晩翠堂[만취당]: 金蓋國
자는 공제(共濟) 또는 공증(公證)이고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548년(명종3년) 득몽(得夢)의 아들로서 榮川(現, 榮州市 伊山面)에서 출생했다.
소고 박승임의 문인으로서 1573년(선조6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식년문과9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왜적을 막는데 활약한 공으로 그해 가을에
형·예·공의 3조랑(三曹郞)을 거쳐 강원도사, 충청도사, 옥천군수를 역임했다.
천성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관직에 나가 군수(郡守)와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있다가,
고향의 부모를 가까이서 돌보며 신병을 치료하여 주기 위하여 낙향하였다.
마침내 부모와 사별한 후 슬픈 마음을 가누지 못하여 상기를 모두 마치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저서는 만취일고(晩취翠逸稿)가 있으며 서거 후 승지(承旨)로 추서(追 )되고
영주의 삼봉서원(三峯書院)에서 향사(享祀)하여 왔다.
金蓋國은 어려서부터 명민하여 일찍이 학문에 힘을 쏟았고? 嘯皐 朴承任의 門下에서 수업하였다.
1573년(宣祖 6) 司馬試에 합격한 이후 1591년(宣祖 24) 乙科에 급제하고 禮賓主簿? 三曹의 曹郞을 거쳐
江原道 都事에 임명되었다. 1592년(宣祖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장이 되어 많은 전공을 올렸
으며? 江原道 都事 시절 佐幕으로서 寒岡 鄭逑를 보필하기도 하였다.
1597년(宣祖 30) 가을 咸陽郡守에 임명되었으나 倭寇가 날뛰어 부임하지 못하고?
1598년(宣祖 31) 忠淸道 都事 兼春秋館에 임명되었다.
이때 明나라 군대의 식량보급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으며? 明나라 군대가 철수할 때 충청도를 거치게
되자 동분서주하며 明나라 장수들의 支待를 마련하여 충청도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하였다.
1601년(宣祖 34) 沃川郡守로 부임하여 전란 후의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는데 힘써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으며? 후에 宣武原從勳으로 中直大夫司憲府執義兼春秋館編修官에 추증되었다.
그의 호 晩翠堂은 집의 서쪽에 심어져 있던 푸른 소나무 수백 그루를 따서 지은 것이다.
晩翠堂[만취당] 앞 구택 소유자 : 김 승 기[전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