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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볼때마다 눌제 양성지의 정책의 현실성과 구체성에 놀라게 됩니다.
조선조에 왜 이런 사람들이 계속 나오지 않고 어벙벙한 사림들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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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국(軍國)의 일은 깊이 생각하고 멀리 도모하여 만전의 계책을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행순(行巡) 하는 군사를 한 무장(武將)에게 주어 어둡기를 틈타서 점열(點閱)하니, 실로 미편합니다. 빌건대 금후로 순장(巡將)은 문관(文官)·무관(武官)의 두 사람을 아울러 차정(差定)하고, 의금부(義禁府)의 상직(上直)하는 낭관(郞官)이 친히 병조(兵曹)의 문안(文案)을 주고, 순장을 대하여 점고(點考)하여 보내고 그 군목(軍目) 을 순장에게 주면 순장이 군목을 받아서 검찰(檢察)하게 하소서.
1. 신이 듣건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에는 종실(宗室)이 합(閤)에 나오지 않았고, 송(宋)나라에는 대종정시(大宗正寺)가 있었고, 남송(南宋)에는 서·남(西南) 두 외종정(外宗正)이 있어 종실을 처리하였다고 하는데, 지금 혹 이 뜻을 모방하여 경주(慶州)·전주(全州)·평양(平壤)·영흥(永興)·개성부(開城府)의 영전(影殿)과 함흥(咸興) 본궁(本宮)에 각각 직질(職秩)이 낮고 친속의 먼 종실(宗室) 두 사람을 보내어 3년에 한 번 교대하여 향화(香火) 를 받들게 하고, 아울러 관(官)에서 10호(戶)를 주어 넉넉하게 하면, 이것도 또한 유성(維城)의 뜻이요 반석(盤石)의 종(宗)이 될 것입니다.
1. 신이 명(明)나라의 관제(官制)를 보건대, 남직례(南直隷) 진강(鎭江) 등 14부(府) 15주(州)와 북직례(北直隷) 순천(順天) 등 8부(府) 18주(州)는 모두 포정사(布政司)에 예속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고황제(高皇帝)의 깊은 생각입니다. 본조(本朝) 8도(道)에서 경상도(慶尙道)의 안동(安東)·진주(晉州), 전라도(全羅道)의 남원(南原)·광주(光州), 충청도(忠淸道)의 공주(公州)·홍주(洪州), 경기(京畿)의 파주(坡州)·수원(水原), 강원도(江原道)의 춘천(春川)·양양(襄陽), 황해도(黃海道)의 연안(延安)·평산(平山), 함길도(咸吉道)의 영흥(永興)·북청(北靑)·경원(慶源), 평안도(平安道)의 의주(義州)·정주(定州)·성천(成川) 등 군은 직접 한성부(漢城府)에 예속시키어 그 문이(文移) 등의 일은 모두 예전대로 하고, 다만 전최(殿最)하여서 포폄(褒貶)하는 것은 이조(吏曹)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소서.
1. 평안도(平安道)·함길도(咸吉道)는 경계가 다른 나라와 연접하여 방어하기에 고생하니 무수(撫綏)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안도(平安道) 평양(平壤)의 자제(子弟) 한 사람은 동반(東班)에 쓰고, 강변(江邊) 육군(六郡)의 자제는 사복(司僕)에 쓰고, 영변(寧邊)·안주(安州)·의주(義州)·인산(麟山)·귀성(龜城)·정주(定州)·성천(成川)의 자제는 서반(西班)에 쓰고, 함길도(咸吉道) 함흥(咸興)의 자제는 동반에 쓰고, 육진(六鎭)·삼수(三水)·갑산(甲山)의 자제는 사복에 쓰고, 경성(鏡城)·길주(吉州)·단천(端川)·북청(北靑)·영흥(永興)의 자제는 서반에 쓰고, 제주(濟州)의 자제 4인과 정의(旌義)·대정(大靜)의 자제 각 2인은 또한 서반에 쓰되, 동반(東班)은 3년마다 교대하여 만세의 계책으로 삼으소서.
1. 신이 역대의 제도를 보건대, 민구(民口)가 30만이면 호수(戶數)는 10만이 되고 호수가 10만이면 군사는 3, 4만 명이 되어 으레 3정(三丁)을 1호(戶)로 삼고 3호(戶)로 한 군사를 길렀는데, 지금은 2정(丁)을 1보(保)로 삼으니 보(保)는 곧 호(戶)입니다. 그리하여 부역(賦役)에 이바지하고 그리하여 군정(軍丁)을 내고 하니 모름지기 매 보(保)가 부실(富實)한 연후에야 혹 나누기도 하고 혹 합하기도 하여 이롭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2정을 1보로 삼으면 보(保)가 장차 고단하고 약해져서 비록 3보를 거느리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이고, 3정(丁)을 1보(保)로 삼으면 보가 모두 부실(富實)해져서 다만 2보를 거느려도 또한 좋을 것입니다. 빌건대 3정을 1보로 삼아 보병(步兵) 가운데 경(輕)한 자와 아전(衙前)·공장(工匠)·연호(煙戶) ·잡색(雜色)이 스스로 1보(保)가 되면 이것은 3인(人)이 한 군사가 되는 것이고, 보병(步兵) 가운데 중(重)한 자와 기병(騎兵) 가운데 경한 자가 1보(保)를 거느리게 되면 이것은 6인이 한 군사가 되는 것이요, 기병(騎兵) 가운데 중한 자라야 바야흐로 2보(保)를 거느리게 되니 이것은 9인이 한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재주가 있고 부유한 자는 가난하고 재주가 없는 사람을 조정(助丁)으로 삼고, 재주는 있는데 가난한 자는 부유하고 재주가 없는 자를 조정으로 삼으니, 이와 같이 하면 군사가 모두 정기(精騎)가 되어서 재주 있는 자가 정군(正軍)이 될 것이고 빈부(貧富)가 모두 제 곳을 얻어서 백성도 또한 따라서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1. 승지(承旨) 6인이 왕명을 출납하는 것을 나누어 맡으니 그 임무가 지극히 중한데, 지금 혹은 상참(常參)으로 인하여, 혹은 관사(觀射)로 인하여 6인이 모두 어전(御前)에 들어갑니다. 입계(入啓)하는 일은 친히 상지(上旨)를 품(稟)하므로 지극히 정밀하지마는 다만 1일 만기(一日萬幾)여서 육조(六曹)·제사(諸司)의 공사(公事)를 정원(政院)으로 인하여 입계하고자 하나 하지 못하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빌건대 매양 상참·관사하는 날에는 승지(承旨) 5인은 들어와 예지(睿旨)를 받고 한 사람은 본원(本院)에 머물러서 제사(諸司)의 공사를 받아 그때 곧 입계하게 하소서.
1. 군자(軍資)는 저축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한 곳에 축적하여도 안되며, 모름지기 안팎이 모두 족하고 동서가 모두 갖추어진 연후에야 가합니다. 빌건대 두모포동(豆毛浦洞) 안에 큰 창고를 창설하고 인하여 한강 상류(上流)에서 조운(漕運)하는 것으로 들여서 쌓고, 하류(下流)에서 조운하는 것도 또한 서강(西江)에 이르러 작은 배에 옮겨 싣고 한강(漢江)에 도달한다면, 이렇게 하여 군국(軍國)의 수요(需要)되는 것이 한 곳에 있지 않고 급한 때에 서로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일대(一代)가 일어남에 반드시 일대의 제도가 있으니, 예악(禮樂)은 때에 인하여 손익(損益)하고 하나를 고집하여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이 예조(禮曹)에서 왜인(倭人)·야인(野人)에게 잔치할 때를 보건대, 남악(男樂)을 쓰는데 가무(歌舞)와 의관(衣冠)을 볼 수 없으니, 이것은 이웃 나라에 들리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에서 번방(蕃邦)의 사신에게 잔치할 때에 잡기(雜伎)를 쓰고, 본조(本朝)에서 명나라 사신에게 잔치할 때에는 또한 여악(女樂)을 씁니다. 빌건대 이제부터 동북(東北)의 사신에게 잔치하는 데는 무동(舞童)을 제하고 고쳐서 여악(女樂)을 쓰고, 서조(西朝)의 사신에게 잔치하는 데는 또 본국(本國)의 잡기(雜伎) 중에 볼 만한 것을 택하여 쓰소서.
1. 법을 세우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법이 세워져 영(令)하면 행하고 금하면 그쳐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근일에 특별히 사행(私行)을 금하고, 범하는 자는 중전(重典)으로 의논하는데, 신이 듣건대 이 법이 서자 행장을 꾸렸다가 가는 것을 정지한 자도 있고, 좌석에서 망명(亡命)한 자도 있고, 촌락에서 손과 나그네가 자취를 거둔 것도 있고, 수령(守令)이 그 권솔[家累]들을 흩어 보낸 자도 있다 합니다. 금일 이후로는 생민의 폐해가 10분의 3은 덜리고 수령의 폐해가 10분의 5는 덜렸으니, 어찌 국가에 크게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법은 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법이 중하면 범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민의 폐해와 수령의 폐단이 오히려 다 없어지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근년에 대납(代納)한 물건값을 받는 자가 혹은 수령을 짓밝고 혹은 뇌물을 자행하여 백성을 침어(侵漁)하는 것이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빌건대 금후로는 물건을 공납(貢納)할 백성이 스스로 납입하지 못하는 자는 그 소원에 따라 호조(戶曹)에 전보(轉報)하면 호조에서 부상(富商)으로 하여금 납세(納稅)하여 대신 바치게 하고, 그 대납(代納)한 문안(文案)은 한 건(件)은 감사(監司)에게 보내고 한 건은 대납한 자에게 주면, 이에 수령은 한결같이 대전(大典)에 의하여 백성에게서 거두고 대납한 자는 문빙(文憑)을 가지고 들어가 주창(州倉)에서 받습니다. 이렇게 하면 생민을 침요(侵擾)하지도 못하고 수령에게 당돌하게도 하지 못하여 수령의 폐해는 10분의 7은 덜릴 것이고 생민의 해는 10분의 5는 덜릴 것입니다.
1. 법을 세우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법이 선 뒤에 간사한 것을 발각하고 은복(隱伏)한 것을 적발하여 이익이 국가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근일에 양인(良人)을 억압하여 천인(賤人)으로 만드는 자는 장(杖) 1백 대를 때리고 전 가족을 변방에 입거(入居)시키고 범인(犯人)의 노비(奴婢) 3구(口)를 진고(陳告)한 자에게 상으로 주는데, 이 법이 세워지자 중외(中外)가 두려워하고 경계하게 되니 모두 좋은 법이라 칭하여, 한 자는 반드시 자퇴(自退)하고 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니 법이 이렇게 쾌(快)합니다. 빌건대 다시 더 법을 세워 이제부터 양인(良人)이 한 군정(軍丁)을 누락시키면 장(杖) 1백 대를 때리고 전 가족을 입거(入居)하고, 공사 노비(公私奴婢) 한 명을 숨기다가 발각된 자는 사유를 만나는 것을 물론하고 모두 장(杖) 1백 대에 전 가족을 입거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여 양민이 다 나오면 군액(軍額)이 족할 것이고, 공천(公賤)이 나오면 관부(官府)가 족할 것이고, 사천(私賤)이 나오면 사대부(士大夫)가 족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되면 반드시 평민을 쇄출(刷出)하여 변방에 채우지 않더라도 변군(邊郡)이 족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