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입사하여 고참과장이 되었을 때까지도 나는 회사가 나의 전부인 양, 가정 일은 모두 부모님이나 아내에게 맡겨놓고 오직 회사를 위하여 회사에서 시키는 일을 무조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야말로 "회사인간"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런 것이 꼭 옳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첫 현장인 바그다드 병원 공사현장에서 3년 6개월 근무를 마치고 귀국해 보니 나는 벌써 30세가 넘은 그때 당시로써는 노총각이 되었다. 그런데 바로 직속 상관이었던 임 전수 과장은 당시 35세 이었는데 이 양반이 자기는 선을 100번도 더 보고도 눈이 높아 결혼을 못했지만 나만은 결코 자기보다 먼저 장가보낼 수 없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며 내가 선보러 나가는 것을 방해했다.
하기야 입찰 팀에서 근무 하다보니 매일같이 야근에 철야를 하여 선보러 갈 시간도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억지로 대 여섯 번은 봤는데 지금의 아내와 선을 보기로 한 날도 저녁 7시에 퇴근하겠다고 했더니 철야 작업을 해도 입찰기간에 맞추기 힘드니 다음에 좀 한가해지면 하는 것으로 약속을 다시 하라고 했다.
"우리가 뭐 언제 한가해질 틈이 있나? 벌써 예약되어 우리 손을 기다리는 신규 프로젝트가 몇 개나 되는데" 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7시에 나가서 11시까지는 사무실로 돌아와 철야를 하겠다고 했는데도 안 된다고 하여 그냥 화장실 간다고 나가서 밤 11시에 야참거리 사들고 씩 웃으며 들어왔더니 별 다른 싫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데이트는 1 주일에 일요일 포함해서 두 번 정도 꼴로는 했나? 어쨌든 선 본지 3 개월만에 약혼을 하고 그로부터 1개월 후에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됐는데 결혼 후가 큰 문제였다. 본사에서 근무하는데도 한 달에 철야가 4 ~ 5 일, 새벽 2시 넘어 퇴근이 일 주일, 자정 전후 퇴근이 1 주일, 밤 10시경의 퇴근이 1주일, 정상적인 7시 반경의 퇴근이 겨우 4 ~ 5 일에 불과했다.
그러니 저녁을 가족과 같이 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퇴근하면 우리 방이 있는 2층 창문에 돌 던져서 문 열어 달라고 집사람 깨우는 것이 큰 문제였다. 가끔씩 돌을 던지다 반응이 전혀 없으면 할 수없이 전화를 걸어 어머님께 문 열어 달라고 했는데 들어가 보면 아내는 방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잠이 들어 있곤 했었다.
그러던 중 결혼 3개월도 채 못된 5월 초에 부서장이 부르더니 다음 주에 필리핀 입찰 출장을 한 달만 다녀오라는 것이었는데 말 한마디도 못하고 "예" 하고 나왔다. 그러나 나와서 생각하니 아직 시집살이에 제대로 적응을 못한 임신 3개월의 새색시를 혼자 두고 머나먼 이국으로 장기 출장을 나간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그 일이 꿈만 같았다.
결혼한 지 꼭 만 3개월이 되는 날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그 전날 저녁부터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내가 비행장으로 출발하려는 새벽에 유산을 하고 말았다. 뭔가 좀 잘못되었고 아내가 많이 아프다는 것은 알았지만 유산인지도 모르고 출장 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핑계로 어머님과 누님을 불러 병원으로 좀 데려가 달라는 부탁만을 남기고 그냥 출발을 했다.
내가 제 정신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아마 출장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포기하고 병원으로 내가 직접 데리고 가서 조치를 시키고 위로를 해 주었어야 했는데 당시는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그냥 회사 일이 최고로 중요한 것으로 알아 그렇게 행동했다. 그러나 나 또한 한 달로 예정되었던 출장이 계속 입찰이 연기되는 바람에 석 달을 마닐라에 머무르게 되어 낮에는 바빠서 집 생각, 아내생각을 별로 할 여유가 없었으나 밤에 숙소에 들어가면 같이 말할 사람도 없고, 집 생각은 나고 우울하여 무척 힘이 들었었다.
석 달만에 입찰에 성공해서 돌아와 보니 다행히도 아내는 유산의 후유증 없이 건강을 되찾았으나 몇 일 전에 방 정리를 하겠다고 의자 위에 올라갔다가 넘어져 다리를 부러뜨렸다고 공항에 기브스를 했었는데 그래도 남편이라고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채 못되어 하청회사 선정을 위한 장기출장을 또 나가게 되었고, 거기서 귀국하자마자 그 현장 팀으로 인선되어 현장 동원 준비를 한다고 다시 2주일 정도를 나가게 되어 현장에 부임 전까지 별로 아내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랬던 아내가 현장에 부임한지 8개월 반만에 같이 나와 같이 살기 위해 마닐라까지 날아왔다. 열일 다 제쳐두고 공항으로 마중 나갔는데 다른 승객들 다 나온 지 오래되었는데도 나오질 않는다. 기다리다 지쳐 공항경비 손에 20페소 쥐어주고 이민국 심사 대 있는 곳까지 들어가 보았더니 아기 업은 한 아줌마가 이민국 직원과 한참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본 아내는 무척 낯이 설어 보였다. 아내도 자기가 결혼을 한 건지? 자기가 남편이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했었는데 그렇기도 했을 것이다. 결혼한 지 1년 8개월이 됐는데 같이 산지는 겨우 5개월 남짓 그것도 신혼초기에 잠깐이고 그 뒤 2달 정도 띄엄띄엄 살았으니 남편얼굴도 잊어버릴 만 하지... 입국카드를 주고 나오며 우리의 첫 아기라며 보여주는데 그것이 잠깐잠깐 귀국해 있을 때 다시 만든 우리 딸과의 첫 부녀 상봉이었다.
내가 크게 아내에게 잘못해서 평생을 노력하더라도 쉽게 만회할 수 없는 첫 번째 잘못이 유산한 아내를 돌보지 않고 출장 갔다는 것이고 두 번째 잘못이 신혼 초기를 너무 별 볼일 없이 기다림으로만 보내게 했다는 것이라 생각하여 다시는 헤어져 살지 않으리라 약속을 했고 그 이후로는 아내와 아이들도 필리핀, 중국, 이집트, 인도, 싱가포르 등 내가 세계의 구석 어디로 가든 따라 다니고 있다.
아내는 가끔 우리는 항상 신혼이라고 말한다. 글쎄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는 권태기라는 것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2 ~ 3년마다 현장, 본사를 옮겨다니고 거기에 따라 이사도 몇 번씩하고 또 출장도 자주 다니고 하다보니 생활에 변화도 많이 있고, 아내와 나도 만났다 헤어지고, 또 만났다 헤어지고 해서 항상 새로운 느낌이 들곤 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