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는 종본탑(宗本塔·현 서울 탑골공원 주변으로 추정) 동편에 살면서 매일 마을의 똥을 져 나르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었다. 아침이면 기쁜 마음으로 일어나서 바지게(거름지게)를 지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뒷간을 치는 것이다.”(연암 박지원의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에서)
18세기 후반 인물인 박지원 이덕무 윤기 이옥 등은 각자의 글에서 한양 가구 수를 8만 호라고 언급했다.
1790년대 가구당 인구가 5명 내외였으니 18, 19세기 초 한양은 인구가 40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추정된다.
전통시대 도시의 인프라 중 마실 물, 땔감 공급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것이 배설물의 처리다. 조선은 초기부터 이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설화집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제149화에는 오염된 물을 맑게 만들기 위한 내용과 방법 등을 다룬 1444년의 실제 상소문 내용이 발췌돼 있다.
분뇨로 인한 한양의 수질오염과 개천에서 아무렇게나 대소변을 보는 문제로 고심한다는 내용이다.
또 18세기 후반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에 실린 ‘똥거름’이라는 글은 한양 성내 사람과 동물의 분뇨로 인한 악취와 길가에 덕지덕지 붙은 똥 문제를 기록했다. 이처럼 인분뇨와 축산폐수 처리는 녹록지 않은 문제였다.
그러나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 정책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태평한화골계전’은 집집마다 사람과 가축의 배설물을 모아 두는 통을 설치하고 이를 성 밖에 버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시행됐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공중화장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강희맹(1424∼1483)의 ‘요통설(溺桶說)’에 나온다.
큰 시장의 으슥한 곳에 오줌통을 설치했는데 양반들이 이를 이용하면 불결하다는 비난을 받았다고 했다.
19세기 초 지어진 ‘진담록(陳談錄)’의 ‘방분(放糞)’이라는 글에도 길가 옆에 화장실이 있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민간인 배설물 처리업자의 활동이 보이기 시작한다.
박지원의 단편소설 ‘예덕선생전’은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 처리가 직업인 사람의 이야기다. 주인공 엄행수는 마을의 온갖 똥을 져 나르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똥장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은 물론이고 말, 소, 개, 돼지, 토끼의 똥을 가리지 않고 쓸어 담는다. 그의 주요 고객은 왕십리 주변 무 농가, 서대문 밖 가지 오이 수박 농가, 연희동 고추 마늘 부추 농가, 청파동 미나리 농가, 이태원 토란 농가 등 채소를 재배하는 농가였다.
똥을 주워 담아 팔아 얼마나 수익을 올렸을까?
그의 연봉은 놀랍게도 6,000전이었다. 100전이 1냥이니 연수입이 60냥이었다. 이는 18세기 후반 한양의 괜찮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다.
사람들이 더럽고 천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직업치고는 돈벌이가 꽤 좋았다.
박지원은 천한 일을 하는 엄행수와 친하게 지낸다는 비난에 “선비는 가난이 얼굴에 묻어나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출세하여 온몸에 표가 나는 것 또한 부끄러운 일”이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18세기 조선의 분뇨처리업자 엄행수에게 더럽지만(穢·예) 덕이 있다 하여 ‘예덕선생’이라는 칭호를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