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말씀(2024. 7.14) 말씀/ 빌립보 3:7-14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자유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요즘 소유냐 존재냐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며 배우고 있습니다. 소유는 우리의 행복한 꿈을 이룰 것 같지만 오히려 소유가 많을수록 이기적이 되기 쉽고, 그 소유를 지키고 관리하기 위해서 힘을 사용하게 되거나 얽매이고 종속될 수 있습니다. 반면 존재 지향적으로 살아가게 되면 소유문제로 오는 근심걱정에서 자유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자동차가 없다고 해보십시오,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저 같은 경우 자동차는 집이고 사무실이고 생활공간 이동 수단입니다. 엄청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존재가 부요한 사람은 이런 불편한 문제들도 극복될 수 있습니다. 김재중 집사님은 회사에 오너입니다. 그런데 차가 없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크게 불편하고 힘든가요? 소유는 존재를 변화시킬 수 없지만 존재는 소유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후진국 뱅글라데쉬같은 나라 사람들이 행복지수가 오히려 높다는 것은 그런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존재와 자유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에게 자유처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자유인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할 존재들입니다. 자유가 없다면 살아야할 존재의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매이고, 사건들, 생각들에 매여서 자유롭지 못하게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피조물인 연약한 우리 인생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이렇게 매여 살게되어 있습니다. 욕망에 매이던지, 죄의 소욕에 매이던지, 사람에 매이던, 제도 에 매이던지, 어려운 현실 삶에 매이면 불행하게 삽니다. 유명한 톨스토이는 '독서의 바퀴'라는 옛날 책, 고전에서 이렇게 말했니다. 『인간은 노예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인가에 완전히 붙들려 사는 것이 좋다. 그런데 문제는 선택된 바의 노예여야 하고 또 누구의 노예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자기 정욕의 노예가 되면 인간의 노예요, 정신적으로 보는 그것의 노예가 되면 신의 노예다』 무엇에 붙들리는가 안 붙들리는가, 노예가 되는가 안 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d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자유는 묶이는가 묶이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선택하여 스스로 매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예일대학 로니 타워 박사님이 이끄는 연구팀이 6년 동안을 면밀히 연구해 가지고 내놓은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처가나 애처가는 보통 사람보다 일찍 죽고, 부인이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그런 전통적 부부관계 아래서 살때에 남편도 부인도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이는 나사 풀어진 것처럼 풀려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올바른 관계에 적당히 매여 사는 것이 더 좋고, 그 매임이 오히려 인간의 수명까지도 더 연장해 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수동적인 매임인가 능동적인 매임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탐욕이나 명예욕이나 권력욕 등 죄의 종으로 매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절망의 노예요, 슬픔의 노예, 죄의 노예가 되어 살면 결국 죽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렇게 죄의 종노릇하며 살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선택 여지도 없이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께 붙들렸습니다. 예수를 만나 후에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늘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종은 매인 자, 잡힌 자입니다. 본문에서 ‘포로 된 존재’(카타르넨스텐)라는 말도 '붙잡혔다, 포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그 후 그는 예수의 포로가 되어 평생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를 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 잡힌 후부터 어떤 세상의 유혹도, 욕망도 붙들어 맬 수 없는 자유인으로 살 수 있었고, 모든 형편에 자족하며 사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도 매이지 않고, 수없이 죽을 고비를 만났지만 매이지 않았고, 그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매이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매이지 않는 딱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보다 높은 차원에 붙잡히면 됩니다. 첫째, 지식과 가치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히면 됩니다. 8절로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3:8). 과거 그는 육체를 신뢰할만한 자였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 바리새인이요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사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좀처럼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바꿀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뜻이 모두 옳았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이런 가치관이 깨졌습니다. 고후10:4,5절을 보면 이럼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하나님의 강력으로 인해서 그의 이론 사고가 다 깨어졌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에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다 해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안 후에 그의 가치관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 고상함을 알고 그 삶에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전에 좋아하던 것, 믿기 전에 소중히 여기고 좋아하던 것이 배설물같이 여겨졌습니다. 이제 더이상 세상과 영적인 세계 안에서 갈등하며 방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평생 이 예수 그리스도는 주라고 전파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도 삶과 행동이 안 바뀌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기는 하지만 아직도 가치관이 롯의 처와 같이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치관이 흔들리면 행동이 흔들리고, 삶이 흔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치관이 예수께 붙들려 있으면 모든 생각과 사상에서 자유입니다. 세상 철학 사상을 읽어도 니체 책을 읽어도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 잡았는데 구속받을 것이 없습니다. 최고의 가치에 붙잡히면 생각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둘째, 운명이 예수께 붙들리면 됩니다. 사람들은 죽고 사는 문제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일생 어두운 운명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한 사람, 장애인으로 태어나고 무능한 사람은 운명에 지배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가게에 흐르는 저주. 운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이미 저주의 형벌에 묶인 자들입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늘 불행한 생각을 하며 삶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합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거지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를 보면서 믿음 안에서도 운명에 빠지려 하였습니다. 그가 저렇게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습니다. 원인과 결과. 인광 응보. 답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로 저주 받고 죽어야 할 운명의 인생들을 풀어서 자유케하러 오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매이면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운명의 사슬에서 풀려 주님으로 자유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3:10). 그의 죽으심까지 본받는다는 것은 운명을 예수님께 맡곁다는 것입니다. 죽음도 그를 묶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난의 운명, 실패의 운명, 못 생긴 운명, 등등 모든 운명... 이 모든 운명을 예수님께 내려놓고 주님께 붙잡히면 우리는 누구나 섭리의 인생이 됩니다. 섭리의 인생은 죽음에도 고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실패와 절망에도 뜻이 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에 다 하나님께 달려있고,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십니다. 그러니 살고 죽는데도 매이지 않습니다.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욕먹고 오해받고 핍박당하고 매를 맞고 고생하는 모든 것도 그 자체가 의미가 있으니 억을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평생 자유인이 되어 주를 위하여 수고하며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수많은 핍박을 당하고, 오해받고, 비난받고 그리고 로마에서 목 베임을 당하면서도 운명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장차 영광을 위한 위대한 흔적 이었습니다. 운명을 주님께 맡기면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째, 거룩한 목적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큰 의문은 '도대체 내가 누구를 위하여 사는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분명치 못한 사람은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소유냐 존재냐 책을 보면 오늘날 젊은이들의 성향에 대해서 나옵니다. 이들은 소유에 욕심보다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을 택한다고 합니다. 소유보다 당장 원하는대로 자유로운 존재로 살려고 한다고 합니다. 여행을 좋아합니다. 가방메고 어디론지 갑니다. 결혼도 잘 안 하려고 합니다. 매이기 실허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으로부터의 자유는 있는데 .. ~~으로의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의 목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유는 어떻게 됩니까? 방황이 되는 것입니다. 목적이 있으면 여행, 목적이 없으면 방황! 바울도 과거에는 이처럼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교회를 핍박하며 성도를 잡아들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삶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자유인인 것 같았지만 죄의 종노릇을 하며 잘못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2-14). 그리스도는 그의 삶에 거룩한 푯대가 되었습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 인생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목적이 바뀌니 삶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 인생 자체도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린도 후서 5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나를 위하여 살던 삶이 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목적이 바뀌면 진정 자유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란 삶의 중심이 자기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뀐 사람을 말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사시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 2:20). 예수가 거룩한 목적이라는 삶의 푯대를 잃지 않으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유 이며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께 잡히면 꼼짝 없이 묶이는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 하고 싶은 것도 못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래서 실컷 자기가 하고싶은 대로 살다가 60이나 넘어서 예수를 믿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런 생각은 단지 육체의 자유일 뿐입니다. 그 자유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죄가 도사리고 있고, 탐욕이 도사리고 있어서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죄와 마귀의 종이 됩니다. 자유할 것 같지만 오회려 평생 잡힌 인생 저주받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만 진정 자유한 인생을 살 수 있음을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즘 지홍 집사님이 청산도 바다 섬을 배경으로 한기의 점심식사 사진을 한번씩 올립니다. 최고의 밥상 우주의 밥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저도 은퇴하면 섬을 돌며 우유배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를 지배하고 주님께로 향한 자유가 있으니 행복한 것입니다. 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8:32)
우리가 누리는 자유 어떻게 얻은 자유 입니까? 저도 예수를 믿었지만 처음에는 자유를 못 누렸습니다. 여전히 탐욕과 운명에 사로잡히고, 율법데 갇히고 제도에 매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유를 최대한으로 누리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제가 살아가는 것을 보고 자유인이라고 합니다. 전에 선배 목사님 한 분이 저 보고 김해영 목사는 어떻게 혼자 살면서 할것 다하며 사느냐고 하였습니다. 둘째 딸 엘리는 아빠는 신기하다고 합니다. 자신은 신랑이 닥달해서 공부도 하고 논문도 쓰고 그랬는데 옆에서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규칙적인 삶을 살아가느냐고 합니다. 그것은 자유의 힘을 체대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내 자유가 방종으로 흘렀다면 저는 아무 간섭도 받지 않으니 육체가 원하는대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아침 늦잠 실컷 자고, 영화도 보고 TV 드라마에 빠져 살고..,유튜브 중독되고.. 그럴 수 있습니다. 자유는 사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인생 살아가며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획득입니다. 진정한 자유에는 질서가 있고 원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을 보십시오. 얼마나 자유 합니까? 누가 간섭하지 않지 않습니까? 나무들 보고 너는 여기 있고, 너는 저기 있고, 새들 짐승들 보고 너는 여기서 살고 너는 저기서 살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자유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유 속에는 정연한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축복 속에 한가지 원칙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주님께 사로 잡히는 것입니다. 저 하늘을 향한 목표있는 자유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 이렇게 그리스도께 잡힌 사도 바울의 삶의 자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그는 주님께 잡혔지만 수동태에 머물지 않고 능동적으로 분명한 푯대를 향해 쫓아갔습니다. 자유 의지가 적극적으로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매였어도 주의 종이 되었어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 이었습니다. 조지마티스란 사람의 시 하나를 소개합니다. 주님 나를 사로잡아주소서. 주님, 나를 사로잡아 주시옵소서,그 때 내가 자유케 됩니다. 주님, 나의 검을 넘겨드리게 하소서 .그 때 나는 승리자가 됩니다. 내가 나 자신의 힘으로 설 때 .나는 인생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주님, 주님의 팔 안에 나를 가두어 주시옵소서. 그 때 나의 손이 튼튼해 집니다 결론적으로 이제 우리도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처럼 붙잡혔지만 자유인으로서 승리의 삶을 산 것처럼 우리도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께 붙잡혀서 자유와 승리를 누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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