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
문재인은
1953년 1월 24일에 경상남도 거제군 거제면 명진리 694-1번지에서
아버지 문용형과 어머니 강한옥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9] 문용형은 함경남도 흥남의 남평 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흥남시청에서 농업과장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12월 23일에 흥남 철수 작전 무렵에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가족과 함께 몸을 싣고 남쪽으로 겨우 피난해 내려왔다.[10][11]
아버지는 거제에 정착한 후 공무원 경력을 제시하며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노무자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으나,
수입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계란 행상을 해야만 했다.
문재인의 가족은 거제도에서 제대로 살 수 있는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
문재인이 태어날 때에도 셋방을 살던 주인집에 임산부가 있다는 이유로,
산모가 진통 중에 이웃 집에 옮겨가 출산을 해야할 정도로 곤궁한 생활을 했으며,
이에 문재인의 생가는 실제 그가 살던 집이 아니었다.
결국 문재인의 부모는 자녀들의 교육을 생각해 부산으로 이사했으며,
문재인의 서류상의 본적은 부산 영선동으로 되어 있다.
문재인은 남항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가난 때문에 학교 바로 위의 '신선성당'에서 양동이를 들고 줄을 서서 정기적으로 배급을 타먹어야 했다.
배급을 받으러 온 문재인에게 수녀들이 귀엽다며 자주 사탕과 과일을 쥐어주었기 때문에
문재인에게는 수녀들의 모습이 천사의 모습으로 보일 정도로 감화가 되어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고 세례를 받았다.
학창 시절
1965년에 남항국민학교를 졸업한 문재인은
당시 명문이던 경남중학교에 입학했고,[12]
1968년에 졸업한 후에는 당시 명문고라 불리던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13]
고교 시절 초기에는 학내에서
'문과에 문재인, 이과에 승효상'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말기에는 극도로 가난한 자신의 처지에 낙망,
술·담배에도 손을 대며 방황을 하다 결국 대학 입시에 실패하였다.[14]
문재인은 졸업 후
1971년 종로학원 진입 시험에서도 일등을 하며 학원비를 면제받고 재수를 시작했다.[15]
이후 경희대학교 설립자이자 당시 경희대 총장이었던 조영식이
문재인에게 '4년 전액 장학금'을 약속하며 경희대 입학을 권유하였고,
문재인은 그 권유를 받아들여 재수 후, 1972년 경희대학교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16]
문재인은 경희대학교 법대 시절 운동권으로서
총학생회장이던 강삼재를 대신하여 당시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서 집회를 주도하다가
1975년 4월 11일 집회 때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고,
그 해 6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출소 후 강제로 군에 징집되어 1975년 8월 육군에 입대하였고
대한민국 39향토보병사단 신병훈련소를 거쳐
특수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 제3특전대대 대대본부 작전과에서 복무했다.
군대 복무 중 당시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와 여단장 전두환으로부터 두 차례의 최우수 특전사 표창을 수상했다.[17]
전역 후 1980년에 경희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후
전두환 정권에 항거하다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청량리구치소에 수감 중,
경희대학교 조영식 총장의 신원보증 아래
제22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한 후에 극적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사회 생활
1980년 5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내려지면서 실시된 예비 검속으로 체포되어,
사법시험 합격 통지서는 청량리구치소에서 받았다.
이후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동기였던 박원순, 고승덕, 조영래 등 걸출한 인재들 사이에서도 일등을 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사법연수원 시험성적이 수석[3]이었고
연수원 내 최고상인 법무부장관상도 수상했지만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성적이 차석으로 밀리고[3]
원하던 판사는 물론 아무런 임용도 되지 않았다.
당시 사법연수원에서 12등이었던 고승덕이 판사로,
상위권이 아니었던 박원순도 검사로 임용되었기 때문에 불합리한 처사였다.
이후 문재인은 대형 로펌의 영입 제의를 거절하고,[18]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갔다.[18]
그곳에서 변호사 노무현을 만나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오랫동안 인권변호사 생활을 했다.
또한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법무법인 부산에서 노무현과 인연을 맺은 것을 계기로
30년 가까이 가장 친한 친구이자 최측근으로 활동했다.[19]
노무현이 정계에 입문하여 청문회 스타가 된 뒤에도
부산변호사협회 인권 위원장을 지내면서 인권 변호사로 일했으며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동의대학교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을 변론했다.
그는 1996년 8월 발생한 페스카마호 사건에서 조선족 선원들의 변호를 맡았다.[20]
한겨레신문 설립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문재인은 무료로 변론하게 되면
자칫 사건 당사자와 가족들이 재판을 경시하는 풍조가 나타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무료 변론은 하지 않았는데,
경상대학교 교수들이 《한국사회의 이해》라는 저서를 강의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자 5년 간 변론을 맡아 항소심에서 승소했을 때
고작 1백만∼2백만원대의 수임료를 받기도 했다.[출처 필요]
1988년에는 김영삼으로부터 노무현, 김광일과 함께 국회의원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문재인은 3명 중 유일하게 정치입문을 거절했으며[21] ,
정계입문을 결심한 노무현과 김광일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참여정부 시절
변호사 활동을 하며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기도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특히 2002년 대한민국 제3회 지방 선거를 앞두고,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이 몇 차례 부산광역시장 출마를 권유했음에도
'나는 참모용'이라며 '더 나은 사람이 출마해야 한다'고 고사했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문재인은
'변호사 업무에 복귀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참여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을 지냈으나,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 악화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그러나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네팔 산행 도중[22]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 영자 신문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을 꾸렸으며[23],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
정무특보를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18]
청와대 안에서
이정호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이호철 대통령비서실 국정상황실장 등과 함께 PK인맥을 대표했는데,
'왕수석'으로 불리며 한나라당으로 부터
'왕수석인 문재인 수석의 월권과 청와대의 시스템 경시로 인해 국정 원칙이 파괴됐다'는
비난을 받으며 2인자로 주목받기도 했다.[24]
비서실장 시절 이해찬 국무총리가
부적절한 관계에 있는 인사들과 내기 골프를 쳤다는 소식을 듣고
고심하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해임을 촉구하기도 했으며[25],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시절 모든 직원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해내는 업무 스타일을 보였다.[26]
또한 참여정부 들어
검사장으로 승진한 17명 중 문재인과 이호철 비서관의 경남고등학교 동문은 한 명도 없었는데,
두 사람은 아예 동창회에 얼굴을 비추지도 않았고,
고등학교 동창인 고위 공직자가 문재인의 방에 들렀다가 얼굴도 못 본 채 쫓겨난 적도 있으며,
또한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단 한 차례의 식사나 환담 자리도 갖지 않았다고 한다.[27]
2006년 11월 6일 국정자문회의 의원 138명을 보궐할 때
국정자문위원으로 추가 보선되었으며[28],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문재인에 대해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했다.[29]
다 읽어 봤나요?
문재인 그는 열렬히 지지함을 자랑해도 되는 사람이다.
정의롭고, 똑똑하며, 남의 아픔에 연대하는 사람이다.
아베나 트럼프, 김정은과는 질이 다른 인간이고,
미국인들이 자랑하는 오바마와 맞장 띄워도 되는 인간이다.
지켜줄 가치가 차고 넘치는 사람이다.
지키자...회한을 갖지 않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