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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키퍼
골키퍼라는 포지션을 좋아한다는 것은 존 레논, 폴 메카트닉,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비틀즈의 네 멤버 중에서 링고 스타를 좋아하는 것과도 같다.
가장 작은 체구에 쳐진 눈과 커다란 코, 드럼의 특성상 무대의 가장 뒤에서 커다란 드럼들 사이에 가려진 링고 스타. 하지만 그를 좋아한다 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묘한 자랑스러움을 준다. 비틀즈라는 거대한 메이저에서 번외자 인 듯 한 링고 스타에게 시선을 줄주 아는 이들은 자신의 빗나간 취향을 그리고 링고 스타를 찾아낸 자신이 좋은 것이다. 조금은 비뚤어진 혹은 색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로 보는 자신에 대해 은근히 자랑스러워 한다.
기타 스트랩을 어깨에 걸친 존과 폴과 조지의 뒷통수, 눈부신 조명과 무대 아래에서 괴성을 지르는 여자아이들을 바라보았을 링고 스타의 시선과 (그들 자신은 가수를 쫓아다니는 이 여자아이들과의 비교를 가장 수치스러워 하지만) 그들에게 한 치도 뒤지지 않는 소리의 에너지를 내뿜어대는 축구팬들이 가득 찬 경기장에서 골키퍼의 시선은 어쩐지 닮은 점이 많다. 동료들의 등을 바라보며 너른 초록의 피치, 조명과 함성은 언제 그의 등 뒤에서 울려 퍼질 뿐, 90분간의 짧은 시간 동안,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 와서는 않된다.
골키퍼가 자신의 골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상대 공격수와 같은 시선을 갖게 된다는 것은 매우 재미없는 상황이다. 드러머가 등을 돌려 무대의 맨 앞으로 나와 자신의 연주하는 뒷 태를 보여주는 것처럼 민망하기 그지없는 장면이다.
사람들의 공격수의 궤적을 쫓으며 그가 돌진 해 가는 골대를 향하면 다수의 시선은 창이 되어 골네트를 가르고자 한다. 극복해야 될 대상으로 여겨지는 골키퍼라는 존재에게 축구는 달려가는 것이 아닌 달려오는 것. 손을 쓸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포지션이지만, 페널티 박스를 넘어서는 안 되는 가장 속박 받은 존재. 상대가 슈팅을 날릴 때 그들은 자신의 몸을 날린다.
-인터뷰
“이런 인터뷰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편인데, 동영상 같은 거 있잖아요. 멘트 날리는 건 쫌(웃음), 아직까지도 어색해서(웃음) 별로, 썩 좋아하진 않는데, 이런 인터뷰는 편하고 좋은 것 같아요.”
-김창수
“친하죠. 같은 룸메이트가 저는 창수형이예요. 친하게는 지내는데, 말이 별로 없어요. 창수형은.”
-과묵
“아니예요. 저는. 친한 사람한테는 친하게 구는 편이라(웃음,) 처음 좀 사귀귀가 좀 그렇지, 친해지 면은 말이 많아져요.”
-형
“지금 정훈이 형요. 딱! 정훈이 형까지는 형이라고 부르고, 나머지는 선배님.”
-웃음
“긴장하면 자꾸 웃는 편인 거 같아요. 버릇이 그렇게 들어 버렸어요.”
-야유
“저는 안 들리던데요. 제 귀가 안 좋은 건지도 모르겠네요.”
-환호
“그런 건 눈이 가니까, 조금 들리는 편이예요.”
-한일전
“(웃음) 가족들 반응이요.(웃음) 축구를 제대로 못 보셨데요. 계속 채널을 돌리면서 조금씩 조금씩 보셨다고 하더라구요. (웃음) 녹화 한 다음 나중에서야 쭉 보셨다고.”
-퍼플크루
“프로팀에 들어오면서, 처음엔 좀 놀랐어요. 아, 저렇게 열정적으로 하는 서포터들이 있나 해서요. 경기를 많이 보면, 서포터들이 안 오는 팀이 몇몇 있더라구요. (대전도) 항상 많이는 아니지만, 먼 거리의 경기라도 조금씩 들은 오셔 가지구 응원해주시는 거에 대해서는, 제가 평소에 말은 잘 못하지만, 이런 기회에 꼭 얘기해드리고 싶었는데, 정말, 정말 힘나고, 정말 선수가 열심히 뛰게 되는 동기가 아닌가 해요. 너무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양동원, 그는 대전의 팬들이 가져본 가장 어린 선수이며,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장 어린 골키퍼이다. 최은성 선수와는 16년이 차이가 있는 어린 아이가 처음 대전에 왔던 그 해에는 어찌된 일인지 웃는 일도 말하는 일도 볼 수 없어, 그를 걱정하는 이도 있었다. 팀에 대한 적응과 애정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그것은 용인FC라는 천연잔디와 인조잔디에 실내연습장까지 갖추고 있는 유소년 클럽을 나온 그의 유복한 이력에 의한 선입견이기도 했다.
“솔직히 시설 면에서는요. 용인FC가 어느 프로팀의 시설보다도 좋아요. 그렇기 때문에, 거기 있다가 여기와서 다시 생활 적응하는 게 좀 힘들었어요.”
“용인FC에 있을 때, 처음에는 골키퍼를 보러 스카우터가 오니까 저희 코치님께서, 살짝 열심히 하면은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하셨었어요. 그게 대전에서 오는 건지는 몰랐구요. 한 두달 지나고 있다가, 대전에서 다시 보고 싶다고 해서, 그때가 졸업하기 전이었는데, 잠깐 대전에 와서 3개월 동안 운동했어요. 그게 테스트였죠.”
“그 전에는 오히려 체육교사 쪽으로 장래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운동을 일찍 접으려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는데, 그렇게 프로팀에서 연락이 왔어요. 사실 운동을 하면서 몸이 안 좋아져가지고 그만 두려고 했었는데, 주위에서 아무래도 끝까지 해보라고. 여기서 놓치기엔 아쉽지 않은가 생각해서 솔직히 고민도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데 대전에 와서 처음 같이 운동했을 때, 유심히 보면서, 아, 이게 프로구나, 진짜 잘한다. 그때는 은성이 형이랑 승준이 형도 같이 계셨는데, 야, 정말 잘하신다. 진짜 실력차이가 이렇게 나는 구나. 정말 내가 좁은 물에서만 놀았구나. 그때 확고하게 굳혔어요. 이제 프로팀이 아니면 축구화 못 벗겠다고. 부모님께 말씀 드렸어요. 한번 가서 해보자. 축구화 벗을 때까지 해보자. 그렇게 결정하게 됐어요.”
“이제 대전 와서 3년차인데 키는 한 2cm 더 컸어요. 그때 87cm, 86cm에 들어왔는데 지금은 88cm, 89cm쯤 되요. 키도 크고, 기량도 저는 못 느끼겠는데, 주위에서 많이 늘었다고 하고.”
“처음에 왔을 때는 형들하고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나가지고, 형들한테 말 걸기도 참 뭐했거든요. 지금은 이제 그만큼 줄어 가지구, 형들한테 편하게 얘기할 수 있고, 형들도 받아주구 하니까, 아무래도 그런 면에서는 성격도 많이 바뀐 거 같애요.”
“친하게 지내는 형은......? 모르겠어요.(웃음) 저는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선수가 친하다고 받아 줄까 모르겠는데(웃음) 광현이 형하고 많이 친한 편이예요. 광현이 형 방에서 아예 살고 있어요. 광현이 형이 청소를 깨끗이 하니까,(웃음) 그쪽 방에 가서 살면, 제가 청소를 안 해도 되거든요.(웃음)”
프로라는 절대선의 목표가 세워졌다. 강철처럼 제 몸을 단련하고 반응을 키우고, 늙은 올빼미보다도 현명한 시야를 키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을 던지는 훈련의 반복이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선이 고운 아이라 할지라도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비켜갈 수 없는 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엔 허들을 양옆에 세워놓고 매트를 깔았어요. 거기를 뛰어 넘으래요. 거기를 뛰어 넘으면서 그렇게 처음으로 다이빙을 뛰어 봤어요. 중학교 때는 책상을 올려놓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라고. 거기서 다이빙 뜨고 그랬어요. 그래서 특히 어깨나 무릎 같은 곳을 많이 다치죠. 착지를 정확하게 해야하는 데, 못하니까. 떨어질 때 구르는 게 과장되게 보일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자길 보호하려고 구르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도 아직은 다이빙이 경지에 오르지 못해서, 아직은 하는 방법만 알지, 잘하진 못해요.”
“공격수들의 슈팅 같은 것도 훈련으로 커버 할려고 노력을 하고 있어요. 학교 다닐 때 저희는 테니스 공 있잖아요. 테니스공을 라켓으로 바로 앞에서 후려치는 걸 막고 그랬어요.(웃음) 그러면서 하는 거죠. 처음엔 조금 그랬는데요. 하다보면 익숙해져요. 그러다보면 실전에서는 대부분 몸이 먼저 반응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게 될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구요. 다른 거보다두요. 잠자기 전에 1,2십분 씩 이미지 트레이닝 하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아요.”
축구 선수가 되기까지 십 수년의 담금질이 반복된다. 고통과 인내를 극복해야 하는 과정의 끝을 ‘경지’라 하는 어린 선수의 표현이 재밌다 생각 들었다. 경지에 오르기까지 겪어 나가야할 거친 길을 함께 달려주고 끌어주었던 여러 스승들 중에서도 가장 귀한 존재는 부모님이라 이야기 하는 소년은 그의 부모님이 그와 함께 감내하고 있는 인내의 시간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솔직히 유소년 때부터 같이 축구하던 축구들 중에서 고등학교 때 친구들 빼고는 거의 다 그만뒀어요. 지금 프로에 있는 친구는 (정)인환이하고 (백)승민이, 전남에 있는 친구요. 용인FC에 같이 있던 친구들 빼고는 거의 다 그만 뒀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에는 경제적인 부분도 없지 않아 있죠.”
“저는 고등학교 때 축구를 그만 두려고 했었어요. 그때 부모님이 걱정 많이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께서 니가 하려던 건 끝까지 책임져야 되지 않겠냐고 말씀하셔서 계속 하게 됐어요. 저도 (용인FC 비용) 그 돈 못 내서 힘들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150만원이라는 돈이 상당히 큰 돈이잖아요. 그거를 부모님이 저한테 말씀 안 해주셨는데, 우연찮게 들어 가지구, 상당히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도 그런 얘기가 오히려 저한테는 자극제가 되어가지고 훈련을 더 열심히 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쓰러져가는 시골 초가집을 시멘트 2층집으로 고쳐 올린 인생역전의 어떤 축구 선수의 이야기에 비하면 소공녀나 다름없는 귀하게 자란 티가 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삶에 각자의 마음에 상처의 깊이를 서로 견주어 길고 짧음을 비할 수가 있을까.
더군다나 이이는 Hedgehog's Dilemma, 쉽게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 해주는 이야기에 의식하지 않고 대뜸 다가설 수가 없다. 이쪽에서 한발을 때 다가가면 웃으며 뒷걸음질치고 만다. ‘다가오지 마세요. 나에겐 커다란 가시가 있어요. 당신이 상처 입을 지도 몰라요.’ 그런 그에게서 자신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보여 달라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그나마를 보여준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지 않는가 싶었지만, 이 잘 웃는 고슴도치씨에게 그만 사악한 질문이 던져졌다.
Attack One.
- 어린 나이에 축구를 하다보면, 주변에서는 자신의 의지보다 부모님의 욕심으로 나가고 있다는 시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부모님이 시켜서 하는 거 아니냐구요? 음...... 당연히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게 시작하지 않나요? 거의 다 대부분 그렇게 시작하지만, 하다보면 애착을 갖게 되고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이것도 하나의 직업이잖아요. 저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직업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하고 더 성실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남들보다 더 축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직업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게 또 프로라고 생각해요. 전 걸어온 길이 너무 길기 때문에 이젠 되돌릴 수 없어요. (웃음)”
“저도 축구 즐겨요. (웃음) 모든 것을 즐길려고 해야죠. 또 뭐 즐기지 않으면 할 이유가 없잖아요. 형들하고 운동한다는 게, 축구화를 아직도 신고 있다는 게, 그게 제일 행복하고 즐거운 것 같아요.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너무 잘 아니까. 운동장 나간다는 게 너무 좋아요.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고맙게 생각하죠.”
Attack Two.
- 골기퍼는 카리스마가 필요한데 양동원 선수는 외모가 고운 편이잖아요.
“(웃음) 뭐 모르겠어요. 험악하게 하고 막 그러라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저는 그런 걸 원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저는 칠라베르트나 칸을 안 좋아해서 (웃음)....... 부폰이나 카시아스 경우도 위치가 골키퍼다 보니까, 일단 지시하는 게 많아서 인상을 쓰고 그렇게 보이는 거 같아요.”
“공격수를 주눅 들게 하거나 현혹시키기 위해서 액션을 과격하게 하는 건 좋은 거라 생각해요. 듀덱의 춤 같은 건 그런 걸로 해서 축구가 발전할 수 있다면, 뭐 하라면 해야죠. 저도.(웃음) 해야죠. 하지만, 경기력 외적인 걸로 이기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어요.”
“저는 과장된 몸동작 보다는 90분 내내 혹은 100분 120분 동안 계속 안정적으로 필드들 한테, 다른 뛰는 사람들한테, 안정감을 줘야 경기를 더 좋게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개인적으로는 자주 그렇게 할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골키퍼로써 팀에 대한 장악력, 카리스마 같은 게 포함이 되는데, 저는 많이 키워야 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이제 시작하는 단계니까요. 앞으로 많이 배우겠죠.”
“저는 김용대 선수 좋아해요. 제 우상이 용대형이예요. 번호도 제가 좋아했던 용대형이 18번 달고 대표팀을 뛴 적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18번 달고 싶었어요.”
Attack Three.
-성남전에 갔을 때 김용대 선수 만나셨지 않나요?
"예."
쑥스러운 듯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에 맞춰 함께 웃으면서도
- 개인적으로 인사라도 나누지 그러셨어요.
“아이, 그런건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성남 전에서 게임하는 건 봤어요.”
낭창낭창한 팔다리에 순한 인상으로 쉽게 휘어질 듯 보여도, 본인의 말마따나 고집이 엿보인다. 돌려 말해도 말의 본위를 바로 알아듣고, 직설적인 답변이 돌아온다. 확고한 주관에 확고한 취향, 또래들보다도 일찍 ‘직업’이라는 것을 갖게 된 그에게 축구는 유희와 의무의 중간지대다.
아스날을 좋아하며, 아스날이 하이버리에서 마지막 경기가 치러지던 날엔 하이버리에 안녕을 고했던 그였지만, 2부리그로 강등된 유벤투스에 남은 부폰에 대한 팬들의 낭만적인 해석에는 절대 비위를 맞취기 위해서라도 동의하는 법이 없다. ‘안녕 하이버리.’ 라 말해주던 소년과 부폰의 천문학적인 몸값이 그의 이적을 방해한 것이라는 현실적인 해석을 접지 않던 냉정한 분석가는 한 사람이었다.
축구팬들은 그들의 팀에 소속된 선수들에게도 자신의 팀의 팬이기를 바란다. 보스만 룰 따위는 어찌되도 상관없으니 지금 바로 리버풀과 재계약을 하고 싶다 서슴없이 말하는 리버풀의 제이미 캐러거와 같이 팬들이 가장 갈망하는 소망중의 하나인, 팀을 위해 달릴 수 있다는 소원을 이뤄낸 이들이 자신의 팀의 선수이길 바란다. 그리만 된다면 팬들은 그들을 존경해마지 않을 수 없다는 절대적으로 정당한 이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스날과 리버풀, 레알 마드리드의 우승을 기원해주는 그이지만,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할 게임의 수가 많아질수록 생각은 달라질 것이다. 그의 생각의 방향이 어찌될지는 알수 없지만, 대전시티즌 11명의 하나가 되어 양동원 선수가 처음 풀타임을 뛴 경기는 광주상무를 상대로 한 원정이었다. 양동원 선수 자신 뿐만아니라, 그의 동료들과 대전의 팬들이 모두 그가 대전의 골문을 지켜줄 거라는 마음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 치러진 첫 경기였다.
“사실 저희가 어려운 경기를 했었어요. 왜냐면은 거긴(광주) 휴가가 걸려 있었어요."
-오! 정말요?(웃음)
일상적이지 못한 광주상무만의 특수한 포상이야기에 새삼 모두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저흰 그냥 첫 경기라 솔직히... 처음에 나갈 때 상대 편에도 아는 형들이 와서 말씀하시잖아요. 그 얘기 하면서 우리 휴가 걸렸으니까, 죽을 각오 하라고. (웃음) 진짜 돈보다 더 무서운 게 휴가잖아요. 그날 (대전)형들이 너무 잘 뛰어줘 가지고 편하게 했어요.”
“광주전 때 처음 출장하는 형들도 많았지만, 서로 별 얘긴 안 나눴어요. 잘 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보여줄 수 있게 열심히 뛰자고, 다만 재훈이 형이 저한테는 좋은 말을 많이 해주셨어요. 경기 전날에도 잠깐 미팅하면서 얘기해주고, 경기 당일 날 또 잠깐 미팅했는데, 그날 우리 팀은 작은 선수들이 많았었잖아요. ‘세트 플레이에서 특히 선수들 위치를 잘 잡아야 한다.’ 그런 얘길 많이 해주셨어요. 저한테.”
유재훈 선수의 조언을 손꼽아 주는 양동원 선수를 보며, 양동원 선수에게 조언을 해주는 유재훈 선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팀이란 무엇인지, 한 팀이란 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팀이라는 말이 지닌 테두리가 어렴풋하게 다가왔다. 남들은 경쟁이라 생각하는 두 사람.
“경쟁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게? 모르겠어요. 남들은 경쟁이라고 하는데, 경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없고, 부담스러운 것도 없고, 그냥 있는 그대로, 감독님이 포지션 짜주고, 명단 짜주셨을 때 저희가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 하는 게, 그게 중요한 거지 뭐, 내가 저 선수를 꼭 이겨야 되겠다, 어떻게 해야 되겠다, 그런 맘을 먹으면 부상이라던지, 자만심에 빠진다던지, 그래요.”
“그런 얘길 많이 들었거든요. 자신의 위치가 어디 던지 그 위치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 가는 게 중요하다고. 다른 사람들은 경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경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도 솔직히 프로 오기 전에는 굉장히 욕심 많았거든요. 프로 말고 고등학교 졸업하면 외국도 가고 싶고 욕심이 많았었는데, 그때마다 항상 다쳤어요. 다쳐가지고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들이 전부가 되버리는 거예요. 그래가지구 그때부터 항상 마인드 컨트롤 하고 주위에서 여러 얘기 듣고 하니까, 그때부터 욕심을 안 갖게 됐어요. 욕심 없이, 다치지 말고 훈련에나 집중을 하자, 하니까, 3학년 때부터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어요. 그전에 1, 2학년 때나 중학교 때도 계속 다쳐서 운동을 계속 해본 적이 없었어요.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예요.”
“비슷한 나이 대에 주전으로 출전하는 골키퍼들이 몇몇 있는데, 어차피, 또 다른 새로운 사람은 계속 나오게 되어 있고, 그게 당연한 거고,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보다는 위에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쫓아가는 게 재밌는 거죠. 제가 또 위에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고, 올 해 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면 그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덤덤하다. 아니 무덤덤하다. 상대팀 팬들의 야유는 관심이 없어 들리지 않는다는 소년의 외모는 그런 말들을 늘어놓기에는 너무 섬세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제는 경기장에 들어서면 긴장이 안 되서 걱정이라는 너스레까지 보여주는 이 아이가 처음 대전에 왔던 날은 바람이 차가운 가을이었다. 알록달록한 가을 단풍에 둘러싸인 대전월드컵 보조경기장에 사선으로 내리쬐는 하얀 햇살은 눈도 가슴도 서늘하게 하는 가을의 편린이었다. 그로부터 3년.
“매일 매일 진짜 3년동안 있으면서 은성이 형은 하루라도 조금씩은 좋은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게 저뿐만 아니라, 재훈이 형한테도 그렇게 해주셨어요. 순간 상황이 일어나면은 이간 어떻게 하느냐고 다시 되물으시면서, 같이 의견을 많이 나누면서 말씀을 많이 해주셨거든요.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냐 이런 식으로, 서로 얘기하면서, 뭐라고 해야하나? 그때부터 기량이 많이 늘었다고 해야되나?”
“그리고 제제 코치가 아니었으면 지금에 (게임을 뛰고 있는) 저는 있기가 힘들었을 거예요. 저뿐만 아니라, 형들도 다들. 항상 운동하면서 옆에서 조언을 많이 해줘요. 프로그램도 각자의 장단점에 따라서 프로그램을 맞춰 주구, 다른 형들도 느끼는지 모르겠지만은 저는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느껴요.”
“저는 맨날 제제코치한테 지적 받아요.(웃음) 맨날 욕먹어요. 한국말로도 하고, 브라질 말로도 하고. (웃음) 3년동안 맨날 맨날 욕만 먹었어요. 하지만 여태까지 축구하면서 여러분의 골기퍼 코치를 경험해 봤지만, 그중에서 제제코치가 제일인 것 같아요. 저도 (제제코치) 칭찬 많이 하고 싶은데, 더 좋은 말이 생각이 않나서. (웃음)”
양동원. 21세. 대전시티즌 선수로써 3년차. 축구 선수로써의 삶이란 길지 않기에 그들을 바라보는 팬들의 손에는 스톱워치가 쥐어져있다. 매년 매번 그들의 나이를 체크하고, 성장의 높이를 체크한다. 그가 목화솜 마냥 뽀얀 얼굴로 대전을 찾았을 때 그의 나이는 18세였다.
팬들의 손에 쥐어진 스톱워치와 달리 골기퍼라는 포지션은 눈금자를 들이대며, 얼마만큼 발전했는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위치가 아니었다. 꽃의 이름이 바뀌는 계절이 와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바위를 보는 듯, 너그럽지 못한 사람의 눈엔 보이지 않는 변화였다.
형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여린 어깨가 언제쯤이 되어야 단단히 여물어 갈지 걱정을 쌓던 어린 뒷태가 미동도 없이 최은성 선수 쪽만을 바라보았던 대구전.
“은성이 형 쓰러지셨을 때, 걱정이 앞섰죠. 평소 진짜 아프셔도 왠만해서는 90분 다 채우고 나오시는 그런 스타일이시잖아요. 근데 계속 못 일어 나시더라구요. 왜 그러지? 왜 그러지? 하는데 갑자기 교체 사인이 들어왔어요.”
최은성 선수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급박하게 출전해야 했던 대구전을 무실점으로 훌륭히 소화해냈고, 경기를 마친 후 돌아서는 그에게 퍼플크루는 이름을 불러주었다.
“뜻밖이었어요. 저는 제 이름이 그렇게 불릴 줄은 몰라가지고. 그것도 아무 생각 안하고 있다가, 현규형이 ‘야, 뒤에 한번 쳐다봐, 인사하고 가.’ 해서 그때서야 제 이름인 줄 알아들었어요. 그때 기분은 좋았죠. 저를 그렇게 생각 해주신다는 거에 너무 감사드리고.”
<굳은 살이 배겨야 할 자리에 아직도 껍질이 벗겨지고 여린 살이 도로 오른다.
앞으로도 수없이 껍질을 벗기고 벗겨내야 한다.>
아이가 웃는다. 말을 한다. 꼿꼿이 세워 접근을 막던 가시들은 이제 한쪽 방향으로 기울여 조금은 누그러트려 놓으며 그렇게 아이는 어른이 되어 간다. 그렇게 매년,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새하얀 목화 솜같던 사람이 햇볕에 그을려 대지의 색깔에 가까워져 가면, 부정한 것은 숨을 구석이 없어보이던 낭창낭창한 그의 뒷태에도 격이 세워질 것이다.
<골기퍼. 무언가를 지켜낼 수 있다는 남자의 生.>
그리고 언젠가는 최은성 선수처럼 두 어깨만으로도 각이 나오는 날이 오겠지만, 양동원 선수에게서는 스톱워치를 일시 정지 시켜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며, 데뷔전이 언제일까 기대 하던 그때의 모습이 각인되어져 있다. 기억 속에 사람이 들어가 사는 방법이 그러하다. 차곡차곡 쌓아 놓인 기억들을 따라 손끝을 더듬어 보면 그날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보조구장에 가을이 되면 바람과 햇살 속에는 언제나 웃지도 말하지도 않던 수줍고 서툰 18세 양동원에서 +3. 그렇게 2007년 우리는 그의 3년을 기다린 리그 데뷔전을 보았다.
※ 인터뷰 진행을 맞아주신 재즐양과 인터뷰에 응해주신 양동원 선수께 감사드립니다.
※
- ¡Amigo, Vamos correr junto! 는 친구! 우리함께 달리자! 라는 뜻으로 같은 포지션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두 선수에 대한 조인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 될 예정입니다.
제 글은 아니지만 먼 옛날 이 인터뷰를 읽고 간직해뒀다가 우연히 외장하드에서 다시 발견하게 되어 올려봅니다. 이때는 이 어린 후보 골키퍼 양동원이 수원의 골키퍼가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었죠. 선수들의 옛날 인터뷰를 읽고 있으면 지금 모습과 비교가 되어서 즐거울 때가 많네요.
첫댓글 와...진짜좋네요이런글...ㅎㅎ 고맙습니다ㅎ
알사드전 때 그 모습도...... 외모에 비해 파이팅 넘치는.......
실력도 서브 이상 되는 것 같고..... 경험치로 안정감만 키우면 될 듯!
김용댜가 성남...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