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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전은 사도세자의 비극이 일어난 곳이다.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정성왕후)서씨가 영조 33년에 타계하자
문정전에 위패를 모시고 휘령전(휘령전)으로 불렀는데, 당시 경희궁에 머물고 있던 영조는 자주 이곳에 들러
창경궁에서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사도세자와 더불어 참배하곤 했다.
영조 89권, 33년(1757 정축 / 청 건륭(乾隆) 22년) 6월 1일(신유) 1번째기사
친히 정성 왕후의 명정과 대행 대왕 대비 재궁의 글씨를 쓰다
임금이 친히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명정(銘旌)을 쓰고, 또 친히 대행 대왕 대비 재궁(梓宮) 위의 글씨를 썼다.
재궁에 옻칠하게 하였는데, 모두 25차례 하고 마쳤다.
(註 대왕대비 : 숙종의 제2 계비 인원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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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문 |
선인문 앞 회화나무 |
그런데 영조 38년(1762)5월13일 영조가 휘령전에 들렸을 때 세자가 병을 핑계하고 늦게 나타나자 비행을 일삼는
세자를 불신하고 있던 왕은 노여움이 치솟아 세자에게 칼로 자결하라고 명했다. 시강원 신하들이 자결을 만류하자
왕은 세자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에 가두도록 명했다.그리하여 8일만인 5월21일 세자는 창경궁 남문인 선인문
부근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이 사건을 임오화변(壬午禍變) 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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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을해) 2번째기사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 왕후(貞聖王后)께서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하고, 이어서 협련군(挾輦軍)에게 명하여 전문(殿門)을 4, 5겹으로 굳게 막도록 하고, 또 총관(摠管) 등으로 하여금 배열하여 시위(侍衛)하게 하면서 궁의 담쪽을 향하여 칼을 뽑아들게 하였다. 궁성문을 막고 각(角)을 불어 군사를 모아 호위하고,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으니, 비록 경재(卿宰)라도 한 사람도 들어온 자가 없었는데, 영의정 신만(申晩)만 홀로 들어왔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扣頭]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신만과 좌의정 홍봉한, 판부사 정휘량(鄭翬良), 도승지 이이장(李彛章), 승지 한광조(韓光肇) 등이 들어왔으나 미처 진언(陳言)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세 대신 및 한 광조 네 사람의 파직을 명하니, 모두 물러갔다. 세손이 들어와 관(冠)과 포(袍)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김성응(金聖應) 부자(父子)에게 수위(守衛)하여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이때 신만·홍봉한·정휘량이 다시 들어왔으나 감히 간하지 못하였고, 여러 신하들 역시 감히 간쟁하지 못했다. 임금이 시위하는 군병을 시켜 춘방의 여러 신하들을 내쫓게 하였는데 한림(翰林) 임덕제(林德躋)만이 굳게 엎드려서 떠나지 않으니, 임금이 엄교하기를, “세자를 폐하였는데, 어찌 사관(史官)이 있겠는가?” 하고, 사람을 시켜 붙들어 내보내게 하니, 세자가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하고, 이에 전문(殿門)에서 나와 춘방의 여러 관원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물었다. 사서(司書) 임성(任晠)이 말하기를, “일이 마땅히 다시 전정(殿庭)으로 들어가 처분을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니,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 천선(改過遷善)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映嬪)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世孫)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嬪宮)·세손(世孫) 및 여러 왕손(王孫)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임금이 이에 전교를 내려 중외에 반시(頒示)하였는데, 전교는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8책 99권 22장 A면 【영인본】 44책 101면
[註 15394]정축년 : 1757 영조 33 [註 15395]무인년 : 1758 영조 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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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21일(계미) 2번째기사
사도 세자가 훙서하다. 왕세자의 호를 회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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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世孫)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大臣)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號)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사도 세자(思悼世子)라 한다. 복제(服制)의 개월 수가 비록 있으나 성복(成服)은 제하고 오모(烏帽)·참포(黲袍)로 하며 백관은 천담복(淺淡服)으로 한 달에 마치라. 세손은 비록 3년을 마쳐야 하나 진현(進見)할 때와 장례 후에는 담복(淡服)으로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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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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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미 처분하였은즉 빈궁(嬪宮)은 효순(孝純)과 같으니, 구인(舊印)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혜빈(惠嬪)이란 호를 내려 일체로 옥인(玉印)을 내리고, 조정은 정후(庭候)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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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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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5년에 대비(철종비 철인왕후)가 별세하자 혼전을 문정전으로 정했다.
문정전은 일제 강점기에 헐려나간 것을 해방 후 다시 중건했다. 다만, 문정전 중앙에 남북으로 설치한 복도는
복원되지 않아서 (동궐도)의 모습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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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26일 창경궁 문정전에 불이나다.
[조선일보 안준호기자]
26일 오후 5시쯤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경궁(사적 123호) 문정전(文政殿)에서 불이 나 문 일부를 태우고 5분여 만에 꺼졌다.
문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 남쪽에 위치한 건물로 조선시대 성종 때 지어졌다.
이 사건을 목격한 관람객 이모(39)씨는 "70대 노인이 갑자기 부탄가스 4통을 놓고 불을 붙여
부탄가스통이 폭발하며 불이 나 관리직원들과 함께 주변에 있던 소화기로 불을 껐다"고 말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현장에서 관람객들과 직원들이 범인으로 지목한 채모(70)씨를
서울 혜화경찰서로 연행해 조사 중이다.
하지만 채씨는 경찰에서 "불을 지른 적이 없다"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한편 문화재 전문가들은 "화재가 난 문정전은 지난 1986년 복원된 건물이며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과 인접해 있는 건물이어서 자칫 이번 화재가 번졌을 경우
엄청난 피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며 "특히 창경궁 같은 궁궐에
범인이 부탄가스를 들고 출입할 수 있었다는 것은 관리가 소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안준호기자 libai@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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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1. 조선왕조실록
2. 창덕궁과 창경궁( 한영우.김대백)
3. 동궐도 (한영우 김대백)
4. 소구리 싸이트
5.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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