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강병대교회와 금사향의 임 계신 전선
김영욱(대한민국 공군, 공군역사자문위원)
제주도 남제주 대정읍 상모리에 있는 강병대교회(强兵臺敎會)는 제2대 육군 제1훈련소 소장 장도영(張道暎,1923-2012)장군의 지시로 5월1일 기공하여, 그해 9월 14일에 준공된 교회다. 지금은 대한민국 공군의 군목이 예배를 인도하는 교회로 등록문화재 제38호다.
건축 당시 기술자가 아닌 국군 공병대가 제주도 특유의 돌 현무암을 외벽으로 사용한 목재 골조의 함석지붕이다. 2006년에 보수해 지붕과 교회 첨탑은 새롭게 단장했다. 교회의 외벽이 현무암 때문에 거름하게 보이는데 준공 당시의 모습 그대로다. 뾰족 첨탑과 아치형 문과 창문, 스테인글라스 등은 중세 고딕 건축양식으로 고풍스럽다.
교회 앞에는 1953년 6월 3일에 세워진 빗돌에는 ‘장도영 육군 제1훈련소 소장(所長)의 지시로 건평 총185평으로 지어져 헌당(獻堂) 되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현재 건물현황과 구조는 예배당이 595평방미터(180평), 교육관이 51평방미터(15평)이며 예배당과 교육관 사이에 강병대교회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역사전시실(歷史展示室)’로 되어있다.
조선시대 제주도는 서울 한양에서 가장 먼 곳의 섬이어서 귀양살이를 오던 선비들이 많았던 곳이다. 무려 40여 명이 귀양을 왔다가 갔다. 그 중에 한 선비는 이곳 대정읍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로 그려 이름을 떨쳤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선생이다. 선생의 예술세계를 기리기 위한 ‘추사관(秋史館)’ 이 강병대교회에서 가까운 거리로 안성리에 있다.
한 점의 겨울 마음 송이송이 둥글어라/ 그윽하고 담담하고 냉철하게 빼어났네/ 매화가 기 품이 높다지만/ 맑은 물에서 참으로 해탈한 신선을 보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시 「수선화(水仙花)」다. 스물네 살에 동지사 일행을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사랑스럽고 고귀한 기품을 뽐내는 수선화를 처음 보고 반했다. 그 후 수선화를 좋아하게 되었고 유배 와서는 담 모퉁이나 보리밭에 지천으로 널린 수선화를 보고 지은 시다. 수선화가 지천으로 널리던 대정읍은 6.25 한국전쟁 땐 훈련받는 군바리, 즉 군인들로 가득 찬 세상이었다.
흔히들 군인을 비하하거나 얕잡아 이르는 말로 ‘군바리’라고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다. 제주도에서 처녀를 ‘비바리’라고 부르는데서 ‘군바리’라는 말이 기원했다. 그런 기원을 밝힌 이는 모슬봉 레이더기지의 제308관제 대대장이었던 한만희 중령이 제주도의 풍토에 대해 관심을 갖고 대정 토박이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니 군바리는 제주도에서 군인을 뜻하는 정겨운 말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6.25 전쟁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국군은 패퇴하게 되었다. 북한군에 밀리고 밀러 낙동강 전선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을 무렵, 서울에 있던 정부의 임시정부는 피난길에 올라 대구를 거쳐 부산에 옮기게 된다. 그리고 조국을 지킬 육군 병사를 키워낼 훈련소가 급했다.
그래서 육군은 8월 14일 대구에서 육군 제1훈련소를 창설했다. 다음 해인 1951년 1.4후퇴가 시작되자 육군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1월 22일 제1훈련소를 이곳 제주도 제주도 모슬포로 옮겼다. 모슬포는 대정읍 상모리와 하모리의 통칭이다. 1956년 폐쇄되기까지 5년간 모슬포의 육군 제1훈련소는 ‘모슬포 훈련소’라고 부르기 보다는 ‘못살포 훈련소’라고 불렀다.
그렇게 불렀던 까닭은 눈물겹다. 그 당시 훈련병은 10대 중학생부터 30대 중반까지의 농부, 처자식을 두고 온 직장인, 낫 놓고 'ㄱ‘자도 몰라 자기 이름 석 자도 못쓰는 문맹자 등 천차만별이었다. 더구나 나이 어리고 키가 작은 훈련병은 길이가 길고 무거운 엠원(M-1) 소총을 어깨에 메면 개머리판이 땅에 끌리고 총을 드는 것도 힘겨웠다.
군복은 미군 작업복으로 얼마나 컸던지 키 작은 훈련병이 입으면 팔소매와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려도 몸 따로 옷 따로 놀았고, 체구가 왜소한 훈련병은 바지에 둘이 들어갈 정도였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런 군복도 귀했다. 떨어져 구멍이 나고 누더기가 되더라도 기워 입었다. 그리고 그것도 옷이라고 다음 훈련병에게 물려주어 입게 했다.
물 사정도 나빠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발 한 번 씻지 못하는 때가 많았고, 세수는 잘 걸러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맨손으로 얼굴을 비비는 고양이 세수를 했는데 어쩌다 비 온 뒤 야외훈련 때 흙탕물이라도 만나면 그런 물로 세수를 하고 목욕을 할 수 있었다.
제주는 바람이 불 때는 사람이 날아갈 정도로 분다. 특히 모슬포는 제주도 전 지역을 통틀어 가장 바람이 매서운 곳으로 바람이 불면 화산재 같은 자주색 먼지가 휘몰아치고 연일 구름이 낀 날 씨에 안개비가 내리는 날이 많았고 땅은 일 년 내내 거의 저벅저벅했다. 그래서 사람이 살기 어렵다고 ‘못 살 곳의 모슬포’라고 빗대어 ‘못살포’라고 빗대어 부르기도 했다지만 훈련병의 못살포의 속내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배고픔이다. 강풍으로 육지의 뱃길이 끊겨 식량보급선 오지 않으면 고구마로 겨우 끼니를 때우고 훈련을 하다보면 입 안까지 타는 갈증과 배고픔은 죽기보다 더 심한 고통이었다. 눈비바람과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던 훈련병의 몸꼴은 바짝 마른 건태였고 하얀 부분은 흰 눈동자와 흰 이빨뿐이었다. 그래서 훈련병들은 모슬포를 사람이 살 곳이 못된다는 뜻으로 ‘못살포’라 그랬고 육군 제2훈련소를 ‘못살포 훈련소’라고 부르게 되었다.
훈련병의 훈련은 12주지만 전선에서는 한치라도 우리 땅을 되찾으려고 싸우던 젊은 병사들이 턱없이 부족해 훈련을 3주로 줄이기도 했으나, 그나마 3주를 채우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겨 총만 쏠 줄 알면 전선으로 보냈지만 용감하게 싸웠다.
그 당시 육군 제1훈련소가 모슬포로 오면서 군 야전 병원인 98병원이 들어서고, 육군 제29사단이 창설되고, 해군도 훈련 장정을 실어오고 전선으로 보내는 수송과 훈련소 물자 수송을 위한 항만부대를 화순 백사장과 산방산 밑에 이르는 백사장에 배치했다. 그리고 공군사관학교도 임시로 옮겨오는 등 육해공군이 모슬포를 중심으로 주둔하였다. 또 육지에서 건너온 수많은 피난민과 군인 가족들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대정면(현재 대정읍)의 인구는 7만여 명 이상었다. 지금은 읍인데도 1만6천여 명 밖에 안 되지만 그땐 사람들로 들끓었다.
특히 전선으로 보내는 훈련소 장병들을 위로하고 사기를 높여주기 위한 위문공연을 하던 국방부 정훈국 ‘군예대(軍藝隊)’가 있었다. 군예대에는 황해, 주선태, 구봉서 등 명배우와 박시춘, 유호, 황금심, 금사향, 남인수, 신카리아 등 유명한 작사, 작곡가, 가수 등으로 조직돼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위문공연을 하고 군가를 작사 작곡도 했지만 짬을 내어 가요를 만들기도 했다. 대표적인 노래가 황금심이 불렀던「삼다도 소식」이다.
태극기 흔들며 임이 떠날 새벽 정거장/ 기적이 울었소/ 만세소리 하늘 높이 들려오던 날/ 지금은 어느 전선 어느 곳에서/ 지금은 어느 전선 어느 곳에서 용감하게 싸우시나/ 임이 여 건강하소서
군예대 육군 제1훈련소 소속의 유호가 작사하고 금사향이 부른 「임 계신 전선」이다. 하지만 훈련소 장병들을 위한 군예대의 위문공연도 중요하나 정신무장(精神武裝)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당시 훈련소 소장 장도영 장군이 신앙과 기도의 힘으로 훈련병들의 정신력을 강화하기 위해 교회를 지으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게 되었는데, 교회의 이름이 강병대교회이다.
강병대교회의 ‘강병대’는 훈련소의 통칭으로 ‘강[强]한 군사[兵]를 기르는 터전[臺]’이라는 뜻이다. 즉 국군장병들이 예배를 보며 정신무장을 하던 곳으로 훈련소에서 제주도의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병을 얻어 죽어가는 병사들이 있었다. 그런 동료의 죽음을 본다든가. 육지의 전선에서 벌어지는 비참한 전쟁 상황을 전해 듣는다든가 하면 극도의 두려움 속에서 훈련을 받게 된다. 그런 속에서 훈련을 마치고 전쟁터로 배치돼 전선으로 떠날 때 교회에 들러 기도하므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용기를 냈다.
하지만 강병대교회는 우리나라 군인들만 예배드리는 교회는 아니었다. 육지에서 피난 온 신자들, 교회 근처에 1개 중대 병력의 미군 고문단이 예배를 드리고 기도했다. 특히 참전 16개국 장병들이 모슬포 알뜨르비행장에 내리면 반드시 강병대교회를 들렸다.
강병대교회는 군인교회라는 특수한 교회였지만, 대정(모슬포)지역의 첫 유치원인 ‘샛별유치원’을 교회 안에 개설해 훈련소 장병들이 교사가 되어 가르치는 대민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가장 값진 대민봉사는 공군이 강병대교회의 관리를 맡고부터이다.
강병대교회는 1965년 공군 제8546부대의 기지교회로 편입된 후 가난해 중학교를 가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야학(夜學)을 열어 지역봉사에 기여하게 된다. 교회 부설로 ‘신우고등공민학교(信友高等公民學校)’를 연다. 문교부가 인가한 정규 중학교가 아니기에 국가의 혜택이 없다. 그래서 공군 장병들이 교사로 나서서 가난해서 정규 중학교는 못 갔지만 배우고자 하는 향학열(向學熱)에 불타던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6.25 전쟁이 끝났을 땐 국민의 대부분이 배고픔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빈곤한 생활이었다. 그러니 아이들은 초등학교 공부는커녕 돈을 벌러나가야 했던 아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비가 없는 야간 공민학교라도 찾아가서 ‘주경야독’으로 배움의 갈증을 풀어야 했다.
육지와 환경은 달라도 공군기지교회인 강병대교회의 신우고등공민학교에 다니던 청소년들 역시 어려운 환경에서 주경야독으로 중학교 과정을 공부했다. 1966년부터 1981년까지 15년 동안 14회 200여 명의 졸업생이 배출된다. 그들 가운데는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임영봉 예비역 대령이 있다.
지난 2012년은 강병대교회 창립 60주년이었다.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전선으로 떠나기전 교회에 들려 예배를 보며 ‘총알이 빗발치던 전선에서 무사하게 해달라고 안녕을 빌었던’ 노병(老兵)들의 발길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