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면목 찾는 이가 장부다. / 월하 큰스님
자기의 본래면목 찾는데
여러 방법이 있지만 화두일념(話頭一念)으로 나가면 볼 수 있다.
화두란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식심(識心)이라는 것이 연잎 위의 물방울과 같아서
바람이 없고 고요하더라도 자꾸 흔들리는 것과 같다.
요동치지만 않으면 그 물방울에 모든 물체가 반영이 되어 비춰질 것인데
망상을 자꾸 피우니 반영이 아니 되고 물방울이 흔들거린다.
물에 파도가 친다고 달그림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흔들리기에 정확히 못 보는 것과 같이
우리의 본래면목이 있기는 있으되
망상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참선하는 것은 물방울을 정착시키는 일이다.
怜利衲僧會不得 [영리납승회부득]
石火電光猶遲鈍 [석화전광유지둔]
우리의 본래면목은 영리한 납승도 알지 못함이요,
석화전광(石火電光)도 오히려 느리고 둔한 것이다.
망망한 우주의 무수한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의 남아가 장부냐.
승려 중에 도통해서 부처님과 어깨를 겨룰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그러니 우리가 삼계의 무수한 인간 중에서 진정한 남아장부가 되려면
본래면목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걸 알기위해, 보기위해 화두를 드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결제 3개월은 고기가 그물에 던져진 듯이 꿈쩍하지 아니하고
정진을 했는데 요즘은 그물 없는 고기요, 새장 없는 새와 같이
탕탕무애하게 왕래하니 그래서는 물방울을 정착시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둠속에서 글씨 써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참선한다고 앉아 있어 보이지만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 한석봉이가 공부가 이만하면 됐겠지 하고
기한이 차기 전에 귀향을 했는데 모친이 평소 떡장사를 했는지라
아들의 공부를 점검하려고 어두운 방에서 글씨를 써 보라고 하고
자신은 떡을 썰었다고 하지 않는가. 모친은 손에 익어서 눈 감고도 잘 써는데
석봉이는 글씨가 엉망이 되니 꾸지람을 당하고 다시 공부하러 떠났다지 않는가.
참선도 그와 같이 화두가 잘 익어야 어디서나 여일(如一)하게 된다.
그렇고 보면 세간법이 불법과 둘이 아니다.
왜냐하면 둘 다 마음자리를 두고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功)을 쌓는 것도 떡을 썰듯 정진을 오래하면 그렇게 된다.
진제(眞)와 속제(俗) 다 둘이 아니다. 설법이 따로 없다.
바람소리, 나무 흔들리는 소리, 물 내려가는 소리가 다 법문이다.
유정무정(有情無情)이 다 성불한다고 했으니
모든 것에 진리가 포함되었다는 말이다.
옛날 어느 수좌가 선지식 스님을 모시고 시봉하였는데
눈이 번쩍 뜨이고 귀가 트일 말씀을 일러주기를 학수고대 하였는데
몇 년이 가도록 별다른 말씀이 없자 시간 낭비라 생각하고
딴 큰스님 회상으로 공부를 하러 갔다. 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별 다른 말씀이 없어 실망하고 말았는데 나중에 스스로 정진해 도를 깨달았다.
우리가 별난 도량을 찾고 더 좋은 스님 찾는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다.
無一物中無塵藏 [무일물중무진장]
有花有月有樓臺 [유화유월유누대]
우리의 심성(心性)자리는
한 물건도 없는 듯 하면서도
무진장 갖추었고 꽃도 있는데
달도 있고 누대도 있는 것과 같다.
근본 자체는 물형(物形)으로는 내놓을 것이 없지만
무진묘리를 갖추었기에 응용력과 작용력이 없어서 수용을 못할 뿐이다.
우리가 늘 남의 것만 부러워하지 자신의 것은 찾을 생각을 아니 하니
중생놀음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근본 자체는 드러낼 수가 없기에 말[說]이 말이 아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스스로 알아야 할 따름이다.
조사어록이 다 공부하는 길을 일러놓은 것이고
경(經)도 중생제도하는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길[路記]을 알기만 해서는
실제 길을 가 본 경험 있는 이와 애기해 보면 막힌다.
망망한 우주의 무수한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의 남아가 장부냐.
[茫茫宇宙人無數幾箇男兒是丈夫]
승려 중에 도통해서 부처님과 어깨를 겨룰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그러니 우리가 삼계의 무수한 인간 중에서
진정한 남아장부가 되려면 본래면목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 2531 하안거 결제법어 중에서 -
- 조계종 9대 종정 노천당 월하 대종사 법문 중에서 -
출처 : 금음마을 불광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