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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은 서방으로 이주한 흉노족인데 영화에서는 서양인 얼굴들로 나오네...한국인들이 출연해야 오리지날 훈족인데..참고로 한나라가 두려워하여 한나라가 보낸 미녀 왕소군을 황후로 삼은 흉노 대선우 호한야는 고구려 주몽의 외조카로 흉노 대선우에게 시집간 주몽의 누나 아들이다.
흉노의 장례풍습
노용 올 유적 22호 무덤 내부
동로마의 요르다네스가 기록한 《게티카》에 따르면 453년, 훈족의 왕 아틸라가 사망하자 훈족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여인의 울음과 눈물이 아닌, 남자의 피로써" 애도하기 위해 관습에 따라 얼굴에 상처를 냈다고 전한다.
그 외에 《수서》 돌궐전에서도 장례식을 치를 때에 망자의 가족들이 얼굴을 칼로 그어 피와 눈물을 흘리는 의식을 치렀다.
또한 남송의 우문무소가 기록한 《금지》에서도 여진족 또한 친우가 죽으면 칼로 이마를 베어 피와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를 이른바 "송혈루(送血淚)"라 하였다.
이러한 유목민족들의 장례풍습을 보면 그 근원이 만주와 시베리아지역임을 알 수 있다.
1. 흉노의 묘제
그 송사(送死, 장례) 때에는 곽관(棺槨)과 금은의구(金銀衣裘)를 썼으며, 봉수(封樹, 봉분과 나무)나 상복(喪服)은 없다.
其送死,有棺槨金銀衣裘,而無封樹喪服。
- 《사기》 권110 흉노열전
현재까지 발견된 흉노의 무덤은 1만 3천여 기 정도이며, 그 가운데 1만여 기 이상이 오늘날의 외몽골 일대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 기본적인 형태는 적석목곽분이지만, 외부 적석부의 형태에 따라 방형 적석무덤과 원형 적석무덤으로 나뉜다. 《사기》에서 말하듯이 봉분이 만들어진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방형 적석무덤은 대체로 凸자 형태를 띄고 있으며, 규모가 대형인 것들이 많아 귀족계층의 무덤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가운데에서도 최고위 계층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유적은 몽골의 노용 올 · 골모드 · 골모드Ⅱ · 도르릭 나르스 · 버르 볼라깅 암 · 타힐팅 훗거르 · 벨르호 · 오보노 하르 · 햘간트 유적 등 9곳 및 러시아의 일모와야 파띠 · 차람 · 오르고이텅Ⅱ · 바이탁Ⅱ 등 4곳에서 발견되었다.
동아시아의 다른 고분들과 비교해 볼 때에 묘광이 특히 깊은 것이 특징으로, 얕은 것은 5m, 평균은 10m, 깊은 것은 최대 22m에 이른다. 무덤을 깊히 파기 위해 계단식 테라스 형식으로 땅을 판 경우가 많이 보인다. 바닥에 시신을 안치한 목곽을 두고 1차로 흙으로 봉한 후 그 위에 나무 껍질 등을 놓아 태우는 의례를 행했으며, 그 위에 다시 흙과 돌을 번갈아 채워넣었다. 무덤 중간중간의 적석층은 도굴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무덤의 규모가 대형인 경우에는 2중곽, 소형인 경우에는 단독곽을 사용했다. 전자의 경우에는 목관과 목곽의 외관이 옻칠과 금띠 및 비단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흔적이 보이며, 목곽 내부의 바닥과 벽은 동물 문양이 장식된 펠트 카펫과 직물 등으로 장식된 흔적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대체로 그 머리가 북쪽을 향하도록 눕혀졌으며 생전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금제 귀걸이와 허리띠 및 목걸이, 청동장식, 장옥 등의 부장품이 목관에 함께 묻혔다. 그 외에 제사용 토기와 마구 등의 부장품이 목곽에 함께 묻혔다. 무덤의 규모가 대형인 경우에는 목곽 외부에 마차 및 순장된 말과 양 등의 동물뼈가 발견되었다. 이는 모두 피장자가 사후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묻은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원형 적석무덤은 적석부 중앙이 비어 있어 고리 형태를 띄고 있다. 규모나 부장품이 비교적 간소하며, 한 유적에 많은 무덤이 군집을 이루는 경우가 있어 대부분 평민들의 무덤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가끔 그 규모가 큰 것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어 예외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2. 순사(殉死)
근행(近幸, 가까이서 총애받음)하는 신첩(臣妾, 신하와 애첩)으로서 종사(從死, 따라서 죽음)하는 자는 많게는 수백 인에 이른다.
近幸臣妾從死者,多至數千百人。
- 《사기》 권110 흉노열전
흉노 귀족계층의 것으로 여겨지는 방형 적석무덤 중에서도 그 규모가 큰 것은 주변에 원형 적석무덤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경우가 보이는데, 이는 일종의 배장묘로 생각된다. 아마도 흉노의 선우나 고위 귀족이 사망했을 시에 그를 사후세계에서 수행하기 위해 주변의 측근이나 노예 등이 주인을 따라 죽은 후 그 시신이 주변부에 매장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런 배장묘의 수는 3기, 5기, 7기, 30기 등으로 다양한 편이다. 그 외에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말과 양 등의 동물을 순장하기도 했다. (※ 다만 지금까지 발굴된 예시를 보면 《사기》에서 말하는 것 처럼 순사한 인원의 규모가 수백에 달하는 사례는 아직 발견된 바가 없는 것 같다.)
후술하겠지만 흉노의 장례 풍습 가운데 망자를 애도하기 위해 일부러 자해를 해서 피를 내는 이면과 머리카락을 잘라 무덤에 함께 묻는 전발 등이 보인다. 몇몇 학자들은 이와 같은 풍습이 순사 및 순장으로 인한 인명과 노동력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흉노의 무덤에서 꾸준히 배장묘가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은 면도 있다.
이러럼 유목사회에서 고위층이 죽으면 그 수하들이 따라 죽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예컨데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저술한 《역사》에 등장하는 고대의 유목민족 스키타이도 왕이 죽을 경우 신하들을 죽여서 순장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에 따르면 처음에는 왕의 후궁 중 한 사람과 요리사 · 마부 · 시종 · 안내자 등을 교살하여 말이나 황금 잔 등의 가려 뽑은 보물을 함께 묻어 큰 무덤을 지었고, 다음 해에는 다시 무덤에서 의식을 거행하여 생전에 왕을 모시던 50명의 젊은 시종과 50필의 말을 모두 죽인 후 시신에 봉을 박아 넣어 마치 말에 탄 것과 같은 형상으로 고정시킨 후 묘 둘레에 세워두었다고 한다.
3. 이면(犁面)
경병(耿秉)이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되어서 (남흉노의) 선우(單于) 이하를 진무(鎮撫)하였다. (경병이) 훙(薨)하기에 이르자 주관(朱棺, 붉은 관)과 옥의(玉衣, 장례용 옥갑)를 하사하였다. 남선우(南單于, 남흉노 선우)가 거국적으로 발애하며 이면유혈(犁面流血, 얼굴에 상처를 내서 피를 냄)하였다.
耿秉為征西將軍,鎮撫單于以下。及薨,賜朱棺玉衣。南單于舉國發哀,犁面流血。
- 《동관한기》 권10 전5 경병
이면이란 곧 칼로 얼굴을 베어 피를 내는 의식을 의미한다. 이런 의식의 정확한 의미는 알기 어려우나, 이승에 남겨진 사람들이 생명의 원천인 피를 흘림으로써 이를 망자와 일체화하여 그 영혼을 소생시키는 의례가 있었으라는 추측이 있다.
흉노인들이 망자를 애도하기 위해 이면 의식을 거행했다는 묘사는 후한 시기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91년, 후한의 장군으로서 북흉노 원정에서 활약했던 경병이 사망하자, 북흉노와 대립하며 후한에 복속했던 남흉노의 선우가 거국적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얼굴에 상처를 내고 피를 흘렸다는 기록이 바로 그 것이다.
존경하거나 친애하는 망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얼굴에 상처를 내거나 자해를 해서 피를 흘리는 의식은 후대의 여러 유목민족들이 공유했던 관습이었다. 예컨데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고대의 유목민족 스키타이는 왕이 사망할 경우 속국의 주민들이 귀의 일부를 잘라내고 머리털을 둥글게 깎았으며, 그 다음에 양팔에 칼자국을 내고 이마와 코에 상처를 냈으며 왼손을 화살로 꿰뚫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4. 전발(剪髮)
노용 올(노인올라)의 흉노 귀족 계층의 대형 무덤에서는 사람의 머리카락 뭉치가 다수 발견된 바 있다. 한 무덤에서 동시에 여러 개가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머리카락 끝 부분에서 날카로운 도구로 자른 흔적도 발견되어 무덤 주인의 머리카락이라고 보기 어렵다. (※ 예컨데 노용 올 1호 무덤에서 24개, 6호 무덤에서 85개, 12호 무덤에서 14개, 24호 무덤에서 1개 등 도합 120여 개 정도가 발견되었다.)
이처럼 망자를 애도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자르는 풍습의 의미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아마도 영혼이 깃드는 것으로 알려진 머리카락의 일부를 베어서 이를 망자에게 바쳐 그 영혼을 소생시키는 의례가 있었다는 추측이 있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앞서 소개한 이면의 의식과 흡사한 뜻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무덤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은 대체로 검은색이었으나 갈색이나 적갈색 등 연한 색을 띄기도 했고, 때로는 노인의 흰 머리카락과 어린이의 연한 머리카락이 발견되기도 했다. 무덤에 부장된 머리카락 뭉치는 모두 비단이나 직물로 만들어진 주머니에 감싸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머리카락 뭉치를 감싼 주머니는 대체로 겉면에 삼각형 모양의 직물 띠를 바느질해서 부착한 형태를 띈다.
귀한 신분을 지닌 자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사람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풍습은 흉노의 근연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훈족에게서도 관찰된 바 있다. 앞서 언급한 요르다네스의 기록에 따르면, 훈족의 왕 아틸라가 사망하여 그 장례를 치를 당시에 훈족 사람들이 이를 애도하기 위해 관습에 따라 스스로 자해를 해서 피를 내거나 머리털을 뽑았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사와다 이사오, 《흉노》, 아이필드, 2008
에렉젠 외, 《흉노 : 몽골의 첫번째 유목제국, 흉노의 문화유산》, 진인진, 2017
중앙문화재연구원, 《흉노고고학개론》, 진인진, 2018
① 묵돌 (흉노) : 북아시아 유목제국의 탄생
선우(單于, 두만선우)에게는 태자(太子)가 있었는데 이름은 묵돌(冒頓)이었다. 후에 총애하는 연지(閼氏)가 작은 아들을 낳자, 선우는 묵돌을 폐하고 작은 아들을 (태자로) 세우고 싶어했다. 이에 곧 묵돌을 월지(月氏)에 인질로 파견했다. 묵돌이 월지에 인질로 가자 두만(頭曼)이 갑자기 월지를 공격했다. 월지가 묵돌을 죽이려 하자, 묵돌은 그 선마(善馬)를 훔쳐타고 도망하여 귀환했다. 두만은 이를 장하게 여겨 1만 기병을 거느리게 하였다. 묵돌은 곧 명적(鳴鏑, 소리내는 화살)을 만들어 그 기병들에게 활쏘기를 연습시켰는데, 명령하여 말하기를, "(내가) 명적을 날린 곳을 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참할 것이다."라 말했다. 새와 짐승을 사냥하러 나갔는데, 명적을 날린 곳을 쏘지 않는 자가 있자 곧바로 이를 참하였다.
얼마후에 묵돌이 명적으로 자신의 선마(善馬)를 쏘자, 좌우의 몇몇 사람들이 감히 쏘지 못했는데, 묵돌은 선마를 쏘지 않는 자들을 즉시 참하였다. 이로부터 얼마후에 다시 명적으로 자신의 애처(愛妻)를 쏘자, 좌우의 몇몇 사람들이 자못 두려워하여 감히 쏘지 못하자 묵돌은 이들 또한 다시 참하였다. 이로부터 얼마후에 묵돌이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명적으로 선우의 선마를 쏘자 좌우에서 모두 이를 쏘았다. 이에 묵돌은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쓸만해 졌음을 알았다. (묵돌이) 그 아버지 선우인 두만을 따라 사냥을 하러 갔다가 명적으로 두만을 쏘자 그 좌우 또한 모두 명적을 따라 선우인 두만을 쏘아 죽였으며 마침내 그 후모(後母)와 아우 및 따르지 않는 대신들을 모두 주살했다. 묵돌은 자립하여 선우가 되었다.
묵돌이 즉위하자, 이때 동호(東胡)가 강성하였으니, 묵돌이 아버지를 죽이고 자립했음을 듣고 곧 사자를 보내 묵돌에게 말하기를 두만이 소유했던 천리마를 요구했다. 두만이 군신(羣臣)들에게 묻자, 군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천리마는 흉노의 보마(寶馬)이니 주어선 안됩니다."라 하였다. 묵돌이 말하기를, "어찌 인국(鄰國)과 더불어 말 한 마리를 아끼겠는가?"라 하며 마침내 천리마를 주었다.
이로부터 얼마후에 동호는 묵돌이 자신들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고 곧 사자를 보내 묵돌에게 말하기를 선우의 연지 한 명을 요구했다. 묵돌이 다시 좌우에 묻자, 좌우에서 모두 노하여 말하기를, "동호가 무도하여 연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청컨데 이를 공격합시다!"라 하였다. 묵돌이 말하기를, "어찌 인국과 더불어 여자 한 사람을 아끼겠는가?"라 하며 마침내 총애하는 연지를 취하여 동호에 주었다.
동호왕은 더욱 교만해져 서쪽을 침공했다. (동호와) 흉노의 사이에 버려진 땅이 있었는데, 사람이 살지 않았고 (그 길이가) 1천 리였으며 (양국이) 각기 그 변경에 구탈(甌脫, 감시초소)을 두었다. 동호가 사자를 보내 묵돌에게 말하기를, "흉노와 우리가 경계하는 구탈 바깥의 버려진 땅은 흉노가 이를 수 없는 곳이니 우리가 이를 가지고자 한다."라 하였다. 묵돌이 군신들에게 묻자, 군신 중에 어떤 이들은 "이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묵돌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땅이란 국가의 근본이거늘 어찌 줄 수 있단 말인가!"라 하며 (땅을) 줘도 좋다고 한 자들을 모두 참하였다.
묵돌이 말 위에 오르며 국중(國中)에 늦는 자들은 참하겠다고 명한 후 마침내 동쪽으로 동호를 습격하였다. 동호는 처음부터 묵돌을 가볍게 여겨 대비를 하지 않았다. 이윽고 묵돌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여 동호왕을 멸망시켰고 그 민인(民人)과 축산(畜產)을 노획했다. 곧 돌아와서 서쪽으로 월지를 공격하여 도주시켰고, 남쪽으로 누번(樓煩) · 백양(白羊)의 하남왕(河南王)을 병합했다.진나라(秦)가 몽염(蒙恬)을 보내 흉노에게서 빼앗았던 땅을 모두 되찾았으니, 한나라(漢)와 더불어 옛 하남새(河南塞)에게 관문을 두고 조나(朝那) · 부시(膚施)에까지 이르러 마침내 연나라(燕) · 대나라(代)에 침입했다. 이때에 한나라의 병사들은 항우(項羽)와 서로 맞서고 있었으니, 중국(中國)은 병혁(兵革)에 고달팠는데 때문에 묵돌은 스스로 강해질 수 있었으며 공현지사(控弦之士, 활당기는 군사)가 30여 만이나 되었다.
순유(淳維)로부터 두만(頭曼)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 동안 (흉노는) 때때로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였으나 따로 흩어지고 나누어 갈라섬이 계속되어 그 세전(世傳, 계보)를 알거나 정리할 수 없다. 그러나 묵돌에 이르러 흉노가 가장 강대해져서는 북이(北夷)들을 모두 복속시켜 남쪽으로 중국과 더불어 적국(敵國)이 되었으니 그 세세로 전해온 나라의 관호(官號)를 알고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중략) 후에 북쪽으로 혼유(渾庾) · 굴역(屈射) · 정령(丁零) · 격곤(鬲昆) · 신리(薪犁)의 나라들을 복속시켰다. 이에 흉노의 귀인대신(貴人大臣)들이 모두 복종하며 묵돌선우를 현명하다 여겼다.
單于有太子名冒頓。後有所愛閼氏,生少子,而單于欲廢冒頓而立少子,乃使冒頓質於月氏。冒頓旣質於月氏,而頭曼急擊月氏。月氏欲殺冒頓,冒頓盜其善馬,騎之亡歸。頭曼以為壯,令將萬騎。冒頓乃作為鳴鏑,習勒其騎射,令曰:「鳴鏑所射而不悉射者,斬之。」行獵鳥獸,有不射鳴鏑所射者,輒斬之。已而冒頓以鳴鏑自射其善馬,左右或不敢射者,冒頓立斬不射善馬者。居頃之,復以鳴鏑自射其愛妻,左右或頗恐,不敢射,冒頓又復斬之。居頃之,冒頓出獵,以鳴鏑射單于善馬,左右皆射之。於是冒頓知其左右皆可用。從其父單于頭曼獵,以鳴鏑射頭曼,其左右亦皆隨鳴鏑而射殺單于頭曼,遂盡誅其後母與弟及大臣不聽從者。冒頓自立為單于。
冒頓旣立,是時東胡彊盛,聞冒頓殺父自立,乃使使謂冒頓,欲得頭曼時有千里馬。冒頓問羣臣,羣臣皆曰:「千里馬,匈奴寶馬也,勿與。」冒頓曰:「柰何與人鄰國而愛一馬乎?」遂與之千里馬。居頃之,東胡以為冒頓畏之,乃使使謂冒頓,欲得單于一閼氏。冒頓復問左右,左右皆怒曰:「東胡無道,乃求閼氏!請擊之。」冒頓曰:「柰何與人鄰國愛一女子乎?」遂取所愛閼氏予東胡。東胡王愈益驕,西侵。與匈奴閒,中有棄地,莫居,千餘里,各居其邊為甌脫。東胡使使謂冒頓曰:「匈奴所與我界甌脫外棄地,匈奴非能至也,吾欲有之。」冒頓問羣臣,羣臣或曰:「此棄地,予之亦可,勿予亦可。」於是冒頓大怒曰:「地者,國之本也,柰何予之!」諸言予之者,皆斬之。冒頓上馬,令國中有後者斬,遂東襲擊東胡。東胡初輕冒頓,不為備。及冒頓以兵至,擊,大破滅東胡王,而虜其民人及畜產。旣歸,西擊走月氏,南幷樓煩、白羊河南王。悉復收秦所使蒙恬所奪匈奴地者,與漢關故河南塞,至朝𧤤、膚施,遂侵燕、代。是時漢兵與項羽相距,中國罷於兵革,以故冒頓得自彊,控弦之士三十餘萬。
自淳維以至頭曼千有餘歲,時大時小,別散分離,尚矣,其世傳不可得而次云。然至冒頓而匈奴最彊大,盡服從北夷,而南與中國為敵國,其世傳國官號乃可得而記云。
(중략) 後北服渾庾、屈射、丁零、鬲昆、薪犁之國。於是匈奴貴人大臣皆服,以冒頓單于為賢。
- 《사기》 권110 흉노열전
: 흉노의 묵돌선우는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제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위에 소개된 그의 모험담은 설화적인 느낌이 있어서 그대로 신빙하기는 어려우나 대단히 인상적인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명마를 훔쳐 적국을 탈출하고 아버지와 이복동생을 제거하여 선우의 지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숙적인 동호와 월지를 격파하고 오르도스와 하서회랑 및 몽골고원 북쪽의 여러 유목민족들을 복속시킨 묵돌의 영웅담은 이후의 유목세계에 깊은 영감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흉노인들은 묵돌의 업적을 존경하여 오랜 세월동안 오로지 묵돌의 후손인 연제씨에게만 선우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주었으며, 후에 흉노를 중흥시킨 호도이시도고선우 또한 스스로를 묵돌에 비견했다. 심지어 흉노에게 멸망당한 동호의 후예인 오환의 수령 답돈이 용맹을 떨쳤을 때에도 묵돌에 비견되기도 하였다. 먼 훗날 오호십육국 시기에 남흉노의 후예들이 영가의 난을 일으켜 건국한 전조의 유요 또한 묵돌을 존숭하여 그를 하늘과 함께 제사지냈다. 튀르크족의 전설적인 군주인 오구즈 칸의 설화도 묵돌의 설화와 매우 흡사한 면이 있다.
② 엽교미 (오손) : 까마귀와 늑대의 왕자
이후에 천자(天子, 한 무제)는 건(騫, 장건)에게 대하(大夏)와 같은 나라들에 대하여 수차례 물었다. 건은 이미 후(侯, 제후의 작위)를 잃었으므로 말하였다.
"신(臣)이 흉노(匈奴)에 머물적에 들었는데, 오손(烏孫)의 왕은 곤막(昆莫)이라 합니다. 곤막의 아버지는 흉노 서쪽 변경의 소국(小國)(의 왕)이었는데, 흉노가 그 아버지를 공격하여 죽였습니다. 이때 곤막은 갓 태어나 들판에 버려졌으나, 까마귀가 고기를 물고 그 위를 날아다녔으며, 늑대가 그와서 그에게 젖을 먹였습니다. 선우(單于)가 괴이하면서도 신이하게 여겨 그를 거두어 길렀습니다.
(곤막이) 장성하자 군사를 거느리도록 하였는데 수차례 공을 세웠으니 선우가 그 아버지의 백성들을 곤막에게 돌려주어 서역(西域)을 지키게 했습니다. 곤막이 그 백성들을 거두어 기르고 소읍(小邑)들을 두루 공격하였으며, 공현(控弦, 활당기는 군사)이 수 만에 이르렀는데 공전(攻戰, 전투)을 익히게 했습니다.
선우가 죽자 곤막은 곧 그 무리를 거느리고 멀리 떠나가 중립(中立)하면서 흉노에 조회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흉노가 기병(奇兵, 기습병)을 보내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자 그를 신이하게 여기며 꺼리고 있으니 때문에 그를 기속해두기만 할 뿐 크게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하략)
是後天子數問騫大夏之屬。騫既失侯,因言曰:「臣居匈奴中,聞烏孫王號昆莫,昆莫之父,匈奴西邊小國也。匈奴攻殺其父,而昆莫生棄於野。烏嗛肉蜚其上,狼往乳之。單于怪以為神,而收長之。及壯,使將兵,數有功,單于復以其父之民予昆莫,令長守於西(城)[域]。昆莫收養其民,攻旁小邑,控弦數萬,習攻戰。單于死,昆莫乃率其眾遠徙,中立,不肯朝會匈奴。匈奴遣奇兵擊,不勝,以為神而遠之,因羈屬之,不大攻。」 (하략)
- 《사기》 권123 대완열전
: 오손의 곤막인 엽교미는 한 편의 소설같은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그의 출생설화에 대한 기록은 사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 예컨데 엽교미의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에 대해서 《사기》 대완열전에서는 이를 흉노라고 하였지만, 《한서》 장건이광리전에서는 월지라고 하였다. 한편 엽교미의 이름은 《한서》 서역전에 보이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오손의 왕호인 곤막으로만 칭할 뿐이다.) 어린 시절에 적국의 습격으로 아버지를 잃고 들판에 버려졌으나 까마귀가 물어다 준 고기와 늑대가 물려준 젖으로 살아남아 흉노의 선우에게 양육되었고, 장성한 후에는 용맹함을 발휘해 오손을 부흥시켜 서역의 강자로 거듭난 엽교미의 일화는 오늘날에 보기에도 인상적인 면이 있다.
③ 무익원검 (강족) : 화염을 이겨낸 사나이
강족(羌)의 무익원검(無弋爰劍)은 진 여공(秦厲公) 때에 진나라에게 사로잡혀 노예가 되었는데, 원검이 융(戎)의 어떤 별종인지는 알 수 없다. (무익원검이) 후에 도망하여 돌아갔는데, 진나라 사람들의 추격이 급박하자 바위굴 속에 숨어 면할 수 있었다. 강인(羌人)들이 말하기를, 원검이 처음 굴 속에 숨었을 때 진나라 사람들이 이에 불을 질렀으나, 마치 호랑이같이 생긴 경상(景象, 기운)이 있어서 그 것으로 불을 막고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곧 (바위굴을) 나왔다가 또한 비녀(劓女, 코가 베이는 비형을 받은 여자)와 들판에서 만나 마침내 부부가 되었다. 여자는 자신의 모습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머리카락을 풀어해쳐 얼굴을 가리고 다녔는데, 때문에 강인들도 이것을 풍속으로 삼았다.
(무익원검 부부는) 마침내 함께 도망하여 삼하(三河)의 사이로 들어갔다. 여러 강족들은 원검이 불을 질러도 죽지 않은 것을 보고는 그 신이함을 괴이하게 여겼으니, 모두가 그를 경외하고 섬겨서 호(豪, 우두머리)로 추대하였다. 하황(河湟, 황하와 황수) 사이에는 오곡(五穀)이 적고 금수(禽獸)가 많아 사냥을 생업으로 삼았는데, 원검이 그들에게 전축(田畜, 농사와 목축)을 가르쳤으니 마침내 (사람들이) 경신(敬信)을 보였으며 여락종(廬落種) 사람들로서 그에게 의탁하는 자들이 날마다 늘어났다. 강인들은 노비를 무익(無弋)이라 부르는데, 원검이 노예가 되었던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부른다. 그 후에 세세터록 (무익원검의 후손들이) 호가 되었다.
羌無弋爰劍者,秦厲公時為秦所拘執,以為奴隸。不知爰劍何戎之別也。後得亡歸,而秦人追之急,藏於巖穴中得免。羌人云爰劍初藏穴中,秦人焚之,有景象如虎,為其蔽火,得以不死。既出,又與劓女遇於野,遂成夫婦。女恥其狀,被髮覆面,羌人因以為俗,遂俱亡入三河閒。諸羌見爰劍被焚不死,怪其神,共畏事之,推以為豪。河湟閒少五穀,多禽獸,以射獵為事,爰劍教之田畜,遂見敬信,廬落種人依之者日益眾。羌人謂奴為無弋,以爰劍嘗為奴隸,故因名之。其後世世為豪。
- 《후한서》 권117 서강전
: 서강의 시조로 알려진 무익원검의 이야기는 엽교미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 보기에도 인상적인 면모가 있다. 적국에 사로잡혀 노예가 되었으나 탈출하였고, 불길에 타 죽을 뻔 하였으나 어느 신령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면했으며, 장애에도 개의치 않고 사랑하는 여인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함께 새로운 개척지를 향해 떠나갔다는 내러티브는 상당히 감동적인 느낌을 준다.
④ 동명 (부여) : 한국 시조설화의 원형
북이(北夷)의 탁리국왕(橐離國王)의 시비(侍婢)가 아이를 배자 왕이 이를 죽이려 하였다. 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까닭에 아이를 배게 되었습니다."라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돼지 우리에 던져 놓았으나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에 던져 놓아 말들로 하여금 그를 짓밟아 죽이게 하려 했으나 말들이 다시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이 그를 하늘의 아들(天子)이라 생각하였으니 명하여 그 어머니가 거두어 노비로 키우도록 하였는데,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으며 소와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이 그가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하다가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으로 엄호수(掩淲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자 물고가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으니 동명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지자 추격하던 병사들은 건너지 못했다. 이로 인하여 부여(夫餘)에 도읍을 정하고 왕이 되었으니 때문에 북이에 부여국(夫餘國)이 있게 되었다.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王欲殺之。婢對曰:「有氣大如雞子,從天而下,我故有娠。」後產子,捐於豬溷中,豬以口氣噓之,不死;復徙置馬欄中,欲使馬藉殺之,馬復以口氣噓之,不死。王疑以為天子,令其母收取,奴畜之,名東明,令牧牛馬。東明善射,王恐奪其國也,欲殺之。東明走,南至掩淲水,以弓擊水,魚鱉浮為橋,東明得渡。魚鱉解散,追兵不得渡。因都王夫餘,故北夷有夫餘國焉。東明之母初妊時,見氣從天下。及生,棄之,豬馬以氣吁之而生之。長大,王欲殺之,以弓擊水,魚鱉為橋。天命不當死,故有豬馬之救;命當都王夫餘,故有魚鱉為橋之助也。
- 《논형》 제9 길험
: 부여의 시조로 알려진 동명의 설화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인용된 《위략》의 기록 및 《후한서》 부여전 등의 기록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출생이 상서롭지 못하여 태어나자마자 버려졌으나 짐승들의 도움으로 체온을 유지하여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는 고대 중국 주나라의 시조인 후직의 설화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다만 동명을 하늘의 아들, 즉 천손으로 설정한 점과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준 덕에 강을 건너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한 점은 부여인들의 독창성이 발휘된 대목이라 하겠다. 한편 이와는 별개로 동명설화는 한국 고대국가들의 시조설화에 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광개토왕릉비문 등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의 시조 추모성왕의 시조설화는 사실상 부여의 것을 거의 떠다 옮겨놓은 듯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추모성왕이 알을 깨고 나왔다는 것인데, 이 부분은 신라의 박혁거세 설화와 가야의 김수로왕 설화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결국 왕실의 시조가 신이한 기운에 의해 하늘에서 내려와 알을 깨고 세상에 태어났다는 한국 시조설화의 내러티브는 부여와 고구려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⑤ 쯩 자매 (남월) : 왕이 된 여전사들
(건무) 16년(40)에 이르러 교지(交阯)의 여자인 징측(徵側)과 그 자매 징이(徵貳)가 반란을 일으켜 군(郡)을 공격하였다. 징측은 미령현(麊泠縣)의 낙장(雒將)의 딸이었다. 주원(朱觏) 사람인 시색(詩索)에게 시집을 갔는데 심히 웅용(雄勇)하였다. 교지태수 소정(蘇定)이 법으로 제재하자 측이 분노한 까닭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구진(九真) ·일남(日南) · 합포(合浦)의 만리(蠻里)들이 모두 이에 호응하였으니 무릇 대략 65개 성에 달하였으며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 교지자사와 모든 태수들은 간신히 자리만 지킬 수 있었다. 광무(光武, 광무제)가 곧 장사(長沙) · 합포(合浦) · 교지(交阯)에 조서를 내려 수레와 선박을 갖추고, 도로와 다리를 수리하여 막힌 길과 골짜기를 통하게 하였으며 양곡을 쌓아두도록 하였다.
(건무) 18년(42), 복파장군 마원(馬援) · 누선장군 단지(段志)를 파견하여 장사(長沙) · 계양(桂陽) · 영릉(零陵) · 창오(蒼梧)에서 병사 1만여 인을 징발하여 이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듬해(19) 여름 4월, 마원이 교지를 격파하고 징측 · 징이 등을 참하자 나머지는 모두 항복하거나 흩어졌다. 계속 진격하여 구진의 도적인 도양(都陽) 등을 격파하여 항복시켰다. 그 거수(渠帥) 3백여 구를 영릉(零陵)으로 옮겼으니 이에 영포(領表)가 모두 평정되었다.
至十六年,交阯女子徵側及其妹徵貳反,攻郡。徵側者,麊泠縣雒將之女也。嫁為朱觏人詩索妻,甚雄勇。交阯太守蘇定以法繩之,側忿,故反。於是九真、日南、合浦蠻里皆應之,凡略六十五城,自立為王。交阯刺史及諸太守僅得自守。光武乃詔長沙、合浦、交阯具車船,修道橋,通障谿,儲糧穀。十八年,遣伏波將軍馬援、樓船將軍段志,發長沙、桂陽、零陵、蒼梧兵萬餘人討之。明年夏四月,援破交阯,斬徵側、徵貳等,餘皆降散。進擊九真賊都陽等,破降之。徙其渠帥三百餘口於零陵。於是領表悉平。
- 《후한서》 권116 남만서남이열전
: 징측과 징이 자매는 베트남어 발음에 따르면 각기 쯩짝과 쯩니라 읽힌다. 이 두 사람은 여인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남성들을 뛰어넘는 용맹성을 발휘하여 남월 지역을 지배하던 한나라에 반기를 든 희대의 영웅들이었다. 비록 2년 만에 복파장군 마원에게 진압되어 죽임을 당했지만, 두 자매의 장렬한 일화는 후대의 베트남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이 분명하다. 베트남의 사서인 《사기대월전서》의 〈징여왕기〉에서는 쯩짝(징측)의 남편인 티 사익(시색)이 소정에게 부당하게 처형당하자 민중들을 설득하여 반란을 주도하였고 고향인 미령현에서 3년 간 왕으로서 군림했다고 전하고 있다. 본래 남월에는 중국 출신의 무제 조타가 왕조를 창건한 일이 있었지만, 오늘날의 베트남인들에게 쯩씨 자매는 베트남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어 독립 왕조를 창건한 여걸로 존숭을 받고 있다,
⑥ 궁 (고구려) : 태어나면서 두 눈을 뜬 전사군주
상제 · 안제의 연간(106~125)에 이르러 구려왕 궁(宮, 고구려 태조왕)이 수차례 요동(遼東)을 노략질하더니 다시 현도(玄菟)에 속하였다. 요동태수 채풍(蔡風)과 현도태수 요광(姚光)은 궁이 두 군(郡)을 침범할 것이라 생각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려 하였다. 궁이 거짓으로 항복하고 화친을 청하자 두 군은 진군하지 않았다. 궁은 몰래 군사를 보내 현도를 공격하여 후성(候城)을 불태웠고, 요수(遼隧)로 쳐들어가 관리와 백성들을 죽였다. 후에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였는데, 채풍이 경솔하게 관리와 군사를 이끌고 이를 추격하여 토벌하려다가 군사가 패하여 전몰하였다. (중략)
이이모(伊夷模, 고구려 산상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灌奴部)와 간음하여 아들을 얻고 그 이름을 위궁(位宮, 고구려 동천왕)이라 하였다. 이이모가 죽자 즉위하여 왕이 되었으니, 지금의 구려왕 궁(宮)이 바로 그이다. 그 증조부의 이름이 궁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능히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있었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하였는데, 이내 장성하게되자 과연 흉학하여 수차례 (중국을) 노략질하다가 나라가 잔파하게 되었다. 지금의 왕(위궁)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역시 능히 눈을 떠서 사람을 바라보았다. 구려인들은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 하였는데, 그 증조부와 닮았던고로 그 이름을 위궁이라 한 것이다. 위궁은 힘이 세고 용맹하며, 말을 잘 타고, 사냥을 하면서 활을 잘 쏘았다.
至殤、安之間,句麗王宮數寇遼東,更屬玄菟。遼東太守蔡風、玄菟太守姚光以宮為二郡害,興師伐之。宮詐降請和,二郡不進。宮密遣軍攻玄菟,焚燒候城,入遼隧,殺吏民。後宮復犯遼東,蔡風輕將吏士追討之,軍敗沒。(중략) 伊夷模無子,淫灌奴部,生子名位宮。伊夷模死,立以為王,今句麗王宮是也。其曾祖名宮,生能開目視,其國人惡之,及長大,果凶虐,數寇鈔,國見殘破。今王生墯地,亦能開目視人。句麗呼相似為位,似其祖,故名之為位宮。位宮有力勇,便鞌馬,善獵射。
- 《삼국지》 위서 권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조
: 고구려의 왕인 궁은 태조대왕이라는 시호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 한국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태조대왕이라는 시호가 지닌 의미에 주목하여 그의 치세에 고구려가 역사상의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했다고 보기도 한다. (국력의 확장 혹은 왕계의 교체 등 다양한 추측이 있다.) 태조대왕은 태어날 때 부터 두 눈을 뜨고 사람들을 노려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런 묘사는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 뿐 아니라 한국의 사서인 《삼국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의 기록에서는 한나라의 변경을 수차례 침공하고 약탈한 태조왕을 부정적인 이미지의 악당처럼 그려냈지만, 한국의 기록에서는 반대로 100세가 넘도록 장수한 용감하고 현명한 군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어느 쪽이 사실이건간에, 전사군주 태조왕의 활약상은 고구려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긴 것이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 고구려인들은 태조왕의 후예로서 마찬가지로 두 눈을 부릅뜬채로 태어나 뛰어난 기마궁술로 이름을 날린 동천왕에게 조상의 이름을 딴 위궁이라는 이름이 붙여주기도 하였다.
⑦ 단석괴 (선비) : 벼락으로 잉태한 유목군주
투록후(投鹿侯)가 흉노군에 3년을 종군하였는데, 그 아내가 집에 머물면서 아들을 낳았다. 투록후가 돌아오고나서 이를 괴이하게 여겨 죽이려 하였다. 아내가 말하기를, "이전에 낮에 길을 가던 중 벼락소리가 들려와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는데 번개가 입 안으로 들어오길레 삼켜버렸더니 곧 임신하여 10달 후에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가 필시 기이함이 있으니 길러야 합니다."라 하였다. 투록후가 끝내 믿지 않자 아내는 곧 친가에 말하여 거두어 기르게 하였으니, 이름을 단석괴(檀石槐)라 하였는데 키가 크고 용건(勇健)하며 지략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단석괴가) 나이 14~5세가 되자 다른 부(部)의 대인(大人)인 복분읍(卜賁邑)이 그 외가의 소와 양을 훔쳐갔다. 단석괴가 채찍질하며 말을 달려 쫓아가 공격하였는데, (적들이 단석괴를 두려워하여?) 앞으로 나서는 자가 없어 잃어버린것들을 모두 되찾아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부락(部落)이 경외하며 복종하였는데, 법금(法禁)을 시행하면서 옳고 그름을 평결하였으니 감히 (법을) 어기는 자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대인으로 추대되었다.
단석괴가 즉위하자 곧 정(庭)을 고류(高柳)에서 북쪽으로 3백여 리 떨어진 탄한산(彈汗山)의 철구수(啜仇水) 강가에 두자 동·서부의 대인들이 모두 귀의하였다. 병마가 강성하여 남쪽으로 한나라(漢)의 변경을 약탈했고, 북쪽으로 정령(丁令)을 막았으며, 동쪽으로 부여(夫餘)를 물리쳤고, 서쪽으로 오손(烏孫)을 공격하였으니 흉노의 옛 땅을 모두 점거하였다. 동서로 1만 2천여 리에 달하였고 남북으로 7천여 리에 달하였으며 산천(山川) · 수택(水澤) · 염지(鹽池)를 망라하여 심히 넓었다.
投鹿侯從匈奴軍三年,其妻在家,有子。投鹿侯歸,怪欲殺之。妻言:「嘗晝行聞雷震,仰天視而雹入其口,因吞之,遂姙身,十月而產,此子必有奇異,且長之。」投鹿侯固不信。妻乃語家,令收養焉,號檀石槐,長大勇健,智畧絕衆。年十四五,異部大人卜賁邑鈔取其外家牛羊,檀石槐策騎追擊,所向無前,悉還得所亡。由是部落畏服,施法禁,平曲直,莫敢犯者,遂推以為大人。檀石槐旣立,乃為庭於高柳北三百餘里彈汗山啜仇水上,東西部大人皆歸焉。兵馬甚盛,南鈔漢邊,北拒丁令,東却夫餘,西擊烏孫,盡據匈奴故地,東西萬二千餘里,南北七千餘里,罔羅山川、水澤、鹽池甚廣。
- 《삼국지》 위서 권30 오환선비동이전 선비조 배송지주
: 단석괴는 약 300년 전에 진한교체기의 혼란상을 틈타 흉노제국을 건설한 묵돌선우의 뒤를 이어 선비제국을 창건한 유목군주였다. 그의 탄생설화는 부여와 고구려와 흡사한 면모가 있지만 차이점도 분명하다. 부여와 고구려의 시조는 막연하게 하늘의 기운을 받아 출생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단석괴를 잉태시킨 것은 굉음과 함께 내려치는 번개라는 점에 있어서 보다 호쾌하고 거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에 걸맞게도 단석괴는 뇌성벽력과 같이 거침없는 활약을 펼치며 생전에 거대한 유목제국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유능한 후계자가 배출되지 못했고 또한 오환과 같은 라이벌이 부상하였기에 결국 선비제국은 분열되어 단명하고 말았다. 그러나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부와 탁발부는 위진남북조시대에 크게 활약하여 훗날 중국사의 전개에 깊은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