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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정례법회] 청년법회
정산종사법어 공도편
원기 107년 02월 05일
설교 : 규산 이광규 교무님
타이핑 : 김성환
반갑습니다. 명절들 잘 보내셨어요? 저는 안암교당에 적응 좀 해보겠다고 계속 교당에 있었어요. 자리를 이동해가지고 함부로 나다니면 안된다고 해서 가만히 안암교당에 있었습니다. 우리 청년들 사진도 다시 한번 보고 교도님들 사진도 다시 훝어보면서 어떻게 안암교당을 났고 함께 공부하며 나아갈 것인가 고민할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저희들이 오랫동안 교당 관리를 해왔는데, 교당이 이곳저곳 고칠 곳이 뭐가 있는가 하나씩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명절 끝나고 돌아왔더니 우리 성현교무님도 오시고, 한 일주일 간은 남자애들 다섯명이서 득시글살아야 할 것 같아요. 교당에 도움이 필요하거나 힘쓸일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요청해주세요. 먼저 이초현교우님이 일기발표를 해주셨죠. 며칠 전에 제가 그 내용을 봤고, 훑어봤어요. 아주 공부를 열심히 한 지난번부터 느꼈지만 안암교당 청년들이 참 공부를 열심히 했구나 라고 생각하고 우리 청년들을 지도해주시는 교무님께 다시 한번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감정을 그대로 한 번 읽어보면, 도움될까 싶어서 읽어보겠습니다. 초현교우 일기를 읽고 처음에 딱 드는 생각은 유레카! 새로운 발견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득으로 가서는 정성심을 과학적인 용어로 적분이라는 용어로 풀었죠? 새로운 이해방법을 발견한 것이 소득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시간이 가지는 상대적 개념이 소득입니다 영생을 놓고보면 이번생도 순간에 불과하다. 그것이 참 중요한 속득이에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다고 해서 상대방이 행복할까요? 잘 생각해보세요. 그 우리가 흔히든 옆에서 차를 몰고 가다보면 무언가 휘익 지나갑니다. 굉장히 고급차들이 시끄럽게 지나가요. 그사람들은 행복할까요? 그건 잘 모르겠죠. 여러분들이 그렇게 구하고자 하는 일자리가 구해지면 행복할까요? 행복하기도 하겠죠.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영생이 행복할까? 행복할까요? 영생이 행복한가요? 우리가 말하는 몇 가지 행복조건을 충족하면 그 행복이 영원해질까. 라고 생각을 해보면 그렇지 못할 것은 잘들 아실겁니다. 가진 사람은 그것이 일상이 되거나 때로는 그 행복을 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저희들이 공기를 이렇게 마시고 살면서도 그 행복과 고마움을 때때로 망각을 하고 삽니다. 공기들은 늘 숨 쉬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망각을 하고 살죠. 상대가 행복해보이는 것이지 그 대상은 행복할지 불행할지 그것은 모를 일입니다. ‘선인선과 악인악과’ 적실한 인과의 법칙이지만 때때로 그렇게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번 생에 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노년이 불쌍해. 어떤 사람은 대충대충 사는 것 같은데 노년이 편안해 그건 왜 그럴까 선인악과 악인선과 이것이 과연 진리일까? 진리인가요? 좋은 인연을 지었는데 나중에 받는 과는 악과야. 나쁜 인연을 지었는데 나중에 받는 것은 좋은 과야. 그것이 진리겠는가. 콩 심은데는 뭐가 나야하죠? 콩이 나야하죠. 콩심은데 팥이 나면 그게 진리인가요? 선한 인연을 지었으면 선한 과가 나와야 진리입니다. 진리의 속성중 인과의 원칙은 변함이 없는 모습이라 우리가 믿음을 가지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 초현교우가 얘기한 것처럼 선인악과 악인선과가 진리라면, 믿으라고 얘기할 수 없죠 어떻게 상황이 변할지도 모르는데, 다만, 제가 얼마 전에 아침에 교당에 근무하는 교무님하고 우진간사하고 얘기를 하다가 상추씨를 봄에 뿌리면 그것이 똑같은 시기에 나겠느냐. 똑같은 시기에 움을 틔우고 싹을 피워서 우리에게 상추가 똑같은 시기에 나오겠느냐 라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우진간사가 뿌리의 시기는 똑같을지 모르겠지만 나오는 과정들은, 결과물들은 때론 차이가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차이는 좀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죠. 그것이 사실은 진리죠? 어떤 것은 물을 좀 더 많이 줘가지고 빨리 자라는 것이 있고 어떤 것은 비료를 많이 줘서 빨리 자랄때도 있고, 비료가 적게 주면 적게 자라고 그런 것들이 있죠. 저희들이 원인을 제공헀는데 그것이 나중에 결과는 빨리 나올 수도 있구 늦게나올 수도 있는거죠. 우리가 살아가는 이치가 틀릴까요? 우리 삶의 이치가 틀릴까요? 똑같습니다. 성욱교무님이 얘기하신데로 이생에 나오는 결과도 있어요. 하지만 다음 생, 영생에도 다가서지 않는 결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있습니다. 만약 그 결과가 없다면 우리가 노력해야될 이유도 없죠. 세상 만물이 모두 은혜의 관계임은 분명합니다. 그 은혜의 관계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면 영생을 다녀갈 때 악연이 되어 나오는 인연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선연으로, 상생의 인연으로 돌릴까. 우리 출가여행 가셨던 청년교도들은 알겁니다. 정산종사께서는 방에 들어온 파리나 모기를 내쫓을 때, 그것은 선연인가요 악연인가요? 악연도 선연도 아니죠. 다만 불편한거죠. 그것을 인연을 지을 때 잡기는 잡아야되잖아요 불편하니까. 때로는 내가 물리쳐야하잖아요. 그래서 정산종사님께서 그러셨답니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불을 끄시고 도망갈 기회를 주셨다고 합니다. 도망갈 기회를 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가지 못한 불편한 관계인 것들은 때로는 잡으셨다고 얘기를 해요. 영생을 오고갈 때 분명 인과의 원리에 따라 주고받게됩니다. 그렇지만 그 원리를 주고받고 행하는 사람들이 진급이 되고 은혜를 입으며 선연과 상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초현교우는 이번 일기를 통해서 대단한 깨침을 얻은 것 같아요. 이 순간이 순간이 아니라 일생도 한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깨침을 얻은 것 같아요. 영생에 대해 알게된 것은 삶을 더 여유롭게 정성스럽게 살아갈 안목이 생기며 우리 모두가 축하해야할 일이 된 것 같습니다. 상대가 행복해보인다고 그 마음을 챙겨 정성을 다하다보면 나도 행복해질수있어요. 왜 상대의 행복을 내 행복의 씨앗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초현교우의 일기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인과는 변함없는 진리다. 다만 그 결과가 나오는 것을 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리다가는, 어떤 결과도 얻을 수 없는 것들도 있을 수 있다. 왜 내가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아닐 수가 있으니까 .내가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지극한 정성을, 그 노력을 지속하다보면 그 결과는 나올 것이다. 그것이 초현교우의 일기를 본 제 감정이었습니다.
공부들 많이 하셨죠? 몇 가지 들어온 질문들이 있어서 질문 같이 읽겠습니다.
Q. 이대일 교우님
공도편 35장 말씀에서, 중군기의 단합을 하근기의 단합 보다 낮은 단계처럼 표현하셨는데, 대종경 신성품 2장 말씀과 연결지어 해석하면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공도편 41장 말씀과 관련해서 전무출신 집단은 아니지만 어떤 집단의 공동생활을 할 때 과오가 있는 동지에게 충고를 함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고, 과오가 있어도 그냥 모른체 넘어가던 적이 다반사인데 혹시 교무님께서는 이런 일에 대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이광규 교무님
상근기보다 중근기가 낮을까요? 중근기보다 하근기가 낮을까요? 하근기는 하근기고 중근기는 중근기입니다. 중근의 단합보다 하근의 단합보다 높다 낮다가 아니라 그 성질이 그렇다는 겁니다.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제2부 법어(法語) 제12 공도편(公道編) 35장 |
말씀하시기를 [중근기의 단합은 모래와 같아서 아무리 모아 놓아도 낱낱이 부스러지고, 하근기의 단합은 진흙과 같아서 낱은 가늘지마는 뭉치면 덩이를 이루고, 상근기의 단합은 큰 바위와 같아서 그대로 큰 단합을 이루나니라.] |
교당을 오고갈 때에도 향하는 마음을 살펴보면, 처음에 교당을 인도받고 소개받고 왔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내 또래 친구들이 많네 교당에 가니까 맛나는 것도 좋고 할게있네? 그런 재미가 있어서 와요. 재미가 있고 또 교무님들 얘기를 듣다보면 마음공부라는 것을 하네? 마음공부라는 것이 또 재미를 높이면서 공부의 깊이를 더해 갑니다. 그러다가 조금 안다 싶으면 공부심이 물러나죠. 그 꼭 노력을 안해도 하지 않고도 아는 것만으로도 교당을 오고갈 때가 있게 되는데, 그것은 욕속심이 치성을 해지면 교당이 조금씩 멀어집니다. 내가 조금 안다. 내가 조금 가지고 있다. 내가 이정도는 한다. 이런 마음들이 내가 안다라는 그런 착에 빠지면 때로는 교당이 조금씩 멀어지기도 해요. 거기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 이런 정도 라고 생각을 하니까. 그렇지만 상근기로 나아가는 사람은 짧은 시간이라도 이런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내가 착에 걸렸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이런 핑계를 대지 않고 계속 공부하는 거죠. 그런 모습들을 혜지교우의 일기를 보면서 봐요. 일기가 굉장히 집약적이에요. 요령 있게 잘쓰고. 정말 딱 내가 뭐에 걸려있었고 뭐를 내가 해야한다 뭐를 공부하고 있다. 이 내용을 명확하게 알고 있더라고. 그것을 잘 기재를 해요. 이것은 중근기를 넘어서 얼른 상근기로 올라갈 수 있는 그렇게 공부하면 된다. 이 것은 내가 조금 미뤄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니까 해도 돼. 아니까 하는 거야 이런 마음으로 공부하더라구요. 이런 사람들은 금방 상근기로 가는거에요.
대종경(大宗經)제 15 부촉품(付囑品) 6 |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나를 따라 처음 발심한 그대로 꾸준히 전진하여 간다면 성공 못 할 사람이 없으리라. 그러나, 하근(下根)에서 중근(中根)되는 때에나, 본래 중근으로 그 고개를 넘지 못한 경우에 모든 병증(病症)이 발동하여 대개 상근에 오르지 못하고 말게 되나니, 그대들은 이 무서운 중근의 고개를 잘 넘어서도록 각별한 힘을 써야 하리라. 중근의 병은, 첫째는 공부에 권태증이 생기는 것이니, 이 증세는 일체가 괴롭기만 하고 지리한 생각이 나서 어떤 때에는 그 생각과 말이 세속 사람보다 오히려 못할 때가 있는 것이요, 둘째는 확실히 깨치지는 못했으나 순전히 모르지도 아니하여 때때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여러 사람이 감탄하여 환영하므로 제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어 제가 저를 믿고 제 허물을 용서하며 윗 스승을 함부로 비판하며 법과 진리에 호의(狐疑)를 가져서 자기 뜻에 고집하는 것이니, 이 증세는 자칫하면 그 동안의 적공이 허사로 돌아가 결국 영겁 대사를 크게 그르치기 쉬우므로, 과거 불조들도 이 호의 불신증을 가장 두렵게 경계하셨나니라. 그런데, 지금 그대들 중에 이 병에 걸린 사람이 적지않으니 제 스스로 반성하여 그 자리를 벗어나면 좋으려니와,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이는 장차 제 자신을 그르치는 동시에 교단에도 큰 화근이 될 것이니, 크게 분발하여 이 지경을 넘는 공부에 전력을 다할지어다. 이 중근을 쉽게 벗어나는 방법은 법 있는 스승에게 마음을 가림 없이 바치는 동시에 옛 서원을 자주 반조하고 중근의 말로가 위태함을 자주 반성하는 것이니, 그대들이 이 지경만 벗어나고 보면 불지(佛地)에 달음질하는 것이 비행기 탄 격은 되리라.] |
여러분들이 사회생활이나 학교생활에도 별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아. 신입사원 때는 무엇을 가르쳐준다고하면 얼른 쫓아가죠. 신입생 때도 그러죠. 막 시작할 때는 그런 마음이 막 납니다. 근데 회사에도 적응이 되고 학교생활에 적응이 되고 보면 어느 순간 땡땡이를 치고 도망갈지 다 알게되죠. 오늘은 빠져도 된다. 스스로 결정을 하죠. 그리고 마침 도망간 날이 시험에 나오는 내용들이 나오는 날이에요. 마침 회식을 참석하라고 했는데 빠진 자리가 사장님이 참석한 자리. 이럴 때들이 있어요. 중근은 그런 갈등 상황에서 처해요. 그런데 그 결과들은 어떨 때는 물론 생각한대로 결과가 나오긴 하지만, 때로는 결과들이 옳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런 마음들이 뭉쳐지면 처음에 아 내가 초심을 잊지 않고 열심히 배워야지라는 생각이 흩어져요 그러면 기운이 더 흩어진단말이죠. 처음왔을때는 열심히 공부해야하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나중에 이때 법회는 좀 빠져도 되지 이때 모임에선 빠져도 되지라는 이런 마음이 난단말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보고 있는 사장님이나 학교 교수님들이나 이것이 이것 좀 안다고 빠지기 시작하네? 이것이 중근의 모습입니다. 조금 알고 계교하다보면서 중근이라는 병에 걸리면, 조직을 와해하고 자칫 자기 잘난 맛에 빠지고 하는데 그것은 대종사님께서 크게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는 중근의 말로는 항상 위태롭다. 낮은 단계는 아니다. 다만 중근들이 만나지는 그 자리는 하근보다는 결속력이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낮은 단계는 아니고, 다만 그 조직을 와해하고 분산시키는 그런 여지는 있다. 그래서 하근하고 중근하고 높고 낮음으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내가 중근병이 있으면 내가 소속해있는 가족, 사회, 회사, 학교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그것을 아셔야 한다는 거죠. 그것이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나 학교생활을 하나 중근병에 걸리면 볼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제2부 법어(法語) 제12 공도편(公道編) 41장 |
말씀하시기를 [전무출신의 집단 공동 생활은 정신 일체(一體)와 육신 일체의 본지를 잘 이해하여 매사에 서로 친애(親愛)를 주로 하되, 동지간에 혹 정신상 과오가 있을 때에는 간격 없는 애정으로 진실히 충고하고 그 과오가 외부에 누설되지 않도록 주력하며, 충고를 받은 이는 감사한 마음으로 회개에 힘쓸 것이요, 동지간에 지식 우열이 상대할 때에는 그 우(優)한 이가 열(劣)한 이를 절대로 하시하지 말고 힘 미치는 대로 지식을 알려 주는 데에 노력하며, 어떠한 묘법이나 독특한 견문이 있을 때에는 때를 따라 모든 동지에게 전해 주는 데에 노력할 것이요, 동지간에 혹 육체상 병고가 생긴 때에는 가족의 정의에 의하여 힘 미치는 대로 정성껏 원조하며, 애경재상(哀慶災祥)등 일이 있을 때에는 힘 미치는 대로 서로 동정할 것이니라.] |
2.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세요? 과오가 있는, 내 옆에 동지가 있는데, 잘못한 것이 보여 잘못한 것이 보이는데 충고를 해도 말을 안들어요. 그럴 때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원인파악이 되야 고쳐지기도 하겠죠. 그 옛 말에 보면은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하죠. 그 속담이 왜 나왔을까요? 죽은 귀신도 죽었을 때는 억울해요, 억울해서 만 가지 이유가 있다는 거에요. 너무 억울하게 죽어가지고 내가 죽어야 될 자리는 아닌데 죽은 것같다 라고 생각을 한다는거에요. 충고는 과오를 과오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충고가 가능하죠. 술이 만취가 되어가지고 한 번씩 운전을 하다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파출소에 가서 정신을 차린 다음에 제가 그랬냐고 얘기를 하죠. 제정신이 아니니까, 아무리 그 사람을 잘못했다고 얘기를 해도 그 사람들은 잘못한지 몰라요. 집에 와서 물건을 던져놓고 난리를 쳐도 그 사람들은 모른다는 거죠. 제정신이 아니니까, 충고를 받을 준비가 안되어있어요. 그런 사람에게 충고를 해본들 도움이 될까요? 도움이 안됩니다.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한 여성이 버스를 탔어요. 버스를 탔는데 기사가 너무 운전을 험악하게 하는거에요. 그런데 버스 기사 표정이 안 좋아. 그래서 그 사람이 좀 이상하다 싶어서 기사에게 물었습니다. ‘기사님 혹시 오늘 아침에 아내와 다투지 않으셨어요?’ 그랬더니 기사님이 깜짝 놀라서 ‘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아내와 사소한 일로 다퉜어요.’ 그러자 승객이 운전사에게 또다시 질문합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죠? 그것을 기사가 알아들었을까요 못 알아들었을까요? 기사는 알아들었습니다. 운전사는 부부싸움이 공적인 일이 될 수 없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제서야 승객이 말하는 것을 알아차린 기사는 안전하게 몰기 시작했어요. 그 승객은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이야기하고, 충고를 잘해준거죠. 입장이해를 잘 시켜준거죠. 당신이 이런 문제가 있ᄋᅠᆻ습니다. 라고 얘기를 하는거죠. 충고를 잘하려면 충고받은 후에 깨우치고 있어야 하지만, 충고받은 이도 고칠 점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해를 잘 이해를 해줄 필요가 있다. 대종사님께서도 공부심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보통 하는 말이라도 촉이 달려나오므로, 결과를 나쁘게 맺어서 뒷날에 화를 불러오고, 공부심이 있게 하는 사람들은 보통 하는 말이라도 덕이 따라나오므로 결과를 좋게 맺어서 뒷날에 복을 불러온다.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충고를 하더라도 좋다 나쁘다라는 자신의 시비에 치우쳐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보고 덕 있는 마음으로 넉넉하게 말하는 습관을 기를 수 있을 때 그때 충고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내가 충고를 한다고 하더라도 충고를 듣는 사람들이 기분이 상하지 않겠죠.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소태산대종사님께서 정말 싫어하던 것이 아침 좌선에 졸거나 좌선을 나오지 않은 사람에게 대해서 어마어마하게 경책을 하셨어요. 정말 말로 안 들으면 짐싸서 가라 이런 얘기도 하셨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아침에 좌선을 빠지면 예전에 어른들이 짐싸서 가라. 이렇게까지 지도를 받았ᄋᅠᆻ어요. 그래서 대종사님께서 하루는 좌선을 안나오는 사람이 있으니까 노발대발 화가나셔서 짐싸서 가라. 너는 도저히 안된다. 이것을 정산종사님께서 옆에서 지켜보고 계시다가 대종사님께 빨리 가서 빌어라. 그렇게 얘기를 한거에요. 그래서 그 사람이 정말 잘못해가지고 빌기도 좀 뭐하고 그러면 정산종사님이 손을 잡고 가셔서 ‘저희들이 함께 잘못했으니까 용서해주십시오’라고 얘기를 하시는 거에요. 그렇게 용서를 구하면 대종사님께서는 못 이긴 척 그러시죠. ‘너는 이번에 정산이 그래서 용서한다. 이번 한번만 용서를 할테니까 너는 열심히 공부를 해라’라고 말씀하시죠. 그렇게 지도를 받으시면서 공부를 하시던 대종사님께서 돌아가시고 정산종사께서 종법사위에 오르셨어요. 정말 말을 안듣는 제자들이 있으니까, 또 옆에 다른 제자가 가서 말씀을 드리는거에요. ‘정산종법사님 당신도 화를 내셔라. 이 사람들도 경책을 해라’라고 말씀하신거에요. 그랬더니 정산종사님께서 나도 화를 낼 수 있지만 그렇지만 그 뒤를 봐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충고를 하더라도 나는 막 뭐라고 할 수 있어. 근데 그 충고를 받고 상처받는 사람이 또 다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충고를 해준들 그 사람은 상처만 되고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그 성현들의 심법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죠. 충고를 하더라도 늘 모든 것을 살펴서 함께 충고를 해주고 이 사람이 진급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그 모습을 우리가 한번쯤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충고를 하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충고를 해야할 것인가. 이렇게 정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Q. 이경주 교우님
공도편 48장이나 50장에서 자신의 수행으로 자연 중 권도가 되게 하라고 하여서, 저는 교법대로 나름 잘 살고 있으니 내 주변사람들도 나를 보고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잘 안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해야 교화를 잘할 수 있을까요?
1번의 연장선상에서, 가족교화를 하고 싶은데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 중에서도 특히 동생을 교당에 데리고 오고 싶은데, 어릴 때 입교는 했고, 커가면서 학교를 다니느라 자연스레 안나오게 된터라 동생이 원하는 것을 해준다거나, 동생이 듣고 싶은 대로 말을 한다거나 해야 할까요?
49장에서 신심이 확실히 설 때까지 자주 보살펴주어야 참 제도를 받게 되나니 제도를 받도록까지 꾸준히 공을 들여 참다운 연원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는데, 어느 지경에 되어야 그 사람의 신심이 확실히 섰다고 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제2부 법어(法語) 제12 공도편(公道編) 48장 |
말씀하시기를 [적극적인 포교도 좋지마는 대도정법이라도 너무 강권하거나 지나치게 선전만 하면 도리어 가치 없이 인식되기 쉽나니, 포교를 하는 이는 먼저 상대자의 근기를 잘 살펴서 기연에 맞게 도를 권할 것이며, 자신의 수행으로써 자연중 권도가 되게 하여야 실효 있는 포교가 될 것이니라.] |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제2부 법어(法語) 제12 공도편(公道編) 49장 |
말씀하시기를 [연원을 많이 다는 것이 제도의 한 방법은 되나, 벌제위명으로 입교만 시키는 것은 참 제도가 아니요, 신심이 확실히 설 때까지 자주 보살펴 주어야 참 제도를 받게 되나니, 이왕에 입교의 연원이 되었거든 제도를 받도록까지 꾸준히 공을 들여 참다운 연원이 되어야 할 것이니라.] |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제2부 법어(法語) 제12 공도편(公道編) 50장 |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교화하는 이는 자신이 먼저 실지로 느끼고 체험하여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설교하며, 진실하게 참다운 인연을 널리 맺고 대중을 두루 살펴 감화시켜야 모든 사람과 참다운 법연이 맺어지고 기운이 서로 응하여 참된 교화가 이뤄지나니라.] [출처] 정산종사법어 제2부 법어(法語) 제12 공도편(公道編) 50장|작성자 원마음 |
A. 이광규 교무님
데려오는 것도 참 쉽지가 않고, 안착하는 것도 쉽지가 않아요. 48장 법문을 살펴보면 권도는 나만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것인가. 그렇지 는 않은 것 같아요 상대자의 근기를 잘 살펴서, 기연에 맞게 그 도를 권할 것이다 말씀하셨어요. 상대자의 근기는 정말 필요한 부분들이, 별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상대자가 요구하는 것은 경주 교우가 가지고 있는 완벽함 이런 것이 아니고, 나는 좋은 친구가 필요하고 나와 함께 즐기는 시간이 필요해. 그런데 나같이 바른생활을 해? 나 같이 교무님같은 생활을 해? 라고 하면 오고싶을까? 쉽지 않을 겁니다. 수행으로써 다시 말해 서원한 바가 성취될 때까지 정성껏 꾸준히 하는거에요. 권도는 우리가 정신수양을 한다고 얘기하지만 정신수양 방법도 좌선도 있고 기도도 있고 염불도 있고 그러잖아요? 그런 것처럼 상대의 근기를 봐가면서 아 이사람은 요란하니 염불로 해야해, 이사람은 조용하니ᄁᆞ 좌선으로 공부를 시켜야해, 이사람이 부족한 것이 공부라고 생각하면 공부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알려줘야해, 이사람은 늘 친구가 필요하면 친구가 되줘야해, 이래야지 권도가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해서 예전에 어른들이 그러셨죠. 야 이거 먹어. 이거 먹으면 진짜 니 건강에 좋아하지만 그 약은 무지하게 써요. 쓴 약을 무조건 먹으라고해서 과연 먹어질까. 오히려 먹으러 그러면 다시 토해내든지 뱉어내죠.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상대의 형편을 따라서 도를 권하면 권도가 되지 않을까? 근기에 따라서 살펴주는 것이 중요하겠다. 이번에 아는 사람들은 알텐데, 출가여행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말로 표현해봐야 뭘 알겠어요. ‘여기 맛있는 것이 있으니까 먹어보면서 이 맛을 즐기자’라고 얘기했을 때 그 맛을 알겠죠. 지리산 천왕봉. 구름도 멋지고, 산세도 수려하고, 아무리 얘기한들 모를거다. 그 사람들이 알만한 눈높이에서 얘기를 해줘야 지리산 천왕봉이 멋지고 수려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동생 데리고 오고 싶을 땐 어떻게 해야할까요? 앞선 질문하고 비슷한 맥락일 것 같은데, 대산종사님께서는 교화에 세가지 단계가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대산종사법어(大山宗師法語) 제2부 법어(法語) 제6 회상편(公道編) 16장 |
대산 종사, ‘교화의 3단계’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첫째는 자비 인정 교화로 정의를 서로 건네서 법을 받아 가게 할 것이요, 둘째는 무량 법문 교화로 정법을 전해서 인생의 활로를 열게 할 것이요, 셋째는 무언 실천 교화로 말없는 가운데 스스로 수행 적공하여 대도를 증득하여 이를 본받게 할 것이니라.] |
첫 번째가 자비인정교화다. 그 인환경이라는데 보면 사석심이란 것이 있는데, 네 가지 마음을 내야하는 것이 있는데, 자비인정교화를 위해서는 보시를 잘해야 한다. 상대방이 필요한 보시를 잘해야한다. 그 사람이 뭐가 필요한지, 오전에 보니까 경주교우가 이사를 한데요. 저도 이삿짐 나르러 가야겠어요 안가야겠어요? 이삿짐 나르러 가야할 것 같아요. 우리 경주교우가 무엇을 하는 것에 합해줘야할 것 같아요. 그것이 보시심이에요. 그 다음에 좀 더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거에요. 요즘에 교당에 수양이 되는 카톡에 보면 여러분들이 제가 올려드린 그림을 보셨겠지만, 긍정적인 마인드로, 스키선수들이 장애물을 만났을 때 장애물에 내가 다가설 때 장애물만 생각하면 장애물에 부딪히기가 쉽대요. 그렇지만 내가 가야하는 눈길만 보고가면 스키 잘타기가 쉽다는 거에요. 즉 내가 해야할 길, 내가 나아가야할 긍정적인 생각들을 자꾸 전달하면 그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거에요. 부정적인 생각하면 부정적으로 전달될 가능성이 높아요. 그 사람에게 할 때도 좋은 말만 해주는거에요. 좋아하는, 사랑하는 말들을 해주는거에요. 그 상대에게 이로운 행동들을 해주는 거에요. 자비인정교화를 할 때. 그 사람이 좋은 일을 도와주고 그렇게 행동을 하면 싫어할 사람이 없잖아요. 그렇게 자비인정교화를 베푸는 거에요. 그사람이 하고자 하는 일들에 뜻을 합해줘서, 봉사, 사석심을 통해서 자비인정교화를 한다는 거에요. 그렇게 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량법문교화를 하라고 하셨어요. 여러분들은 그동안 수요공부방이든지 여러 가지 공부를 하잖아요. 거기서부터 교육이 되는 거에요. 여기와서는 ‘이런 공부를 하면 성장이 되겠구나’라고 안내를 해주는 거죠. 무량법문교화. 셋째는 무언실천교화에요. 말이 없이 모습을 보여주면 되요. 나는 이런 공부를 했는데 나는 삶이 바뀌어간다. 여러분들은 한 번씩 감상담을 얘기한다던데, 바뀐 삶에 대해서, 그건 무언실천교화를 보여주는거에요. 그렇게 하다 보면 저 사람이 처음에 재미 삼아서왔는데, 내 삶에 도움이 되는 그런 말씀들이 많네. 또 한편으로는 내가 삶이 이렇게 행복해지고 지혜로워지네. 이렇게 교화가 된다네. 이것이 대산종사님이 말씀하신 3단 교화방법이에요. 오늘 새로 함께하시는 교도님이 두 분 계시는데 무슨일인지 이해는 좀 되세요? 그렇게 해서 함께 공부해나가는거에요.
3. 믿음이 어느 정도 서야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신성품 1장’을 봉독해 드릴게요.
대종경(大宗經) 신성품(信誠品)1장 |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스승이 제자를 만나매 먼저 그의 신성을 보나니 공부인이 독실한 신심이 있으면 그 법이 건네고 공을 이룰 것이요, 신심이 없으면 그 법이 건네지 못하고 공을 이루지 못하나니라. 그런즉, 무엇을 일러 신심이라 하는가. 첫째는 스승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비록 천만 사람이 천만 가지로 그 스승을 비방할지라도 거기에 믿음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혹 직접 보는 바에 무슨 의혹되는 점이 있을지라도 거기에 사량심(思量心)을 두지 않는 것이 신이요, 둘째는 스승의 모든 지도에 오직 순종할 따름이요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는 것이 신이요, 세째는 스승이 혹 과도한 엄교(嚴敎) 중책(重責)을 하며 혹 대중의 앞에 허물을 드러내며 혹 힘에 과한 고역을 시키는 등 어떠한 방법으로 대하더라도 다 달게 받고 조금도 불평이 없는 것이 신이요, 네째는 스승의 앞에서는 자기의 허물을 도무지 숨기거나 속이지 아니하고 사실로 직고하는 것이 신이니, 이 네 가지가 구비하면 특별한 신심이라, 능히 불조(佛祖)의 법기(法器)를 이루게 되리라.] |
원불교를 다니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을 신심이라고 얘기하죠. 비록 천만 사람이 천만 가지를 가지고 스승을 비방할지라도 거기서 믿음이 흔들리지 아니하여 혹 직접 보는 바에 무슨 의혹되는 점이 있을지라도 사량심을 두지하는 것이 신심이요. 여러분들이 같이 지내다보면 저하고는 다른종교를 신앙하는 사람들과 사귀는 경우가 좀 있을거에요. 그럴 때 저는 그렇게 얘기를 하죠. 그 사람들과 신앙이 틀린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러면 저는 그렇게 말하죠. 법회도 데리고 와라. 미사도 가라. 예배도 봐라. 같이 가서. 무엇이 더 우월한지를 알게 해주는 거죠. 우리가 성당에 가서 미사를 보는 것을 왜 불편해합니까? 저희들이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고 신앙의 방법인데 불편해하겠어요. 그럴 필요가 없다는거지. 가세요. 해보고, 다만 무엇이 더 나은 것인지 생각을 해봐라. 그것을 알게해줘라. 그것을 보고 나면 원불교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겠죠. 두 번째는 스승의 모든 지도에 순종할 따름이요. 제 지도에 순종하라는 얘기도 아니고, 종법사님 말씀을 순종하셔야겠죠? 그렇지만 우리 교법에 순종해라. 계문을 지켜나가고 교당을 오고갈 때 우리가 지켜가야될 부분들을 지켜나가고. 상시 무슨 훈련을 해야할지 지켜나가고. 그것을 해라. 대종사님께서 솔성요론1조에 그렇게 강조를 하셨잖아요.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때로는 여러분들이 신앙하는 스승이라는 것은, 우리가 믿고 의지할만한 그분이 지도하는 것은 오직 순종을 하셔야죠. 그것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느냐, 그 스승께서 지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순종하라는 것이죠. 우리가 못 믿겠는데, 교수님 강의를 듣다가 못 믿겠는데, 들을 수 없죠. 불편해지죠. 믿으니까 들어지는거죠. 그분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하니까 들어지는거죠. 스승의 모든 지도에 오직 순종하라. 그리고 세 번째 스승이 혹 과도한 엄교(嚴敎)중책(重責)을 하며, 혹 대중들 앞에 허물을 드러내며, 혹 힘에 과한 고역을 시키는 등, 어떠한 방법으로 대하더라도 달게 받고 조금도 불평도 없는 것이 믿음이고 신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서로 간에 살아오신 방법이 틀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습관이 틀리기 때문에, 스승님이 가지고 있는 법을, 법을 가지고 지도하시는데 때로는 엄하게 혼도 내시기도 하고, 대중 앞에서 창피도 주시고 하지만, 그런 부분들을 다 달게 받아서 오롯이 바쳐라. 그것이 믿음이다. 그것이 신심이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스승이라고 얘기를 하면 그 법을 오롯이 받들고 믿어가는 그분을 스승으로 저희들이 모시겠죠. 그분이 엄교중책을 하는데, 왜 저런 사람이 나한테 뭐라그래? 그래서는 안된다는 거죠. 마지막으로 스승의 앞에서는 자신의 허물을 숨기지 말고 사실로 직고를 해야한다. 제가 모르면 모릅니다라고 하라고 했어요. 단장중앙모임을 하면서, 교무님이 어떻게 진행을 하실거에요? 나는 모르면 모른다고 얘기할 거다. 난 여러분들이 스승이에요. 여러분들이 아는 만큼, 여러분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만큼이 저의 정도다. 그것을 제가 조금이라도 간교하게 조금이라도 아는 척을 한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정말 잘 알거에요. 아 저 사람이 엉뚱한 얘기하고있구나, 저사람이 모르는 얘기를 하고 있구나 . 정말 잘알아. 왜 여러분들이 들은 것이있고 행해온 바도 있고, 저와 조금 차이가 난다고, 여러분들이 살아온 세월들이 있는데. 제가 살아가는 모습들이 틀린지 옳은지 모르겠어요? 다 알죠. 거기서 거짓을 말씀을 드리고 옳지 않음을 얘기하면 믿겠어요? 인과를 얘기안하고 다른 것을 이야기하면 믿겠냐고. 사실로 직고하고 내 스스로를 낱낱이 다 들어내고 사실로 직고할 때 그 스승과 직접 만나지는 신심이 생길 수 있어요. 여러분들 이 네 가지를 지켜나갈 때, 이 네 가지가 뿌리를 탁 내렸을 때 저 사람은 내가 데리고 왔지만, 원불교에 내가 믿고 맡겨야해. 신심은 그런 정도가 내렸을 신심이 뿌리를 내렸다고 하는거에요 어렵죠? 그렇지만 그래서 끝까지 챙겨야 하는 거에요. 아까 수행하는 마음으로 챙기라고 얘기했죠? 그것이 많은 인연이 되었지만, ‘내가 원불교까지 안내만 했으면 되었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안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뿌리가 탁 내려졌을 때 이 사람은 정말 성불제중의 서원들을, 내가 부처가 되고 서원들을 이뤄갈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내가 안내했으니까 라고 이정도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 스스로도 인연을 잘못 걸어준 거이고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 때 그 믿음이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인연을 못 보여준다고 하면, 교무님에게 더 나은 인연은 걸어주세요. 그렇게 하면 이 믿음이 더 굳건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39장 한번 보실래요?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제2부 법어(法語) 제12 공도편(公道編) 39장 |
말씀하시기를 [어떠한 일이 대의에 크게 어긋나거나 큰 손해 날 일이 아니거든 지나치게 상대적으로 처사하지 말라. 작은 일에 불화하여 상대가 되면 큰일에 큰 손해를 보는 수가 있나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져서 큰 손해 없을 터이니, 대의를 좇아 2,3할만 이기라. 대인은 이길 능력이 있으면서도 져주고, 소인은 이길 능력이 없으면서도 이기려 드나니라.] |
제가 마음에 든 부분이 2,3할이에요. 우리가 이겼다고 하면 보통 51대 49는 되어하는데, 어떻게 2할 3할일까. 이게 저한테 탁 걸렸었어요. 왜 2할 3할일까. 왜 그럴까요? 상대가 이겼다. 눈치를 못 채게 이겨버리게 3할만 이겨버려라? 여기 말씀을 보면 저희들이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고 지표가 될 것 같아요. 대의를 쫓아. 우리가 정말 큰일에는 나의 생사 문제나 내 신앙을 크게 어그러뜨리는 일이나 내 삶에 큰 문제가 될 때에는 51%가 되야겠지만, 그런 문제가 아닐 때에는 적당히 져주는 것도 내가 이기는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대의를 내가 받아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공을 위한다고 얘기를 하지만, 우리가 흔히 공을 위한다고 얘기를 하지만 사실 우리는 개인 사사로운 이익들을 많이 쫓아가죠. 그런데 그것을 가만히 마음을 비추어보면 사사로운 마음을 쫓아가다보면 결국 큰 것을 놓치게 돼. 100m달리기를 할 때 고개를 숙이고 달리는 사람이 있어요? 다 앞에 보고달리죠. 끝 지점을 보고 달리죠.그렇게 달려야 100m를 달릴 수가 있어요. 앞만 보고 뛰잖아요? 진짜 뛰어보세요. 바로 넘어집니다. 조금이 무슨 차이야. 그것이 바로 앞만 보고 달린다는 나의 소소한 이익들을 찾아서 가다보면 결국은 내가 많은 것을 얻을 것 같아도 딱 그만큼밖에 못 얻어요. 저 끝을 보고 달려야 그 100m를 완주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여러분들이 살아갈 때 모두 만족스러울 수 없죠. 때로는 23할만 만족스러우면 크게 그 부분에서 어그러지지만 않으면 손해 보는 것처럼 하더라도 내가 이익을 물릴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혹시 궁금한 점이 더 있으면 개인적으로나 카톡으로 지도문답하면서 공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야 이거 속도 뭡니까 진짜 와 일단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겠습니다 감사드려요 성환 교우님
우와 어제 끝나고 앉아서 타이핑 하시는 거 같던데 진짜 빨리 올려주셨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