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신] 인간시장(5권) 58. 흑장미

[물 안 개]

흑장미 면도를 하지 못해 까칠까칠한 얼굴이 유리창에 반사되고 있었다. "한숨 자두는 게 좋겠어요." 병규가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이삼일 안 자는 거야 자신 있지만 배고픈 건 참을 필요가 없겠지." "시장하죠?" "뭐 있겠냐?" "도시락이 괜찮아요. 일본 어딜 가나 돈만 있으면 먹는 거 걱정은 없으니까요." 병규가 도시락 세 개를 사들고 왔다. 깔끔한 나무도시락과 예쁜장한 포장지가 일본 상술의 친절처럼 느껴졌다. 오차를 담은 물병도 세 개나 들고 왔다. 거의 오차를 마시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도시락을 까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집 안에서 먹으나 도시락을 먹으나 별 차이가 없는 그들의 간편한 식사법 때문인 것 같았다. 도시락은 너무 깔끔해서 오히려 맛이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왜놈들 이것만 먹고도 견디냐?" "그렇죠. 형님은 싱겁겠지만." "따로 고길 먹거나 주전부리하는 건 없냐?" "별루예요." "이것만 먹고 견디는 것 보면 왜놈은 왜놈이다. 그러고도 경제대국이 된 걸 보면 생선 힘인가 보다." 모든 음식은 바다 물고기 위주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정도였다. 식사의 양은 우리가 탄 니치린 11호 특급열차는 우거진 숲과 대나무밭이 울창한 지대를 지난 구로사키에서 잠깐 머물렀다. 병규는 재빨리 뛰어나가 과자 한 봉지를 사들고 왔다. "형님, 이거 화장실 가서 처리하고 오죠." 녀석이 빈 종지 속에 쇳소리가 나는 물건을 담아 건네 주었다. 나는 직감으로 하카다 역에서 받은 표창이라는 걸 알았다. "그건 또 언제 받았냐?" "나도 잊고 있었어요. 애들이 주지 않았으면 잊어 버렸을 거예요." "제대로 만들었겠지." "틀림없을 겁니다." "귀찮은데 한숨 자고 따지자." "지금 넣어두는 게 좋겠어요." "왜?" "아무래도 심상찮아서 그래요." "미행이냐?" "눈치가 그래요." "그래서 일부러 과자 사러 간 거냐?" "대여섯 놈 되는 것 같아요. 아까부터 자꾸 눈에 거슬리는 녀석들인데." "손 좀 봐 주고 와라." "확실친 않아요. 낌새가 그렇지. 지금 우리 뒤쪽에서 잡지 읽는 척하고 있으니까 잠들었다간 당해요." "알았다." 나는 봉지째 들고 화장실로 갔다. 허리띠를 늦추고 한 개씩 꼼꼼하게 넣었다. 내가 말한 대로 제 규격을 맞추어 만들었지만 무게가 조금 가볍게 느켜졌다. 온몸에 힘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다. 허리도 든든하고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충대충 세수를 하고 나왔다. 차창으로 경치는 계속 바뀌고 있었다. 나는 병규가 얘기한 녀석들이 어떤 애들인지 살펴보기 위해 천천히 걸었다. 눈이 마주치는 애들이 우리 자리의 등 뒤쪽으로 앉아 있었다. 힘깨나 써보였고 날렵한 동작을 느끼게 하는 눈빛이었다. 어쩌면 출발할 때부터 병규 녀석은 눈치 채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카다를 떠날 무렵에 그런 사실을 알리면 아예 하카다의 나가시마 두목을 해치우기 위해 주저앉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이제야 말하는 것 같았다. "저 녀석들을 중간에서 해치워야지 "그래서 혹시나 해서 기차를 탄 건데...... 나가시마 애들이거나 청부업자일지도 몰라요. 일본엔 청부업자가 많아요. 돈만 주면 무슨 짓이든 해내죠. 아마 형님한테 걸린 상금하고 특별 보너스가 욕심나는 녀석들이라면 찰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 나가시마 애들이 직접 해결하려고 들지 않지?" 그런 방대한 조직과 인원이 있다면 굳이 청부업자를 따로 불러들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야쿠자는 항상 추적을 받는 셈이죠. 사건이 터졌다 하면 경찰이 잽싸게 물어뜯거든요. 그러니까 큰일 치를 땐 청부업자를 끼워넣는 경우가 있어요. 위자료 주기 싫어서 청부살인자들을 사는 사내들도 청부업자 사는 계집년들도 있는 나라니까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안단 말이냐?" "알지도 모르죠." "그럼 따돌려야잖아." "생각중입니다." 나는 당장이라도 다가가서 기차 밖으로 내던지고 싶은 생각이었다. 미행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태평할 순 없었다. "지금 우리가 어디쯤 왔지?" 병규는 수첩 속에 끼여 있는 지도를 펼쳐 놓았다. 하카다에서 구로샤키를 지나 해변을 따라 가고시마까지 가는 특급열차의 방향을 설명했다. "터널이 많거나 굴이 깊은 지역은 없냐?" "없어요." 가자. 따라오면 화장실에 쑤셔넣거나 던져 버리는 수밖에 없다." 병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는 벱푸역이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상대편도 그렇게 쉽게 공격해 올 애들은 아닌 것 같았다. 빈 좌석이 없는 기차 안에서 말썽을 일으킬 수는 없기 떠문이었다. 기차는 계속 줄기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이쯤 시작하자." 내가 먼저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서자 병규가 뒤따라 일어섰다. 뒤통수가 간질간질했다. 다음 칸으로 자리를 옮기는 척하다가 승강기 쪽으로 몸을 숨기고 녀석들이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녀석들은 따라나오지 않았다. 무슨 낌새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게 말예요." "우리가 너무 과민한 거 아니냐?" "그렇지 않아요. 두고 보면 알겠지만." "벱푸에 거의 다 왔지?" "이 다음 정거장입니다." "그럼 여기서 버텨보자." 두 녀석이 문을 열고 나왔다. 우리는 담배를 피우는 척 하면서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한쪽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바로 옆으로 다가와 담뱃불을 빌리자는 시늉을 했다. 나는 담뱃불을 내밀었다. 그 순간 녀석의 오른손이 재빠르게 빠져나오며 잭나이프의 칼날이 튀어나왔다. 나는 몸을 숙이며 정권치기로 녀석의 면상을 후렸다. 윽! 옆에 있던 녀석도 동시에 쓰러졌다. 녀석의 손에도 칼날이 쥐어져 있었다. 병규가 등을 한 번씩 더 가격했다. "화장실에다 쌓아두자." 병규가 멱살을 잡아 화장실에 차례로 넣어 버렸다. "이제 세 놈 남았죠?" 손바닥을 털며 병규가 빙그레 웃었다. "세 놈과 한 여자다." "여자도 있어요." "여자가 제일 무서운 상대니라." 병규녀석은 그 일행 가운데 끼여 있는 걸 무심하게 넘긴 모양이었다. "형님은 염복도 많습니다." "저런 염복은 목숨 건 염복이다." "안 되면 미인계 쓰려고 그러는 모양이죠?" 이번엔 사내 녀석 세 명이 조심스럽게 걸어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병규가 뒤통수를 갈겼다. 나도 잽싸게 두 녀석의 복부를 갈겼다. 세 녀석이 길게 누웠다. 우리는 세 녀석을 화장실에 또 처넣었다. 문을 닫고 세면기에 손을 깨끗이 씻고 천천히 들어갔다. "저 여잡니까?" 눈치 채지 않게 병규가 물었다. 계집애는 힐끗 쳐다보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래." "어떻게 할까요?" "사랑해 줘야지. 외로울 테니까." "흐흐흐...... ." 병규가 여유있게 웃었다. 나는 내 자리에 짐을 놓고 계집애가 앉아 있는 자리로 갔다. "남자 친구들이 기차에서 뛰어내렸다고 병규가 계집애 옆에 앉아서 능청스럽게 내가 시키는 대로 말했다. "건들면 뒤칸의 소대병력이 그냥 두지 않을 거랍니다." 병규는 뒤쪽을 흘끔 쳐다보고 말했다. "소리쳐서 불러보라고 해라." 계집애가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순간적인 방어심리로 거짓말한 게 분명했다. "까불면 내던져 버린다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라고 해." "그 얘긴 미리 했어요. 남자들 어떻게 했느냐고 묻는데요?" "천당 가면 만날 거라고 해. 걔들 만나고 싶거든 떠들고 지랄 발광해 보라고 해." "이제 어쩔 거냐고 하는데요. 계집애가 보통은 넘은데요." 일이 생겼으며 자신의 처치도 곤경에 처한 여자치고 퍽 대담하게 굴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믿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한 여자이거나 이런 꼴을 당해 봤던 여자일 것 같았다. 여자 몸으로 범죄단체와 손을 잡고 일하려면 그만한 베짱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말 잘 들으면 다음 역에서 보내 줄 거고 그렇지 않으면 황천 역까지 특급으로 보내 줄 거라고 해라." 병규가 말하는 사이에 계집애는 눈을 깜박거리며 웃었다. "아는 대로는 대답하겠답니다." 바로 그때 열차의 남자 승무원들이 사내 다섯 명을 화장실에서 끌어내어 부축해 가는 모습이 보였다. 웃옷을 벗어부친 남자들이 눈치를 살폈다. 병규도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내들이 부축되어 옆으로 지나가도 계집애는 침착하게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계집애가 소리를 질러 버리면 일은 아주 복잡하게 꼬여 버리는 것이었다. "형님더러 솜씨가 꽤 좋답니다." "건방진 년." "그 얘기도 전할까요?" "허튼 소리 말고 누가 시킨 거냐고 물어라." "이 계집애가 스스로 나선 거랍니다. 장총찬이란 남자가 필요하답니다." "수작 부리면 정말 보낸다고 해." "같이 죽기 싫다면 얘기 좀 하잡니다. 손만 까딱하면 이 기차칸 정도는 금방 폭파시킬 "쌍녀러 계집앨 칵!" 작은 소리로 말을 주고 받아서 주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했지만 내 목소리가 너무 커서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형님 잠깐만요." 병규가 나를 말리고 계집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보통 미녀가 아닌 자태며 조금도 굴하지 않는 말솜씨며 표정이 예사 계집애는 분명 아니었다. 병규에게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이 진지해 보였다. "형님, 함부로 대할 여자가 아닙니다. 독자적으로 추적한 것도 확실한 것 같습니다. 나는 소문으로 들었는데 바로 이 여자가 흑장미입니다." "뭐라구?" 나는 믿어지지 않아 그녀를 찬찬히 두려워하는 여두목으로서 과감한 작전으로 폭파사건의 전문가란 칭호를 받고 있었다. 부두의 선박폭파나 아지트 폭파로 상대편을 한순간에 전멸시켜 버리는 무시무시한 전력을 소유한 집단의 두목이었다. 다른 야쿠자 조직과 다른 것은 여두목 밑에 기라성같은 여자 대원과 철저하게 비밀에 싸인 남자 대원을 거느리고 있어서 거의 조직의 내부가 알려져 있지 않은 비밀결사대였다. 나는 그녀의 자자한 명성과 사건이 터져도 추적할 수 없게 교묘한 술수로 다른 집단끼리 암투를 불러 일으키게 만들어 버려 경찰의 감시망도 없을 정도라는 소리를 들었다. "당신 정말요." "지금이라도 손가락 한 개만 까딱하면 어여쁜 처녀의 핸드빽 속에서 총알이 나는 무심결에 건너편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자의 손바닥 안에 조그맣고 새카만 권총이 보였다.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증거를 보여 주쇼." "그건 헛소문이랍니다. 왼쪽 팔뚝에 장미가 파여져 있다는 건 일부러 만들어 퍼뜨린 거랍니다." 내가 듣기론 흑장미의 왼쪽 팔뚝엔 철인으로 낙인을 찍은 흑장미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고 들었었다. 흑장미는 패전 직후에 항복 당한 일본의 참상 가운데 하나인 진주군들의 횡포를 무모하지만 지하조직으로 맞서온 조직이었다. 항복당한 서러움 속에서 억울하게 정조를 유린당한 여성들이 비밀조직을 결사, 못된 흑장미는 육체를 농락당하는 여자편에 서서 싸웠지만 세월이 흐르자 남자 중심이 야쿠자들과 충돌을 일으킬 정도로 방대한 조직력을 갖게 되었다. 흑장미가 유리한 점은 겉보기에 연약하고 예쁜 여자들이기 때문에 쉽게 구분할 수 없고 승전국 병사들과 싸워온 처절한 지하활동에서 얻어진 투쟁력을 바탕으로 야쿠자 조직을 붕괴시키는 무서운 실력을 여러 차례 보여 주어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미 두 세대 쯤은 흘러간 흑장미가 아직도 두려운 존재로 남아 있다는 건 변질되긴 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바로 내 앞에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는 이 흑장민는 과연 누구일까? 상부조직의 간부이거나 지방조직의 두목급이어야만 했다. 흑장미란 칭호를 받은 여자가 많은 것은 흑장미 초기에 여러 곳에서 동시에 출몰하기 위해서였고 사건 현장마다 흑장미가 색인된 종이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흑장미는 사회에 알려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승전국의 진주군들이 일부러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조직이 일반인에게 알려지면 패전국 국민들에게 영웅처럼 대접받을 게 빤할 뿐 아니라 유사한 지하조직이 병발하여 괴롭히거나 동조자가 더 나타나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소수의 극렬분자들이 조직한 천황구국대나 대일본평화군, 대일본독립단 등이 무참하게 깨어진 것은 이탈자들의 고발 때문이었지만 위기를 넘겼으나 존속되었다고 한다. 타협하지 않는 무자비한 흑장미가 바로 내 눈 앞에 앉아 있고, 어떤 여자가 그의 부하인지도 모르며 기차까지 수틀리면 폭파해 버리겠다는 이 여자 앞에서 나는 곤혹스러움을 겪고 있었다. "어째서 우리를 미행했는지 물어봐라." "형님이 필요하답니다." "왜?" "그런 건 묻는 게 아니라는 데요." "더럽게 물리는구나." "어떻게 할까요." "가능하면 서로 살아남자고 해라. 나는 놀러온 놈이지 싸우러 온 놈이 아니고 흑장미하곤 아무 감정도 없는 놈이다. 나를 편히 놀다 가게 내 버려 두지 않는다면 계집애한테 똑똑하게 일러 줘라." 병규는 아까처럼 계집애처럼 거만스럽게 굴지 않았다. 한동안 연인처럼 얘기를 주고받았다. "형님을 괴롭힐 생각은 없답니다. 다만 인연을 맺고 싶다는 겁니다. 형님을 눈여겨 본 것은 한국 여자만 구해 낸 게 아니라 일본 소녀까지 구해 낸 걸 보고 인연을 생각했답니다. 이념이 같다나요. 아무 조건없이 그냥 친해두자는 겁니다." "염복이 아니라 염병할 복이다. 아무튼 친해두자는 건 반대하지 않지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고 간섭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해라. 그리고 난 체질적으로 혼자 돌아다니는 놈이라 옆에서 도와 주는 것도 달갑지 않다고 해라. 내가 죽게 될 때, 갚는다고 해라." 나는 이상하게 내 죽음과 흑장미와 어떤 연관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안내를 해도 되냐는 얘깁니다. 형님을 결코 불편하게 하진 않겠답니다." "고맙다고 해라." "부하들의 치료비는 청구하지 않겠답니다." "줄 돈도 없다." 우리는 처음으로 마음 놓고 웃었다. 벱푸역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기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벱푸 역에 기차가 머물자 흑장미는 조그만 핸드백 한 개만 들고 내렸다. 세련된 용모와 차림새가 사교계의 여인처럼 품위 있어 보였다. "그냥 따라가는 겁니까?" 노출되었다. 웬만한 일에 두려움을 갖지 않던 병규였지만 흑장미를 따라간다는 사실 앞엔 주눅이 들어 버린 것 같았다. 녀석도 말만 들었지 한번도 조우한 적은 없었고 군정시절에 흑장미가 남긴 일화와 몇몇 대형 건물의 폭파사건과 족적을 남기지 않는 잠적 따위의 치밀성은 수없이 들었다고 했다. "죽기밖에 더 하겠냐?" "겁나요.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흑장미라니...... 더구나 곱고 순박한 계집애들 속에 날고 긴다는 부하들이 있으니 오므렸다 펼 수도 없잖아요. 이거야 원 생감옥일세." "그래, 생감옥이란 말은 나도 인정한다. 뒤에서 들고 치는 흑장미를 네가 무서워할 나를 꼬나집은 건 처음부터 우릴 지켜봤다는 얘기고 계속 추적했다는 얘긴데...... 가는 데까지 가보자." "형님, 나는 솔직하게 빠지고 싶어요." "임마, 네가 가면 난 벙어리야." "저쪽에서도 통역쯤은 있을 겁니다." "지랄 말고 따라와. 내가 죽더라도 넌 살려 줄 테니까." "차암." 녀석은 입맛을 쩍 다시고 처덕처덕 걸어나갔다. 벱푸 역전 광장에서 흑장미는 손가락으로 승용차를 가리켰다. 우리는 말 없이 올라탔다. 엷은 갈색 선글라서의 여인이 목례를 하고 차를 몰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어디로 가느냐고 그냥 따라가는 거다. 네가 안절부절 못하는 거 보니까 여자한테 되게 약한 모양이구나." "흑장미라는데 겁 안 먹게 생겼어요?" "이 자식아, 너 그런 식으로 크다간 아무 짓도 못해. 어려서부터 몸 사리면서 큰 자식들이 어떻게 되는지 봤잖아? 한국에 가봐라. 귀한 집 자식처럼 군 자식들이 커서 어떻게 됐는지. 사내라면 무엇이든 승부를 걸어봐야 되는 거다. 신념을 주둥아리로만 가지고 있는 자식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빤히 보이잖아. 지랄 그만하고 한번 부딪쳐 보란 말이다." "알았어요." 녀석은 그래도 볼멘소리를 했다. 자동차가 큰길에서 회전하여 골목길로 꺽어들었다. 바닷가를 끼고 우뚝 서 있는 세후 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자동차가 현관에 멈추어 섰다.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고 뛰어 들어가 방 열쇠를 들고 나왔다. "온천 물이니까 목욕하고 쉬시면 모시러 다시 오겠답니다." "수고했다고 해 줘." 여자는 몇 번이나 일본식으로 허리를 굽히고 나갔다. 세후 호텔 삼백사십 호는 바로 바닷가와 연결된 방이었고, 뒷문의 발코니엔 인조잔디와 가꾼 나무들이 정돈되어 있는 다다미방이었다. 바다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방풍석 위에 주욱 앉아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넓게 펼쳐지는 바닷가엔 가지런하게 시멘트로 만든 방풍석이 깔려 있었고 차지 않은 놓인 뜨거운 물에 차를 타 마신 우리는 넓은 욕실로 들어가 뜨겁게 몸을 덥혔다. 바닷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온천수 사우나탕은 우리 두 사람 뿐이었다. "목욕하고 한숨 자두자. 이틀째 잠을 설친 셈이니까." "그러죠." "흑장미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보기엔 오히려 야쿠자 놈들보다 믿을 수 있는 애들 같더라." "그건 모르는 소리예요." "모를 수밖에 없지. 그러나 느낌이란 게 있다." "아무튼 형님 말이죠. 난 모르겠어요." "그래 두고 보자." 목욕을 끝내고 우린 방으로 돌아와 커튼을 모두 내려 어둑한 속에서 나는 흑장미와 어떤 인연이 될지 하나하나 헤아려 보았다. 내겐 방패가 없었다. 이곳 일본에서의 움직임은 적지에서 활동하는 셈이었다. 흑장미도 나를 이용하려는 속셈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당장 돌아간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틀림없이 큰일을 치르게 될 게 빤한 이치였다. 한숨 자고 일어나 면도를 하고 있는데 로비에서 연락이 왔다.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아까 그 운전해 주던 여자의 말이었다. "가자." "지옥(地獄) 온천 구경할 맛 나겠는데요." 온천지대를 일명 지옥 온천이라고 했다. 그만큼 색색가지의 물과 진기한 자연현상이 땅 속에서 솟구쳐 오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지반이 약한 일본 열도엔 온천지대가 흔했지만 이곳 지옥 온천지대의 현상이 손꼽히는 풍물로 알려져 있었다. 자동차가 산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벱푸의 인구는 십사만 명밖에 안 되지만 호텔과 여관 등 관광객 유치업소는 팔 백여 개가 된다고 했다. 산기슭으로 올라서니 산자락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저게 수증기입니다. 가정 집에서든 수챗구멍에서든 수증기가 솟았다 하면 온천수가 돼 버리는 곳이죠." "저런 곳에 사는 건 정말 위험하겠다. 언제 모르잖아." "여기 사람들은 걱정이 많대요. 그전에 조사자료를 보니까 여기 주민들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기나 봐요." "겨울에 난방비는 안 들겠구나." "가보면 즉석에서 달걀 삶아 주는 데도 있어요." "말은 들었다만." "벱푸 지옥조합이란 게 있어요. 그 관련 온천을 구경해 보면 볼만하죠. 산화철 때문에 빨간 온천 물이 솟아오르는 곳도 있고, 파란 물, 회색 구덩이, 지독하게 맑은 물, 펄펄 끓는 물, 이십 분마다 튀어오르는 살아 있는 온천지대 등 푸짐하니까요." 지옥 온천지대 앞 넓은 광장에 흑장미가 서 있었다. 청바지와 니트 차림이었다. 테 가는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눈매를 뺀다면 관광객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차림해였다. 카메라를 멘 모습도 그랬고 머플러나 장신구 없는 차림새가 여염집 여자 그대로였다. "안녕하세요." 흑장미 곁에 선 계집애가 유창한 한국 말로 인사를 했다. "한국인요?" "아녜요." "꽤 잘하시는데." "한국서 공부했어요. K대학에서 국문학 전공했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잘하긴 어려울 텐데요." "아버지가 한국서 오래 살아서 저도 어려서부터 그곳에서 자랐어요." "어쩌다 저런 여자 따라다니게 됐소?" "우리 언니예요." "뭐요?" "그러니 말조심 하세요. 그런 얘기는 안 전할게요." "전해도 상관 없소. 병규야, 넌 따라만 다녀라. 이 여자가 다 알아서 한다니까." 흑장미의 가족사항은 알 수 없었지만 한국과 긴밀한 연결고리를 가졌다는 걸 의심할 수는 없었다. "내가 데리고 다니는 녀석하곤 답답했던 모양이죠?" "그랬겠죠. 언니는 솔직한 걸 좋아하니까요." "솔직한 거 안 좋아하는 사람 봤소?" "그런 얘기가 아녜요." "언니가 누군지 알고 있나요?" "알아요. 흑장미예요." "난 자랑스러워요. 다른 사람은 어떻게 느끼든지 상관없어요. 우리 언니가 흑장미라는 걸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염려하실 것도 없죠. 우리 언니는 좋은 일을 많이 해요. 장총찬씨를 언니가 관심 갖은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거예요. 장총찬씨의 실력이나 한 일은 언니한테 얘기 들어서 알고 있어요." "놀랍소." "그 정도는 언니한테 아무것도 아니죠. 우리 언니 우습게 봤다간 다칠 겁니다." "겁 주지 마쇼." "두고 보면 알겠죠." 우리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감정으로 나란히 걸었다. 피의 지옥은 56년 전에 폭발한 온천수로 짙은 빨강 색깔의 물이 고여 있는 곳이었다. 흙도 붉었고 물 빛깔도 짙은 붉음으로 오히려 검붉어 보였다. 바로 온천 둘레엔 무성한 숲과 잔디밭이어서 뜨거운 지열 속에 그런 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정말 피의 지옥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계속 끓어오르는 용암덩어리 같은 못 가운데는 78도쯤 되지만 가장자리는 식은 물이라고 했다. 수증기가 바람부는 대로 피어올라 근처 나무 숲의 잎새들은 습기를 듬뿍 먹고 있었다. 뜨거운 물에 풀과 나무들이 닿은 자리만 누렇게 죽어 있었다. 이십 분마다 폭발하여 뜨거운 온천수가 튀어오르는 용권(龍卷) 지옥과 이백여 미터 깊이에 98도나 되는 파란 지옥, 원숭이가 많은 지옥지대와 횟가루를 진하게 탄 것 같은 안내하고 있는 흑장미의 표정은 정말 티 없이 밝은 여염집 규수 같았다. 파란 지옥의 끓는 물에 삶은 달걀을 한 꾸러미나 사서 직접 까 주는 손은 귀엽게 자그마했다. "저 흙탕물에서 나온 걸로 깁스할 때 사용하면 쉽게 낫는답니다." 병규 녀석이 귀석방주 지옥에서 진한 횟가루처럼 나오는 흙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더러 어디가 부러지라는 거냐?" "여기서 부러질 사람은 나밖에 없잖아요." "비루먹은 말처럼 그러지 말고 뭔가 냄새를 맡아봐라." "상대는 흑장미입니다. 뭘 알아내겠어요. 내가 죽으면 장례나 잘 치러 줘요." "녀석...... ." 흑장미는 한적한 찻집을 가리켰다. "조오치." 우리는 따라 들어갔다. 텅 빈 찻집엔 곱게 늙은 할머니가 나와 수선스럽게 주문을 받았다. "아기씨 이름이나 압시다." "야기미체코(八木美代子)예요." "언니는?" "아시려고 할 것 없어요. 어차피 본명은 아니니까요." "부르는 이름이라도 압시다. 흑장미야 할 순 없잔소?" 애기미에코와 흑장미는 귀엣말처럼 몇 마디 주고받았다. 뻐드렁니 한 개가 퍽 어울리는 웃음을 지었다. "도모코(祝友子)예요. 그냥 도모코라고 불러달래요." 흑장미가 됐는지 모르겠어요. 나이도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기구한 사연이 있어요. 아실 필요 없지만." "알 만한 것만이라도 좀 압시다. 서로를 알아야 통하든 미워하든 할 거 아뇨. 손님대접 치곤 좀 뻑뻑하잖소?" 나는 흑장미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여염집 규수 같은 이 도모코란 흑장미에게 어떤 사연이 있으며 어떤 한이 서려서 그런 세계에 발을 들여놨는지 알고 싶었다. 이렇게 꾸미고 나서면 어느 누구도 그녀를 흑장미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런 점이 흑장미가 지하활동을 할 수 있는 최대의 강점인지도 모른다. 밤의 황제라고 하는 야쿠자들도 벌벌 흑장미가 전후 혼란기에 태어나 일본 여자들의 고통을 덜어 줬다는 사연을 듣고 미워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런 양심 세력이 존재했었다는 게 기분 좋았다. "흑장미가 도모코란 사실을 밝힌 것만도 장총찬씨는 무지하게 많이 안 거예요. 그 이상은 알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친해 두셔도 돼요. 언니가 원하는 것도 그런 거니까요." "그렇다면...... ." "왜 친절하고 왜 친해 두자는 거냐 이거죠?" "그렇소." "언니는 장총찬씨 같은 사람이 필요하대요. 나쁜 일을 같이 하자는 게 아니라 보람 있는 일을 같이 하자는 겁니다. 언니 힘으로는 드리겠답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며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고 때로는 아주 손쉬울 수도 있대요." "말하자면 나더러 흑장미 앞잡이가 되라는 겁니까?" "그게 아녜요. 언니는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어요. 일테면 한국 여자들이 어디서 어떤 수난을 겪고 어떻게 속아서 흘러 들어왔으며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는지를 알 수도 있고 비슷한 처지의 일본 여자들 경우도 많이 알고 있답니다. 말하자면 그런 일을 같이 하자는 거죠. 억지로 붙잡거나 애원하지 않는답니다. 다만 생각이 같으니까 그런 일만이라도 마음을 합치자는 거죠." 나는 짧은 순간이지만 여러 가지생각을 한꺼번에 하기 시작했다. 흑장미는 많이 방법을 가리지 않아온 모순을 안고 있었다. 초창기의 순수성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였다. 더구나 조직이 방대해지자 경영합리화라는 명목 때문에 거침없이 이권에 개입하거나 야쿠자와 대혈투극을 벌여 시끄럽게 구는 집단으로 성장해 오기도 했다. 내가 흑장미와 인연을 쌓게 된다면 그런 일을 동조할 수밖에 없고 내가 일본 땅을 밟을 때의 결심이 무너지는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내가 거절한다면 어떻게 하죠?" "언니는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답니다. 이런 일은 누군가 해야 됩니다. 장총찬씨라면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도모코나 야기미에코의 표정은 우연찮게 일본 땅에 온 이유를 알고 있었고 내 행동을 면밀하게 관찰한 후에 그런 결정을 한 것 같았다. "나는 찬성할 수가 없습니다. 옳은 일이라는 건 압니다만 어느 특정단체나 개인을 위해 뛰어본 적도 없고 뛸 생각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나 혼자서 하는 걸로 만족하고 싶어요." "그 말씀은 모순인데요. 옳은 일이란 걸 알면서 어째서 거절하는 거죠? 두려운가요? 아니면 일본 여자들의 아픔은 아픔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가요? 사람의 고통은 다 마찬가지 아닐까요?" "물론 옳은 얘깁니다. 그러나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내가 일본 여학생 열두 명을 구하러 간 것을 보면 일본 여자의 겁니다." "그건 그렇지 않죠. 나가시마 도목을 잡기 위한 간접 수단이었잖아요." "부정하지 않겠소. 그러나 나는 어떤 경우든 조직적인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나가시마 일당이 벌써 움직이고 있어요. 그건 대일본평화회가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인가 알겠죠?" "압니다." "그런데도 버티실 참인가요?" "그렇소." 야기미에코와 도모코는 한동안 수근거렸다. 두 여자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들의 진지한 표정 속에 사심이 끼여들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명분을 내세워 접근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더 강요하거나 조르지 않겠답니다. 부탁하고 싶은 건 몸조심을 해달라는 겁니다. 장총찬씨의 행동은 여러 사람이 주시하고 있어요. 이미 사건을 일으켰고 대화단과의 관계도 의심을 받고 있답니다. 지금 일본의 암흑가는 대혈전을 앞둔 치열한 정보전중이라고 합니다. 살아남는 지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겠죠. 언니는 장총찬씨를 돕고 싶대요. 이 문제를 떠나서 그냥 아무 조건 없이 친해 두고 싶다는 겁니다. 아무 요구도 하지 않겠답니다. 그냥 인연이 닿았던 사이로 개인적인 친분을 갖고 싶답니다." 나는 한참만에 도모코의 손을 잡았다. "고밉소. 그건 나도 바라는 일입니다." 흑장미라고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갑시다." 우리는 굳게 악수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둑해질 때까지 식당에 앉아서 얘길 나누다가 헤어졌다. 오히려 미사코보다 강렬하게 머리속에 남는 여인이었다. 바래다 주겠다는 걸 뿌리치고 택시를 잡았다. 야기미에코와 도모코는 예쁘게 웃음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고것들, 귀엽다." 나는 그들이 멀어지자 이렇게 말했다. 병규 녀석이 씨익 웃었다. "형님, 반한 거 아뉴?" 녀석이 보아도 시원시원한 성격과 고운 자태가 어울린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곱게 자란 규수이지 흑장미라고 보기엔 아무래도 그들에게 어떤 한이 서려 있단 말인가? "반하면 안 되냐?" "안 될 것까지야 없지만...... ." "임마,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뭘 하는 것처럼 한마디 하자 병규가 키들거렸다. 다혜 얼굴이 떠올랐다. 다혜와 헤어져 있는 시간이 상당히 오래된 느낌이었다. 다혜가 떠나자마자 나는 터무니없이 파리로 유학을 가겠다는 생각을 품어본 적이 있었다. 불어 한마디 못하면서 파리로 날아갈 생각을 한 것은 오직 다혜가 보고 싶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그녀가 적어보내는 사연과 그곳 풍물사진은 나를 더 끌어당기게 했다. 나는 무슨 짓을 하든 기회를 만들어 다혜한테 쫓아갈 생각이었다. 그런 결심은 이미 굳어 시내 족으로 들어서기 위해 택시가 산모퉁이 길을 돌았다. 옆길에서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게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브레이크!" 병규가 나보다 먼저 소리질렀다. 나도 뭐라고 소리질렀다. 육중한 것이었다. 택시가 순간적으로 튕겨나갔다. 전진하던 방향으로 무섭게 달려나가 인도를 건너 뛰어 도랑으로 처박혔다. 뒤돌아보았다. 힘 좋게 생긴 트럭이 벌써 모퉁이를 돌아 내달리고 있었다. 문을 열려고 했지만 문짝이 튕겨져 들어와 꼼짝도 안 했고 운전사는 피투성이가 된 채 운전대에 얼굴을 처박고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냐?" "팔이, 팔이....... ." 질렀다. 운전사를 잡아채자 피투성이 얼굴에 가볍게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혓바닥을 물려 피가 배어나오는 입가를 손등으로 닦고 발길질로 병규 쪽의 문짝을 열었다. 병규는 엉금엉금 기어서 뒹굴 듯이 빠져나갔다. 박살난 차창, 움푹 들어간 차체, 전파나 다름없는 참사, 살아났다는 게 기적일 수밖에 없는 현장이었다. 사람들이 멀찍이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앞문짝은 열리지 않았다. 의자를 눕히고 운전사를 끌어냈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차마 손 대기 어려울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 병규가 인도로 기어 올라가 일본 말로 뭐라고 떠들었다. "트럭 번호판 봤어요?" "못 봤다." "개새끼들!" 병규 녀석이 절규하듯 욕지거리를 했다. "운전사 죽었죠?" "아직은 살았다." "구급차하고 경찰차가 금방 올 겁니다. 이 새끼들 신고는 잘해주니까." "괜찮냐?" "아무래도 팔뚝이 부러졌나 봐요. 형님은요?" "아직은 멀쩡하다." "피 나는데요." "괜찮아." "흑장미 짓예요." "아닐 거다. 대일본평화회 애들이거나 다른 애들 짓이다." "아녜요. 믿지 마세요. 흑장미가 어떻다는 거절했으니 보복하는 겁니다." "나중에 보면 알겠지." 나는 심호흡을 하고 산모퉁이 쪽을 쳐다보았다. 살았다는 게 환희였다. 더구나 다치지도 않았다. 충격을 받았겠지만 멀쩡한 몸이었다. 약간 시큰거리는 무릎과 혓바닥만 아니면 다친 곳은 전혀 없었다. 트럭이 충돌하는 순간에 납작 엎드려 의자와 바닥의 공간으로 숨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형님, 이건 기적입니다." 병규도 그 정도로 다치고 살아났다는 게 기쁨으로 남는 모양이었다. 트럭이 그렇게 모질게 달겨들었는데 어떻게 해서 택시가 차체에 깔리지 않고 튕겨나와 개울에 처박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살인행위가 그렇게 밉지도 않다는 모순을 느끼고 있었다. "여권 있죠?" "그래." 경찰차 앞에 구급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하얀 차에 붉은 십자가 달린 구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추더니 운전사를 실었다. 병규가 경찰관에게 사고 경위를 설명했고 내 여권과 병규의 신상을 확인한 경찰관이 길을 막고 트럭의 방향과 택시의 방향을 검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없는 사고랍니다. 두 차가 모두 브레이크를 사용하지 않았대요. 받쳐서 튕긴 자국은 있어도 순각적으로 밟게 되는 브레이크 자국은 없대요. 우리더러 살아난 게 기적이랍니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형님은 괜찮겠느냐고 해요." "쉽게 죽지 않을 놈이라고 해라." "도주차량을 수배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게 없냐고 하는데요?" "없어." 경찰관은 병규가 개인적으로 병원에 가겠다는 말을 듣고 현장사진과 주위 사람들에게 탐문조사를 했다. 내가 생각해도 두 자동차가 전혀 브레이크를 사용한 흔적이 없다는 건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도 운전을 하고 다니지만 위험한 순간이면 누구나 브레이크로 발길이 가는 게 상식이었다. 달겨든 트럭은 의도적으로 우리를 깔아 뭉개기 위해 그랬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브레이크라고 소리까지 쳤는데 그냥 질주하여 이해하기 어려웠다. 트럭이 받은 곳은 내가 앉아 있는 운전사 뒤쪽보다 조금 앞이었다. 정확하게 충돌을 시도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운전석의 운전대마저 휘어 버린 정도면 우리들이 살아 있는 건 정말 기적에 가까웠다. 조사가 끝나자 경찰관은 사인을 받고 돌아갔다. 목격자들의 증언으로는 트럭의 차량번호와 차의 형태와 색깔 정도뿐이었다. 나는 자올차의 번호판이나 차체에 그다지 기대를 걸지 않았다. 계획적인 행위가 확실하다면 얼마든지 위장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병원부터 가자." 우리는 다른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달렸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병규는 살아났다는 게 "정면에서 받았으면 꼼짝 없이 갔을 겁니다." "이런 일은 정면에서 받지 않는 게 상식일 거다. 사람 새끼라면 운전사를 죽일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계획적으로 내가 앉아 있는 뒤쪽을 정공으로 받을 참였어. 그런데 그 운전사가 노련했거나 몹시 당황해서 엑셀러레이터를 브레이크 대신 밟은 거야. 만약 멈췄다면 정통으로 나를 받았을 거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자동차가 받치면서 달린 거야. 그래서 개울에 처박힌 거지. 그냥 잠깐이라도 멈추었다면 깔고지나갔겠지. 두 차가 모두 브레이크를 사용하지 않아서 사고조사반이 고개를 흔든 이유가 있어. 우리가 산 것은 바로 운전사의 그 속력 때문이다. 속력 때문에 튕기면서도 빠져나간 가고 있을 거다." "일리 있는 얘기 같애요. 그나저나 아직도 흑장미를 믿고 있나요?" "아직은 믿는다. 걔들이 흑장미가 아니란 사실은 후속조치를 하지 않은 점이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한 순간 다시 이단계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게 흑장미이고 충동사고 자체만으로 해결하려는 단순성은 바로 야쿠자의 수법이다. 그래서 하수인을 사용한 작전이 실패하면 그 하수인만 문책을 받는 우를 범하지. 흑장미라면 재차 폭탄이라도 던질 치밀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로 온 것을 아는 사람은 흑장미뿐예요." "아냐. 대화단 애들도 알고 대일본평화회 애들도 알고 있어." "의문투성이다." "우린 믿어봐요." "내가 너무 쉽게 노출되고 있어. 그건 너랑 움직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표적이고 정보가 어디론가 새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나까지 의심하는 겁니까? 지금 금방 형님따라 황천갈 뻔했는데요." "넌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다. 네가 대화단의 멤버이지만 너를 없애서 득이 된다면 네가 사라지는 건 간단한 거다." "설마...... ." "하여튼 두고 보자." 병원문 앞에서 녀석은 찡그리며 내렸다. 통증이 심한 모양이었다.

[묘안당]

일본 진출은 그야말로 죽음을 갖고 놀고 있는건데 내일이 궁금해지네요...감사합니다

[묘안당]

이조시대 일본을 건너간 사명대사가 생각남니다

[미혜]

잼나게 잘봤읍니다~!

[새처럼]

좋은글 김사헤요 ^^^

[그리운남촌]

잘 읽고갑니다~~

[김성갑]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