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o, everybody--except for Chokey and J-Kitty, and we'll hear from them tomorrow. The homework was all timely and thoughtful, and brightened my weekend a lot.
Here's my agenda:
Week_5.doc
And here's what I've been thinking about, while re-reading the chapter on Stern. It's from Helen Keller's book, which includes a lot of Ann Sullivan's letters. Professor Yi Wonkey translated it for a book we did back in 2006:
1887년 4월 5일
오늘 아침 매우 중대한 일이 벌어져서 글 한 줄 써야겠다. 헬런은 자기 교육에서 두 번째로 큰 발자국을 떼었다. 헬런은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고, 손으로 쓰는 글자가 자신이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에 핵심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에 보낸 편지에서, ‘mug’와 ’milk’라는 말이 다른 어떤 것 보다 헬런에게 가장 큰 곤란을 느끼게 한 것이라고 쓴 것 같다. 헬런은 ‘drink’라는 동사를 명사와 혼동을 했던 것이다. 헬런은 ’drink’란 단어를 몰랐지만, ‘mug’나 ‘milk’란 단어를 손가락으로 쓸 때 항상 몸짓으로 뭔가를 마시는 시늉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세수를 하고 있을 때, ‘물’을 어떻게 쓰는지 알고 싶어 했다. 헬런은 무엇이든지 그것의 이름을 알고 싶으면 내 손을 톡톡 두드렸다. 내가 ‘w-a-t-e-r'이라고 철자를 써주었는데, 아침 식사 후에도 철자를 써주었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그 후에, 나는 이 새 단어(water)를 사용해서, 헬런이 느끼고 있는 ‘mug-milk’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펌프가 있는 우물로 가서, 내가 펌프질을 할 때, 헬런은 펌프 주둥이에 머그(mug)를 갖다 대고 있으라고 했다.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나와 머그에 넘칠 때 나는 헬런의 다른 한 손에 ‘w-a-t-e-r'이라고 철자를 써 주었다. 손위로 흘러넘치는 차가운 물의 느낌에 연이어 금방 써 준 그 단어에 헬런은 상당히 놀랐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헬런은 머그를 떨어뜨리고,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새로운 빛이 그녀의 얼굴에 나타났다. 헬런은 ‘water’란 단어를 여러 번 써 보았다. 그리고 나서, 땅바닥에 앉으며 땅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었고, 펌프와 시렁을 가리키며 그것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달라고 했다. 곧 몸을 돌려서 내 이름이 무엇인지도 물었다. 나는 ‘Teacher’라고 써 주었다. 바로 그때 간호원이 헬런의 어린 아기 동생을 펌프로 데리고 왔는데, 그때 헬런은 ‘baby’라고 철자를 썼고 그 다음 간호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헬런은 아주 기분이 상기되어 있었다. 손으로 만져본 모든 물체의 이름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두세 시간 만에 30개의 새 단어를 더 배우게 되었다. 새로 배운 단어들 중에는 door, open shut, give, go, come 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추신: 편지를 어제 밤에 부치기엔 너무 늦어서 못 부친 김에 한줄 더 첨가한다. 헬런은 오늘 아침에 빛나는 요정처럼 일어나, 이것저것 물건을 만지고 다니면서, 그것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보고는, 기뻐서 나에게 키스를 해 대었다. 어제 밤 내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헬런은 몰래 내 팔에 스스로 기어 들어와서 처음으로 나에게 키스를 했었다. 나는 기쁨으로 가슴이 너무 벅차서 터질 것만 같았다. (Keller, 1954: 256-257).
이 이야기는 정말 감동적이다. 그렇지만 이 설명은 어딘지 모르게 모순적인 면이 있는 것 같다.
설리반 선생님은 헬런이 ‘mug’나 ‘milk’ 같은 명사와 ‘drink’ 같은 동사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다는 것일까? 또 헬런이 ‘물’이라는 사물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을 어떻게 알았다는 것일까? 무엇보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헬런이 모든 사물엔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사물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어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는 것이다.
설리반 선생님은 인형 사건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헬런에게는, 자신은 볼 수 없지만, 비슷하게 생긴 두 물체가 만졌을 때의 느낌은 다르더라도 같은 이름을 가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뻔한 좋은 기회였다. 헬런은 자신이 단어의 개념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했는데 반해, 설리반 선생님은, 헬런이 혼동을 한 근본적인 원인은 명사와 동사에 있다고 믿었다. 또, 헬런은 재미있는 손가락 놀이를 단순히 모방하고 있다고 말하는 데 반해, 설리반 선생님은, 헬런이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서 물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한 편으로 설리반 선생님의 설명은 내재적으로 모순 덩어리다. 헬런이 이름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사물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요청할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설리반 선생님 이야기는 그 일이 일어난 날과 같은 날에 기록되었는데, 기록된 반면 헬런의 이야기는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난 이후 여러 해 뒤에 나왔다. 누가 옳은가? 두 사람 다 옳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고츠키는 학습이 단계적인 과정을 기반으로 갑작스레 일어나며, 점진적인 단계를 거쳐 혁명적인 과정을 겪는데, 점진적 단계가 혁명적인 비약을 하기 위해서는 헬런이 겪은 것 같은 위기상황의 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비고츠키는 또한, 학습은 언제나 외부를 통해 시작되며 그 이후에야 내면화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학습은 반드시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촉발되며 그 후에야 개개인의 내면에서 학습 내용이 정착화 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관점을 통합하여 설리반과 앤의 일화에 접근해 보자.
There really IS something there. There IS an “aha” moment. But it’s not INSIDE the child at all. It’s a SHARED moment, a social moment rather than a psychological 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