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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교역의 통로, 카라코람 실크로드 탐방기(끝)
21. 중앙아시아의 중심도시 타슈켄트
8월 12일, 새벽에 일어나서 호텔 주변을 한 시간 반가량 산책하였다. 전날 들어 올 때는 잘 몰랐으나 아침에 호텔을 나서니 곧장 티무르 광장과 나보이 극장이 보인다.
티무르광장 중앙에 아미르 티무르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15년 전에 그의 동상을 참관할 때 한국의 세종대왕 같은 사람이라는 설명을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데 책과 TV에서 다룬 그의 행적을 살피니 희대의 풍운아다. 티무르는 1336년에 태어나 1405년에 70세를 일기로 사망한 중앙아시아의 걸출한 전설적 인물이다. 각종 전쟁에서 승리하여 서쪽으로는 소아시아와 시리아의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동쪽으로 차가타이칸국과 북인도까지, 북쪽으로는 카프카즈와 킵차크국까지 아우르는 세계적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티무르는 화려하고 웅장한 이슬람사원을 짓게 하는 등 건축사에도 큰 공적을 남긴 인물로 알려져 있다. 국토가 한반도의 2배인 44만 평방킬로미터이고 2천만 명이 넘는 인구를 지닌 우즈베키스탄을 20년째 통치하고 있는 카리모프대통령은 티무르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그를 국부로 떠받들고 있다.
티무르 광장에 우뚝 서서 우즈베키스탄을 호령하는 아무르 티무르 동상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중에 우즈베키스탄을 보름동안 배낭으로 여행하는 한국의 젊은 여성 세 명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외국을 여행하다가 이처럼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젊은이들을 만나며 모험과 도전정신이 오늘날 세계 전역에 깊숙이 뿌리내린 우리 민족의 저력과 열정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청년들이여! 세계를 향하여 더욱 힘차게 전진하라
오전 9시 반에 호텔을 출발하여 실크로드의 오랜 유적도시 사마르칸트로 향하였다. 시내 중심가를 관통하여 가는 동안 차창으로 타슈켄트의 전모를 일별하게 된다. 여행의 마지막 날 다시 타슈켄트에 머물게 되므로 그때 시내를 돌아보는데 필요한 예비 정보를 얻는 셈이다. 공원과 가로수가 크고 잎이 무성한데 상수리 열매가 많이 달려있다. 그러고 보니 15년 전에도 상수리나무가 많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4,000명의 고려인들과 함께 참관한 대극장이 어느 곳인지는 아직 확실히 감이 잡히지 않고.
사마르칸트까지의 거리는 약 320km, 도심을 벗어나는데 한 시간 걸린다. 시내를 벗어나니 넓은 평원에 목화, 옥수수, 밀 ,양 떼들도 듬성듬성 보인다. 뙤약볕에서 밭일하는 일꾼들도 눈에 띄고 넓은 평원에 물을 대는 수도가 사통팔달 이어져서 농사짓는데 물 걱정을 하지 않을듯하다.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로 가는 도로변에 광활한 끝없이 평원이 이어진다.
세 시간 넘게 평원을 달리니 중동지방의 광야 같은 구릉들이 나타나고 사마르칸트에 가까워서는 다시 광활한 오아시스처럼 녹지대가 등장한다. 사마르칸트는 이슬람 시대 중앙아시아의 중심도시로 동서 문화를 잇는 문명의 교차로,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유적지다. 15년 전에 타슈켄트에 이틀간 머물며 하루를 틈내어 사마르칸트를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다른 행사일정이 빠듯하여 포기 한 것이 아쉬웠는데 15년 만에 그때의 심정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더 여유 있는 탐사 길이 되어 기쁜 마음이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최신 시설을 갖춘 산뜻한 대형버스가 제 속력을 내지 못한다. 오후 3시경 사마르칸트의 아시아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우즈베키스탄 첫날, 페르가나에서도 아시아호텔이었는데 체인인가 보다. 숙소에 도착하여 객실의 TV를 켜니 올림픽남자마라톤경기가 생중계되고 있다. 통상 올림픽의 대미는 마라톤으로 장식된다. 인내심과 끈기, 지구력으로 체력의 한계를 이겨내는 마라톤경기를 통하여 우리는 스스로의 가능성과 강인한 정신력을 되새긴다. 상상하기 힘든 고통과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최종목적지에 도착하는 선수들의 감투정신을 본받아 우리도 인생의 마라톤, 먼 여정의 나그네 길을 정신 줄 놓지 않고 완주하리라.
여장을 풀고 잠시 쉬다가 호텔주변을 세 시간여 살펴보았다. 호텔을 나서자마자 중년의 여성을 만났는데 한국의 공장에서 5년간 일하다가 돌아왔다며 우리말을 곧잘 한다. 소냐(58세)라는 여인의 집으로 들어가서 차 한 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니 남편은 병으로 돌아가고 30세 된 아들이 8월 20일에 결혼한다며 곁에 있는 며느릿감도 소개한다. 한국의 공장 사장과 부인이 좋은사람들이라며 지금도 통화한다고 말한다.
그 집에서 나와 사원 모양의 큰 건물이 있는 곳으로 가니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온다. 레기스탄(Registan)이라는 곳으로 사마르칸트의 가장 대표적인 이슬람유적지다. 다음날 찾아보기로 하고 주변을 산책하였다. 레기스탄 근처가 공원인데 이곳을 지나던 젊은 처녀 둘이 사진을 찍자며 붙잡는다. 공원에서는 사마르칸트 대학에서 한국어를 공부한다는 오르틱이라는 대학생을 만나 여러 가지 유익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공원 건너 한 쪽에서 주악이 울려 다가서니 결혼 축하 파티가 열린다고 한다. 좋은 기회라 여겨 행사장으로 들어가니 한 남자가 '아저씨, 한국에서 왔어요?'라고 묻는다. 샤사(30세)라는 청년은 한국에 갔다가 3개월 만에 나왔다며 다시 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에 앉으라고 권하여 함께 만찬을 즐겼다. (그는 초청 가수가 노래 부를 때의 반주자였다.)
한낮을 피하여 5시경에 외출하였는데 약간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어 크게 덥지 않아서 좋았고 한국을 좋아하는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이 유쾌하였다.
결혼축하 파티의 음식이 다채롭고 맛있다
22.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인 사마르칸트
8월 13일, 새벽 3시에 잠이 깨어 수영장의 벤치에 누워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깊은 묵상에 잠겼다. 낮은 뜨거운데 새벽에는 서늘하여 덮개가 필요하다.
5시 조금 지나 로비에 나가니 젊은 일행들이 이곳의 일출 모습이 보기 좋다며 일찍 산책길에 나선다. 다른 일행과 함께 뒤따라 공원에 이르니 잠시 후 떠오르는 붉은 해가 어느 곳보다 크고 밝아 보인다.
큰 도로를 따라 10여 분 걸어가니 아파트 벽에 신혼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크게 새긴 모자이크 형의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그 건너 편 낮은 언덕에 이 나라 역대 최고의 통치자 이무르 티무르와 그의 손자 등 가족들이 묻혀 있다는 '구르 아무르'(티무르 박물관)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경내를 청소하던 젊은 청년이 입장료가 8,000숨(약 3달러)이라고 말한다. 외양만 살피고 오전에 다시 오겠다고 하니 한국 사람이냐고 물으며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안으로 들어서니 하던 일을 멈추고 앞장서서 티무르의 묘실로 직접 안내하는 모습이 순박하다. 박물관에서 나오니 입구에 서 있는 노인이 도쿄인가, 서울인가 묻고 중국의 1950년대 지도자들인 모택동, 유소기, 주은래의 이름을 들먹이며 만면에 웃음을 띤다.
티무르박물관에서 청소하는 청년과 함께
호텔에 돌아와 아침을 들고 오전 9시에 유적 탐사에 나섰다. 처음 찾은 곳은 15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교육 기관으로 세웠다는 레기스탄(Registan), 입장료가 13,000숨으로 가장 비싼 곳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중앙과 좌우편에 세원 건축미가 뛰어난 건물 전체의 내부가 각종 기념품 가게로 변하여 씁쓸한 느낌이 든다.
이어서 찾은 곳은 중앙아시아 최대의 사원이라는 비비하눔(Babi-khanym), 그곳으로 가는 길에 작은 학교가 보인다. 길 안내를 맡은 노르틱(전날 만난 한국어학과 학생)에게 무슨 학교인가 물으니 현 대통령 카리모프가 어릴 적에 다닌 학교라고 답한다.
레기스탄의 전경을 담은 그림과 외국방문객들이 늘어선 실제의 모습
비비하눔 사원은 14세기 말에 티무르가 세계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사원을 짓겠다고 다짐하며 유명한 건축 기술자와 수많은 노동자를 동원하며 지은 빼어난 건축물이다. 티무르의 여러 왕비 중 가장 사랑하는 왕비 비비하눔은 왕이 전쟁에서 돌아오기 전에 완공되도록 독려하였는데 최고의 기술자인 페르시아 출신 젊은 건축가가 왕비의 미모에 반하여 키스를 해 주면 끝내겠다고 하여 결국 키스를 허락했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티무르가 건축가와 비비하눔 둘 다 죽게 한 '운명의 키스' 전설이 담겨 있다.
비비하눔 사원 옆에 청과물과 농산물을 파는 재래시장이 있다. 시장 입구의 다과류 판매장의 나이 지긋한 여인은 고려인 3세라고 소개하는데 한국어를 잘 한다. 옆의 젊은 여인은 며느리, 그녀에게서 몇 가지 다과를 샀는데 고려인이 자기 것도 사 달라고 말한다. 동업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몫이 다르다는 것이다.
재래시장에서 나와 차량들이 질주하는 큰 도로를 넘어서 언덕배기에 있는 공동묘지 사히진다(Shahi-zinda)를 찾았다. 위쪽에 장식이 화려하고 번듯한 묘지들이 자리 잡고 아래쪽에 평범한 묘들이 더 많다.
그늘이 진 곳에서 쉬고 있는데 앞의 묘지 화강암 대리석에는 1889년에 태어나 1983년에 죽었다고 적힌 할아버지와 1967년에 태어나 1996년에 죽은 젊은이의 모습이 좌우에 새겨져 있다. 잠시 후 중년 남성이 청년과 함께 그 묘역에 이르러 한국에서 왔느냐며 인사를 건넨다. 한 달간 한국을 다녀왔다고 말한다. 묘지의 주인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답한다. 이들이 호스로 묘석에 물을 뿌리며 묘역을 청소하고 관리인을 불러 틈이 벌어진 곳을 수리해 달라며 돈을 한 뭉치 꺼내준다.
묘역에서 나오다 보니 화사한 모습의 어린 소년을 화강암에 새긴 묘도 있다. 1983년에 태어나 1992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다. 키르키스스탄에서부터 여러 차례 돌비가 세워진 묘역을 차창으로 지나쳤는데 이곳에서 묘역 순례의 대미를 장식하게 된 셈이다. 유적이나 유산은 결국 지난 세월의 흔적들, 이처럼 누구나 이 세상에 한 차례 왔다간 흔적인 것을 되새긴다.
묘역에서 만난 부자와 함께
돌아오는 길의 햇살이 따가워 푹신한 풀밭의 나무 그늘로 다가서니 마침 서너 명의 남자들이 수박을 가르고 있다. 비켜서기도 멋쩍어서 멈칫하니 앉으라고 권하며 잘 익은 수박을 크게 잘라 한 조각씩 건네준다. 갈증이 나던 참에 달게 먹으며 낯선 나그네에게 베푼 호의를 감사하였다.
호텔에 돌아오니 오후 1시가 지났다. 간단히 점심을 챙겨들고 한 시간 가량 자는 낮잠이 달다. 햇볕이 뜨거운 낮에는 쉬고 비교적 선선한 아침과 저녁시간을 이용하니 한결 여유가 있고 몸도 가벼워 좋다.
전날 사마르칸트로 떠나는 버스의 앞 유리창에 '유라시아 문화 포럼'이라고 쓴 표지가 붙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동서 문화의 교착지 사마르칸트에서 생산되는 종이 사마르칸트지는 채윤이 발명한 중국의 종이가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해진 길목이기도 하다.
동양의 끝자락에 붙어 있는 한국 땅에 유럽의 길목에 있는 사마르칸트의 많은 남녀들이 한국에서 일한 것, '안녕하세요' 등 한국 인사말을 예사롭게 들을 수 있음이 예상 밖이다. 수박을 나눠주던 남자들이 한국의 경제 발전이 경이적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주몽'과 '장보고'를 입에 올리며 호감을 나타낸다. 한국 경제와 한류의 융성기를 잘 발전하고 계승하는 일이 우리의 몫인 것을 먼 땅에서 확인하며 자부심과 사명 의식을 되새긴다.
중앙시장 건너편 도로에서 바라본 사마르칸트의 모습
23. 낙원의 문은 열려 있을까
8월 14일, 새벽에 일어나 로비에서 아침 산책을 함께 할 일행을 기다리니 대전의 정 선생이 나타난다. 전날 운전기사가 사히진다라는 곳에 내려 주었는데 돌아와서 동영상을 확인하니 제대로 본 것이 아니어서 다시 가보고 싶다고 한다. 전날 우리가 갔던 곳도 사히진다가 아니란 말인가?
그곳을 다시 찾아가니 전날 간 언덕배기보다 훨씬 아래쪽에 푸른 지붕의 돔 형식 건물들이 계단을 이루며 줄지어 서 있다. 입장료(5,000숨)를 내고 계단으로 올라서는데 동쪽 하늘이 밝아지며 아침 해가 장엄하게 떠오른다. 왕족과 이슬람 지도자 무덤들의 출입구가 화려한 문양의 채색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죽은 뒤의 시신도 호화 저택에 머물고 있음인가. 묘실마다 문이 닫혔는데 현장에서 작업 중인 남자가 반갑게 아는 체를 하며 15세기 초의 선지자 무함마드 000이라고 적힌 묘실로 안내한다.
몇 사람이 그 안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무슨 내용인지 몰라 천정의 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밖으로 나와 입구의 표지판을 살피니 '낙원의 문들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열려 있다.'(The doors of paradise are open to all believers)고 적혀 있다. 이어진 길을 따라 뒤쪽으로 나가니 전날 왔던 묘역과 연결된다. 그 길을 따라 대리석에 새긴 인물들의 면면을 살피다가 한 곳에 눈길이 머물렀다. 어머니, 아들 내외, 갓난 아이 등 일가족 4명이 1987년의 한 날에 사망한 가족 묘지다. 묘역을 지키는 관리인이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라는 손짓을 한다. 그들에게도 낙원의 문이 열렸을까? 아침에 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잠언 14장 27절)는 말씀으로 답을 얻는다.
사히진다의 초입에서 바라본 화려한 채색의 경관
이곳을 함께 찾은 일행과 대화를 나누며 1968년 체코의 자유화 운동 때 분신자살한 얀 팔라흐의 무덤을 30여 년이 지난 2002년에 아내와 함께 찾은 사연을 설명하니 크게 흥미로워 한다.(그 사연은 내가 쓴 책 '여행에서 배우는 삶과 문화'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오전 9시 반, 이틀간의 사마르칸트 여정을 마치고 '실크로드의 꽃'이라 불리는 부하라로 향하였다. 300여㎞를 이동하며 본 주변 풍광들과 비슷하여 차창으로 살피는 경관의 감흥이 약간 줄어든다. 뙤약볕 밑에서 척박한 땅을 일구는 손길들이 안쓰럽고 버스가 잠시 쉬는 동안 드넓은 목화밭에 직접 내려가서 하얀 꽃과 여물어 가는 열매를 손으로 만져 본 것이 좋았다.
부하라로 가는 길에 버스에서 내려서 살핀 목화밭
부하라 입구의 교차로에 500~700㎞에 이르는 도시들의 이정표가 적혀 있다. 2,500년의 역사를 지닌 부하라는 '수도원, 곧 성스러운 곳'이라는 뜻을 지닌 도시라는데 시내에 들어서자 넓은 땅에 심은 묘목들을 햇빛이 차단되도록 가리개를 씌운 모습이 이색적이다. 작열하는 태양빛에 나무들도 자라기 힘든 곳, 그곳에 수천 년 역사가 서려있고 동서 문명과 교역의 십자로가 자리 잡고 있음이 인상 깊다.
호텔에 도착하니 오후 2시가 조금 넘었는데 강하게 내리쬐는 햇볕이 예사롭지 않다. 가이드는 특별히 더운 것이 아니라 항상 이러한 것임에 유의하여 낮에는 외출을 삼가고 아침, 저녁으로 문화 유적들을 살피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한다.
찜통더위(호텔의 계기판에는 최고 41도, 최저 27도라고 적혀 있다.) 속에 현대식 아시아 호텔 체인에 머물게 되어 다행이다. 강렬한 햇볕은 따가운데 호텔의 수영장에 들어가니 한결 시원하다. 유럽인들일까, 여러 명의 백인들은 물속에 들어갔다가 따가운 태양을 정면으로 쬐며 일광역을 즐기기도.
오후 6시경에 호텔을 나서 부하라의 상징인 칼란 미나레트와 아르크(Ark) 성채 쪽으로 걸어갔다. 10~20여 분 거리의 가까운 곳이라서 찾아 가기가 쉽다.
칼란 미나레트는 기단부의 지름이 9개나 되고 높이가 46미터인 원통형의 첨탑인데 칭기즈칸이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휩쓸며 지나갈 때에 많은 문화유적들을 파괴하였는데도 이를 피하여 보존되었고 여러 차례의 지진에도 해를 면하여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특이한 건축물이다. 이 탑이 칭기즈칸의 화를 면하게 한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그가 이 탑 앞에 다가서는 순간 모자가 땅에 떨어졌다. 그는 엉겁결에 허리를 굽혀 모자를 주워 쓰며 자기 머리를 숙이게 한 비범한 탑이니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라며 물러섰다.'
성벽 옆 광장에서 바라본 칼란 미나레트 전경
성경에는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옹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그 성읍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전도서 9장 14~15절)는 구절이 있거니와 혹 이름 없는 지혜자가 이 도시에 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칼란 미나레트 맞은편에는 이슬람의 부흥을 누렸던 15세기 티무르 시대에 미르 아랍 마드리사(신학교)라는 교육 기관이 웅장하게 세워져 있다. 청백색 모자이크 타일로 정교하게 장식한 이 건축물은 이 시대의 건축 미술의 빼어남을 일깨워 준다. 건물 안은 많이 퇴락되어 관람객의 입장을 막고 있는데 문이 열려 있는 틈에 잠시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칼란 미나레트를 지나면 큰 광장이 나오고 그 옆에 거대한 성채가 우람한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성벽을 끼고 돌아 정문에 이르니 금줄을 쳐놓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 멀리서 성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돌아섰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그곳을 찾았더니 성문을 지키는 경관들이 비공식적으로 입장하는 편법을 허용하여 거대한 성채를 한 바퀴 돌며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시내 전경을 한 눈으로 조망하였다.
아르크 고성은 고대 부하라의 발상지로 둘레는 780미터, 면적은 4만 2천 ㎢의 큰 성채다. 여러 차례의 외침으로 크게 훼손된 것을 18세기에 복원하였고 1920년대까지도 성 안에 3천여 명이 거주했다는데 지금은 퇴락하여 '황성 옛터에…….'의 노래 가사처럼 옛 영화를 기억하기 힘든 쓸쓸한 정경이다.
칼란 미나레트와 아르크 고성을 오가는 길에 있는 고색창연한 유적지들에는 '실크로드 기념품 판매'를 내세운 상점들이 가득 들어서 있고 지날 때마다 '곤니찌와', '안녕하세요.'를 연발하며 손님 끌기에 바쁘다. 북을 좋아하는 친지가 떠올라 열심히 여러 악기들을 연주하는 인상 좋은 상인한테 작은 북 하나 사들고 몸집이 큰 여인의 가게에서 실크로드 탐사에 나선 것을 기리며 실크 머플러를 몇 개 골랐다.
아시아호텔에서 아르크성과 칼란 마나레트로 오가는 길의 여러 상점들
호텔에 돌아오니 저녁 8시가 지났다.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한 후 수영장 벤치에 누워 캄캄한 밤하늘에 하나 둘 빛을 드러내는 별을 헤아리며 수천 년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부하라에서 고요한 휴식을 취하였다.
24. 부하라에 뻗친 한국 바람
8월 15일, 광복67주년의 날이다. 중국의 CCTV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미묘한 관계를 분석하는 대담 프로를 방영하는 가운데 광복절 치사를 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모습이 화면에 비친다.
전날 아내가 다음과 같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건강하시리라 이곳은 문제없음이요. 올림픽 금이 13개라서 기뻐하였고 축구는 멋진 경기였습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항상 우리를 앞서던 일본을 멀찌감치 제치고 온 세계가 지켜보는 축구경기에서도 일본을 압도하였으니 금년의 광복절은 남다른 자부심과 뿌듯함으로 맞이해도 좋으리라. 원하기는 광복 67년이 곧 분단 67년인 것을 되새기며 하루 빨리 서울과 평양을 따로 알고 있는 코리아(~~스탄 사람들에게 코리아라고 말하면 대부분 서울인가, 평양인가 되묻는다.)가 아니라 남북이 하나 된 자랑스러운 코리아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이다.
아침 일찍 산책길에 나서는데 여러 사람이 뒤따른다. 목표지점이 없이 시내 쪽으로 나아가다가 공원 비슷한 곳에서 방향을 꺾으니 이름 모를 동상의 뒷모습이 나타난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피니 이븐 시나(980-1037)라는 이름이 새겨져있고 동상 안쪽으로 부하라 주립의과대학 캠퍼스가 보인다.
부하라 주립의과대학 앞에 세워진 이븐 시나의 동상
주인공이 곧 부하라의 대표적인 의사이자 철학자인 이븐 시나다. 의학에 철학과 심리학을 접목시킨 그는'의학법전'과 '치유의서' 등 평생240여권의 책을 남겼다고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아침 산책길에 부하라의 대표적학자의 발자취가 담긴 뜻밖의 소득을 얻게 되어 두 시간 동안 걸었는데도 발걸음이 가볍다.
7시 반에 호텔에 돌아와 풍성하게 차린 식당에서 아침을 든든하게 들고 이승희 씨와 함께 9시부터 다시 시내 탐사에 나섰다. 호텔에서 10여분 거리인 아르크성 부근에서 출발하는 미니버스에 오르니 처음에는 대여섯 명이던 승객이 점점불어 정원(17석)을 훨씬 넘는 초만원을 이룬다. 요금은 500숨(우리 돈으로는 200원), 시내요소를 두루 돌아 종점에 이르는 동안 줄잡아 40여명이 오르내리는 만원버스 안에서 시민들과 몸을 부대끼며 그들의 일상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다.
30여 분을 타고 가니 종점에 이른다.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겠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 조수가 다시 타고 가도 좋다고 손짓으로 권한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강한 햇볕을 쬐며 외곽으로 걸어가니 외진 곳에 깔끔한 슈퍼마켓이 보인다. 목을 축일 겸 안으로 들어가 콜라와 물을 한 병씩 고르니 상점주인 남자가 한국 사람이냐고 묻는다. 몇 년간 한국의 이천에서 일했다는 그는 한국어를 제법 구사하며 혼자 가게를 지키느라 같이 가지 못하여 미안하다고 말한다.
보건소 직원 및 수퍼마켓 주인과 함께
길가의 그늘에서 잠시 쉬다가 특이한 모양의 건물이 눈에 띄어 그쪽으로 나아가니 도중에 보건소 같은 건물이 나타난다. 안으로 들어가니 흰 제복을 입은 여직원이 부슨 일이냐고 묻는듯하다. 잠시 뒤 책임자 여성이 다가서는데 역시 대화가 안 된다. 여러 명의 여직원이 몰려들어 영어하는 분이 없느냐고 물으니 묵묵부답이다. 손짓으로 같이 사진 찍자고 요청하니 사양하지 않고 응한다.
보건소를 나오자 한 여성이 안으로 들어서고 정문에 차가 한 대 서 있다. 깔끔한 운전사가 일본이이냐고 묻다가 한국인이라고 답하니 반색을 하며 어떤 일로 보건소에 왔느냐고 묻는다. 시내 탐방 차 시발점에서 종점까지 버스타고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하니 자기 차로 종점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차에 오르라고 권한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서 바꿔준다. 그도 한국통인 듯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사마르칸트에서 의외로 한국통이 많은 것에 놀랐는데 더 외진 도시인 부하라에도 한국바람이 불고 있음이 의외다.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길 가던 한국처녀가 인사를 건넨다. 어째서 혼자인가 물으니 아버지가 부하라의 학교에서 컴퓨터를 가르치고 있어서 한 달간 머물고 있다고 말한다. 전통과 역사의 도시에서 오랜 유적과 문화를 익히는 것도 좋지만 사람 사는 냄새를 맡고 실제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더 기쁘다. 시내에는 삼성전자와 LG의 점포들이 여러 개 있고 현대버스와 대우자동차들이 많이 달리고 있다.
버스에서 내리니 낮 12시, 한낮의 햇볕이 따갑지만 호텔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기보다는 땀 흘리는 김에 한두 곳 더 둘러보는 게 낫겠다 싶어 종점에서 거슬러 올라가니 아르크성에서 500미터쯤 되는 맞은편에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건물이라는 사마니 묘당이 나타난다. 892~943년간에 51년이나 걸려 지었다는 이 건물은 특수한 건축기법으로 인해 고고학계와 건축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는데 그 부분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역사적인 건물을 근접해서 지켜 본 것으로 만족한다.
그 다음 찾은 곳은 압둘 아지시오 마다라사시라고 새긴 건물인데 천정에서 지하까지 빛이 쬐이도록 설계한 건물의 주인공과 용도가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하여 유감이다. 이곳을 먼저 둘러보고 나오던 여러 명의 처녀들이 함께 사진을 찍자고 달려든다. 우리도 한때 서양인을 보면 말을 걸고 사진도 찍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는데 우리가 그들에게 친근한 이웃이 된 셈일까?
버스터미널과 연계된 시장에 들러 과일과 빵을 사들고 호텔에 돌아오니 오후 두시가 가깝다. 두어 시간 방에서 쉬다가 수영장에서 몸을 풀고 저녁을 든 후에 호텔 앞의 아름다운 연못인 라비 하우즈 주변을 산책하고 돌아오니 아직도 잘 시간이 이르다. 전날처럼 수영장의 벤치에 누워 억겁을 달려온 별빛을 벗 삼아 무심의 경지에 빠져든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샤마니 묘당과 현대여성들이 대조적이다
25. 관광에서 관통으로
8월 16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수영장 벤치에 누워 밤하늘의 별들을 벗 삼아 두 시간 쯤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5시 반에 산책길에 나서 호텔 뒤편에 있는 서민주택가를 거쳐 아르크 성벽을 한 바퀴 돌았다. 이른 시간인데 양젖인지, 소젖인지를 팔러 나온 행상들이 전을 펴고 과일상들도 한 몫 거든다. 포도를 파는 청년에게 다가가 400솜(약 150원)을 펴 보이며 그만큼만 달라고 손짓으로 표현하니 네 가지 종류의 포도를 각기 한 송이씩 봉지에 달아준다. 제값일까, 낯선 이방인이 푼돈을 내놓으니 덤으로 더 주었을까? 채소와 과일, 빵, 버스 요금 등이 매우 저렴하고 의복과 주거비도 큰돈이 들지 않을 터이니 의, 식, 주 등의 기본생계는 그런대로 해결하기 쉬운 편이라 여겨진다.
아르크성 앞에 아침 전을 편 과일상들, 직접 재배한 산물들을 팔고 있다
8시 반, 부하라를 출발하여 타슈켄트로 향하였다. 10시간이 소요되는 지루한 이동이다. 여행의 첫 단계는 스치는 풍광을 감상하는 것, 가는 길에 들판과 사막, 농가와 소도시의 모습들을 되짚어 본다.
오후 1시, 중간 지점의 휴게소에서 한 시간 머물며 점심을 들고 줄기차게 달려 타슈켄트 첫날 묵었던 그랜드플라자호텔에 도착하니 오후 6시 반이다. 한 달여 긴 여정 마지막 코스에 이르기까지 GPS에 찍힌 육로 이동거리가 약 6천km, 지구 지름의 절반가량을 순례한 것이다. 감기와 배탈로, 혹은 발을 삐어 고생한 이도 있고 심한 알레르기증상으로 의사가 왕진 와서 여러 시간 병세를 지켜보는 사례도 있었지만 일행 모두 무사히 강행군의 일정을 잘 소화한 편이다.
나는 여행을 삶에 비유하면서 풍광을 감상하는 관광(觀光), 자연과 그 속에 담긴 사연을 경청하는 관음(觀音, 열월의 단종 묘에 있는 관음송에서 그 뜻을 새겼다), 기록을 통하여 역사와 문화를 익히는 관서(觀書, 도산서원에 새긴 주희의 글에서 익혔다.), 자신과 이웃에게 너그러운 인격을 담은 관덕(觀德, 제주에 있는 무예수련원의 이름이 관덕정이다.)의 단계를 체득하는 것이라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이번 여행에서 다섯 번째 단계로 역사와 문화의 통시적 이해와 달관의 경지에 이르는 관통(觀通)의 이치를 깨쳤다.
기독교의 위대한 종, 사도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장 11~12절)고 술회하였거니와 이번 순례의 길에서 인도의 열악한 침대기차 속에서와 타슈켄트 호텔의 디럭스침대에서 똑같이 숙면을 취하는 등 비천에 처할 줄도, 풍부에 처할 줄도 알게 하는 깨우침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를 관통하는 지혜와 지식의 길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는 느낌도 갖게 되었다.
라비하우즈 연못의 오래된 나무를 배경으로
친지가 다음과 같은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 벌써 오시네요. 건강, 무사하시지요? 무더위 강행군 이겨낸 금메달, 찬사와 감탄을 드립니다.'
그렇다. 주변에서 찬사를 보내며 금메달을 수여할 만큼 무더위와 강행군을 이겨내며 단순한 관광에서 고차원의 관통으로 승화된 순례의 길이 된 것을 감사하며 기뻐한다. 저녁식탁에서 룸메이트와 함께 서로를 존중하며 이번 여정을 무사히 마친 것을 자축 하는 건배를 하였다.
추신,
타슈켄트로 돌아오는 길에 품격이 있어 보이는 현지인들이 주유소의 나무그늘에서 마시는 차를 함께 들었다. 김우란 씨가 이를 지켜보며 흥미로운 표정이다. 인정은 서로 통하기 마련, 손짓으로 불러 한 잔 더 따랐더니 아주 구수한 맛이라고 좋아한다. 귀국하여 이틀 후 노인건강타운에서 '식객(2) - 김치전쟁'이라는 영화를 감상하였다. 김치경연의 결승에 오른 두 사람에게 주어진 테마는 '통(通)이다. 한쪽은 '마음의 맛', 한쪽은 '어머니의 맛'으로 승부를 걸었는데 결과는 두 가지 맛이 하나로 통하였다. 관통(觀通)이 관통(貫通)으로 연결되는 사례를 음식에서 찾게 될 줄이야…….
주유소의 나무그늘에서 현지인들과 차 한 잔 마시며
26. 고난과 보람이 교차된 대장정의 마무리
8월 17일, 한 달여 실크로드대장정의 마지막 날 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에서 가까운 지역을 두 시간여 돌아보았다. 박물관, 미술관, 대공원, 티무르광장, 브로드웨이 등을 살피는 동안 나무 숲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장면이 아름답다.
도심을 흐르는 하천에서 몸을 씻는 남자, 쓰레기통을 뒤지는 여인, 요소요소를 지키며 출입을 통제하는 경찰관들을 접하며 낯선 도시의 편린을 눈 여겨 보았다. 경찰관이나 주요시설을 카메라에 담지 말라는 가이드의 주의가 있었는데 지하철에서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니 어느새 먼 곳에 있는 경찰관이 다가와 손짓으로 점잖게 금지 표시를 한다.
1967년의 지진피해 때 자식을 껴안은 어머니 상, 어머니는 언제나 위대하다
귀국 편 비행기는 저녁 10시 20분, 호텔의 체크아웃을 12시 까지 해야 하므로 마지막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모두들 열심히 궁리 중이다.
오전 9시에 가까운 거리에 있는 박물관을 찾으니 문이 닫혀있다. 발길을 돌려 지하철을 타고 브로드웨이로 향하였다. 사람들로 붐빌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거리가 한산하다. 광장의 중앙에 새로 지은 듯한 큰 건물이 자리 잡고 있어서 도로변에 머물고 있는 젊은 운전자에게 물으니 도서관이라고 알려준다.
브로드웨이에 들어선 도서관이 크고 산뜻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세 곳의 출입문 가운데 한곳이 열려있다. 안내원이 검색을 받고 들어가라고 일러준다. 1층의 전시실에 우즈베키스탄의 역사와 문호를 화려한 칼라로 담은 책이 눈에 띈다. 키릴문자와 영어로 설명이 되어 있는 큰 책을 주마간산하듯 일별하며 우즈베키스탄의 역사, 자연, 문화 생활상 등을 개략적으로 살폈다. 우리를 지켜보던 젊은 직원이 일정한 요금을 내고 열람증을 받으면 도서관시설 전체를 돌아 볼 수 있다며 앞장서서 안내한다.
열람에 필요한 내부적인 절차를 밟으니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직원이 동행하여 도서관전체의 방을 일일이 안내한다. 박물관이 닫힌 덕분에 색다를 코스의 역사문화탐방을 할 수 있어 좋은 기회였다. 외국자료 열람실에는 한국을 소개하는 책자도 여러 권 비치되어 있다.
한 시간 넘게 도서관을 둘러보고 호텔에 돌아와서 점심을 챙겨들었다. 점심메뉴는 이승희 씨가 만들어준 참깨주먹밥. 전날 산 소시지와 포도를 곁들여 먹으니 별미다. 참기름까지 넣어 만든 정성이 깃들어서 맛이 더 좋았다.
도서관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역사와 문화, 자연을 살폈다
12시 지나 체크아웃을 한 후 가방을 호텔 보관소에 맡기고 외출 길에 나섰다. 지하철역에서 멀리 가는 쪽의 행선지를 물으니 한국어를 아는 청년이 다가와 인사를 한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어를 배운 후 서울의 GS건설 본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휴가차 우즈베키스탄에 왔다고 자기소개를 한다. GS건설이 우즈베키스탄의 대규모 가스관 매설 공사를 맡아 시공하고 있어서 채용되었다고 한다.(명함에는 GS건설 플랜트사업지원팀 사원 산자르'라고 적혀있다.)
지하철의 종점 부근에 이바드롬 바자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 갔더니 시장은 그곳에서 더 가야하고 햇볕은 견디기 힘들 만큼 따가와서 시장 탐방을 포기하고 호텔로 되돌아 왔다. 호텔로 오는 길목에 슈퍼마켓이 있다. 그곳에 들러 더위를 식히며 진열품들을 살피니 한국산 백설탕이 수북이 쌓여 있는 코너도 있다. 콜라와 비스킷을 사들고 호텔에 돌아오니 여러 사람이 로비에서 담소하고 있다. 시간 여유가 있어 글쓰기 좋은 기회다. 보관소에 맡겨둔 배낭을 찾아 노트를 꺼냈다.
잠시 이번 순례의 길을 회상하니 빈부가 섞여 사는 인도의 역동적인 모습, 간다라 지방에서 형성된 초기불교문화를 익혔고 험산준령이 첩첩이 쌓인 파키스탄의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30여 시간 종주하며 만년설산의 위용을 눈이 시리게 목도하였다. 세계의 장수촌 훈자 마을과 인접 지역의 오아시스에서는 숨 막히는 생존 경쟁에 찌든 심신을 추스를 수 있어서 좋았고 태고의 신비가 담겨 있는 파미르 고원과 천산산맥의 눈부신 경관에 전율하였다. 키르기스스탄의 호수와 초원, 우즈베키스탄의 광활한 평원과 면면히 이어온 실크로드 요충지들의 찬란한 유적들에 경탄하였고 곳곳에서 만난 인정이 넘치고 순수함을 간직한 이방의 친구들이 반가웠다. 또한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역사와 문화를 관통하는 삶의 지혜와 세계로 뻗어가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재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오후 7시, 타슈켄트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세 사람씩 나누어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였다. 호텔에서 공항까지는 20여 분, 에어컨이 설치된 고급 택시요금 은 약 5달러로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공항 도착 직전에 석양으로 넘어가는 붉은 태양이 긴 여정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듯 강렬하고 화려하다.
저녁 10시 20분에 출발하는 아시아나 항공기는 연결 편 도착이 늦어져서 한 시간 늦게 출발하였으나 편서풍의 영향인가, 인천공항 도착 시간은 예정 시각보다 15분 정도 늦었다. 저녁 9시에 대한 항공이 출발하였는데 한 시간 간격인데도 기내는 만원이다.
간단한 입국수속을 끝내고 공항출국장으로 나오니 10시가 가깝다. 11시 20분에 출발하는 광주행 고속버스표를 예매한 후 공항 출국장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리는데 KBS 1TV의 '걸어서 세계 속으로'의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다. 취재 팀이 간 곳은 방금 다녀온 우즈베키스탄이다. 휴양지로 각광받는 아름다운 호수와, 스위스보다 맑은 공기를 자랑하는 명소를 소개하는데 이어 며칠 전에 집중 탐사했던 사마르칸트의 낯익은 경관에 눈길이 쏠린다. 화면에는 사마르칸트의 중앙시장에서 며느리와 함께 식품을 팔던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등장하고 결혼 축하파티에 참석한 것을 되새기는, 화려한 결혼식 풍경도 감회가 깊다. 귀국시간에 맞춰 우즈베키스탄 편이 방영된 타이밍이 절묘하여 공항에서 지루하게 기다리는 시간을 적절하게 활용한 셈이다.
고속버스에서 바라보는 우리 강산의 풍경이 아름답고 수려하다. 고되고 힘들었지만 보람 있었던 실크로드 대장정을 무사히 마치고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고난의 역정을 함께 한 정강이에는 여러날 괴롭힌 상처의 흔적이 훈장처럼 남아 있다. 긴 여행길에 격려와 성원을 보낸 가족, 친지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한 달 간 고락을 함께 한 일행들이여, 일상으로 돌아가 활기 있는 삶을 누리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