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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감리교(Methodist Church)
(1) 미국 남감리교 선교회의 조선선교(1896년)
“감리교회”(Methodist Church)는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1703~1791)의 영향력이 굳건한 기독교로서 “성결”(sanctification)의 은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884, 미국 북감리교회 소속 일본선교사 “맥클레이”(R.S. Maclay, 1824-1907)가 조선으로 입국하고, 1885년 4월, “아펜젤러”(H.G.Apenzeller)와 의료선교사 스크랜톤과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에 의해 미국의 북감리교 선교회 지도자들로 구성된 헌신적인 선교정책으로 선교와 복지와 복음과 사회개혁등 4대 부문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미국 남감리교 선교회의 조선선교는 중국 의료선교사 “리드”(Dr.C.F.Reid)와 함께 벤더빌드 대학 출신이며 중서학원 교수인 “윤치호”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중서학원"(Anglo Chiness College)은 남감리교 선교회 “영 알렌”(Young J.Allen) 선교사가 운영하는 대학으로 윤치호도 이 학교의 출신이었습니다. 윤치호는 1887년 4월3일, 남감리교인으로는 최초로 “본넬”(W.B.Bonnell)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10월, 미국 벤더빌드대학(신학)과 에모리대학(영문학)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1893년, 윤치호는 남감리교 감독이 된 에모리 대학교 총장 “캔들러”(Warren A.Hendrix)에게 조선선교기금 2백달러를 기부하며 조선선교를 부탁하였습니다. 1895년 10월, “헨드릭스” 감독(Bishop E.R.Hendrix)과 리드 선교사가 서울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중국교구의 남감리교 조선지회는 1897년 5월, “조선선교부”를 조직하고 리드 목사를 초대 “감리사”로 선출하였으며,인천 송도를 선교 거점으로 삼아 경기지역 복음화에 선도적 역할을 해 나갔습니다. 초기에는 미국 북감리회와 남감리회가 별도의 회를 조직하였으나, 1930년 12월2일, 북남감리회는 “기독교 조선 감리회”로 통합하였습니다. 1943년, 일본에 의해 “조선기독교단”으로 강제 통폐합되었으나 해방후 다시 분리되었고, 1949년 이후에는 6.25의 시련을 극복하고 완전 정착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감리교회는 서울,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교회를 설립하고 1887년 “배재학당”(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과 1907년, 협성신학교(협성대학교의 전신)와 목원대학교(1954년) 등을 설립하여 기독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2) 감리교 총회조직
1901년, 감리교는 전국을 3개 지방으로 관장하였으며 1904년, “조선선교연회”(Korea Mission Conference)가 조직되었습니다. 1906년, 한국인 “김창식”(金昌植)과 “김기범”(金箕範)이 감리교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1908년, “조선연회”(Korea Conference)가 중국연회에서 독립되어 “김창식” 목사와 “현순” 목사가 최초로 감리교 연회의 정회원 자격을 취득하였고, 김창식 목사는 “지방감리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1910년, 감리교 연회의 한국인 정회원은 10여명으로 증가하였고 준회원은 수십명에 달하였습니다.
1908년 10월, 남북감리교회는 전도부인 육성을 위한 “전도인 단기강습회”(1908년10월~1909년6월)를 개최하고 여성지도자를 배출하였습니다. 여성 전도인은 복음전파와 함께 한글교육을 하여 교인심방과 교육성과를 이루었습니다. 복음은 복음전파라는 궁극적 사명외에 문화적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원산부흥운동(1903)과 평양대부흥운동(1907)으로 성령운동은 교회변혁을 중심으로 사회개혁을 주도하였습니다. 1907년, 감리교신학교 설립과 함께 노회가 조직되었습니다. 1912년에는 감리교 총회가 조직되어 한국기독교는 장로교와 함께 감리교의 양대축을 중심으로 성장을 가속화 하였습니다. 1914년, 한국교회는 185,000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인도전체 기독교인과 비슷한 통계로 먼저 복음이 전파되었던 일본, 중국보다 높은 성장이었습니다. 1900년 이후 한국기독교는 교회와 나라와 사회를 개혁하는 가장 큰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구축되어 갔습니다.
한국감리교회는 개인에 따라 구원이 예정되어 있는 캘빈의 구원관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누구나 예정에 관계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만인구원론”을 믿고 있습니다. 감리교회는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의 핵심원리로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체험신앙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고 교리를 노래와 찬송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감리교회는 평신도 전도인 제도와 야외전도, 순회전도를 위해 평신도들에게 교회를 개방하였습니다. 사랑의 완전을 통한 기독자의 완전, 교육중시, 고아, 노인, 빈민, 노동자들의 영혼 구원 등 사회적 관심고양과 사회제도의 개선을 역설하였습니다. 감리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과 복음과 봉사를 위하여 교회연합정신을 강조하였습니다.
(3) 남북감리교회와 신학교육
1905년, 북감리교는 영변, 공주, 해주지역을 선교구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중국 감리교선교회 관할의 남감리교회는 1906년 독립하여 송도와 원산과 춘천지역을 선교구로 하였습니다.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으로 감리교회는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으며 이로인한 교회지도자 양성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습니다. 북감리교회 스크랜톤 은 지금까지의 신학반(Theological Class)에서 중앙 교역자 양성기관인 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전하였습니다. 북감리교 선교회 스크랜톤, 북지방감리사 모리스, 서지방감리교 케이블, 남지방 감리교 스위러를 위원으로 하는 “신학교 설립 특별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감리교 신학교육은 “신학반”(1900~1906), “신학부”(1906~1908), “신학교”(1908~)로 발전하였습니다. 1888년,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성경, 십계명, 사도신경의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그후 1893년, 한국인 담임전도사 교육을 위해 4년과정의 신학교육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신학반 교육은 12명을 선발하여 1주에 3일간 오후 시간을 이용하여 성경, 설교학, 구원론, 성경개론 등을 공부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김창식(평양),이명숙(강화), 김기범(제물포)은 성실하게 교육을 이수하고 전도사로서 사역자의 길을 갔습니다. 1899년 5월, 신학반을 신학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4년과정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감리교는 교역자 육성을 위한 신학회와 평신도 지도자 육성을 위한 사경회로 구분하여 교육을 지도하였습니다. 신학교육에 있어서 어려움은 신학용어를 한국어로 변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성품”(personality), “의인”(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 “구속”(atonement), “구원”(salvation) 등 존스 선교사는 한글신학용어를 채택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신학회”(Theological Association of Club)에서는 신학개론(아펜젤러), 교리장정(스위러), 역사신학(존스), 심리학(노블), 조직신학(노블), 설교학(노블) 등을 공부하는 등 체계적인 교육체계를 갖추어 갔습니다. 1901년, 감리교 연회에서 한국기독교 사상 최초로 김창식, 김기범, 최병헌(1902년,상동교회담임)이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1903년, 한국인 최초로 김창식, 이은성 감리교 목사가 복음서를 강해하였고, 교과과정은 신학개론, 조직신학, 설교학, 석의학, 윤리학, 심리학, 교회사, 목회학, 감리교교리학 등으로 보다 확대되었습니다. 1905년, 신학반 입학시험제도를 도입하여 성서한문, 성서 및 일반지리, 수학, 성경상식, 감리교교리, 감리교주의 과목 등 입학고사를 시행하였습니다. 한편 신학회의 교과과정은 신학개론, 조직신학, 설교학, 석의학, 윤리학, 교회사, 변증론, 목회학을 필수과목으로 이수하도록 제도화 하였습니다.
1906년 11월, 신학회는 신학교 설립을 위한 “신학부”로 승격하고 신학교육을 남북연합으로 시행하였습니다. 신학부는 신학부장 존스와 스크랜톤, 모리스, 케이블, 스위러, 클램, 헐버트, 노블, 무어, 포웰을 교수진으로 하는 신학교 체제를 확립하고 남감리교와 북감리교 연합 신학부를 구성하였습니다. 남북감리교는 신학부외에 “교회지도자 양성과정”을 신설하여, 속장과 구역지도자를 위한 “일반과정”과 지방사역자 양성을 위한 “지방성경반”과 전도자를 위한 “신학준비과정”으로 세분화 하였습니다. 1906년 11월, 신학부교육 22명, 1906년 12월, 지도자양성교육(평양) 198명, 1907년 1월, 지도자양성교육(서울) 122명, 1907년 2월, 신학부교육 98명 등이 신학부 교육을 이수하였습니다.
1907년 6월18일, 북감리교 제3회 연회에서 신학교 문제가 중요 현안이 되었고, 6월25일, 교장인 존스의 “협성신학당”(The Union Theological School) 설립 계획안이 벡크 목사의 동의로 정식 채택되었습니다. 동일한 시기, 배화학당에서 회집한 남감리교 선교회 연회는 북감리교와 연합하여 신학당을 설립하기로 가결하였습니다. 이로서 10월, 37명의 신입생과 함께 정규신학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1911년 9월, “피어선성경학원” 신입생과 함께 임시교사 규장각에서 1년2학기의 체계화된 신학교육을 시작하였으며, 그 해 12월20일, 제1회 졸업생이 45명에 달하였습니다. 1916년, 서울 냉천동에 서양 근대식 학교 본관과 3동의 부속건물과 기숙사와 교수사택을 완공함으로서 본격적인 신학교체제의 틀을 갖추었습니다.
“협성신학교”는 1대교장, 존스에 이어 2대 하디, 3대 노블, 4대 왓슨, 5대 드밍, 6대 케이블과 같이 감리교를 대표하는 선교사들로 구성되어 장로교평양신학교와 함께 중요한 신학교육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해 갔습니다. 남북감리교회의 연합 학교로서의 협성신학교 설립은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하나의 통합된 감리교로 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협성신학교는 1916년, “신학세계”를 발간하고 한국신학의 틀을 제공하였습니다. 1915년, 남감리교는 최초로 김홍순, 정춘수, 양주삼에게 목사 안수를 하였으며 이 가운데 양주삼목사는 협성신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1920년, 남감리교 연회에서 정재덕 목사를 만주와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12월6일, 서울 “종교교회”에서 “조선여선교회 연회”를 조직하였습니다. 1922년, 미국남감리교 총회에 한국대표를 최초로 파견하였으며, 1926년, 양주삼 목사가 한국최초로 철원지방 남감리교 “감리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감리사는 감리교회에만 있는 독특한 직책으로 지방회의 사업과 행정을 관할하기 위해 지방회 부서를 조직하고 관장하는 역할을 하는 직분에 한국인 목사가 임명되었다는 것은 감리교내 한국인의 위상이 신장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1929년, 협성신학교는 별도로 운영하던 “여성신학교”를 통합하여 “감리교신학교”를 설립하고 신학교육 강화를 위해 3년 학제를 4년제로 개편하였습니다. 1930년, 감리교신학교가 새롭게 출범하고 1935년, 빌링스 교장이 예과 2년, 본과 3년의 5학제로 개편하여 신학교육의 내실을 기하려 하였으나 1937년 중일전쟁이후 일본의 압력으로 1940년 10월3일, 정춘수 감독이 무기휴교령을 선포하고 폐교되었습니다.
(4) 남북감리교의 통합과 신앙고백
1924년 3월5일, 피어선성경학교에서는 남북감리교 교단대표들이 참석하여 양교단 통합을 위한 “진흥방침위원회”가 개최되었습니다. 회의결과 5개조항의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남북감리회를 합동하여 단일감리회를 만들되 이름은 새로운 이름으로 사용하고, 교회의 예문과 장정을 통일하며, 통합된 조선감리회 감독이 남북감리회를 구분하지 않고 어디든지 파송하되 현재의 모든 사업과 교회는 새롭게 조직되는 조선감리회에 흡수통합하는 것이었습니다. 1926년 12월28일, 북감리교회의 이화여자전문학교 경영에 공동참여하고 각 연회에서 선출된 10명의 위원들이 합동문제를 적극적으로 논의하였습니다. 북감리교대표 노블(W.A.Nobel), 윌리엄즈(F.E.C.Williams), 김찬홍, 김종우, 오기선과 남감리교 대표 저다인(Joseph L.Gerdine), 갬블(F.Kirk.Gamble), 정춘수, 신공숙, 양주삼 등 10명은 1927년, 3월10일과 19일, 5월31일 등 6차례의 모임을 갖고 남북감리교 합의안을 도출하여 1927년 9월, 미감리 조선연회와 남감리 조선연회가 합동하여 조선감리교회를 조직할 권한을 미감리교 총회에 청원하였고 1928년 5월, 미국 북감리교 총회와 1930년 5월, 남감리교 총회에서 승인하였습니다.
1930년 11월29일, 미국감리교 총회 대표 웰치(Bishop H.Welch) 감독, 니콜슨(T.Nicholson) 감독, 쇼(W.E.Shaw) 박사, 서더랜드(G.F.Sertherland) 박사, 애번(Mrs.J.M.Avann) 여사, 미국남감리교 총회 대표 컨(P.B.Kern) 감독, 크램(W.G.Cram) 감독, 무어(J.W.Moore) 박사, 매딘(P.D.Maddin) 박사, 하웰(Mrs.M.K.Howell)여사, 미감리교회 조선연회 조선주재감독 베커(James C.Baker), 조선대표 노블(W.A.Nobel) 신흥우, 변성옥, 오기선, 김종우, 남감리교회 조선연회 주선주재감독 컨(Paul B.Kern), 조선대표 와그너(Miss. Wagner. E.), 윔(C.N.Weems), 양주삼, 윤치호, 정춘수 등22명이 서울에서 연합위원회를 조직하고 3개항의 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미감리 조선연회와 남감리 조선연회가 합동하여 자치하는 조선감리교회를 창립하며 조선감리교회 제1회 총회개회 초에 이 성명서를 제출하는 즉시 두연회는 자동적으로 폐지됨을 선언하였습니다. 12월2일,오전10시 경성(서울) 협성신학교에서 제1회 총회를 개최하여 교회조직을 완성하고 모든 사건을 처리할 권한을 위임하였습니다. 12월3일, 총회 임원선출, 12월7일, 총회주일이 선언되었으며 12월8일, 총리사 선거에서 “양주삼”이 총리사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신의 잉태와 십자가 보혈의 속죄와 부활 승천과 최후의 심판”조항을 교리적 선언에 삽입하는 문제가 부결되어 기독교 2천년의 근본교리와 요한 웨슬리의 감리교 신앙이 교리선언에 반영되지 못한점은 아쉬움이었습니다. 감리교의 정치제도는 당회, 구역회, 지방회, 연회, 총회 등 5회제였으며 남장로교에서 지방책임자로 불렀던 “장로사”는 감리사로 통일되었고, “집사목사”와 “장로목사”제도 준회원기간을 거쳐 목사안수를 주는 것으로 변경하였습니다. 교회의 평신도 제도는 탁사, 유사, 속장, 권사, 본처 전도사(장로) 등 5단계로 하였으며 여성목사 안수도 허용하였습니다.
멕시코와 브라질에 이어 한국감리교가 통합되자 미국 감리교회는 노예문제로 인한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1939년 통합하였습니다. 조선감리교회는 양주삼 목사가 초대 총리사에 추임함으로서 선교사선교회가 주도해 온 한국감리교회를 한국인이 주도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습니다. 1930년, 피셔(James Farnest Fisher) 선교사는 조선의 새교회에서 새롭게 탄생할 조선감리교총회에 대하여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1931년, 양주삼 총리사는 14명의 미국 여자선교사들에게 목사안수를 거행하였으며 이것은 한국감리교사의 상징적이고 역사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사건이었습니다. 1930년, 조선감리교회의 설립은 26,184명의 교세를 이룬 한국의 독자적인 사업을 추진할수 있는 역량을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한국감리교는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 교회의 책임과 권한을 부여해 여성목사 안수와 평신도 총대권을 가능하게 하는 등 세계 감리교 역사상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보수적인 남감리교회 미국본부에서 조차 갖지 못하는 특권이 한국에서 주어지는 개혁적인 조치라고 남감리교 전권위원 하웰(Mrs.M.K.Howell)이 전하였습니다.
한국의 여성인권은 상당히 열악하고 기본적인 권리조차 박탈당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여자는 남자와 겸상할 수 없고 남편과 동등한 위치가 아닌 수직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여성은 교육받을 권리가 박탈당하였고, 투표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감리교회안에서 여성은 남녀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이러한 기반을 갖출수 있는 법적 제도는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예수교감리회의 교리적 선언은 요한웨슬리의 종교강령과 설교집과 신약주해에 나타난 복음적 신앙을 계승하였습니다. ➀ 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시오, 섭리자시며 인류으 아버지시오 모든 선(善)과 미(美)와 애(愛)와 진리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➁ 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시며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➂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사 우리의 지도와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신을 믿으며, ➃ 우리는 사랑과 기도의 생활을 믿으며 죄를 용서하심과 모든 요구에 넉넉하신 은혜를 믿으며, ➄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행실에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으며, ➅ 우리는 살아계신 주 안에서 하나된 모든 사람들이 예배와 봉사를 목적으로 단결한 교회를 믿으며, ➆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 하나님 아버지앞에 모든 사람이 형제됨을 믿으며, ➇ 우리는 의(義)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그러나 찰스 사워(Charies August Sauer)선교사는 “교리적 선언”(Korean Creed)에 대하여 남북감리교의 중도적인 타협안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통합감리교회는 한국의 전통적, 문화적 유산과 세계적 기독교 신앙을 접목하여 생명력있는 종교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습니다. 감리교는 외국유학을 장려하고 주일학교와 문서선교사업의 확대, 미션스쿨사역, YMCA, YWCA, NCC, 주일학교연합회 등 초교파사업에 주력하는 동안 장로교는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을 통한 영성과 신학을 겸비한 목회자를 배출하여 교회성장에 주력하였습니다. 1909년, 94,578명에서 1919년, 160,909명, 1929년, 194,678명, 1936년, 341,700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감리교는 1909년, 38,390명에서 1919년, 26,993명으로 감소하였고, 1930년, 22,685명으로 다시 감소하는 추세로 돌아섰습니다. 1930년대, 감리교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감리교단내의 보수개혁간 갈등이 첨예한 가운데 신학적 견해차가 확산되어 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감리교단내 보수주의자들은 “성경의 완전무오성,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영원한 형벌, 육체적 부활과 재림”을 가장 중요한 핵심원리라고 주장하는 반면, 개혁주의자들은 이것을 전하는 방법론적인 면에서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하디선교사는 창세기에 대하여 모세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 BC.586년, 예루살렘이 몰락한 후 바벨론 포로기간동안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하디의 성경관을 의심해 볼 여지는 전혀 없으나 북감리교 선교사들의 개혁적인 성경관은 보수적 영감을 지향하는 남감리교와는 차이가 분명함을 알수 있었습니다. 하디는 성경의 영감성을 신앙하면서도 성경의 저자들에 대한 오류성을 지적하였고, 창조설에 대한 종교학자들의 견해와 일정부분 시각을 같이하는 성향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감리교의 신학적 자세는 장로교와 확연히 구별되는 내용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유로운 토론문화였습니다. 감리교는 다양한 해석과 신학적 견해차를 나타낼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칫 기준없는 성경관으로 인하여 혼돈이 올수 있는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감리교 내부적으로도 보혁갈등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30년대, 한국의 감리교회는 전통적인 감리교와 확연히 구별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교회의 침체위기와 신학적 갈등은 감리교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사회적, 문화적 유산들을 개발하여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한국적 기독교를 만들어 가는 토양을 조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결국 조선어의 계승과 발전이 조선민족과 조선교회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고 예견하여 조선 사회의 구원계획의 필요성을 제기하였습니다. 역사가 말하듯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교회는 사회로부터 외면당하였다고 판단한 감리교 선교사들은 개인구원을 중심으로 개인이 존재하는 사회구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두가지 정책을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1931년 4월 감리교 신학잡지 “신학세계”(神學世界,1916~1940,하디)는 조선감리교회의 부흥운동에서 영화운동을 촉구하였습니다. “영화운동”은 “영적 각성과 부흥운동을 위한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원산과 평양에 이은 부흥운동의 전개를 주요사업으로 추진하였습니다.
감리교는 전도활성화를 위해 “서울중앙전도관”을 개설하여 스톡스(Marion Boyd Stokes,도마련) 선교사를 관장으로 원익상을 총무겸 부흥사로 추대하여 전도사업을 전개하였습니다. 원산과 평양과 백만인구령운동의 열기가 식어버린 1930년의 조선반도에서 부흥의 새바람을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은 감리교를 통합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스톡스 선교사는 개인전도와 부흥은 전도전략과 전도방침과 같은 문서적인 것으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처럼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적각성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스톡스 선교사는 피터(Victor W.Peters,피도수) 부관장과 원익상 총무와 함께 전도사업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포천, 시흥, 고양지역에서 9개월간 전도집회(1931.6.1.~1932.3.10.)를 개최하여 남자 9,298명, 여자 3,358명 등 12,656명이 참석하여 남자 2,134명, 여자 212명 등 2,346명이 결신하였습니다. 1931년 10월27일, 경성지방전도위원부 후원으로 초교파전도집회에 1,500명이 참석하여 250명이 결신하였습니다. 1931년, 부흥사 원익상이 만주에서 전도집회를 개최하여 5,000명이 결신하는 등 전도집회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1932년, 전도집회에 남자 10,858명, 여자 3,217명, 등 14,075명이 참석하여 2,666명이 결신하는 등 높은 성장률을 나타내었습니다. 이러한 부흥회를 통하여 원동교회가 설립되어 스톡스와 원익상이 파송을 받았으며 80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1932년, 원동교회 15명이 세례를 받는 등 내실있는 성장이 기대되었습니다. 감리교 전도운동은 집단적 영적 각성운동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으나 교회로부터 멀어진 사람들로부터 다시 교회로 복귀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1933년 3월11일, 중앙전도관의 1년전도집회에는 남자 10,383명, 여자 4,194명 등 14,577명이 참석하여 남자 2,689명, 여자 348명 등 3,037명이 결신하여 전년대비 상승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예전의 집회와 달리 여자들의 참석율과 결신율이 저조하였으며 교회에 대한 관심도도 낮아졌습니다. 이것은 한국여성들의 외부출입에 대한 제한적 경향과 함께 집 안팎의 일을 모두 해야 하는 여성들의 가정과 직업적 양립현상으로 인한 한계도 있었습니다. 또한 매번 동일한 사람이 반복적으로 집회에 참석하는 경우도 점차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실질적인 감리교의 전도성과는 결과적으로 미비한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경성중앙전도관에서 1925년 9월20일 시작한 전도사업은 1934년 12월까지 10년동안 매일같이 빠짐없이 집회가 계속되었으며 그 결과 149,459명이 참석하여 19,009명이 결신하였습니다. 10년간의 전도관활동을 통하여 7개 교회가 설립되었고 5개의 예배처소가 신설되었습니다. 한국 초기 대부흥운동의 증인이었던 스톡스 선교사의 헌신으로 10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집회를 이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구령사역으로 한국사회에 영적각성의 필요성은 매일 요구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 중요한 결실이었습니다. 남감리교 출신 부관장 피터(피도수) 선교사 또한 보수적 신앙관을 유지하며 한국교회의 부흥을 열망하였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북감리교 선교사들이 양적 부흥에 갈급하였다면 남감리교 선교사들이 질적, 영적 부흥에 갈급해 하면서 지치지 않는 영적 헌신을 다 하였습니다. 1931년, 23,448명, 1932년, 24,278명, 1933년, 24,615명, 1934년, 24,451명, 1935년, 24,793명, 1936년, 25,597명으로 감리교 교세는 크게 신장하지 못한채 정체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감리교의 부흥운동은 사실상 장로교와 함께 추진되어야 할 사명이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전국적인 운동을 하기에 미미한 교세였고, 시대적 상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또한 말씀과 기도로 출발한 부흥운동과 달리 그러한 부분에서 충분히 준비되었는가 하는데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서울중앙전도관은 열심히 하였고,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하여 활동하였지만 감리교 총회차원의 지속적인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서 반성해 보아야 할 대목이었습니다. 그리고 감리교안에서도 협력과 지원이 부족하였다는 점은 분명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현대교회는 “선(善)의 부족”과 “단결의 부족”과 “경제문제의 부족”을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1934년, 감리교선교연회 50주년 강연회에서 감리교가 시대의 요구에 대응하고 만족을 주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감리교회는 구제와 선한사역을 통한 “선행(善行)의 모범”, 금주운동과 금연운동과 물산장려운동과 같은 “일치단결의 모범”, 협동조합과 구매조합과 판매조합과 같은 “경제지원의 모범”을 사회속에서 구현하여야 하는 요구에 직면하였습니다.
1934년, 선교50주년을 맞이하는 감리교 제2회 총회에서 양주삼 총리사는 재선에 성공하였습니다. 장로교가 전통주의적 복음주의 신앙을 지키는 반면 감리교는 현대적 신앙으로 신학적 방향을 전환하였습니다. 장로교 감리교 연합으로 계획하려 했던 50주년 행사는 교단별로 별도로 진행하였습니다. 1934년 6월19일, 선교사와 가족 200명이 참석한 선교50주년 기념식에는 무어 선교사가 영어 프로그램 의장을 맡았으며 양주삼 총리사가 사회와 설교를 하였습니다. 케이블 선교사가 미감리교회 조선선교사, 노블박사가 미감리교회 개척자들을 소개하고, 하디 박사가 남감리교회 조선선교 역사를, 윤치호가 조선감리교회 창설에 대하여 발표하였습니다. 6월20일, 아펜젤러양이 감리교회 교육사업과 감리교회 사업을 보고하고, 노블 여사가 초대 조선교인들이 사적을, 김활란 박사가 조선여성의 발달사를 보고하였습니다. 이어 스톡스가 감리교의 구령운동을, 신흥우 박사가 평신도와 교회를, 무어 박사가 활력있는 감리교를, 빌링스가 감리교회의 장래와 전망에 대하여 발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