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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차 문화답사; 한국건축예찬-땅의 깨달음 (3-2)
제2부 地 - 터의 경영, 질서의 건축
昌德宮, 景福宮, 水原 華城 등 조선시대의 대표적 宮闕 및 城郭, 官衙建築을 통하여 王室이나
지배권력이 漢陽都城과 궁궐, 성곽을 어떻게 구축하고 경영했는지를 風水와 터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東國大地圖>와 <漢城圖> 등 옛 지도를 비롯하여 사진가들이 기록한 창덕궁, 수원화성 사진과
함께 <東闕圖>, <奎章閣圖>, <華城城役儀軌>, <華城陵行圖> 등 건축과 관련 있는 귀중한
미술품과 기록화가 비교 전시된다. 또한 19세기 말 경복궁과 六曹 거리를 재현한 대형모형과
함께 조선시대 관아연구의 寶庫인 霞石 韓弼敎 <宿踐諸衙圖>(하버드 대학교 옌칭[燕京]도서관
소장)가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다. (*실천제아도의 사진은 없음)
(20) 東闕圖 -국보 249-1호- -문화재청 사진-
동궐도는 本宮인 景福宮 동쪽에 있는 昌德宮과 昌慶宮을 그린 궁궐 그림으로 가로 576㎝,
세로 273㎝의 16첩 병풍으로 꾸며져 있다.
오른쪽 위에서 비껴 내려 보는 視角으로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두 宮의 殿閣과 다리, 담장은
물론 연꽃과 怪石 등 造景까지 실제와 같은 모습으로 선명하고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동궐도는 1824년~1828년간에 그려진 것으로 朝鮮王宮의 옛 모습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王宮의 건물 배치나 造園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보물 제596호 궁궐도(동아대학교 소장)가 고려대학교 소장(국보 249-1)과 형식∙기법∙크기 등이
동일한 것으로 판명되어 국보 제249-2호로 재지정하였다.
(21) 동궐도(국보 제249-1호) 大造殿 부근 확대도 -문화재청 사진-
昌德宮 大造殿(보물 제816호)은 王妃가 居處하는 內殿 중 으뜸되는 건물로 太宗 5년(1405)에
건립하였으며 壬辰倭亂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燒失되어 다시 지었으나 1917년 또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 경복궁 交泰殿을 헐고 그 部材로 이곳에 옮겨 건립한 앞면 9칸·옆면 4칸의
八作지붕 건물이다.
(22) 東國大地圖 -보물 제1538호- -문화재청 사진-
동국대지도는 272.2×137.9cm의 대형 朝鮮全圖로, 朝鮮과 滿洲 일부가 포함되어 있으며
정교하게 그려진 솜씨로 보아 圖畵署 畵員이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의 전체적인 모습, 수록된 정보의 종류와 양이 조선 후기 實學派 地理學者인
農圃子 鄭尙驥(1678~1752)의 <東國地圖> 원본 계통과 동일하며, 1767년 山陰과 安陰이
山淸과 安義로 바뀌기 이전의 地名으로 기록되어 있어 1755년~1757년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農圃子 鄭尙驥의 <동국지도> 원본은 남아 있지 않아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되는 <동국대지도>는 學術史뿐만 아니라 文化財的 측면에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23) 都城大地圖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97호- -문화재청 사진-
18세기 중반의 彩色 筆寫本 188.0×213.0cm로 現存하는 都城圖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18세기 漢陽의 모습을 眞景山水畵 技法으로 실감나게 그린 지도로 都城의 모든 중요한
내용들이 총망라되어 있으며, 18세기 서울의 모습을 정교하고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여러 정보에 대한 기호를 가장 체계적으로 사용한 서울 지도 중의 하나이며, 道峯山,
北漢山 등 주변 山勢의 표현에서 眞景山水畵의 繪畫的 技法이 가장 잘 담겨 있는 작품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24) 昌德宮 敦化門 -보물 제383호- -2015.05.04 촬영 사진-
昌德宮(史蹟 제122호)은 太宗 5년(1405) 正宮 景福宮이 있어 別宮으로 건립되어 壬辰倭亂
이후 경복궁과 昌慶宮이 燒失된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 朝鮮王朝의 가장 중심이 되는
正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對稱構圖를 보이는데 비하여 창덕궁의 殿閣은 지형조건에 맞게
배치한 특징이 있으며 창덕궁과 後苑은 자연과의 調和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곳으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敦化門은 昌德宮의 정문으로 太宗 12년(1412)에 건립되었으며 다음해에 2층 문루에 鐘과
북을 설치하여 正午와 人定(통행금지), 罷漏(통행금지 해제)에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光海君 元年(1609)에 완공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어
서울의 宮闕 정문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이다.
‘敦化’는 成宗의 명으로 四佳亭 徐居正이 <中庸>에서 인용하여 지은 것으로 ‘임금이
큰 德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敎化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다른 궁궐의 정문은 3칸이나 창덕궁의 정문 敦化門은 정면 5칸∙측면 2칸이며좌우 협칸을
벽체로 막아 3문형식인데, 이는 皇帝의 궁궐 정문은 5칸, 諸侯國 王宮의 정문은 3칸으로
규제하고 있어 중국과 마찰을 피하기 위한 便法이라는 說이 있다.
(25) 昌德宮 錦川橋 -보물 제1762호- -2007.05.03 촬영 사진-
敦化門과 進善門 사이를 지나는 창덕궁의 明堂水, 즉 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궁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明堂水 위에 錦川橋를 설치하여 궁궐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길이 12.9m, 너비 12.5m의 금천교는 太宗 11년(1411)에 架設되어 여러 차례의 화재와
戰亂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며, 궁궐의 威嚴을 보여주는 상징적 彫刻像과 아름다운 文樣, 견고하고 莊重한
築造 기술 등이 돋보이는 二重 虹霓橋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 가치가 뛰어난 구조물이다.
*경복궁의 錦川橋는 永濟橋, 昌慶宮의 금천교는 玉川橋라고 이름 붙였다.
(26) 昌德宮 仁政殿 -국보 제225호- -2010.12.11 촬영 사진-
인정전은 창덕궁의 法殿으로 왕의 즉위식을 비롯하여 결혼식, 世子 冊封式과 文武百官의
賀禮式 등 공식적인 국가행사를 치르는 正殿으로 光海君 때 重建된 이후 純祖 3년(1803)
화재로 再建, 哲宗 8년(1857년)에 보수하였다.
行閣으로 둘러싸인 인정전 앞의 넓은 마당은 朝會가 있었던 뜰이란 뜻으로 朝廷이라고 하며
御道 좌우에 늘어선 品階石은 文武百官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로 품계석에 맞추어
동편에는 文官, 서편에는 武官이 중앙을 향해 서게 되는데, 문관은 동쪽에 위치하여 東班,
무관은 서쪽에 위치하여 西班이라 하였으며 東∙西班을 합쳐서 조선시대의 상류 계급을
兩班이라고 했다.
(27) 昌德宮 大造殿 -보물 제816호- -2012.10.16 촬영 사진-
대조전은 王妃가 거처하는 內殿 중 가장 으뜸가는 왕비의 寢所인 坤殿으로 임금의 正寢 바로
뒤에 위치하여 중심이 되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왕이 사는 곳을 ‘九重宮闕’이라 하여
겹겹이 문으로 막고 있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란 뜻이며, 왕비의 거처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곳,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中殿’ 또는 ‘中宮殿’이라고 불렀다.
太宗 5년(1405) 건립, 壬辰倭亂 등 여러 차례 불에 타 다시 지었으나 1917년 또 화재를
당하여 1920년에 경복궁의 交泰殿을 헐어 그 부재로 이곳에 옮겨지어 ‘大造殿’이란 현판을
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조전은 앞면 9칸∙옆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는데 용마루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이루니 陰과 陽이며, 龍마루는 天地間의 交通을 방해한다고 믿었으며
더구나 龍이 깃든 곳에 또 용이 깃들면 서로 충돌한다고 생각 하였다.
(28) 昌德宮 芙容池와 宙合樓(보물 제1769호) -2007.05.03 촬영 사진-
창덕궁 後苑의 대표적인 方池인 芙容池는 동서 34.5m, 남북 29.4m의 네모 반듯한 연못으로,
연못 중앙에 소나무를 심은 작은 섬이 있는데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 나다’는 고대 중국의 宇宙觀 天圓地方 思想을 반영한 것이며, 보이지는 않으나
사진 왼쪽에는 芙蓉亭(보물 제1763호)이 있고 중앙의 魚水門을 지나 위에 있는
2층 누각건물은 宙合樓이다.
昌德宮 宙合樓(보물 제1769호)는 正祖 卽位年(1776) 창덕궁 後苑에 御製∙御筆을 보관할
목적으로 건립한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 1층은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奎章閣, 2층은 열람실이었는데, 이 열람실을 宙合樓라고 하며 여기서 바라보는 부용지는
창덕궁 후원의 白眉라고 한다.
正祖의 정책개발과 개혁정치, 조선 중기 文藝復興의 産室로 茶山 丁若鏞, 楚亭 朴齊家,
冷齋 柳得恭 등 다양한 인재들이 활동하던 중요한 공간으로, 정조가 지은 어제와 어필,
御眞, 印章 등을 보관했던 장소로 그 원형이 잘 남아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29) 景福宮 勤政門 -보물 제812호- -2010.09.02 촬영 사진-
景福宮(사적 제117호)은 都邑을 漢陽으로 옮긴 후 太祖 4년(1395) 처음으로 세운 궁궐로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왕조 제일의 法宮(임금이 사는 궁궐)으로 궁궐의 이름은
三峰 鄭道傳이 <詩經> 大雅篇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만년까지 큰 복을 누리리)에서 두 글자를 따 ‘景福宮‘이라고 했는데
‘길이 길이 크게 복을 누린다’는 말로 새 王朝의 번영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경복궁은 壬辰倭亂으로 인해 昌德宮∙昌慶宮과 함께 모두 불에 타 高宗 4년(1867)
興宣大院君이 다시 세웠으며 중국에서 고대부터 전해 오던 都城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 周禮의 ‘左廟右社’의 都城配置原則에 따라 景福宮의 왼쪽(동쪽)에는 宗廟를,
오른쪽(서쪽)에는 社稷壇을 건립하고 건물의 배치는 근정전과 사정전을 비롯한 正殿과
便殿 등이 앞부분에, 왕과 왕비의 거처인 寢殿과 휴식공간인 後苑은 뒷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前朝後寢’의 제도를 따르고, 左右對稱으로 配置한 형식은 경복궁이 조선의 法宮으로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日帝强占期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勤政殿 앞에 조선총독부 廳舍를 짓는 등 궁궐의
대부분을 훼손함에 따라 점차 궁궐의 제 모습을 잃게 되었으나 正殿∙樓閣 등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건립된 자리를 지키고 있어 조선 法宮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錦川橋 건너 있는 勤政門은 勤政殿의 南門으로 좌우에 行閣이 둘러싸고 있으며 행각과 함께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었다. 太祖 4년(1395) 경복궁을 건립할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高宗 4년(1867)에 再建하였으며,南行閣이 연결되는 곳에 동쪽에 東廊 夾門 日華門과
서쪽에 서협문 月華門이 있어 각각 文官과 武官의 출입문이었다.
(*‘日’이 있는 건물은 동쪽, ‘月’은 서쪽에 있는 건물)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우진각지붕 多包式건물로 밖으로 뻗쳐 나온 部材들의 형태가
날카롭고 曲線을 크게 그리고 있어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手法을 나타내고 있으며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 正殿의 남문 중 유일하게 2층 건물로 法宮의 위엄에 맞게 조성되어
궁궐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30) 景福宮 勤政門 行閣 -보물 제812호- -2010.04.10 촬영 사진-
근정문 행각은 勤政殿과 근정문의 둘레를 직사각형으로 둘러 감싸고 있는데,
양식과 구조는 간결하게 짜여 있으며 南行閣이 연결되는 곳에 日華門과
月華門이 있고 북쪽에는 思政門이 있어 思政殿과 연결되며 동∙서쪽으로는
각각 밖으로 돌출한 隆文樓∙隆武樓가 있으며 벽에 만든 井字살창은 사각형의
모서리를 사선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경복궁 창건 초기에는 單廊型 행각이었으나 高宗 때 경복궁이 重創되면서
複廊型(二重 기둥)으로 확장되었으며 바깥쪽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은 둥근형으로,
행각의 안쪽 기둥의 주춧돌은 네모난 돌로 다듬었다.
(31) 景福宮 勤政殿 -국보 제223호- -2013.09.02 촬영 사진-
勤政殿은 조선시대 法宮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勤政’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鄭道傳이 지었고 건물은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高宗 4년(1867)에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5칸 크기의 2층 팔작지붕 多包式 건물로 그 형태가 화려한 모습을 띠고 있으며
건물의 基壇인 月臺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훌륭한 솜씨로 十二支神像을 비롯한
動物像들을 조각하였다.
(32) 경복궁 香遠池-慶會樓와 北岳山 -2013.09.02 촬영사진-
香遠池는 경복궁 북쪽 後苑에 있는 동서 길이 128m, 남북 길이 113m의 인공 연못으로
왕이나 왕족들이 휴식하고 소요하던 寢殿의 後苑으로 모서리를 둥글게 조성한 方形의 蓮池에
연꽃과 水草가 자라고,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으며 향원지의 水源은 북쪽 언덕에서
솟아나는 '洌上眞源'이라는 샘물이다.
‘香遠’은 ‘향기가 멀리 간다’는 뜻으로 北宋의 儒學者로 性理學의 기초를 닦은
濂溪 朱敦頤(1017∼1073)가 지은 '愛蓮說'에서 따온 말이다.
오른쪽에 慶會樓가 보이고 뒤쪽으로 경복궁의 鎭山 白岳(北岳山∙342m)이 보인다.
(33) 景福宮 慶會樓 -국보 제224호- -2008.05.07 촬영 사진-
경복궁 勤政殿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慶會樓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외국使臣이 왔을 때
宴會를 베풀던 곳으로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는 작은 규모였으나 太宗 12년(1412)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아있다가 270여 년 후 高宗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건립하였으며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樓閣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 기둥을
세웠으며,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고 마루 높이를 3단으로
달리하여 地位에 따라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경복궁 경회루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樓閣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 樓閣 建築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며,
화려한 丹靑 그림자가 연못 속에 드리워지면 그 影像이 매우 아름다운 건물이다.
(34) 景福宮 香遠亭(보물 제1761호) -2008.05.07 촬영사진-
향원정은 경복궁 북쪽 후원에 있는 4,605㎡의 香遠池 가운데 섬 위에 건립된 육각형의
亭子로 高宗이 興宣大院君의 간섭에서 벗어나 親政體制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乾淸宮을 지으면서 그 앞에 세운 2층 정자로, 1층은 溫突로 난방이 가능하고 2층은 마루를
깔았으며 고종 4년(1867)부터 고종 10년(1873)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慶會樓가 국왕의 공식 宴會場所라면 향원정은 私的인 공간으로 임금이 휴식과 風流를
즐기거나 신하들과 간소한 詩會를 즐기던 곳으로 경회루가 웅장하면서 格調 높은 風流가
느껴진다면 香遠亭에는 호사스러움 속에 精製된 아름다움이 있다.
香遠池에는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가는 醉香橋가 원래는 북쪽에 있었으나 6∙25 전쟁 때
파괴되어 지금 있는 남쪽의 다리는 1953년에 架設된 것이다.
향원정 뒤에 조금 보이는 건물들은 乾淸宮이다.
(35) 水原 華城 -史蹟 제3호- -2010.10.09 촬영 사진0
수원 화성은 正祖가 부친 莊獻世子에 대한 孝心에서 華城으로 도읍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부친의 능을 楊州 拜峰山에서 明堂 자리인 花山으로 이전하고 그 부근 주민들을 八達山
아래(현재 水原)로 옮기면서 正祖 18년(1794)에 축성하기 시작하여 높이 4~6m,
둘레 약 5.7㎞의 성벽을 완공했는데 實學者인 磻溪 柳馨遠과 茶山 丁若鏞이 설계하고,
茶山이 고안한 擧重機 등의 新 機械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단기간(공사기간 2년)에
완공하였으며 축성의 전 과정을 <華城城役儀軌>에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華城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필요성을 切感한 首都의 남쪽 防禦基地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黨爭이 극심했던 정세를 쇄신하고 강력한 王道政治를 실현하려는 正祖의 원대한 구상을 위한
새로운 개념의 계획적 신도시로 건설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극진한 孝心을 기반으로 軍事∙政治∙行政的 목적까지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화성의
건설에 당대 동서양의 과학과 기술의 성과가 총 결집되었으며 그 결과 화성은 근대 초기
성곽건축의 白眉로 평가 받고 있다.
水原 華城은 축성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八達門과 화성의 북문이며 정문인
長安門을 포함한 4大門, 소실되었다 복원된 西將臺, 北水門인 華虹門, 望樓와 砲樓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시설물인 空心墩, 아름다운 건물인 訪花隨柳亭, 烽墩, 暗門 등과 華城 行宮이
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36) 水原 訪花隨柳亭 -보물 제1709호- -2010.10.09 촬영 사진-
방화수류정은 수원 화성의 네 개의 角樓 중 東北 角樓로 正祖 18년(1794)
水原 華城(사적 3)을 축조할 때 화성의 동북쪽에 군사지휘소로 만들었던 角樓로, 화성의
北水門인 華虹門의 동쪽 丘陵 정상 즉 龍淵 남측에 불쑥 솟은 바위 언덕인 龍頭 위에 있다.
각루의 이름은 宋나라 詩人 明道 程顥의 詩 중 ‘雲淡風輕近午天(운담풍경근오천),
訪花隨柳過前川(방화수류과전천)’에서 따왔다고 한다. (*顥: 클 호)
觀測과 指揮라는 군사적 목적에 충실하면서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조선시대 亭子建築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고,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의 특이성 등을 토대로 18세기의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訪花隨柳亭 밖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살려 연못을 파고 작은 섬을 만든 龍池(일명 龍淵)는
가파른 언덕 위의 정자와 용머리바위 그리고 섬의 나무와 꽃 사이로 떠오르는 보름달이
水面 위에 비치는 아름다운 정취를 ‘龍池待月’이라 고 하며 水原八景의 하나로 꼽고 있다.
(37) 水原 華城 西將臺(華城將臺) -2012.05.20 촬영 사진-
수원시 八達山(해발 128m) 정상에 있는 西將臺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重層 樓閣으로
상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이며, 뒤편에는 8면의 弩臺(西弩臺)를 세웠는데,
이곳은 쇠뇌를 쏘는 군사인 弩手가 머물던 곳이다. (*將臺: 장수의 指揮所 *弩: 쇠뇌 노)
이곳은 성의 안팎이 모두 한눈에 들어와, 화성 성곽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百 里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할 수 있다.
(38) 水原 華城 華虹門 -2010.10.09 촬영 사진-
수원 화성의 北水門으로 남북으로 흐르는 水原川의 범람을 막아 주는 동시에 방어적 기능까지
갖추고 있으며 7개의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을 건립하였다. 7개의 수문을
통하여 맑은 물이 넘쳐 흘러 물보라를 일으키는데, 현란한 무지개가 화홍문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하는데 이를 ‘華虹觀漲’이라 하여 水原 八景의 하나로 꼽는다. (*漲: 물 부를 창)
(39) 수원 華城 烽墩 -2010.10.09 촬영 사진-
華城에 있는 烽燧臺로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화강석으로 기초를 쌓고, 윗부분은
벽돌로 성벽보다 높게 축조하였으며 內面은 굴곡이 지게 하여 3층으로 만들고 5개의 火竇를
곡선 형태로 쌓았으며 적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砲穴과 銃眼을 갖추었고 봉수군들이 사용할
구들방과 창고 등도 마련하였다. (*墩: 돈대 돈 *竇: 구멍 두)
봉수군들은 화성 행궁과 주변을 정찰하다가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을 피워 위험을 알리는
신호를 보냈는데, 華城市 長安面 興天臺 海烽으로부터 峰潭邑 建達山의 間烽을 받아
龍仁市 石城山 陸烽으로 전달하였다.
신호체계는 남쪽 첫 번째 화두부터 시작하여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를 올리고,
적군이 국경 가까이 나타나면 봉수 2개, 국경에 이르면 3개, 국경을 침범하면 4개,
전투를 시작하면 봉수 5개를 모두 올렸다.
(40) 華城行幸圖 屛風 –보물 제1430호- -문화재청 사진-
화성행행도 병풍은 正祖가 부친인 思悼世子의 회갑을 맞이하여, 정조 19년(1795)
윤 2월 9일부터 8일간에 걸쳐 모친 惠慶宮 洪氏를 모시고 思悼世子의 묘소가 있는
화성의 顯隆園을 行幸했을 때 거행한 주요 행사를 그린 8첩 병풍이다.
각 폭의 내용은 ‘華城聖廟展拜圖’, ‘洛南軒放榜圖’, ‘奉壽堂進饌圖’, ‘洛南軒養老圖’,
‘西將臺夜操圖’, ‘得中亭御射圖’, ‘還御行列圖’, ‘漢江舟橋還御’로 구성되어 있다.
이 그림은 대표적인 역사적 記錄畵로 風俗畵的인 성격이 강 할뿐만 아니라 史料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며 描寫, 色彩 면에서 매우 우수하여 18세기 최고의 기록화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41) 화성행행도 병풍 제2폭 洛南軒放榜圖 -문화재청 사진-
(42) 화성행행도 병풍 제7폭 還御行列圖 -문화재청 사진-
(43) 화성행행도 병풍 제8폭 漢江舟橋還御 -문화재청 사진-
한강의 배다리[舟橋]를 건너는 모습이다.
*舟橋; 현대 군사용어로는 浮橋[floating bridge]라고 한다.
(44) 京畿監營圖 屛風 -보물 제1394호- -문화재청 사진-
경기감영도 병풍은 仁王山의 連峰들 아래로 넓게 펼쳐진 서대문 밖 京畿監營의 풍경을
12폭의 화폭에 담아낸 官衙圖로 京畿道 觀察使가 집무하는 경기감영은 太祖 2년(1393)에
설치된 이후 高宗 33년(1896) 水原으로 이전할 때까지 현재의 적십자병원 자리에 있었다.
병풍은 오른쪽부터 시작하여 제1폭에 敦義門(西大門)과 守門將廳이, 제4폭에는 솟을대문에
圻營이라고 쓴 것이, 제6폭 중앙에 있는 큰 건물은 관찰사가 근무하는 宣化堂이며,
8폭 위쪽에는 迎恩門과 慕華館이 있고, 제8폭에서 9폭에 걸쳐 연꽃이 만발한 蓮池가 보이며,
제10폭의 위쪽에는 大峴, 小峴과 揖升亭이라는 활터가 있으며, 제12폭에는 射亭이 보인다.
(*圻: 언덕 은)
山水圖∙地圖∙風俗畵가 결합된 듯한 이 그림은 19세기에 그려진 東闕圖(국보 제249-1호)와
西闕圖案 등과 함께 意義가 큰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45) 水原 華城行宮 -사적 제478호- -2012.05.22 華城 西將臺에서 본 모습-
水原 華城(사적 3)의 부속시설로 正祖 20년(1796) 화성을 축성한 후 八達山 동쪽 기슭에
576칸 규모로 건립하였으며, 그 전까지는 정조 13년(1789) 水原邑治를 花山에서 팔달산으로
옮기면서 官衙로 사용했던 건물로, 한국의 行宮(왕이 궁궐을 벗어나 머무는 곳)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던 곳이다.
효성이 지극한 正祖가 부왕 莊祖(思悼世子∙ 追尊 莊獻世子)의 陵寢인 華城 隆陵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행궁에서 쉬어갔는데 당시에는 奉壽堂과 景龍館∙福內堂∙維與宅∙老來堂∙
新豊樓∙南北軍營∙講武堂∙武庫∙修城庫∙執事廳∙書史廳∙婢將廳∙于華館∙得中亭∙行閣 등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화성행궁의 주건물인 奉壽堂에 의료기관 慈惠醫院이 들어서면서 모든 건물이
훼손되고 洛南軒만 남게 되었다.
1975년 華城 復元 결정과 함께 行宮 복원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96년 화성축성
200주년을 맞아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3년 봉수당, 득중정 등 1단계 공사가 끝나고
2010년 2단계 공사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46) 華城行宮 奉壽堂
화성 행궁의 正殿 건물이자 華城 留守府의 東軒 건물로 正祖 13년(1789) 완공하였으나
日帝强占期에 철거되어 1997년에 복원하였으며 壯南軒이라고도 한다.
‘奉壽堂’이라는 이름은 '萬年의 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으로 정조가 모친
獻敬王后(惠慶宮 洪氏)의 長壽를 기원하며 지었으며, 曺允亨이 편액을 썼다.
정조 19년(1795) 이곳에서 모친의 회갑연인 進饌禮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
(47) 華城行宮 洛南軒
奉壽堂 북쪽에 正祖 18년(1794)에 건립하였으며 1795년 獻敬王后(惠慶宮 洪氏)의 회갑연
진찬례 기간 중 이곳에서 특별 과거시험∙養老宴∙軍士들의 회식 등의 행사를 진행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화성 행궁이 철거될 때에도 훼손당하지 않고 보존되었으며 ‘洛南軒’란 이름은
後漢의 光武帝가 洛陽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景福34회 제50차 문화답사; 한국건축예찬-땅의 깨달음(3-3)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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