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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인이란 것에대해 자세히 알려줘."
푸른색 머리칼을 지닌 파란눈의 소녀가 빗물에 젖어가는 자신의 온몸을 신경쓰지도 않고서 물었다.
소나기 탓에 주변의 색깔이 칙칙해서인지는 몰라도 질문을 마친후에 앙다문 그녀의 입술은 척보기에도 여리고 부드러워 보이는 질감의 분홍색이다.
비가 차다. 태화는 소녀의 질문에 답해주기 전에 우선 손을 뻗었다.
"이 손을 잡으면 말해줄거야?"
태화는 이아에게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잠시 굳었으나 이내 좀더 가까이 그녀를 향해 뻗었다.
"그래. 언젠간 자.세.히~~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이런 비오는대서 하기엔 좀 긴얘기일지도."
"응. 그럼 부실로 돌아가자. 아. 그리고 너가 파놓은 풀밭의 흙부터 원상복귀 해야되."
"아..그렇지 참. 한 서너발 쏜거같은데..이걸 어쩌냐."
턱.
"어쩌긴 어째. 말그대로 원상복귀 해놔야지."
"본부대로 합지요.."
이아는 조금은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흑발소년의 손아귀를 꼭 잡았다.
숨겨져왔던 그 세계의 이야기가 자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때 그녀는 알지 못했다.
툭툭..
"으으.. 역시 좀 허세부린 걸지도.."
이아는 욕실에 배치돼있는 단 세장뿐인 기본타월 중 한장을 대범하게도 몸 가리게로 쓰고 또 다른 한장으로 머리카락을 닦고있었다.
태화의 공력을 이용해서 파헤쳐진 흙들을 원위치 시키고 부실로 돌아온 이아는 즉시 욕실로 가서 샤워를했다.
마땅히 갈아입을 만한 옷을 가져오지 않았기때문에 타월한장 걸치고있는 상황이 된 것.
부실 세탁기에 들어간 교복이 다 세탁되고 마를때까지 어딜 나갈수도 없는노릇이니 한동안은 부실에 있어야 할것이다.
이아는 타월한장 걸치고있음에도 의외로 별로 부끄러워 하거나 하진 않았다.
이런면에선 또 대범하달까, 무신경하달까. 태화를 믿는것인지 태화가 그정도로 얕보이고 있는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아는 여전히 머리카락을 닦는데 여념했다.
안타깝게도 드라이기가 없기때문에 그녀의 푸른색 모발은 어느정도 손상될수도 있다.
태화는 창가쪽에 서서 느긋하게 비가 내리는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비록 빈약한- 이라기 보단 좋은 말을 쓰자면- 몸매 전체로 고른 지방량을 유지하는 균형잡힌 몸이긴 했으나 그래도 여고생이 알몸에 타월한장 걸치고 머리카락을 닦는 장면을 보는것만으로도 남자에겐 꽤 자극적일수 있는데, 아예 같은 공간에서 그런 상황에 놓여있음에도 저러는걸 보니 역시 현경은 현경인가 보다.
'저 빈약한 몸매가 미국혼혈 소녀의 것이라니..'
"근데 태화는 어째서 하나도 젖지 않은거야?"
그러나 태화도 남자는 남자인지라 영 아무런 느낌이 없는건 아닌듯, 그는 돌아보지 않고서 말했다.
"얇은 기를 신체와 옷의 표면에 둘러서 빗방울을 차단한거야."
"와..그런 놀라운 기술이. 난 이렇게 흠뻑젖어서 고생인데.. 불공평해."
이아는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그러게 그냥 물어보면 될걸. 물론 그랬다면 내가 제대로 말해줄리가 없지만.. 역시 넌 평소의 성격과는 달리 의외로 대범한면이 있는거 같에."
"이런거?"
스륵.
이아는 사뿐사뿐 걸어가서 태화의 등을 껴안았다.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물기와 땀이 태화의 교복 등뒤의 섬유에 스며들었다.
본의아니게 수건한장 걸친 여자아이에게 백허그 당한 태화.
"어이.."
놀아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건지 오히려 이런면에선 면역이 있는건지 예상과는 달리 태화는 무미한 반응을 보였다.
이아는 괜히 창피해져서 손을 풀고서 태화를 밀쳤다.
"이,이럴땐 딴지를 걸어주는게 예의아냐? 물묻히기 장난! 중학교때 친구가 비에 흠뻑젖은 옷을 입고서 껴안았는데~.. 이거 의외로 짜증지수가 높아지는거라구?"
"하하..참 짜증난다. 그나저나 무인에 대해 알려달라며."
태화는 베란다 창문에 양손을 데고서 어서 비켜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무리 태화라도 맨살에 손을대기엔 좀 꺼려졌기때문이다.
평소보다 빨리찾아온 어두운 하늘덕분에 조명아래서 비춰지는 유달리 하얀 피부는 3초이상 쳐다보면 위험했다.
벌써 저녁 8시가 넘었다.
바깥의 어둠을 밝혀주는것은 학생회동의 창문에서 나오는 빗물에 희석된 불빛들 뿐이었다.
태화는 부부장의 권한으로 오늘 저녁 10시까지 부실의 사용허가를 받아내었다.
여학생과 함께라는 이야기는 당연히 꺼내지 않았다.
"으씨..등이 축축해. 너 내가 현자급 자제력을 가진 남자란걸 다행으로 생각하라구."
"그러신가요~ 아닌척 했지만 꽤 신경쓰였구나?"
이아는 냉장고에서 홍차가 담긴 주스병을 꺼내와 소파앞 탁자에 올리고서 소파에 몸을 파뭍으며 말했다.
"농담따먹기나 하려고 이시간까지 남은게 아닐텐데."
그나저나 신경쓰이게 해서 어쩌자는건지. 그정도로 헤픈 얘는 아니 라고 생각했건만.
오늘따라 학교에 있을때부터 그녀답지않게 기운이 없고 산만해보이긴 했다.
"그렇지..왠지 긴장했나봐. 그러잖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
"분명히 존재했던 소실된 역사. 소수만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지..나도 이런 얘길 너한테 해도되는지 모르겠다. 왜냐면 뭐랄까 그게좀..정부의 뒤쪽과 연결되있는거 같아."
"꿀꺽."
"하지만 걱정하지마. 내가 반드시 널 지킬테니까."
"....믿어."
그녀는 이미 태화의 힘중 일부를 본적이 있다.
나직한 음성이 태화의 고막을 울렸다.
"자~ 약속. 내가 반드시 널 지켜준다는 약속이야. 좀 유치하긴 하지만 크큿."
태화는 약지 손가락을 내밀었다.
"응."
긴말하지않는 스타일의 이아는 여전히 작지만 전과는 다른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하며 약지손가락을 걸었다.
".....이러이러해서. 이 학교까지 들어오게 된거야."
"헤에...진짜 신비한 능력이네. 사극에서 칼을 휘두르는 사람같은거구나? 근데 태화가 가주라니. 뭔가 안어울려~"
태화의 장황한 이야기를 모두 듣고난 이아는 태화가 꺼내서 보여준 천주일검을 가지고 놀고있었다.
그녀의 키만한 장검이지만 워낙 가볍기도 하고, 여자가 보기에도 예쁜검이니까.
"하하.. 이미지로 보자면 그리 생각하는게 간단하지."
"근데 가주라면 돈 많은거 아니야? 맨날 돈없다고 타령을 하더니.."
휙휙.
"저기 이아야! 그거 진검이라구.. 막휘두르진 마. 그런 시골집에 돈될게 뭐있다고..정의통총회 녀석들에게 판다면 후하게 쳐줄만한 비공서가 몇개있지만..그런건 돈으로 거래하지 않는게 정석이야."
"그렇구나. 근데 나도 무공을 수련하면 막 기를 뿜어내거나 할수있을까?"
이아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흔들면서 기대했다.
"그럴수있지. 하지만 초능력자는 신체의 구조가 우리들과 다른부분이 있는것 같아."
"음? 예전에는 그런얘기가 있었지만.. 학계에서 알려진바에 의하면 비능력자와 초능력자의 차이점은 DNA와 뇌구조뿐이야."
"저번 서울타워사건때 내가 너에게 기를 주입했을때 네 능력이 강해졌어. 분명 무슨 연관이 있을거같아. 아마 우리들이 기라고 부르는것이 능력자에게 전이되면서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 거겠지."
"그럼 지금 당장 해보자."
이아는 여전히 천주일검을 손에서 놓지않은체로 태화에게 등을 보였다.
"뭘 어쩌라고?"
어깨죽지위로 살색의 뽀얀피부가 그대로 드러나있는 상태였지만 뭐 어쩌랴.
건강한 여자아이라는 증명이기도 하니까.
"기운이라는거. 다시한번 나한테 넣어줘."
커다란 돌덩이나 산봉오리를 일검에 자른다던가, 물위로 뛰어다니는 모습을 뽐내고 싶었던 태화는 김이 셌다.
"사심가득한 주문이로군."
"헤헤."
태화는 어깨죽지 사이에 있는 신주혈에서 살짝 떨어진곳에 손바닥을 대었다.
"이제 기를 주입한다. 넌 아예 그릇이 없으니까 내공이 쌓이지는 않을거야."
태화는 자신이 익힌 심법중 이아의 신성력과 가장 잘맞는 기운인 단천심법(旦泉心法)을 베이스로한 기운을 흘려보냈다.
"느낌이 어때?"
"오..오오오오오오오오.!!! 우와! 이렇게 밀도높게 능력을 구현해본건 그때이후로 처음이야..와!"
이아는 그녀답지않게 큰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그도 그럴것이 현대의 초능력 학습법을 훌쩍뛰어넘는 도핑법이기 때문이다.
부작용없는 도핑만큼 좋은것도 없지 않은가.
구체형태의 신성력이 커질대로커져 20평 남짓되는 방안전체를 정화시키고있기 때문이다.
이거 완전 살균소독이 따로필요없을 정도였다.
태화본인도 그 금빛속에 들어와있었는데, 온몸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이아가 능력의 구현을 거두었을때, 방안의 물체들은 약한 따듯하게 달궈져 있었다.
"오...~ 진짜 이런힘이 세상에 나온나면 혁신이 아니라 혁명적이라고 불러야 겠네."
"하지만 무공을 배우지 않은 사람에게 기를 주입시켜봐야 아무런 도움도 안돼. 나처럼 타기대나이(他氣代我以)의 수법을 쓸수있는 무인이 몇남아있지도 않고..."
"타기대나?"
"시전자가 타인의 기운을 대신해주는 상승(上乘)의 수법이야. 단순히 타인에게 기를 주입하는 격체전공(隔體傳功)과는 차원이 다른 수법이지. 아마도 능력자의 '근본'에 접근할수 있어야지만 이 방법이 통하는거 같아.."
"초능력자들의 '근본'이라.. 그런데 태화."
태화 본인은 몰랐지만 능력자에대한 연구중 지금 가장 심도있게 연구되고있는것이 바로 능력자의 본질에 대해서다.
인류 역사를 완전히 바꾼,판도를 뒤엎은 확률적 '행운'이 그저 우연에 의존해서 나타난것에대해 학자들은 여전히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응?"
"검을 수련하는 능력자들이라면 서울에도 있어."
"검을 수련하는 능력자들?"
"응. 흰색셔츠위에 하늘거리는 검은색 상의에 짙은청색 치마,바지를 입고서 기다란 칼 하나씩 차고 등교하는 왠지 무서운 얘들이 다니는곳이야. 소더 라고 불리는 전투 능력자를 양성하는 요란(曜蘭)검술학교!"
초능력을 이용해서 살인술을 가르키는 학교라는 누명이 항상 따르는 요란고등학교는 4년제 특수목적 고등학교로 많은 엘리트를 배출한 학교로 유명하다.
검을 잡는다는것은 몸을 단련하고, 마음을 수양하며, 그외의 것들을 다 수련하고 나서야 겨우 한번 잡아보는 것이기 때문에 엘리트가 배출되지 않을수가 없긴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소더라는 군사력이라는 측면에서의 엘리트들만은 아니다. 사실 재학생들은 요란고등학교에서만 교육되는 능력을 이용한 다양한 잡기술에 더 관심이 많다.
정의의 가호가 항상 그들의 위에서 비춰지게 될 것이긴 하나 굳이 군인 혹은 AES에 소속 되거나 전투능력자가 되어서 사람죽이는 일을 하고싶은 사람은 별로없으니 말이다.
물론 졸업할때 즈음이면 학생들은 대부분 검도학원 관장정도의 실력은 기본적으로 갖추게 된다.
서울에서 '세력'으로치자면 1,2위 권을 다투는 최상위권에 랭크된 학교다.
"와..그런데도 있구나."
"응. 걔들도 태화 네가 말한 검술이란걸 배워. 심법이란 것도."
"검술이야 검술학교니까 당연히 배우는거지만..심법이라고? 으흠. 근데 너 옷은 대체 언제입을거냐."
"이제 슬슬 세탁다 된거같긴한데..신경쓰여?"
이아는 자신의 몸과 태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 그 빈약한 몸매.."
"나보고 어쩌라고? 더이상 자라지 않는걸. 씨이..."
이아는 잡고있던 천주일검을 태화에게 들이밀었다.
아무리 태화라도 내력을 주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검정도되는 날에 베이면 아프다.
"아하, 미안미안..어쨋든 그런 학교라면 한번 가보고 싶네."
"몰라. 태화까지 그렇게 말할줄이야. 실망이야. 흥."
소심함에 억눌려 보여주지 않았던 이아의 본질은 귀찮은 부분이 대부분으로 차있는 듯 했다.
아 물론 태화입장에서. 그녀로썬 콤플렉스중 하나다.
언제부터 자신이 그런기대를 걸만한 남자였는지 모르겠지만 인신공격을 하게된 입장인 태화는 말을 돌릴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내가 한 이야기는 그 누구한테도 하면안돼. 설사 가족이라도 말이야. 어떤 물체에도 기록하지말고, 딱. 그 머리안에서만 가지고 있어."
"알겠어 알겠어. 그치만 사이코 메트러라면 기억을 읽힐수도 있는데?"
"너같이 나라에 봉사하는 일 사람이 그럴일이 뭐있겠냐. 혹시 그런일이 발생한다면.. 협상아니면 전쟁 둘중하나지 뭐."
"역시.. 나 위험한 이야기를 들어버린걸까.. 확실히 재미는 있었지만."
소파에 얹인 그녀의 손은 더욱 파뭍혀갔다.
"풀죽을 필욘 없어. 말했다시피 넌 내가 지켜준다고 했잖아."
"...헤. 나도 딱히 진지하게 내 목숨걱정같은건 할생각이 없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사뭇 진지함이 베여있었다.
띵띵띵-
세탁기의 삼박자 멜로디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