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다시 만난 구보씨
지난 봄에 구보 박태원의 단편선을 읽은 적이 있다.
대표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뿐만 아니라,
그 책에 담긴 모든 단편 소설들이 재미있었다.
일제시대 그렇게 유쾌한 글들을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의 글에는 당시를 살던 일반 서민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 책을 읽고 그의 다른 작품들도 살펴 보았다.
그래서 구입한 책이 바로 <천변풍경>이다.
이번에는 장편소설이다.
하지만, 독특하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사건이 없다.
주인공도 없다.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도 없다.
하지만, 재미는 있다.
이런 형식의 장편 소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처음이었다.
소설 이라기 보다 그냥 자기 이웃에 대해 적은 산문 같은 소설이다.
그의 유쾌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소설이다.
1. 1930년대 청계천가
제목 천변풍경.
천변의 풍경이다.
여기서 천변은 서울 청계천 주변을 이야기한다.
이 소설은 1935년에 출간된 소설이다.
일제시대 서울 청계천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불과 100년도 안된 시절이다.
지금의 청계천과 상전벽해만큼 다른 풍경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은 똑같다.
어쩌면 같은 고민을 하고,
자신들의 꿈을 키워나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어떤이는 부자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지 못해 불행해하고,
어떤이는 가난하지만, 오늘 하루 가족들과 함께 끼니를 떼우는 일로 행복해하고...
오늘날 우리들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2. 군상들
앞서 이야기했지만, 이 소설의 특별한 주인공이 없다.
소설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은 자기 자신인 것과 마찬가지로,
소설 속의 한명 한명이 제각각 주인공이다.
이 소설은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소설은 빨래터에 빨래 나온 여인네들의 수다로 시작한다.
그곳에는 비밀이 없다.
여인네들의 수다로,
이발소에서 일하는 소년 재봉의 입으로,
청계천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 깍정이(거지)들의 입으로,
그리고, 말하기 좋아하는 아저씨들의 입으로,
초고속 인터넷만큼 빨리 이야기가 퍼진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소년 창수가 한약방에서 일하면서,
시골뜨기 창수가 금방 도시의 뺀질이가 되는 모습.
쉰 살의 민주사가 25살짜리 첩을 두고,
그 어린 첩에게 전전긍긍하는 모습.
갑자기 내린 비로 청계천가에서 잠을 자다가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한 깍정이들이 다시 자신의 물건을 챙기려고 물로 들어가는 모습.
그리고 그 비로 인해 상류에서 내려오는 주인잃은 물건들을
건지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 모습들에서 웃음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의 삶에는 웃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울음도 있고, 슬픔도 있다.
삶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 또한 울음이 있고, 슬픔이 있다.
이쁜이와 그녀의 엄마. 단둘이 살다가 시집간 이쁜이.
그 남편이란 넘이 바람둥이에다 술만 처먹고,
시부모란 것들은 어찌나 호되게 구는지,
이쁜이는 시집간 후, 집에 한번 제대로 오지 못하고,
이쁜이 엄마는 그 소식을 듣고, 한숨만 내쉬고,
나중에 이쁜이가 시댁에서 쫓기듯 엄마한테 돌아왔을 때,
그게 더 잘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쁜이 엄마와 동네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읽는 나 또한 그리 생각하였다.
기미꼬와 하나꼬.
그들은 카페 여급으로 일하지만, 무척 착한 여인들이었다.
금순이라는 시골처녀도 스스럼 없이 받아주는 여인들.
금순이의 슬픈 과거.
첫번째 남편은 혼인 전날 도망을 가고,
두번째 남편은 너무 어려 암것도 모르다가 15살에 저세상으로 가고,
두번을 결혼했지만 아직 처녀인 금순이.
못살게 구는 시어머니와 야릇한 눈초리를 보내는 시아버지를
도망나와 무작정 서울로 온 금순이.
갈 곳 없는 금순이를 받아준 기미꼬와 하나꼬.
그들은 서로 의지하면 오손도손 살아갔다.
하나꼬가 시집을 가고, 또 호된 시집살이에,
기미꼬와 금순이도 걱정을 하고...
일제시대 여인들의 삶은 더욱 힘든 삶을 이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책에 나온 여인들은 모두 그렇게 힘든 생활을 하는 여인들이었다.
게으름뱅이 남편을 둔 만돌어미도 그랬다.
아참.. 민주사의 첩 만이 민주사를 쥐락펴락했구나.
대학생 애인과 민주사가 얻어준 집에서 희희덕거리다
민주사한테 걸려도 고향 친구라고 능청맞게 이야기하는 민주사의 첩.
그런 첩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민주사.
....
이 소설에서는 그 밖에 그 시절 다방의 풍경, 이발소의 풍경,
청계천 빨래터의 풍경, 한약방의 풍경....
그야말로 사람사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읽는 내내 나또한 그들의 이웃이 되어,
1930년대의 청계천을 살고 있는 듯했다.
3. 우리 동네 풍경
책을 읽고, 문득 우리 동네 풍경을 그려보았다.
퇴근길 아파트 놀이터에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놀구 있는 어린 아이와 아버지.
슈퍼마켓에서 핸드폰 DMB를 이용하여 TV를 보면서 가게를 지키는 주인 아저씨.
싼 가격으로 친절봉사하는 미용실 아줌마.
경비실 안에 전화기 앞에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경비원.
1층 어린이집에서 들려오는 기분좋은 아이들의 노는 소리들.
닫히는 엘리베이터가 다시 열리고, 얼굴 모르는 나에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유로, 인사하는 젊은 학생.
그리고 또 많은 이웃들.
평소에 그냥 스쳐지나가는 이웃들.
이웃이지만, 낯선 사람들.
그런 사람들 또한 그들의 삶을 살고,
그들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삶은 참 신비로운 것 같다.
책제목 : 천변풍경
지은이 : 박태원
펴낸곳 : 문학동네
페이지 : 468 page
펴낸날 : 2005년 1월 25일
정가 : 9,500원
읽은날 : 2010.09.15 - 2010.09.23
글쓴날 : 2010.09.2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