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이라 부르는 소리에 항상 깨어 있어라
전, 영축총림 승가대 교수사 우현 스님
헤아릴 수 없어라, 부처님의 위신력. 그 수명 다함이 없어라.
보살은 어디에 머무시나, 지금 이 자리, 깨어있는 이 자리.
부사의하여라, 여래의 중생 위함이여.
오늘 ‘화엄경’의 내용은 ‘아승지품(阿僧紙品)’,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 ‘불부사의품(佛不思議品)’입니다.
법문에 들어가기 전에 게송처럼 말씀드린 내용은
이 네 가지 품의 요체만을 뽑은 것입니다.
여성 불자 보살로 부르는 건, 언제나 깨어있으라는 경책
법문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항상 분별없이 바라보고
듣고 나면 시비가 끊어져야
첫 번째 게송은 “헤아릴 수 없어라, 부처님의 위신력”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승지품’에서 설한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아승지품’이 주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말로 설명할 수 없을까요.
부처님의 위신력은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평소 영단을 향해 기도할 때 ‘나무아미타불’ 다음 마지막 대목에
‘불가설전불가설(不可說傳不可說)’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내용은 ‘화엄경’의 아승지품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불가설전불가설은 불교에서 말하는 숫자 중에 가장 큰 숫자를 뜻합니다.
그 숫자가 얼마나 큰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승지품’에는 숫자만 137단계가 나옵니다.
1부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단계까지 137단계가 있지만
이를 한마디로 줄이면 “헤아릴 수 없어라 부처님의 위신력”이 됩니다.
부처님 위신력의 크기는 숫자로도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음은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입니다. ‘여래수량품’에 대한 내용이 짧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 수명 다함이 없어라”입니다.
부처님은 태어나신 적도 없지만 돌아가신 적도 없습니다.
육신으로서의 부처님은 나고 죽지만
법신(法身)으로서의 부처님은 난 적 없고 돌아가신 적도 없습니다.
이것이 여래의 수명, 여래의 수량입니다.
여래의 목숨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를 표현한 내용이 바로 ‘여래수량품’입니다.
여래의 목숨은 법신 그 자체임으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수명은 한정이 있습니다. 태어났으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여기 있는 법사도 앞에 앉아있는 여러분도, 바깥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도
모두 누구나 태어났으면 죽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목숨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 짧은 수명을 가지고 이만큼 살았으니 우리의 수량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수명은 필히 한계가 있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고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은
“보살은 어디에 머무시나, 지금 이 자리, 깨어있는 이 자리” 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보살을 찾아서 여기저기를 다닙니다.
어디는 지장보살님이 영험 있다더라, 또 어디는 관세음보살님이 영험 있다더라.
이렇게 수많은 보살을 찾아서 떠돌아다닙니다.
그렇지만 그곳에 과연 보살이 상주하고 있을까요.
진정한 보살은 어디에 머무실까요. 바로 아셔야 합니다.
보살은 다른 곳에 머무시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 더 정확하게는 깨어있는 이 자리입니다.
보살은 범어로 ‘보디사트바(Bodhisattva)’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이를 ‘각유정(覺有情)’이라고 풀이합니다.
깨달은 중생 또는 깨달을 중생을 뜻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보살님”으로 불립니다.
지나가면 “보살님 오셨습니까. 잘 계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아마 여성불자들을 “보살”이라고 호칭하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유정’이라야 참된 보살이 됩니다.
깨어있는 자라야 참된 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일상으로 듣다 보니까 귀에 딱지가 앉아서인지 보살이라 불러도 별 반응이 없습니다.
하지만 보살이라고 불리는 순간 ‘움찔 움찔’ 놀라야 합니다.
스스로 아직 보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각성을 하고 보살을 서원해야 합니다.
지금 보살의 길을 가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보살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될 때 그 때 비로소 참된 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외국에서 어떤 스님이 오셨습니다.
그 스님께 다른 스님이 큰 시주를 한 보살님을 소개할 때
“아무개 보살님이십니다”라고 소개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외국에서 오신 스님이 갑자기 그 보살님에게 큰 절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소개한 스님이 “스님, 보살님께 왜 절을 합니까?”라고
당황하며 물으니 “방금 보살님이라고 소개를 받았는데
저는 아직 보살의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절을 올린 것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들으니 어떤 생각이 듭니까. 마음이 찔립니까.
보살님이라는 호칭에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아프게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이 가지고 있는 함축된 뜻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깨어있게 됩니다. 깨어있음은 굉장히 좋은 말입니다.
깨어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바꿀 수 있습니다.
아마도 부지런한 삶을 살라고 항상 깨어있으라고
큰스님들께서 여성불자들을 “보살님”이라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살님하고 부르는 소리를 정신 차리라는 뜻으로 들어야 합니다.
네 번째 ‘불부사의품(佛不思議品)’은 “부사의하여라. 여래의 중생 위함이여”라고 풀었습니다.
부사의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부사의 합니까.
중생을 위하는 여래의 마음이 부사의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팔만사천의 법문을 내려주고 있습니다.
한량없는 자비로움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생각의 크기, 말의 크기, 마음의 크기로는 도저히 닿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고 가엽게 여기시는지
우리의 깜냥으로는 생각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화엄경 네 품의 간략한 설명입니다.
목무소견무분별(目無所見無分別)
이청무성절시비(耳聽無聲絶是非)
분별시비도방하(分別是非都放下)
단간심불자귀의(但看心佛自歸依)
눈으로 바라보되 분별없이 바라보라.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시비가 끊어져야 한다.
분별이라는 것, 시비라는 것 내려놓고
마음으로 보고 들어야 참된 보고 들음이라 할 것이다.
이 게송은 부설 거사의 말씀입니다.
법문을 어떠한 자세로 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경책입니다.
보고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 정신을 차리고 보고 들어야 하는지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심부재언(心不在焉)이면 시이불견(視而不見)이요,
청이불문(聽而不聞)이라 식이부지기미(食而不知其味)니라.”
“마음이 그 자리에 가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본 것이 아니고
들어도 들은 것이 아니어서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이런 뜻입니다.
어떤 자세로 공부해야 되는가에 대한 유가의 설명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에도 훌륭한 내용이 많지만
유가의 경전도 우리가 삶을 어떤 자세로 임해야 되는지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입견을 버리고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를 봐야합니다.
시비가 끊어져 고요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온전히 비우고 그 자체에 눈과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부설 거사 말씀의 요체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도
매일 탐진치(貪瞋癡) 삼독에 빠진 채로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는 제대로 듣고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비우지 않았고 또한 부지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는 서로 최선을 다하는 자리가 돼야 합니다.
저는 부지런히 이야기하고 여러분은 마음을 비우고 부지런히 정성을 다해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듣다보면 언젠가 깨달음의 인연이 오게 될 것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보살님” 할 때 명징하게 깨어있도록 해야 합니다.
분별없이 보고 시비를 내려놓고 들어야 합니다.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는 삶을 사시기를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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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문은 1월12일 영축총림 통도사 설법전에서 봉행된
‘화엄산림대법회’에서 전 영축총림 통도사 승가대 교수사 우현 스님이
‘아승지품’을 주제로 설법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우현 스님은 1980년 동진 출가해 1996년 통도사에서 청하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강백 월운 스님으로부터 전강 받았으며 송광사, 극락암 등에서 수선안거 후
통도사 승가대학 교수사와 교무국장을 지냈다. 현재 창녕 관룡사 주지를 맡고 있다.
2015년 2월 4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