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경 / 서숙희
손거울을 보다가 그만 떨어뜨렸다
유리와 수은의 얇은 동거가 끝났다
파경은 그렇게 왔다
실수처럼 운명처럼
내 얼굴이 깨졌다
조각조각 웃는다
파안破顔과 대소大笑는 늘 붙어있어 왔지만
깨어진 거울 속에선
대소 없는 파안만 있다
최후는 쓸쓸할 뿐 슬프지는 않는 것
화장을 지우듯 기억을 지워내고
최선을 다한 파경은
호수처럼 고요하다
저녁의 두부 / 서숙희
두부를 만지는 두부 같은 저녁은
적당하게 무르고 적당하게 단단하다
꾹 다문, 입이 몸이고 몸이 입인 흰 은유
으깨져 닫혀버린 축축한 기억들
경계도 격정도 고요히 순장되어
창백한 무덤으로 앉은 한 덩이 직육면체
잔뼈처럼 가지런한 알전구 불빛 아래
표정 없이 저무는 식물성 적막 속으로
수척한 자폐의 저녁이 허기처럼 고인다
다시 그 섬에서 / 서숙희
사람이 온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라는데*
사람이 가는 건 왜 사소한 일일까요
사람이, 한 사람이 가는 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냥 덜컥 던져주고 가버린 섬에서는
여전히 꿩이 울고
고추잠자리 날으는데
오름은 돌아앉아서
빈 등만 보이는데
* 정현종의 시 '방문객'에서
ㅡ 시집 『빈』 작가 2024
카페 게시글
시조 감상
파경/ 저녁의 두부/ 다시 그 섬에서 // 서숙희
정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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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3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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