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세션의 주제는 ‘궁수의 눈(The Archer’s Eye)’이다. 앞선 세션에서는 마음의 침전물을 가라앉히고,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 사이의 틈을 알아차리는 법을 배웠다. 삶에서 일어나는 피할 수 없는 사건은 첫 번째 화살이다. 그러나 그 사건에 대한 원망과 불안, 반복되는 생각과 스스로 만들어내는 고통은 두 번째 화살이 된다. 우리는 사건의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의 반응을 선택하는 내면의 건축가이다.
이번 세션에서는 반응하지 않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에너지를 어디에 향할 것인가를 배웠다.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 사이의 멈춤을 확장하고 그 공간에 머물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주의의 힘이 필요하다. 이것이 다라나(Dharana), 즉 한 점에 주의를 모으는 집중 수행과 연결된다.
『마하바라타』의 드로나와 아르주나 이야기는 집중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드로나는 제자들에게 나무 위에 놓인 나무 새의 눈을 맞히도록 했다. 다른 제자들은 나무와 하늘, 나뭇가지와 새의 몸을 보았지만 아르주나는 오직 새의 눈만을 보았다. 아르주나가 과녁을 맞힌 것은 더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주의가 하나의 점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집중이 단순한 재능이 아니라 영혼의 훈련임을 보여준다. 아르주나는 나무를 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배제의 기술’을 수행했다. 삶에서 나무는 의무가 만들어내는 소음이고, 나뭇잎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며, 나뭇가지는 과거에 대해 반복해서 들려주는 마음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고, 모든 감정을 동시에 다루려 할 때 숲 전체를 향해 한꺼번에 화살을 쏘게 된다.
궁수의 눈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편협해지는 것이 아니라 목적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지금 내 삶에서 ‘새의 눈’이 무엇인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마음의 평화일 수도 있고, 가장 중요한 일일 수도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현존의 질일 수도 있다. 나머지는 때로 단지 풍경일 뿐이다. 무엇에 주의를 두고 무엇을 흘려보낼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이 집중의 힘이다.
주의는 빛과 같다. 흩어진 빛은 방 전체를 밝히지만 하나의 지점을 뚫을 힘은 없다. 같은 빛을 렌즈를 통해 한 점으로 모으면 레이저가 된다. 한 점에 모인 주의는 낮은 자아가 만들어내는 환상을 꿰뚫고 지금 상황의 진실을 더욱 명료하게 바라보게 한다.
‘궁수의 눈’ 명상은 레이저와 투광등이라는 두 가지 주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레이저처럼 호흡의 한 지점에 주의를 모았다. 콧구멍 가장자리에서 공기가 닿는 작은 감각을 ‘새의 눈’으로 삼았다. 생각이 과거나 미래의 숲으로 흘러갈 때 그것을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단지 알아차린 뒤 다시 호흡의 한 점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백 번 흩어지면 백 번 다시 돌아온다. 돌아오는 순간마다 주의의 레이저는 더욱 예리해진다.
그다음에는 투광등처럼 알아차림을 넓혔다. 콧구멍의 한 지점에서 호흡 전체로, 몸 전체로, 방 안의 소리로 주의를 확장했다. 생각이 하늘을 지나가는 새처럼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생각을 붙잡지도 않고 쏘아 떨어뜨리려 하지도 않았다. 단지 광대한 알아차림의 공간을 지나가도록 두었다. 나는 지나가는 생각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알아차림의 공간이다.
이 수행은 이완되어 있으면서도 선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를 기르는 과정이다. 지혜로운 삶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명료함이 필요하다. 세상이 나의 주의를 어디로 끌고 가는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신의 주의를 어디에 둘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다.
앞으로 며칠 동안 ‘궁수의 1분(The Archer’s Minute)’을 수행한다. 하루에 여러 번 하나의 대상을 선택한다. 바닥에 닿은 발의 감각, 새소리, 커피의 맛처럼 아주 평범한 대상이면 된다. 단 60초 동안 그 대상에 100퍼센트의 주의를 기울인다. 오직 새의 눈만을 바라보듯 하나의 대상에 온전히 머문다.
마음이 산만함의 숲으로 들어갈 때 기억한다.
나는 나뭇가지나 나뭇잎을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새의 눈을 위해 이곳에 있다.
자신의 중심으로 돌아와 지금 이 순간의 진실을 겨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