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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시2
상처에 대한 깊은 인식을 보여준 시인은 주변의 작은 것들에 애정을 가지고 관찰을 한다. 소시민의 생활시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작은 감동들이 놓인 시들을 나는 이정록의 시편들에서 수없이 발견할 수 있었다. 첫 시집의 두 번째 시를 보자.
식 올린 지 이 년
삼개월 만에 결혼 패물을 판다.
내 반지와 아내의 알반지 하나는
돈이 되지 않아 남기기로 한다
다행이다 이놈들마저 순금으로 장만했다면
흔적은 간 데 없고 추억만으로 서글플 텐데
외출해도 이제 집걱정 덜 되겠다며 아내는
부재와 평온을 혼돈하는 척, 나를 위로 한다
농협빚 내어 장만해준 패물들
빨간 비단 상자에서 꺼내어 마지막으로 쓰다듬고
양파껍질인 양 신문지에 둘둘 만다
버려야 할 쓰레기처럼 밀쳐놓고 화장을 한다
거울에 비친 허름한 저 사내는 누구인가
월급날이면 짜장면을 먹고 싶다던
그때처럼 화장시간이 길다
동창생을 만나러 나갈 때처럼
오늘의 화장은 서툴러 자꾸 지우곤 한다
김칫거리며 두루마리 화장지를
장식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오는 길
자전거 꽁무니에 걸터앉아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콧노래 부르며 노을이 이쁘단다
금 판 돈 떼어 섭섭해 새로 산
알반지 하나를 쓰다듬으며 아내는
괜히 샀다고 괜히 샀다고
젖은 눈망울을 별빛에 씻는다
오래 한 화장이 지워지면서
아내가 보석달로 떠오른다
<보석달> 전문
잔잔한 감동을 주는 생활 시로서 이정도면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과연 이런 시를 현대적인 일상시로서 읽을 수 있을까? 물론 일상시가 모두 현대 도시 사회를 풍자하거나 어떤 성찰을 보여 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만한 감동으로 시로서의 역할을 성실하게 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만, 나는 이정록 시인의 첫시집을 읽었을 때 어떤 불만을 품었다. <물이야기><집> 등의 시에서도 어떤 성찰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연장 선상에서 그의 시를 파악하게 되었다. 그런 그의 시에서 큰 변화가 없었음에도 나는 세번째 시집에 이르러서는 그런 측면을 불만으로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이런 생활 속의 감동적인 혹은 따뜻한 시각이 이 시인의 개성이라고 인정해 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낫질 지게질도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 비틀거리는
아버지 대신 엄니가 꼴 베어 나를 때, 바지게 위에 참
외 껍질이 섞여온 적이 있었지. 속상키도 해라. 할머
니 몰래, 아버지도 몰래, 너만 믿는다는 장남도 몰래,
이리 잘 익은 노란 참외를 엄니 혼자 드셨구나. 콩을
까든지 말든지, 등 돌린 채 외양간에 풀을 던져주며
훌쩍였지. 송아지야, 그리고 사나흘 내리 설사해대는
어미소야. 너희들은 참외 껍데기라도 새기는데, 왜 나
마냥 눈망울이 축축하니? 지푸라기와 섞음섞음 아껴주
어도 풀 지게는 금방 비는데, 그러면 불쌍한 우리 엄
니, 어깨에 멍 가실 날이 없는데, 화가 뻗치는 대로
뭉턱뭉턱 내려 주었지
그런데, 아니! 이 깊은 바지게 안창에! 엄니는 세
상에서 제일 예쁜 노랑참외를 숨겨놓으셨네. 너무 바
빠서 잊었구나, 앞치마에 손을 훔치며 아버지를 깨우
시네, 뒤꼍 담 너머로 마실 가신 할머니를 부르시네.
꼴깍, 된장독은 오늘따라 더 부풀어오르고, 땡감의 이
마는 노을에 반짝거리네. 엄니가 드신 것은 곯은 거라
하시네. 눈코 문드러진 썩은 거라 하시네. 외양간의
송아지와 어미소는 왜 또 눈망울이 젖어 있지
늦은 퇴근길, 입덧하는 아내를 위하여 과일을 고르
며, 그 옛날의 젊은 엄니를 만나네. 저녁밥을 챙기지
못한 내 바지게 안창에서 송아지 울음 소리 목이 메
네. 나는 내 깊숙한 어딘가에 깜빡, 노랑참외를 숨겨
놓은 적이 있었던가. 송아지 눈망울 같은 방울토마토
들이 붉은 눈으로 쳐다보네
<개똥참외>전문
이런 시를 읽고 나면 형식이 새로운가 어떤가 하는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첫 시집의 해설에서 비평가는 그를 '촌놈'이라고 하고, 두번째 시집에서는 '촌스러워 보이는' '시'라는 표현을 쓰고 있따. 내 생각과 맥이 닿는 부분인 듯하다. 그러나 개똥참외 같은 시에서는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