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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혼란>
- 투시노의 도적. 두번째 가짜 드미트리 -
1610년 12월. 투시노의 도적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혼란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 러시아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코사크족과 도적들이 날뛰고, 도시들과 귀족들은 어디에 줄을 대야 할 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이 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모스크바로 사절단을 보냈다. 이들은 모스크바에서 폴란드인들이 정교회를 모욕하면서 온갖 행패를 부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총대주교 게르모겐을 알현한 자리에서 게르모겐에게서 반폴란드 봉기를 촉구하는 서한을 받았다. 니즈니 노브고로드는 이 사실을 사방에 널리 알렸고, 곧 대규모 반폴란드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 "모든 러시아인들이여. 단결하라!" -
이 반폴란드 연합군의 수장은 랴푸노프 형제 중 한 명이었던 프로코피 랴푸노프가 맡았다. 1611년 초엽에 결성된 이 군대를 1차 국민군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순식간에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고, 모스크바를 포위하였다. 당시 국민군은 어림잡아 수만명에 이르렀고,폴란드 군대는 3천명밖에 되지 않았기에 폴란드인들은 이제 곧 제압될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폴란드인들은 크렘린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농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1차 국민군은 본질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체였다. 이 안에는 탈주 농노 및 홀로프, 코사크족, 귀족, 군인, 관리, 상인 등등 온갖 계층과 세력들이 다 가담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가짜 드미트리 2세의 추종자들도 있었다. 당연히 이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가장 큰 문제는 혼란을 틈타 코사크족에게 도주해온 농민들 및 홀로프들에 대한 처리 문제였다.
아직까지는 이들을 그냥 코사크족으로 처리하고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게 원칙이었지만, 귀족들과 관리들은 이게 불만이었다. 본질적으로 귀족 출신이었던 랴푸노프도 마찬가지 생각이었고, 이들은 코사크족 수장들을 설득하여 6월 말엽에 이들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합의안을 도출해내었다.
- "뭐여. 이것들이 지금 보자보자 하니까!!!" -
당연히 이 사실을 들은 코사크족은 격분했다. 더군다나 이런 내분을 감지해낸 폴란드인들이 랴푸노프가 자신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허위문서를 일부러 흘렸고, 코사크족은 이 문서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랴푸노프를 죽여버렸다. 수장이 죽자 국민군은 해체되었고, 다들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단 코사크족들은 남아서 모스크바를 포위하기로 했다.
- 스몰렌스크 포위전을 묘사한 삽화 -
이 무렵 지그문트는 러시아 탈영병의 도움으로 성벽을 폭파시키는 식으로 기어코 스몰렌스크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워낙 전투가 치열했기 때문에 스몰렌스크의 시민들은 8만명에서 8천명으로 감소했다고 전해진다.(1) 이 상황에서 폴란드군이 바로 모스크바로 진격한다면 오합지졸 상태인 나머지 포위군은 금방 괴멸되고, 폴란드는 러시아를 지배할 수 있게 됬을 것이다. 그러나 지그문트는 개선식 등을 위해 바르샤바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소규모 기병대가 모스크바로 파견되기는 했지만 이들의 숫자는 너무 적어서 포위하고 있던 코사크 군대에게 가볍게 괴멸되었다.
이 무렵 스웨덴 군대도 노브고로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다행히 스웨덴군이 칼마르 전투에서 덴마크 군대에게 패배하면서 스웨덴은 러시아에 전력을 기울일 수 없게 되기는 했지만, 어찌 됬든 이들을 몰아낼 힘 자체는 러시아에 없었다. 거기에 가짜 드미트리 2세의 아들 '작은 악당 이반'이 그의 모친 마리아 및 일부 코사크 족들과 함께 볼가강 하류에서 웅거하고 있었고, 프스코프에는 부제(2) 출신의 남성이 자기가 드미트리라고 선언, 코사크 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프스코프를 장악했다. 거기에 사방에 도적들과 자립을 꿈꾸는 소수민족들이 날뛰고 있었고 모스크바에는 폴란드인들이 웅거하고 있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미닌과 포자르스키>
- "여러분! 언제까지 저들이 우리를 짓밟는 것을 지켜만 봐야 합니까!" -
1611년 가을.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푸줏간 주인(3) 쿠즈마 미닌은 시민들에게 폴란드인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그의 말에 호응해 자신들의 재산 상당부분을 군비로 헌납하는 데 합의했다. 이들은 1차 국민군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입고 근처에서 요양 중이던 포자르스키 공작을 찾아가, 그를 군사령관으로 추대했다. 2차 국민군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들은 감금되어있던 모스크바 총대주교 게르모겐의 지지를 받으며,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 "모스크바가 저기에 있다. 저 곳을 탈환하자!" -
그 동안 모스크바를 포위하고 있던 코사크족들은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혼란스러워했다. 일종의 어색한 동거가 잠시 이어지다가, 일부 코사크족은 2차 국민군에 합류했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어찌 됬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병력이 등장한 이상 모스크바의 크렘린에 갇혀있던 폴란드 군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 "이 문서에 얼른 서명하시오! 안 서명하면 빵은 없소!" "미닌과 자포르스키에게 축복있으라. 난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그 딴 문서에 서명할 수 없다. 폴란드 놈들아!" -
이들은 자신들이 가두고 있던 총대주교 게르모겐에게 자신들이 작성한 해산 촉구 성명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게르모겐은 끝내 거부했다. 마침 크렘린 안의 식량도 부족한 상황이라, 이들은 그 보복으로 게르모겐에게 먹을 것을 지급하지 않았고, 게르모겐은 1612년 2월 굶어죽었다.
- "항복. 제발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만 해주십시오." -
그러나 이후로도 포위전은 계속되었고, 폴란드인들은 굶주리기 시작했다. 크렘린 안에서는 식인 행위까지 벌어졌다. 폴란드가 다시 소규모 병력을 보내 9월 초엽에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였다. 결국 11월에 크렘린 안의 병사들은 2차 국민군에 항복했다. 이들은 항복 조건으로 안전한 귀환을 보장받았지만, 분노한 러시아인들에 의해 후퇴 과정에서 생존자의 절반이 살해되었다. 한편 미닌과 포자르스키 공은 나중에 영웅이 되어 크렘린 광장에 동상이 만들어졌다.
모스크바에 입성한 2차 국민군은 일단 질서를 확보하고, 코사크족들을 어르고 달래는 한편, 차기 차르를 선출하기 위한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했다. 젬스키 소보르는 어찌저찌 하여 러시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파견한 대표들로 구성되는 데 성공했고, 1613년 3월에 이들은 필라레트의 아들이며, 생전에 게르모겐이 차르로 지지했던 16살의 미하일 로마노프를 차르로 선출했다. 미하일 로마노프는 7월에 차르로써 대관식을 가졌다.
<폭풍이 지나간 후>
- "영 어색하네.." -
그러나 차르 대관식이 곧 전쟁의 종결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러시아 전체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젬스키 소보르에서 선출된 데다가 순교한 게르모겐이 생전에 미하일 로마노프를 지지했다는 점 덕에 러시아 내의 혼란은 많이 가라앉았지만, 일단 미하일 로마노프가 너무 어리고 심약한데다가,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이 새로운 모스크바 정부에게는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소식은 세임의 전쟁 예산 거부로 월급이 밀려버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인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당장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보복할 일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즉 당장은 리소브스키가 이끄는 리소브지치들의 약탈만 저지하면 되는 일이었다. 나쁜 소식은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전쟁이 끝났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스웨덴은 상당한 양의 배상금을 덴마크에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스웨덴의 왕은 북방의 사자 구스타브 아돌프였다.
- "얼른 숨자. 우리 세력이 다 망했지만 빠져나가면 살 수 있을 거야. 아마도." -
그래도 일단 윙드 후사르를 볼 일이 없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러시아는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러시아 정부군은 볼가강 하구에 웅거하고 있던 작은 악당 이반을 공격했다.(4) 작은 악당 이반의 군대는 전멸했고, 이반은 교수형을 당했다. 그리고 아이의 어머니 마리아 므네지치는 모스크바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고, 몇 년 후 그 곳에서 죽었다. 그 외에도 자잘한 군소세력들도 토벌되었다.
- "차르 자리에는 관심은 없지만 형이 덴마크에게 갖다줄 돈 때문에라도 너희 것이 좀 필요해. 좋은 말 할 때 내놔!" -
문제는 스웨덴 군이었다. 스웨덴 군은 1613년 티흐빈을 공격했지만 패배했다. 러시아군은 이 틈에 노브고로드 탈환을 시도했지만, 패배했고, 오히려 이듬해 그도프를 빼앗기고 말았다. 다행히 1615년 구스타브 아돌프는 프스코프를 직접 공격했지만, 휘하의 명장이었던 에베르트 호른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만 입고 철수해야 했다. 어차피 구스타브 아돌프는 자기 동생인 카를을 차르로 만들 생각이 없었기에, 양쪽은 협상에 돌입했고, 1617년 스톨포보 조약을 맺어 전쟁을 끝냈다. 이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카를 대공의 차르 자리 주장을 포기하게 만들 수는 있었지만 발트해의 출구인 잉그리아를 상실하고, 2만 루블을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했으며, 배상금이 완납될 때 까지 그도프를 담보로 내놓아야 했다.
- "약탈하자 약탈하자 약탈하자 먹고살자. 오늘도 방실방실 밝은 러시아의 하늘" -
한편 1615년 리소브스키는 독자적으로 자신의 사병들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했다. 이들은 브랸스크를 포위하고 샤홉스코이 공이 이끄는 군대를 패배시키며 러시아를 휘젓고 다니며 약탈을 하고 다녔다. 리소브스키는 1616년 죽었지만 그가 만든 리소브지치들은 계속 러시아를 휘젓고 다녔다.
거기에 폴란드 군인들의 반란이 진압되조 1617년 세임이 대규모 전쟁 예산 지출을 다시 승인했다는 것이었다. 얀 카를 코드키에비츠가 이끄는 상당한 숫자의 병력이 다시 한 번 모스크바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러시아 도시들이 폴란드 군 손에 떨어졌고, 브와디수아프가 적법한 차르임을 강제적으로 승낙해야 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모자이스크에서 결사 항전을 벌였고, 스몰렌스크에서도 반폴란드 봉기가 일어났다. 거기에 세임이 추가 예산 지출을 거부할 기미를 보이자 폴란드쪽의 전의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침 구스타브 아돌프가 리보니아를 다시 침공하고, 보헤미아에서 신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5) 유럽의 정세가 요동치기 시작했기에 폴란드로써도 러시아에만 신경을 집중할 수는 없었다.
- 데울리노 조약 직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 주황색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러시아에게서 받아낸 영토이다. -
결국 1618년 12월 데울리노 조약이 체결되었다. 15년간의 이 휴전조약에서 러시아는 스몰렌스크 등 영토의 상당 부분을 할양해야했고, 브와디수아프의 차르 자리 주장도 철회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됬든 러시아는 독립을 유지하는 것 자체는 성공할 수 있었다.
동란의 시대가 끝나고 러시아는 엄청나게 변했다. 일단 왕가가 변했다. 거기에 상당수의 보야르들도 혼란 통에 갈려나갔다. 하지만 미하일 로마노프가 유약하기도 했고, 살아남은 보야르들도 상당했기에 차르의 권력이 강화된 것은 또 아니었다. 다만 하위 귀족들과 상인들의 입김은 강해졌다. 반대로 농민들은 그들의 입장을 대변한 세력들이나, 입장을 관철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나버리는 바람에 처우가 악화되었다. 거기에다가 유례 없는 시련 속에 신에게 무언가 잘못해서 이 지경이 되었다는 정서가 퍼졌고, 이는 훗날 러시아에 다시 한 번 폭풍을 가져오게 되었다.
아. 물론 러시아는 이 때 당한 수모를 절대 잊지 않았고, 수모를 갚을 궁리를 했다. 그리고 나중에 되로 받은 것을 말로 갚게 된다.
(1) 참고로 스몰렌스크의 수비대장은 셰인이란 인물로 그는 폴란드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받았지만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살아남아 귀환했다.
(2) 기독교의 하위 성직계급. 사제의 아래라고 한다.
(3) 푸줏간 주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 니즈니 노브고로드 안에서는 명망가였다고 한다.
(4) 프스코프의 가짜는 1612년 5월 경 부하에게 배신당해 체포된 후 처형된 상태였다.
(5) 이게 그 유명한 30년 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