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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온 순간 고열(高熱) 2
“태민아, 너는 너희 형 얼마만큼 사랑해?”
“얼마만큼? 참 뜬금없네.”
태민이가 헛웃음을 흘리며 앱솔루트로 온더록스를 만든다.
“궁금해서 그래. 말해봐.”
난 온더록스에 토닉워터를 따른다.
“글쎄, 네가 듣고 싶은 대답이 뭔지 알겠다보니 선뜻 대답하기가 그러네. 별로 위로가 안 될 것 같아.”
“너는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야?”
“그다지 고민 안하거든. 섹스야 많이 줄었지만 스킨십은 부족함 없으니까. 난 그걸로 되는 것 같아. 우리 형은 어떨까마는.”
태민이는 5년차 커플이다. 1, 2년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쳐도 5년이나 7년이나, 이쯤 되면 별반 차이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나도 섹스는 많이 안 해도 된다. 달려드는 시기가 끝났다는 거 알아. 자연스러운 거고, 적응할 수 있어. 나 역시 충분히 해주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열정이 끝나면 다음엔 신뢰라고 하는데 내가 그러질 못하고 있다. 형이 날 얼마큼 사랑하는지, 세월에 그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어딘가의 자격지심과 피해망상으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난 우리 형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애인이라는 걸 드러내줬음 좋겠어. 그들 보라고 그냥 애인처럼 안아줬음 좋겠어. 정작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위에서 자꾸 식었다, 건조하다, 헤어질 때 됐다, 이렇게 부추기니 정말 그런 건가 싶은 생각이 들더라.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 형에게 다가가면 주위에선 또 치댄다 그러고.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되니?”
“어떻게 할 거 없어. 부러워서 그러는 걸. 농담 삼아.”
“처음엔 나도 그렇게 받아들였지. 오히려 기분 좋았어, 그렇게 생각하면. 근데 이게 계속 반복되다보니 의도치 않게 생각이 딴 방향으로 흘러가.”
“혹시 그런 거 아닐까? 시간이 흐를수록 헤어질 수 없다는 마음이 더 강해져서 자꾸만 말로 확인받고 싶어지는 거.”
“그런가?” 난 짐짓 고개를 끄덕인다. “어쩌면 그럴 수도.”
“참 신기해. 우리가 5년, 7년이라고 하면 남들은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사귀냐고 해. 그런데 그렇게 되는 걸? 갈수록 더. 이건 겪어본 사람만 아는 것 같아.”
태민이 말이 맞다. 시간이 갈수록 헤어질 수 없다는 마음이 오히려 더 강해진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몸은 안 그러면서 마음만 그러는 거.
난 온더록스를 길게 들이켠다. 술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얼음이 잔에 부딪쳐 달그락 거린다. 끝까지 마실 거야, 기울여도 달그락. 녹아봐, 흔들어도 달그락. 아쉽게 내려놓아도 달그락.
뭔가 마음이 깨어나는 듯한 나직한 소리.
작은 울림.
“한잔 더 할 거야?”
물어보나마나지. 요즘 난 술이 필요해.
2화 행동으로 보여주는 카니발
5월의 초입, 오늘처럼 뜨거운 햇살이면 이미 초여름이나 다름없다. 정말 꽃구경 한번 제대로 못하고 봄이 지나가려나. 하기야 바빴으니까. 6월까진 계속 그럴 예정. 하지만 그 다음 달엔 계획된 사이판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더 등골 빠지게 일해야 한다. 7월의 여행이 더 즐거워지기 위해서.
‘그나저나 이렇게 늦을 사람이 아닌데…….’
난 스마트 폰을 꺼내 시계를 보았다. 약속시간이 20분이나 초과했다. 혹시나 싶어 ‘룰 더 스카이’에 접속하여 그의 섬으로 가보았다. 밭의 작물이 모조리 암갈색으로 썩어있다. 그의 패턴이라면 하루짜리 데이지를 아침에 심어 다음날 아침에 수확하는데 이렇게까지 돌보지 않았다는 건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증거. 덜컥 조바심이 난다.
‘이거 전화를 해야 돼, 말아야 돼.’
하자니 독촉하는 것 같고, 안하자니 걱정되고. 난 그의 연락처를 검색하여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재빨리 껐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으려고. 도리어 안 좋은 생각 때문에 부정 타.’
난 하늘 한번 쳐다보고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가 이렇게 늦을 리 없다. 난 이내 재빨리 껐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지. 무엇때문에 전화 한통을 속 시원히 못해.
때마침 은색 제네시스가 끼이익- 다가와 선다. 급한 심정을 대변하듯 요란한 소리로 급정거한다. 이어 윈도우가 내려가며 도일 씨의 모습이 보인다.
“늦었어요. 미안해요.”
그를 보니 이해가 간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앞머리. 왁스를 놓칠 사람이 아닌데 그랬다는 건 긴박했다는 증거.
오히려 보기 좋다. 참 착해 보이셔.
“괜찮아요.” 난 그의 차에 오르며 말한다. “늦는 사람이 기다리는 사람보다 초조했겠죠. 사고가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내심 걱정했거든요.
“호텔예약에 착오가 있어서 수습하는데 시간이 걸렸어요.”
호텔예약?
”자고 오세요?”
“하루요. 괜찮죠?”
왜 나한테?
“혹시, 저도 자고 오나요?”
“네.”
네???
“어, 그런 얘긴 없었잖아요.”
“혼자 올라가게 할 순 없잖아요. 저는 내일 하루 더 스케줄이 있어요.”
“하지만 전 오늘 큐레이터 미팅 외엔 스케줄이 없는데요?”
“부산까지 거리면 출장비가 이틀로 책정 되요. 호텔 잡을 수밖에 없었어요. 회사규정상.”
“그런 거예요?”
“이미 결재까지 끝났어요.”
“네…… 아~”
난 아는 척했지만 잘 모르겠다.
회사규정이라니 맞는 것도 같은데, 아무래도 사회생활이 처음이라.
“그럼 출발합니다.”
그가 핸드브레이크를 내리며 액셀러레이터를 서서히 밟는다. 순간 스테레오에서 ‘바우터 하멜’의 ‘브리지’가 흘러나온다.
산들바람.
‘뭐지, 이 사탕 같은 팝송은?’
출장이랑 안 어울려. 난 곁눈질로 그를 빤히 쳐다본다.
“왜요?”
내 시선을 의식한 그가 고개만 기울이며 묻는다.
“커피 드리려고요.”
난 스타벅스 더블샷 캔을 건넨다. 아메리카노만 마신다는 거 안다. 하지만 한번쯤은 이런 거 먹어도 된다. 아메리카노는 미국에서 살다온 나도 안 먹어. 너무 쓰잖아.
햇살좋은 날 살짝 열린 차창으로 바람이 흘러들어온다. 그의 짧은 머릿결이 바람에 흔들린다. 부드러이 내 쪽으로. 가르마가 내 쪽으로.
그는 알까? 당신은 이 모습만으로도 친절하다는 걸.
정오쯤 되어 부산과학관에 도착하자 그는 일사천리로 스케줄을 진행했다. 이렇게까지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마는 그야 워낙 프로니까.
“입체영상은 스팟 하이라이트를 주는 게 효과가 좋지만 학습영상이라는 걸 고려하면 스토리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해야 되요. 그래야 더 몰입할 수 있거든요.”
과학관 큐레이터인 그는 미술사학과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고 했다. 지적인 이미지답게 이곳 영상물의 전반적인 시나리오를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문득 그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언뜻 보기엔 30대 초반 같은데. 나는 언제가 되어야 이런 프로페셔널을 갖출 수 있을까.
“콘티를 보니 장소가 이동하는 씬에 점프 컷이 있네요. 이건 최소로 줄여야 해요. 뚝뚝 끊기는 느낌을 주거든요.”
음, 그렇담 난 필통을 열고 스테들러 형광색연필을 꺼낸다. 이건 잉크젯세이프 기능이 있어 본래의 프린트가 번지지 않는다. 당신이 부산의 프로페셔널이라면 난 서울의 프로페셔널. 아직은 흉내만 내는 단계지만, 중요한 건 내게 스테들러 형광색연필이 있다는 것.
“그럼 얘랑 얘랑은 살리고, 얘는 커팅하는 게 좋겠네요?”난 살릴 장면엔 노란색, 커팅할 장면엔 주황색을 칠했다. “그리고 얘는 앞당기고, 얘는 뒤로 미루고.” 순서 바꿈이 필요한 장면은 연두색으로 화살표를 그렸다.
이러고 보니 입체영상 콘티가 파스텔 톤으로 아주 화사해졌다. 왠지 모르게 뿌듯하다. 혹시 ‘이런 콘티 부산에서 본적 있나요?’하고 물어본다면 오버려나. 그나저나 ‘씬’을 ‘얘’로 말한 건 실수였다. 내가 왜 그랬지. 전문가답지 못하게.
“수정감각이 좋으시네요. 대부분 수정이라면 진저리를 치는데. 혹시 포트폴리오 가져온 거 있으세요?”
포트폴리오는 왜? 당연히 없는데.
“저는 아직 커리어가 없어요. 플라네타륨 시나리오 작업한 것밖에.”
“아, 네.”
“왜요?”
혹시 초보 티가 많이 났나?
“스타일을 보고 싶었어요. 대사가 특이해서.” 그가 콘티의 내레이션 부분을 가리키며 말한다. “어쩐지, 초등교육용이 아닌 것도 같고.”
이 사람도 그런다. 요즘 애들의 성장도를 너무 과소평가해. 우리 때야 볼 것 못 볼 것 본의 아니게 구별됐다지만, 지금의 이 스마트한 시대는 구글이 모든 걸 한 번에 알려주고 있다. 나 컸다고 애들 어린취급하면 서운해 하지.
“제가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조숙한 편이어서요.”
난 콘티를 덮으며 말했다. 행여 대사까지 관여할까 조바심 났다.
“나쁘지 않다는 뜻이에요. 진부하지 않고, 독창적인 느낌이랄까?”
그가 지적인 눈매를 가늘게 하며 빙긋 웃는다.
“그렇다는 거죠?”
나도 빙긋~
“그럼요.”
그가 또 빙긋~
“그런데 혹시 여기 과학관 자료들을 캠코더에 담아도 될까요?”
“무단배포만 안 한다면 가능해요.”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럼 따라오세요. 지구환경실과 해양 전시관 쪽을 소개해드릴게요.”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전시관 쪽으로 이끈다. 내가 이렇게 친근한 이미지였나? 어느새 그의 손이 허리까지 내려와 있다. 나쁜 느낌은 아니지만 후배 챙겨주는 정이 좀 과하신 게 아닌가.
“그만 가죠?”
그때 어디선가 도일 씨가 다가오며 말했다. 그러자 내 허리에 있던 그의 팔이 멀어졌다.
“아직 전시관을 다 못 둘러봤는데요?”
“때론 봐서 독이 되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도 기본적인 전시물과 영상물을 봐야……”
“아뇨.” 순간 도일 씨가 내 말을 자르며 완강히 단언한다. “바다 속은 ‘니모를 찾아서’, 숲속은 ‘벅스 라이프’ 보면 되요.”
그러고는 내 팔을 잡고 서둘러 과학관을 빠져나간다.
어쩌자고 자기 볼일 끝났다고 내 볼일을 막아버릴까.
“완성물 후지게 나오면 도일 씨가 책임져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뭐야, 책임까진 안지겠다는 거네.
우린 공영주차장에 차를 파킹하고 시내로 들어섰다. 예정에 없던 1박이라 속옷과 양말을 사야했다. 불편한 정장도 벗을 겸 겸사겸사 쇼핑도.
“도일 씨도 사야 되요?”
“저는 챙겨왔어요.”
왠지 이럴 줄 알았어. 나한텐 언질도 안줘놓고.
내가 심드렁한 표정을 짓자 그가 말을 꺼낸다.
“제가 사드릴게요.”
뭐를?
“속옷을요? 됐어요.”
“제가 지불할게요.”
“아니에요. 속옷 사주는 건 왠지…….”
“부담 갖지 말아요. 법인카드로 할 거니까.”
“그건 더 이상해요.”
내가 속옷 고르고 당신이 지불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한데, 그걸 법인카드로 긁겠다니. 회사에 나 속옷 사줬다고 기록남길 일 있나.
부득부득 긁겠다는 걸 난 애써 막으며 내 카드로 속옷과 양말을 지불했다. 하지만 추리닝을 사러 스포츠 매장에 갔을 땐 그러세요, 하고 지불권한을 넘겼다. 법인카드로 안 긁는다기에.
더구나 난 나이키 가려고 했는데 본인이 아디다스로 끌고 갔다. 내가 입을 건데도 자기가 골랐다.
난 왠지 어이가 없어서 “운동화도 필요해요!” 고가의 아디제로 러닝화까지 그의 카드에 맡겼다. 이것보다 더 비싼 게 없다는 게 애석했다.
“배고프죠? 호텔 체크인하고 식사해요.”
그러고 보니 오늘 변변히 먹은 게 없다. 여기로 오면서 마신 스타벅스 캔커피랑 과학관에 비치된 과자 몇 개 집어먹은 게 전부. 부산에 도착하면 의당 밥부터 먹겠지 했는데 도일 씨가 일을 서둘렀다. 덕분에 일찍 끝나 여유시간이 길어졌다만 이게 꼭 좋은 건지. 밥 얘기를 하니 갑자기 허기가 진다.
해운대에 들어서자 차 안으로 바다냄새가 흘러들어온다. 아직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조금씩 느껴지는 설레임, 두근거림. 순간 빌딩사이를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보이는 바다라니!
“와아, 진짜 장난 아니다! 해운대는 처음 와보는데 무슨 신세계 같네요!”
기대보다 한발 앞선 풍광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하얀 모래사장을 경계로 한쪽은 도시, 다른 한쪽은 바다. 중간지점 없이 극과 극으로 점프한 느낌.
“혹시 바다 처음 봐요?”
“설마요. 동해 쪽은 가봤는데 여기와는 느낌이 사뭇 달라서요.”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단번에 풀리는 기분. 가슴이 흥분으로 두근거린다. 해변에 위치한 파라다이스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두근두근.
“여기가 인성씨 룸이에요.”
그가 키를 건네자 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와! 이거 전망도 작살이잖아! 완전 대박!”
세피아 색으로 통일된 안정적인 룸의 분위기완 달리,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오션테라스.
“작살. 대박. 그런 멘트 하네요. 교육용 시나리오 쓰는 사람이.”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아, 진짜 여기 쩐다.” 난 슬그머니 그를 쳐다보며 말한다. “여기. 완전. 대박. 캐쩔어!” 또박또박 천천히.
무엇이든 보이는 것이 정반대. 타협 없이 극과 극으로 치닫는 반전. 뭔가 꽉 조여진 나사가 느슨하게 풀리는 느낌이다. 해선 안 되는 일도 가능할 것 같은 열쇠를 쥔 기분이랄까.
“저는 옆방이에요. 샤워 좀 해야겠으니 1시간 뒤에 이리로 올게요.”
“로비에서 봐요. 저는 씻고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호텔 구경도 좀 할 겸.”
“그래요, 그럼.”
그가 나가자 난 서둘러 씻고 젖은 머리로 후다닥 내려갔다.
어느새 하늘이 석양에 물들어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 이끌린다는 것이 이런 건가. 경치가 내뿜는 황홀경에 발걸음이 자꾸 밖으로 향한다.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전화하시겠지.
난 현관을 빠져나가 정원에 심어진 노송 아래 벤치에 앉았다.
“흐음- 바다 냄새.”
향긋한 비린내가 바람에 실려 코끝에 찡하게 스며든다.
“여기 있었네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짧은 머리가 올곧게 서있다. 다시 예전의 샤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여기에서까지, 이 여유로운 시간에 꼭 가운데를 세워야할까 싶었지만, 뭐 그의 스타일이니.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여기까지 나왔어요.” 난 벤치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부재중 통화는 없다. “근데 저 어떻게 찾으셨어요? 전화도 없이.”
“찾아졌어요. 추리닝 보고.”
“아……!”
난 그제야 알았다. 당신이랑 나랑 추리닝이 똑같아. 그는 검정, 나는 파랑. 색깔만 다르다 뿐 삼선 아디다스 디자인.
누가 보면 커플인줄 알겠다.
“활어회 먹어요? 제가 잘 가는 곳이 있는데.”
이제 보니 그의 모습에서 여유와 생동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정장과는 사뭇 다른 느슨한 느낌. 반면 트레이닝복 위로 드러나는 탄탄한 근육.
이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오늘 내 하루는 그저 그랬을지도.
“그럼요, 부산에 왔으니 활어회 먹어야죠.”
왠지 기분이 들뜬다.
“좋아해요?”
석양을 담아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그의 눈.
“네?”
난 그의 물음에 주어를 놓쳐 되물었다.
“활어회요.”
“아, 네. 그럼요.” 활어회가 주어였지. “그렇죠.”
“네?”
어느새 부드러워진 그의 눈매가 무언가를 묻는다.
“좋아한다고요.”
활어회.
따각따각, 따각따각, 딱딱딱!!
‘이게 무슨 소리지?’
내 손끝에서 나는 소리였다. 무의식중에 난 회가 나올 때까지 젓가락 끝을 테이블에 내리꽂고 있었다. 나름대로 젓가락을 가지런히 하는 동작이었는데 소리가 너무 컸다. 하지만 배가 너무 고픈걸. 이 시간까지 굶다시피 했으니. 스끼다시 샐러드는 아까 다 먹었고, 메추리알도 내가 다 까먹었다.
“손님 무지 많네요.”
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2층으로 된 조립식 건물인데 사람이 여기저기 북적북적 거린다.
“전에 왔을 땐 1층짜리 건물이었는데 그새 한 층이 더 올랐네요.”
“그렇다면 내년엔 한 층 더 오르겠네요.”
정말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때 천사채 위로 수북이 담긴 싱싱한 회가 나왔다. 광어도 있고, 도미도 있고, 잘 모르는 것도 있다.
“이게 제일 맛있는 거예요.”
그가 가리킨 회엔 은비늘이 붙어있었다. 신기하면서 처음 보는 것.
“이건 이름이 뭔데요?”
“어……”
순간 그의 눈동자가 천장으로 향한다. 모르시나 보다. 하하.
“그럼 맛볼까요?”
난 한 점을 집어 초장 없이 입에 넣었다. 음, 혀끝에서 살살 녹지만 무엇이 특별한지는 잘. 아직 회를 더 배워야 하나보다.
“어때요?”
그가 내 대답에 기대를 한다.
“완전 쩔어요! 대박!”
난 기대에 부응했다. 그도 피식 웃는다.
“도일 씨는 여기서 어떤 회를 가장 좋아하는데요?”
“저는 도미요. 인성 씬?”
“저는 광어요.”
“그건 너무 기본인데.”
“그래서 좋아요.”
여태껏 그리 살아왔다. 부모님은 미국에 계신 채 나 혼자 여기로 건너왔다. 그리고 철호 형의 보호 아래 지금까지 기본에 충실하며 살아왔다.
우린 서로의 잔에 소주도 따라 천천히 넘겼다. 바다를 보며 마셔서 그런가? 소주가 하나도 쓰지 않고 달콤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
사실 걱정했었다. 이 사람과 어색하지 않을까. 같이 있으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괜한 걱정이었다. 여기가 바로 그런 곳.
우리가 해치운 소주가 어느덧 여섯 병. 그것도 근 두시간만에.
대단하지? 이렇게 먹고도 멀쩡하다니.
“나갈까요?”
그가 손짓하는 모션을 보고서야 취했다는 걸 느꼈다. 나가자며 화장실을 가리킨다.
“갠찬으세요?”
이렇게 말하는 나 또한 멀쩡하지가 않네. 혀가 본의 아니게 꼬인다.
밖으로 나오자 이미 어두워진 풍경.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뜨겁게 달궈진 얼굴을 시원스레 식혀준다.
“쌀쌀하지 않아요?”
이어서 다가오는 열기. 그의 온기. 그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다른 어깨는 자연스레 그의 가슴에 닿는다.
술 때문인가, 차분하지 않은 그의 심장박동이 내 몸에 뜨겁게 전해진다.
“전혀요.”
이러면 누구라도 따뜻할 수밖에.
행여 나라도 정신이 온전했다면 어땠을까? 그의 느슨해진 모습은 언제든 환영한다만, 이런 예고 없는 행동은 나로 하여금 생각을 흩트리게 만든다.
그 일만 아니었다면 우린 지금쯤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됐을지.
난 흘러내린 앞머리를 입바람으로 넘기며 생각을 떨쳐낸다.
여기서 그러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조금 걷다보니 저만치 생각지도 못한 카니발이 등장했다. 규모는 작았지만 인형사격장도 있고, 로데오도 있다. 더 놀라운 건 네온이 가득 반짝이는 바이킹도 있었다!
“와! 우리 저거 타요!”
난 그의 팔을 잡아끌며 바이킹 쪽으로 향했다.
“토 나올 수 있어요. 술도 꽤 했는데.”
허거걱, 뭐야. 당신은 뭐든지 잘하면서.
“그럼 술도 깰 겸 사격 한 게임 어때요?”
난 카운터로 다가가 만원을 건넸다. 총알이 담긴 바구니를 두 개 준다. 도일 씨는 자신 있다는 듯 이미 총을 골라 조준하고 있다.
“틱.”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
“이거 고장인가.”
그가 애꿎은 총을 흔들어댄다.
“총알을 안 끼우셨어요.”
난 피식 흐른 웃음을 감추며 그의 총구에 총알을 끼웠다. 그러자 그는 자못 진지하게 과녁에 조준한다.
“저는 저기 뽀로로 인형……”
순간 펑! 소리와 함께 총알이 바닥에 꽂혔다. 빗나가도 너무 빗나갔다.
“말시켜서 그래요.”
“아, 네. 죄송해요.”
어쩐지 웃겼지만 난 조용히 총알을 끼워드렸다.
“음, 인형이 자꾸 움직이네.”
그의 말에 난 과녁에 놓인 인형들을 쳐다보았다. 움직이는 건 하나도 없다. 다들 얌전히 앉아 자신을 쏘아주길 기다리고 있을 뿐.
그는 총에서 얼굴을 떼더니 눈을 서너 차례 부릅뜬다. 없는 쌍꺼풀이 두 줄로 진하게 만들어진다. 몸도 조금씩 비틀비틀, 정확히 가누질 못한다.
“갠찮으세요?”
어째 나까지 다시 혀가 꼬인다.
“괜찮고말고요.”
그가 다시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기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헉! 하며 뒤로 물러섰다.
천장에 매달린 현수막을 뻥 뚫은 것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제가 좀 잡아드릴게요.”
그가 총알을 끼우고 다시 조준하자 난 그의 등 뒤로 다가가 양어깨를 잡았다. 이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가 인형을 적중했다.
바닥에 떨어진 걸 보니 새빨간 하트 쿠션.
“봤죠?”
그가 의기양양 내게 어깨를 으쓱한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아 놓고.
“제가 뒤에서 잡아드렸잖아요.”
“안 잡았으면 뽀로로 맞혔어요.”
“아, 네에. 그럼 이번엔 가만히 있을 테니 뽀로로 부탁드려요.”
난 두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이며 총알을 끼워드렸다.
“뻐어어어어엉!!!!!”
헉! 정말 대단해. 난데없이 다트 던지기하는 옆 칸의 풍선을 저격했다. 그쪽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우리를 쳐다본다.
“안 되겠어요. 나머진 제가 쏠게요.”
난 그의 손에 들린 총을 건네받고 비장하게 총알을 끼운다.
그리고 시선을 가늠자와 가늠쇠에 일직선으로 맞추고
차분하게, 침착하게……
아, 이거 정말 만만치가 않다.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술기운이 올라와 몸이 흔들린다.
“뻥!!”
현수막을 뚫는 게 이리 당연하구나.
“거봐요. 안 쉽지.”
그가 히죽 웃는다. 글쎄, 나도 이럴 줄은 몰랐지. 이래봬도 군대에서 야간사격 하나는 끝내주게 했건만.
두 번째 총알은 인형을 지지하는 쇠기둥을 맞고 튀어나와 내 옆의 바구니에 다시 쏙 들어왔다.
“하하-”
그가 너스레를 떨며 웃는다.
“이게 더 어려운 거예요! 바구니에 다시 들어오는 거! 아무렴, 이렇게 한 사람은 부산 해운대에서 나밖에 없을 거야.”
나도 신기해서 놀랄 지경이다.
“내가 잡아줄게요. 원하는 인형 떨어뜨려 봐요.”
내가 다시 총을 들고 과녁에 조준하자 그가 내 뒤로 다가와 양어깨를 잡아준다. 그에게 무슨 바람이라도 들었나. 행동으로 보여주는 다정함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
얇은 트레이닝복 위로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조준하는 시간에 두근두근 맥박 치는 소란한 심장고동이 나라고 하기엔 등에서 전해진다.
어쩐지 안아주고 있는 것 같다. 이 남자가 나를…….
‘이래서는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잖아.’
난 애처롭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곤란한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 그의 중심. 묵직하게 들어 올린 그의 중심이 나를 조준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는 드러난 자신을 감추지 않는 건지.
그러면서 나는 왜 총을 내려놓지 못하는 걸까.
혹시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건가? 사격이 아니었다면 이런 상황은 있을 수가 없어. 전에 한번 그랬대도 우리에겐 감정의 공감대가 없잖아.
그럼에도 아직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있는 나는 왜.
순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주위는 온통 흥분으로 상기된 카니발.
가늠쇠 너머로 네온 가득한 바이킹이 힘차게 솟아오른다.
어둠을 뚫고 저 멀리에 보이는 달까지.
“팍!”
드디어 떨어뜨렸다. 하얀색 개뼈다귀 쿠션.
이렇게 내가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끝났다. 혼란이, 착각이. 이렇게 한순간인 걸 나는 왜 부질없이 마음이 동요했을까.
순간 내 앞으로 그의 팔이 다가오며 총구에 다시 총알이 끼워진다.
“저건 뽀로로가 아니잖아.”
귓가에 전해지는 뜨거운 숨결. 그의 두 손은 어느새 내 허리로 옮겨졌다. 그의 중심은 이제 드러날 대로 드러나 그 형태와 열기와 힘을 고스란히 내게 쏟아 붓고 있다.
굳이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다 사실이고 생생한 걸.
나는 다시 한 번 총을 들고 과녁을 겨냥한다. 걱정 따윈 않기로 한다. 아직 바구니에 총알이 많이 남아있다.
이번에 실패해도 다음이란 게 있어.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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