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YRANNY OF MERIT
역자는 ’공정하다는 착각‘으로 번역했다. 마이클 샌텔(MICHAEL J. SANDEI)이 정의란 무엇인가? 란 책을 읽고 두 번째 책으로 골라 본 책이다. 저자는 27세부터 하버드 교수로 현재까지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중도좌파 경향의 대표주자로 보면 된다.
부의 양극화, 이를 세습화하는 고학력의 심화, 승자의 오만함과 패자의 굴욕감이 팽팽한 이때 이 불안의 근원이 있다고 추천하는 글이 있다. 능력주의는 장점도 많지만, 허점도 있다. 공평한 기회 제공과 능력 발휘 보장 장치는 간단하지 않다. 능력과 성과를 기반으로 한 계급이 생기고, 이를 세습화하기 위한 범법적 시도가 출현한다. 이를 선점한 사람들의 오만이 극치를 이루고 탈락한 사람은 부는 물론 인간의 자존심을 잃고 사회적 정치적 긴장감을 유발한다. 여기는 포퓰리즘 근원도 찾을 수 있다.
2019년 미국 대학입시의 부정 사건이 ‘윌리엄 싱어’ 부정 사건이다. 미국의 명문대 예일, 스탠퍼드, 조지타운, 서던 캘리포니아 등에 자녀를 입학시키기 위한 부정 사건을 연방 검찰이 발표한 것이다. 악덕 입시상담사 ‘윌리엄 싱어’가 돈을 받고 여러 유형의 비리를 저지른 것이다. 정문이든 후문이든 옆문이든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방법을 쓴다. 가짜 자격증, 가짜 사진, 가짜 점수와 대학 담당자에 뇌물 먹이기, SAT모의 시험, 스팩 다듬어주기. 홰외 봉사활동 알선, 각종 스포츠로 엘리트 체육을 익히어 대학 코치와 연결 쉽게 옆문으로 입학시킨다. 소득 불평등이 늘어나면서 학사 소지자와 비 소지자의 소득격차가 벌어지면서 대학의 중요도가 높아진다. 싱어의 고객들은 자식이 사회에서 하행선을 타지 않도록 지갑을 열고 명문대학의 간판을 달아 ‘능력주의의 광채’를 두르게 하는 것이다.
세계화는 그 과실을 불균등하게 배분해서 소득격차는 더 늘어나 오늘날 미국의 부유한 1%가 하위 50%보다 더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미국인은 소득과 재산의 불평등을 참아왔다. 미국은 어디서 출발하든 부자라는 결승점에 도달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메리칸드림의 핵심이다. 정치인은 ‘기회의 평등’이란 말로 불평등에 대응하면서 기회는 균등하니 누구나 재능이 이끄는 만큼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구호를 외쳤다. 이것이 “하면 된다, you can made it if you try”이다. 미국의 상위 소득 1%는 (연간 수입 63만 달러)인데, 미국 하버드와 스탠퍼드 대학 학생의 하위 50% 소득 가정 출신보다 학생 수가 많다. 능력주의 이념에 찬성하며 정치이념으로 삼는 사람들은 도덕적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우리가 운이 좋아 얻는 결과라 생각하면 겸손해진다. “신의 은총 덕에 나도 성공할 수 있었어.” 그러나 완벽한 능력주의는 그런 감사의 마음이 없단다.
사람을 채용할 때 두 가지는 중요하다. 효율성과 공정성이다. 종교나 인종 성별 때문에 덜떨어진 놈을 선택하면 잘못이다. 능력에 따른 채용이 선하고 분별이 있다면 능력주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능력에 따라 경제적 보상과 지위를 배분해야 한다는 생각은 매력적이다. 큰 재난을 신의 징벌로 풀이하는 것은 기독교 섭리론의 전유물이 아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 극우파 도코지사 ‘이시하라 신타로’는 “일본이 물질주의에 빠진 데 대한 천벌”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오랫동안 좀먹어 온 이기주의를 씻어 내릴 쓰나미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건강보험의 재정 악화의 요인은 자체 적에서 발생한 것들이다. 미국인의 2/3가 과체중이며, 전체의 1/3은 비만한 것이 현재 상황이다. 우리가 죽음에 이르는 질병은 대부분 심장병, 암, 뇌졸중, 당뇨병, 비만 등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건강보험료의 70%에 이른다. 이는 적당한 식습관, 운동, 금연, 적정량 음주 등의 건강한 식습관으로 예방될 수 있는 질병이다. 건강을 해친 사람은 자신을 탓해야 한단다. 신앙심이 없어서가 아니고 저지방 위주의 식단이, 고치는 데 치명적인 비용이 드는 질병을 예방함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하려고만 하면 우리는 100세까지 걸어서만 다닌다면 병치레 없이 살 수 있단다.
요즘은 성공을 청교도들의 구원을 바라는 방식처럼 본단다. 신의 은총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라고 보는 것이란다. 내가 많은 세속적 재화(소득, 재산, 명예, 권력)를 얻는 데 스스로 책임이 있다면 그런 말이 맞지만, 성공은 미덕의 징표다. 내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니고 주위의 덕이란 뜻이다. (각자 믿는 신, 조상, 주변 친척과 친구 등) 지난 40년간 능력주의 가정은 민주 사회의 공적 삶에 파고들었다. 불평등이 퍼짐에도 공적 문화는 우리 각자가 “알아서 운명을 책임져라” “스스로 운명을 받아들여라”란 식이 됐단다. 저자가 하버드에서 교수를 하면서 보면, 다 많은 학생이 ‘자신의 성공은 자신의 노력 덕이며. 자신이 기울인 노력에 따라 얻은 결과 다’ 생각한단다. 이런 능력주의적 신념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단다. 소수집단 우대정책으로 하버드에 온 학생도 나는 죽어라 하고 노력해서 하버드에 왔으니, 나의 지위는 능력으로 정당화된다고 여긴단다. 우리가 성공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에 빚을 졌다는 생각에는 저항하고 스스로 성공했고,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 그리고 사회체제가 부여하는 보상이 그리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생각에 환호한단다.
사회적 상승 담론이 능력과 자격에 대한 거론도 많아져 “여러분은 오늘 쉴 자격이 있어요”라는 말이 광고에 많이 쓰인단다. “자격이 있다 you deserve는 1970년보다 2008년에 3배 많이 쓰인단다. 이 자격 담론이 대중문화에 녹아들면서 더 고무적이어서 무조건 성공을 약속하는 형태가 되었다. 수십 년간 능력주의 엘리트들은 ‘규칙을 지키며 열심히 일하는 자는 누구나 자기 재능이 허용하는 한 성공한다.’ 주문을 외쳤다. 그들은 바닥에 묶여 있는 사람들과 물에 가라앉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는 사람의 사정을 챙기지 못했다. 사회적 담론은 그런 이들에게 약속이 아니라 조롱이었다. 정치인의 공허한 말을 지겹게 많이 들으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인의 77%는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고 믿는다. 독일인은 절반이고 프랑스와 일본인은 대부분이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고 대답했단다. 왜 어떤 사람은 부자이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가? 라는 질문에 미국인은 의견이 반반으로 갈린단다. 다수의 미국인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환경 탓이라고 하거나 부양가족을 가난의 원인으로 뽑았다.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점 한 가지는 ’진실이 평등화와 역행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사회 불평등이 각자 어느 정도 대접받을 만큼 대접받기 마련인 상황에서 비록 됨이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을 보면 팩트에서 희망으로 넘어가고 다시 팩트로 넘어가는 이러한 경향은 말실수라기보다는 철학적 혼동이나 사회적 담론의 정치적 측면에서 나온 것이다. 팩트와 희망을 섞은 어법은 승리와 패배의 의미를 혼동시킨다. 즉 뭐 하다 대학 학위도 없는가? 라는 형태로 변한단다. 능력주의적 오만의 가장 큰 고약한 점은 학력주의에서 찾을 수 있단다.
2021.02.21.
공정하다는 착각-1
마이클 센델 지음
와이즈베리 간행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크게 보면
골고루 조화로움이 최선인 것을
이상일까?
능력주의 기술위선주위에 사회주의 자본주의 다해보니
이제는 공자님 말씀이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마이클 센델도 결론은 네가 알아서 내라 얘기를 하면서도
슬쩍 은근히 붙이는 말이 네가 잘난 것이 아니라 모두 주면의 덕이니라
그러니 까불지 말고 윤리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골고루 잘 사는 것인데
우리 인간은 공동생활이 아닌
가정을 가지고 작자 살기에
이 말이
항상 마주치는 기차철도의 기관차가 되는 것이거늘
이는 하늘이 만들어 둔 법칙이 아닐가 합니다!
@류재훈
ㅎㅎㅎ
그러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