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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순위 |
중요 사실 |
선정 이유 | |
1 |
1882 |
임오군란 |
신식군인과 구식군인간의 차별에서 비롯된 임오군란발생의 배경과 그 과정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임오군란은 신식군대와 구식군대의 갈등, 민비와 대원군의 갈등, 개화세력과 쇄국세력간의 갈등이라기보다는 민비정권이 추진한 성급하고 무분별한 개화정책에 반발하여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심화된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일어난 군인항쟁으로 보는 관점도 존재할 수 있다. |
2 |
1884 |
갑신정변 |
갑신정변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알아보고, 3일 만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 본다. 갑신정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탐구한다. 갑신정변은 비록 삼일천하로 끝난 실패의 역사로 남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개혁운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신분제도의 폐지와 의정부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여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
3 |
1892 |
동학농민운동 |
농민들의 봉기과정을 알아보고 동학농민운동이 가지는 성격에 대해 탐구해 본다. 진압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고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 해 볼 수 있다. 초기에는 반봉건적인 성격으로 시작하여 후에는 반외세적인 성격을 띠기도 했다. 갑오개혁과 의병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할 만한 구체적인 방안을 세우지 못했다. |
4 |
갑오경장 |
일본의 조선에 대한 내정개혁 배경을 살펴보고, 갑오개혁의 추진과정 을 탐구 할 수 있다. 갑오개혁을 통해 잃은 것은 무엇이고 얻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교훈을 찾아본다. 갑오경장의 성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근대화를 위해 응당히 시행돼야 할 조치가 포함돼 있었다. 반상의 차별 철폐, 문무 관원의 공평한 대우, 연좌제 폐지, 공사노비의 혁파 등이 그러한 예다. 그러나 일본의 편의대로 시행됐고,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 |
5 |
1907 |
헤이그 특사 |
고종이 헤이그 특사 파견을 결정하게 된 배경을 알아보고, 특사들의 활동사항을 살펴본다. 그 시대의 고종의 결정과 헤이그 특사들의 활동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을 공부한다. 헤이그 특사는 우리의 주체성을 확실히 하기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노력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그들의 정신도 본받을 수 있다. |
발표 범위 : 개화의 성장~ 의병항쟁의 격화
발표 주제 : 왜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였는가
관련연표
1882 |
임오군란 제물포 조약 |
1884 |
청·프전쟁 (中베트남 빼앗김) 갑신정변 조·러 수호 통상 조약 체결 |
1894 |
1월 고부 농민봉기 4월 동학 농민군 전주성 점령(1차봉기) 5월 전주 화약 체결 6월 일본군의 궁성 침범 10월 동학 농민군 2차 봉기 11월 우금치 전투 12월 전봉준 체포 갑오개혁 김옥균 상하이에서 피살 |
1895 |
시모노세키 조약 (대만, 요동반도) 을미개혁 교육입국조서 발표 을미사변 4차 김홍집 내각(친일적) 을미의병 |
1896 |
2월 아관파천 호적 제도 개선(신분 →직업) 4월 독립신문 창간(최초의 한글신문) 독립협회 창립(~1898) |
1897 |
대한 제국 성립 |
1898 |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개최 헌의6조 결의(관민공동회) |
1904 |
러일전쟁 한·일 의정서 체결(군사 기지 사용권) 베델 · 양기탁, 대한 매일 신보 창간(~1910) 8월 제 1차 한·일 협약 (고문정치, 메가다, 스티븐스, 러일전쟁이 일본에 유일하게 돌아가자 맺은 조약) 포츠머스 조약(러·일) 경의선 부설권 보안회 창립 (황무지개척반대운동) 일진회 창설(~1910, 송병준) |
1905 |
헤이그 특사 10월, 을사조약(제 2차한일협약, 외교권 피탈)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발표 |
<민족과 역사>
왜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였는가?
진수결의 모둠 : 강동영, 김유경, 신효진, 이건희, 장세진
발표자 : 김유경
>>학습목표
1.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의 결단력과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보자.
2.헤이그 특사를 통한 국가의 주체성인식에 대해 생각해보자.
3.헤이그 특사와 고종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떤 배울 점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1) 헤이그 특사 파견 배경
1905년 조선은 일제의 뜻에 따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을사 5적에 의해 완성된 이 을사늑약은 조선의 재정과 외교의 실권을 박탈하는 것으로 실제적으로 조선의 국권을 일제에 귀속한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에 장지연은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고 전국의 유생들과 전직관리들은 상소 투쟁과 투신 자결을 감행했으나 조선의 상황은 점점 악화될 뿐이었습니다. 고종황제는 이러한 실정에도 굴하지 않고 이러한 조선의 현실을 세계에 알리기로 결심, 이준과 이상설, 이위종, 이 세 명을 헤이그 특사로 임명하여 1907년 7월에 열릴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로 파견했습니다. 이러한 고종의 명에는 우리나라의 사정을 알리고 일본의 침략을 고발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2) 활동사항 및 결과
헤이그에 도착한 헤이그 특사들은 고종의 신임장과 호소문을 제시하며 러시아 대표에게 한국대표의 참석과 을사늑약의 파기를 의제에 포함시켜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약소국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회의가 아닌 각 열강들의 잔치였다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네덜란드 정부와 러시아 대표는 이미 각국에서 을사늑약의 체결을 승인하여 조선에는 자주적인 외교권이 없다면서 참석을 거부하게 되고, 헤이그 특사들은 의도치 않게 전 세계적인 외면을 당합니다. 거기에 영국과 일본의 집요한 방해 공작까지 겹쳐져 계속 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외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을 필두로 부단한 활동을 펼친 결과, 그들은 간신히 해외 언론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네덜란드 신문을 주선으로 국제협회에 호소할 기회를 얻어 '한국을 위하여 호소한다.' 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게 되었고, 세계 각지의 신문에 보도되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었고, 실제적 각국의 대표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아 구체적인 성과를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헤이그 특사는 이준의 순국을 뒤로 한 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고, 이 사건을 이유로 일제는 고종황제의 퇴위를 강요하여 끝내 고종황제의 왕위를 양위하게 되었습니다. 이 후 일제의 침탈은 가속화 되었지만 국민들의 인식을 일깨우는 데에는 큰 도움을 주어 여기저기서 실제적인 일제 항거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 헤이그 특사 파견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공동 삶의 원리
헤이그 특사파견은 국가로서 주권과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민족의 자존심과 함께 역사성을 함께 부여하는 일대 사건입니다. 헤이그 특사파견은 국가의 '적극적 주권행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늦게 외교에 눈을 뜬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이었으며, 대표단의 숭고한 희생은 역사적 귀감이 됩니다. 비록 헤이그 특사는 실패로 끝이 났지만 역사는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교훈으로 삼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역사적 성패와 민중의 절규를 미래의 용기와 국가적 발전의 거름으로 삼는 것이 최선입니다. 역사는 왜곡이나 비난의 대상이 아니고, 보존과 교훈의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리서부터 외국어에 능통했던 이위종 열사와 같이 미리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헤이그 특사를 파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성사될 수 있는 길을 조금이나마 더 개척해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첫댓글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국권이 점점 빼앗기는 상황에서 고종황제는 끝까지 한국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종황제는 한국을 알려 일제의 침략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고종황제의 퇴위가 결정되게 된다. 일제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타이밍을 노려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고종이 더 일찍 외교에 관심을 뒀다면 일제의 침략에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헤이그 특사는 국권 침탈의 위기에서 고종황제가 시도한 노력이다. 헤이그 특사를 보면서 빨리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항상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위종을 보고 학습을 하는 것이 모든 준비에 기본적이라고 생각을 했다.
이위종의 영어실력을 통해 근본적으로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에 국제에 당시 대한제국의 정세를 알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서 소통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언어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영어를 학습했다는 것은 근대화로 가는 시대에 발맞춰 다른 나라와 소통을 위해서 영어가 필요했음을 인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능동적인 자세를 가졌기 때문에 이위종은 대한제국을 위해 큰일을 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교수님이 민족과 역사 첫 시간에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영어, 피하지 마라. 언젠간 그것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언젠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되어있다.'라는
말씀이 제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는데, 이번 발표를 통해 또다시 윤리 교육인으로서 영어를 피하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준비란 중요한 것입니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뒤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여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노력했습니다. 헤이그 특사의 파견은 고종이 실행한 최선책이었지만 이미 늦은 준비였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전에 좀 더 준비했다면 일제강점기의 암흑기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늦은 준비였지만 헤이그 특사는 일제에 대한 항거 운동의 계기가 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준비의 중요성을 알고 미리 준비하는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헤이그 특사가 파견된 시대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팽배한 제국주의 시대이다. 일본의 제국주의 활동 결과로 조선과 을사늑약으로 맺어 외교권이 박탈했다.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일본의 허락이 없는 외교활동을 하면 부정적인 결과를 안게 된다. 하지만 고종은 그에 굴복하지 않고 헤이그 특사라는 외교활동을 통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하였다. 비록 실패했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결단력을 배울 수 있다.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정치적, 경제적 침략을 당하고 있는 시점에서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고 주권을 찾으려 하는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지금 시련이 닥쳐와 무릎 꿇고 무기력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없었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주변 상황을 꿰뚫어 보고 방안을 찾아보고 도전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시기는 우리에게 더 상황이 악화하지 않게 막을 기회의 시기였습니다. 세계 만국 평화 회의에 이준, 이위종, 이상설을 파견한 것은 국제 정세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할 기회였습니다. 그 기회를 이위종이 외국인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실력으로 기회를 잘 살렸기 때문에 국외 언론들을 주목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기회는 언제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항상 우리는 기회의 시기를 대비하여 기회를 이용할 수 있는 적절한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헤이그 특사가 실패한 원인 중 하나는 일본과 영국의 방해 때문입니다. 일본은 이렇듯 일찍부터 외교관계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중요시했습니다. 이렇듯 저희도 일찍 외교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아서 더욱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했더라면 헤이그만국평화회의 때 다른 나라들이 우리나라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들어줄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헤이그 특사는 결국 실패하였지만, 후에 항거운동이 계속 일어났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실패한다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인 발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위종이 외국어에 능통한 것이 화제가 되어
서 우리나라의 상황이 신문에 보도되었지만, 이 신문은 비록 열강들의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도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항상 준비된 자세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종은 일본의 부당한 침탈을 해외에 알리고자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였습니다. 파견된 특사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등 결과적으로 구체적 성과를 내는 데에는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국민들의 의식을 향상시켜 곳곳에서 항일 운동이 일어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고종 황제와 헤이그 특사가 이러한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상황은 이보다 더 나빠졌을 것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노력해야만 최악의 상황을 모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뛰어난 외국어 실력으로 해외에 우리나라의 상황을 알렸던 이위종을 통해,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항상 준비된 자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헤이그 특사는 고종황제께서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파견한 사절입니다. 당시 우리는 일제에게 많은 권리를 침탈당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을사늑약으로 인해 외교권까지 넘어가게 된다면, 국권이 침탈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해있다고 포기하지 말고, 적어도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며, 더 나아가 변화의 발판으로 삼아 개선된 방향으로 전환될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헤이그 특사는 고종이 직접 제시한 몇 안 되는 제안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여기서 지도자의 솔선수범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근대화로 가면서 민중의 힘이 커지고 그들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당시 약소국이었던 우리나라도 강대국에 우리의 목소리를 들려주려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헤이그 특사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할 때 우리의 목소리를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들려주어야 합니다.
개항이 늦었던 조선은 세계의 흐름에 뒤쳐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도 늦었졌습니다. 뿐만아니라 서구와 교류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근대의 기술을 수입하지 못하였던 조선은 근대화를 이루고 있던 다른 나라보다 국력은 약해졌고 그러한 대한제국을 일제는 침략을 하기위해 을사늑약을 맺습니다. 하지만 아직 외교권을 박탈당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고종은 뒤늦게라도 다른 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고종은 때를 놓쳤다고 포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빠른 법입니다. 제가 살아가면서 뒤쳐졌다고 생각할때 더 노력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해줬던 발표였습니다.
* 강두호 : 1) 개항이 늦었던 조선은 세계의 흐름에 뒤쳐지게 되고 국력 또한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도 늦었을 뿐만아니라 여러가지 불이익을 보면서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을사늑약까지 맺게 됩니다. ->> * 문장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2) 아니였으므로 ->> 3) 늦었지만 고종은 노력했습니다. 저 또한 앞으로 살아갈 때 때를 놓쳤다고 포기할 것만이 아니라 남들보다 한 걸음 더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 논리가 서지 않습니다.
수정하였습니당
헤이그 특사파견, 실패했지만 실패하지 않은 사건입니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시절, 그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고종의 치열한 몸부림은 부당한 세력에 가로막혀 빛을 보지 못했으나 마지막까지의 시도와 신념, 그 정신은 살아남아 후손인 우리에게 강한 울림을 줍니다. 다만 세계정세를 보다 현명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뒤늦은 대응을 했다는 점은 우리가 개선해 가야 합니다. 역사를 이끄는 능동적인 주인의식을 가지고 사상과 기술의 변화, 외교 원리 등을 통찰하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 김치범 : 내용이 빈약합니다. 보완하세요. 1) 이처럼 우리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줄 알아야 합니다. -> * '주장할줄'을 띄어 써야 하는 [우리말 바루기]에 밝히세요. 2) 저도 앞으로 저의 권리를 지키기위해 적극적인 자세로 임할 것입니다. ->> * 문장을 좀 더 다듬으세요.
전체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