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의 달라이라마 13세가 인도로 망명한 것은 1959년의 일이다. 그 당시 그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는 그의 자서전 "티벳, 나의 조국이여"(김철, 강건기 옮김, 정신세계사, 1989)에서 기록하고 있다. 불교가 인도를 떠나면서 세계종교가 되었던 것처럼, 티벳불교 역시 티벳을 떠나면서 세계 속의 불교로 거듭나게 된다. 현재 서구세계에서 가장 넓게 퍼져 있으며, 가장 많이 알려진 불교는 티벳불교라고 한다.
과연 서양인들은 불교를, 혹은 티벳불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다소 암시를 주는 영화가 바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1941 - ) 감독이 만든 "리틀 부다(Little Buddha)"이다. 베르톨루치 감독은 "마지막 황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같은 걸작을 만든 세계적 거장이다. 나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받은 감명을 잊을 수 없다. 그런 거장이 과연 불교를 어떻게 그려 내고 있을까,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 "리틀 부다"를 읽어보자.
환생의 세계와 티벳
얼마 전 우리의 문화, 예술계에 '환생신드롬'이라는 거센 바람이 불었던 적이 있다. 양귀자의 소설 "천년의 사랑"과 영화 "은행나무 침대"가 바로 그같은 '환생신드롬'의 진원지라 할 수 있다. 환생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윤회를 믿는 일이다. 따라서 '환생신드롬'의 진정한 진원지는 불교이며, 티벳불교의 경우는 그 같은 사실을 다소 극적으로 신앙하고 있는 셈이다.
티벳에서는 달라이라마가 열반을 하면 그가 환생한 아이를 찾게 된다. 이때 여러 가지로 시험을 거친 결과 달라이라마의 환생이 확정되면 부모의 허락을 얻어 출가케 하며, 체계적인 교육을 거쳐서 마침내 달라이라마로 모셔진다. 이렇게 달라이라마의 계보가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환생하는 것은 달라이라마 뿐만 아니다. 덕이 높은 고승들은 모두 그렇게 환생한다고 믿었다. "리틀 부다"는 발 그렇게 '환생한 스승 찾기'를 그린 영화이다.
부탄의 티벳사원.
한 노스님(노부 라마)이 어린 동승(童僧)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다. "옛날에 인도에 한 마리의 염소가 살고 있었는데 ---." 염소의 환생이야기. 처음부터 이 영화의 주제를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때 전보가 온다. 미국 시애틀에 '다르마 센터'(법당)를 열고 있는 제자가 보낸 것이다. 노스님의 스승 도제 라마의 환생을 찾았다는 내용이다. 노부 라마는 시애틀로 향하는 비행기를 탄다. 스승의 환생을, 아니 스승을 찾으려는 희망을 안고.
도제 라마의 환생으로 지목된 이는 제시라는 이름의 소년이었다. 제시의 아버지는 건축가, 맑은 외모이 어머니는 수학교사(브리짓 폰다 분)이다. 노부 라마는 그들 부부를 찾아가서 말한다. 제시가 도제 라마의 환생일지도 모른다고. 제시 가족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우리가 그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 대부분의 부모들은 매우 당혹스러워 할 것이다. 제시의 아버지가 보인 반응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한편, 제시와 그의 어머니는 다소 흥미로워하는데, 마치 "동방박사 세 사람이 찾아온 것 같다"고 표현한다.
흥미를 느낀 제시는 어머니로부터 그림이 있는 부처님의 전기를 읽어달라고 한다. 시애틀에 있는 티벳불교의 다르마 센터를 찾기도 하고, 그곳에서 스님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림책에서나, 스님의 입을 통해서 듣는 이야기는 탄생에서부터 깨달음에 이르는 싯다르타 태자의 전기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같이 부처님의 일생을 다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이 부분이 이 영화에 대한 흥미를 반감시키고 지루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이 영화가 서양인들을 위한 영화라는 점에 이해할 수도 있지만, 영화는 허구를 말하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갖는 예술적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제시를 중심으로 한 미국 중산층 가정의 이야기와 싯다르타 태자의 삶이 교차로 편집되어 있다.
이때 반전(反轉)이 일어난다. 제시의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고 동업자인 에반마저 사고로 죽는다. 실패와 죽음을 경험한 아버지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실패와 죽음은 모두 무상(無常)의 상징 아닌가? 비로소 앞만 보고 달려왔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싶어진다. 비로소 노부 라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들 제시를 부탄에 보내야겠다, 생각한다. 불교가 어려운 것은 교리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제시의 아버지가 느낀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경전 밖에서 무상을 체험적으로 실감하지 않고서는 경전의 언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데 그 어려움이 있다. 무상, 무아(無我), 공(空) 등과 같이 부정적으로 말해지는 불교교리는 바로 부처님이 직접 겪은 삶 속에서 깨달은 것이기 때문이다.
제시는 아버지와 함께 2주일간의 일정으로 네팔에 간다. 카트만두에 제2의 후보자가 있다는 전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소년의 이름은 라주. 라주는 서커스단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동양인이다. 그런데 제3의 후보가 또 나타난다. 제3의 후보는 지타라는 이름의 소녀. 생전의 도제 라마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찾아와 배에 손을 댔는데 잉태를 했다고 말한다. 아니, 환생은 하나의 생명으로만 나타나는 것 아닌가? 환생이 여럿이라, 이것은 혹시 모든 조재가 다 불성(佛性)을 갖고 있음을 말하는 것인가?
세 어린이는 함께 부처님 성도의 모습을 본다. 보리수 아래에서 마구니(魔軍, 번뇌의 상징.)의 항복을 받는 부처님의 모습을 본다. 부처님(키아누 리브스 분)과 똑같은 모습의 마구니가 나타나서 서로 상대의 손을 잡고 있다. 본래 부처와 마구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번뇌의 모습 속에 부처가 있으며,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는 것이다. 마구니에게 온전히 황복받게 되자 부처님의 얼굴을 하고 있던 마구니가 가면을 벗는다.(이 영화에서 시청각적으로 가장 볼 만한 장면이 마구니에게 항복받는 이 장면이다. 이 이상 더 잘 형상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세 어린이 중 누가 진정한 도제 라마의 환생일까? 세 어린이를 평가하고 확인할 사람은 노부 라마 밖에 없다. 앞에서 노부 라마는 한 노승으로부터 약을 가지고 가라는 말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머지않아 노부 라마가 죽을 것이라는 복선이었다. 노부 라마는 스스로의 건강을 생각하며, 스승의 환생 찾기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세 어린이를 차례로 불러서 시험한다. 여러 개의 모자가 놓여있다. 물론 그 중에 하나는 도제 라마의 모자. 세 어린이는 모두 도제 라마의 모자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세 어린이 모두 도제 라마의 환생임이 확인된 셈이다.
절의 큰 마당.
티벳 스님들이 서 있는 가운데 노부 라마는 제일 먼저 라주에게 가서 티벳식으로 큰 절(오체투지/五體投地)을 한다.
"당신이 저의 스승이십니다."
세 어린이 모두에게 차례로 절을 한다. 인상적인 것은 절을 하면서 둘은 이마를 서로 마주 댄다. 마지막으로 노부 라마는 제시에게 말한다.
"스승님께서도 얼마 지나면 저를 찾아주십시오."
강물의 흐름처럼 이어지는 삶
노부 라마는 죽기 전 "반야심경"을 독송한다. 제시의 아버지는 지금까지의 전 과정을 따라다니며 지켜보고 있었다. 제시가 아버지에게 "반야심경"의 한 대목을 말한다.
"보는 것도 듣는 것도 공허하며, 제시도 없고 라마도 없다. 죽음도 두려움도 없다."
사업에 실패하고 친구를 잃은 아버지, 스스로 가졌던 자신에 대한 이미지(장기정체성)가와해된 아버지에게는 대단히 힘이 될 만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얼마 뒤 도제 라마의 환생을 다 찾은 노부 라마는 입적(入寂, 작고)한다. 제시는 아버지와 함께 귀국하여 어머니를 만난다. 그들 가족은 함께 큰 강에 배를 띄우고 도제 라마의 발우에 노부 라마의 뼛가루를 넣어서 강에 띄워 보낸다.
강물에 다비한 뼛가루를 뿌리는 것은 그렇게 끝없이 흐르는 강물의 흐름처럼, 생과 생은 연속도미을 보여주는 것이다. 스승에서 제자로, 다시 제자에서 스승으로 이어지는 연속, 어버이에게서 아이로, 다시 아이에게서 어버이로 이어지는 끝없는 윤회의 삶을 보여준다. 생명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것이 베르톨루치 감독이 하고싶었던 말이 아닐까. 마침, 제시 어머니는 임신한 몸으로 그 배에 타고 있다. 죽음이 도 다른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리틀 부다"는 내가 얼마 전에 읽은 어떤 시를 생각나게 하였다. 신중신(愼重信) 시인의 시 '갠지스 江의 추억'("현대문학", 1995년 9월호)이 바로 그것. 미국과 인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기에는 차이보다 더 큰 공감이 있을 것이다. 전문을 읽어본다.
日出을 맞으러 가는 거룻배의
노 끝에서 부서지는 물소리,
영혼을 헹구는 시간이다.
가은 자신을 선택한 사람만을
유장한 품으로 선택한다.
간 밤의 부산스러웠던 번뇌는
푸른 물 속 깊이 가라앉았고
울음 울던 새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뒤돌아 보면 갠지스 강 계단 아래서
새벽 火葬의 연기가 아련한,
그 아침은 더 천천히
그리고 명상적으로 다가온다.
누군가가 태어나고
살다가 한 줌 연기로 사위어 가는
섭리의 흐름, 갠지스 강이여
커다란 햇덩이가 구름장 위로 솟구쳐 올랐을 때
강의 對岸에선
젖은 삭정이 태우는 불길이 멀다.
밤사이에 강은 自淨이 되었을 것이나
투명한 수면에 얼비치는 얼굴은
잠시 떠올랐다 가뭇없이 지워진다.
(1997년 1월 18일)
첫댓글 제 책 "불교, 소설과 영화를 말하다"(정우서적, 2008)에 실린 글입니다. 그 책은 품절되었고, 수업 중 학생들에게 제시하려고 다시 입력하는 중입니다. 내일 계속 입력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