루(降仙樓)를 크게 수리하였다. 누각이 300여 칸이나 되고 지음새가 굉장하여 8도의 누각 중에 으뜸이다”라고 쓰여 있는 성천은 평양의 북동쪽에 있다.
평양 취타대
북한의 국가기념일이나 경축 행사에 꼭 등장하는 취타대는 화려하고 절도 있는 연주가 압권이다.
성천은 북쪽으로 순천시와 북창군, 동쪽으로 신양군, 남쪽으로 회창군과 평양특별시 강동군, 서쪽으로 평성시와 인접한다. 본래 고구려 초기 5부족 가운데 하나였던 소노부(비류국)와 송양왕국의 옛 서울이었던 성천은 고려 태종 14년에 강덕진이라 불렸고, 조선 태종 15년에야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삼국사기』에는 “땅이 기름지며 산천이 험하고 견고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에는 “물이 깊고 땅이 기름지며,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누에치기에 힘쓴다. 고구려의 옛 도읍으로 고구려의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다”라고 실려 있다. 성천의 진산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성천부의 진산은 부의 동쪽 8리에 위치한 검학산이다. 좌우의 낭떠러지가 검(劒) 같고 학같이 생겼으므로 그렇게 이름 지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 열두 봉우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 같은 흘골산을 사람들은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峯)이라고 부른다. 첫째 봉우리를 벽옥봉(碧玉峯), 둘째 봉우리를 금로봉(金爐峯), 셋째 봉우리를 천주봉(天柱峯), 넷째 봉우리를 몽선봉(夢仙峯), 다섯째 봉우리를 고당봉(高塘峯), 여섯째 봉우리를 양대봉(陽臺峯), 일곱째 봉우리를 신녀봉(神女峯), 여덟째 봉우리를 조운봉(朝雲峯), 아홉째 봉우리를 모우봉(暮雨峯), 열째 봉우리를 생학봉(笙鶴峯), 열한째 봉우리를 자지봉(紫芝峯), 열두째 봉우리를 화주봉(火柱峯)이라고 하였다.
박원형은 그의 시에서 “강 위의 여러 봉우리는 검처럼 뾰족하고, 봉우리 앞의 강물은 쪽을 풀어놓은 듯하네”라고 노래하였다. 『택리지』에도 “강선루 앞에 흘골산 12봉(익주의 무산12봉과 비슷하다 함)이 있으나 돌 빛이 아담하지 못하고, 강이 얕고 빠르며 들판이 또한 비좁아서 평양보다는 훨씬 못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흘골산 12봉우리의 자태는 비류강에 비쳐 지상 선경을 연출한다.
성천의 강선루를 두고 김수령은 “우연히 송양(松讓)을 지나다가 꽃다운 샘에 목욕하고, 머리 말리며 흘골산 앞으로 들어오네. 한 물은 뜰을 따라 물결이 다시 고요한데, 두어 봉우리는 물을 헤치고 들어와 푸르게 잇닿았네. 안개가 갠 산시(山市)의 저물어가는 햇빛에 고을이 맑게 보이고, 비가 내리려는 때에 바람은 강루에 가득하네. 재주 없어 황학루(黃鶴樓)의 글귀를 이루지 못하니, 다만 앵무주(鸚鵡洲)에 풀만 처량하네”라고 노래했으며, 조선 초기의 문신 신숙주 역시 비류강과 무산12봉에 대한 시를 한 편 남겼다.
노래와 춤이 강을 가로질렀는데 지는 해는 붉구나.
풍류와 기개는 제공들의 것이로구나.
뉘 능히 고당부(高唐腑)를 화답하여 이루겠느냐.
운우가 의연하니 무산12봉이네.
비류강에는 고구려의 15대 임금 미천왕에 얽힌 유래가 남아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봉상왕이 그 아우 돌고를 죽였는데, 돌고의 아들 을불이 화를 피하여 집을 나가서 남의 집 하인이 되었다. 여러 신하들이 봉상왕을 폐하고 을불을 맞아들여 왕위에 올리려고 조불, 소우 등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였다. 비류강가에 이르러 찾아보았더니, 한 사람이 그 모습은 비록 여위고 쇠약하나 거동이 보통이 아니므로 소우 등이 나아가서 절하고 말하기를 “지금 국왕이 무도하여 여러 신하가 의논하여 폐하고, 왕손께서 인자하시어 대업을 이을 만하므로 신들을 보내어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을불이 의심하여 말하기를 “나는 야인이오, 왕손이 아니오” 하니, 소우 등이 또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의 왕손에 대한 바람이 매우 간절하오니 의심치 마소서” 하였다. 마침내 을불을 맞이하여 돌아와서 그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미천왕이다.
이곳 성천에 성천객사가 있었다. 출장 나온 관리들과 사신들이 묵던 객사는 1343년에 처음 세운 것으로, 사신을 맞거나 제사를 지내던 동명관(東明館)과 사신들을 위한 연회장으로 쓰던 강선루가 있다. 비류강을 굽어보며 흘골산의 이름난 12봉에 걸맞게 12칸으로 길게 지은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수준 높은 건축 기술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불타고 말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평양 동쪽에 있는 성천군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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