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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4일차(2022.11.5)
19. 김천황금성당
김천 지역의 천주교 전래는
유배자 혹은 박해를 피해 피난 온 신자들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김천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시기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로 보여 진다.
천주교 박해에 관한 정부 측 기록으로 신유박해 직후에 쓰여진 『사학징의』에는
충청도에 살던 천주교인 박춘산이 김천으로 귀양 온 사실과
부산 동래에서 현계탁이 김천 증산으로 귀양 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흥선 대원군 집권 시기인 1866년 병인박해 당시
김천에 살던 유시몬 외 5명의 천주교인이
충주 포교에 체포되어 처형된 사실도 있다.
그리고 같은 시기 경기도·충청도·경상도에서 피난 온 신자들에 의해
지금의 황점, 마구실, 장자터, 서무터, 마잠, 부상, 곤천이, 지대골[향천] 등
여러 지역에서 신자촌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에서도 마잠 공소는 1901년에 설립된 김천본당(황금동 본당)의 근원지이다.
마잠마을은 많은 천주교인들이 몰려들어 자연스럽게 교우촌을 이룬 곳이다.
이렇게 해서 큰 교우촌으로 발전을 하자 차츰 인근의 김천 시내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
루르드 성모동굴 성모 마리아
2018년 성모당을 봉헌하여 대구대교구청 성모당과 영적 유대로 은총을 공유
(교구 성모당은 로마의 성모 대성전과 영적 유대)
로마 성모 대성당 ~ 대구교구 성모당 ~ 김천황금성당 성모당
20. 상주 신앙 고백비
상주군에는 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 당시 문중의 박해로
서울서 낙향한 서광수 (徐光修) 에 의해 처음 복음이 전파된 후
많은 사람들이 입교해 천주교를 믿어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해
1827년 정해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특히 신앙 고백비가 서 있는 청리면 삼괴2리 부락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해(金海) 김씨 집안
김복운(金福云)의 아들 4형제가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 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 차남인 삼록(三錄, 도미니코, 1843-1932년) 은
특히 신앙이 돈독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이 신앙 고백비가 공식적인 교회 사적으로 고증된 것은
이제 겨우 38년을 넘어섰다.
김삼록은 신앙 고백비를 세운 뒤 교난을 피하기 위해
고백비 앞에 포플러나무, 미루나무 등을 많이 심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도록 가려 두었다.
바위 위에서 의젓한 모습으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고백비에는
천주님과 교황, 주교, 신부, 교우를 위한 기도가 새겨져 있다.
天主聖敎會 聖號十字嘉 천주 성교회 성호 십자가 (十字嘉는 十字架의 오자)
第一 天主恐衛咸 첫째는 천주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모신다
第二 敎化皇衛咸 둘째는 교황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三 主敎衛咸 셋째는 주교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四 神夫衛咸 넷째는 신부님을 받들어 모신다 (神夫는 神父의 오자)
第五 敎于衛咸 다섯째는 신자들(교우)을 받들어 모신다 (敎于는 敎友의 오자)
奉敎人 金道明告 (천주)교인 김 도명고(도미니코)
癸卯生本(古)盆城(今 · 金海) 계묘년(1843)에 출생, 본관은 분성(김해) 金氏
아침 6시 40분 김천을 출발 7시 15분경 신앙고백비 성지 주차장에 도착했다.
나는 먼저 고백비로 올라가서 둘러보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조금 아래에서 자매들 이야기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형제님 한 분과 아내와 다른 자매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주 친한 사람을 만난 듯 반갑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분이 나중에 이야기 할 루시아 자매님이었다.
천사를 만난 것이다.
루시아 자매와 진요셉 형제 부부는 매주 토요일마다
성지순례를 하고 있다고 한다.
21. 상주옥터
상주에 있는 옥터성지는
안동교구 첫번째 복자인 박상근 마티아 (1837~1867)가 순교한 감옥터다.
1867년 1월 이곳 상주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상주, 문경, 보은, 충북 영동, 제천지역에서 체포되었던 천주교 신자들이
이 옥에 갇혀 문초를 받거나 치명 순교하였는데,
상주 옥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성첩, 문루와 함께 헐린 것으로 보인다 한다.
박상근 마티아는 2014년 8월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으로부터 복자로 시복되었다.
성지를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오다가 떡집을 발견했다.
아침 식사를 하지 못했기에 떡을 샀다(17,000원).
방금 만든 떡이라 맛있어서 운전하면서 요기를 했다.
그리고 이날 산 떡은 다음 날까지 간식으로 사용했다.
22.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은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오신 김수환 추기경의 사랑과 나눔 정신을
실천하고 계승하고자 추기경님의 생가를 중심으로 공원을 조성하였습니다.
특히 공원내에 위치한 ‘김수환 추기경 기념관’의 전시공간은
추기경(님)의 삶의 여정을 옹기를 빚는 과정과 접목하여 담아냈습니다.
23. 한티 순교성지
한티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위치한 해발 600m가 넘는 깊은 산골이다.
한티 순교 성지는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이다.
을해박해(1815년)와 정해박해(1827년) 를 전후하여 박해를 피한 교우들이
팔공산 중텩으로 숨어들어 1850년 말경에 한티는 큰 교우촌을 이루게 되었다.
병인박해(1866년)가 진행 중이던 1868년 봄, 한티에 들이닥친 포졸들은
배교하지 않는 많은 교우들을 그 자리에서 처형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박해 소식을 듣고 인근에 살던 교우들이 한티에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이 산야 곳곳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하여 옮길 수가 없었기에 순교한 그 자리에 시신을 매장하였다.
지금까지 확인된 한티 순교자들의 묘는 모두 37기로
박해 당시의 교우촌과 그 주위에 넓게 흩어져 있다.
그중에는 당시 공소 회장이던 조 가롤로와 부인 최 바르바라, 동생 조아기
그리고 서태순 베드로의 신원만 밝혀졌고, 그 외는 신원을 알 수조차 없다.
현재 성지에는 박해 후 재건된 공소 터가 보존되어 있으며, 무명 순교자들의 묘와
단체. 개인 숙식이 가능한 피정의 집, 대신학교 영성관, 순례자 성당 등이 있다.
매년 10월 말에서 11월 초에는 우리 부부가 제주억새여행을 다녔지만
금년에는 일정이 서로 맞지 않았고, 성지여행으로 포기했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한티성지에서 제주억새와 또 다른 멋진 억새를 볼 수 있었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한티피정에 집에서 피정을 하고싶은 마음이다.
24. 신나무골
'신나무골'명칭은 골짜기에 단풍이 아름다운 '신나무'가 많아 붙여졌다고 한다.
신나무골에 언제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815년 을해박해로 청송·진보·영양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대구로 압송되자,
그 가족 및 일부 신자들이 피난지로 알려진
신나무골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후기 박해때 1837년 이전부터 신자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샤스탕신부와 최양업신부도 여기에 왔을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이후 신나무골 신자들은 여러 박해를 겪으면서도 꾸준히 신앙 공동체를 유지해 나갔고,
1866년 병인박해 때, 일시 흩어졌으나 박해 후 이이전(李梨全, 안드레아) 등
신자들이 돌아오면서 다시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1882년 서울의 명동성당,
1883년 강원도의 섭가지성당(지금 현재 북녁)에 이어
세번째로 신나무골성당이 설립되었고
계산성당(대구 주교좌성당)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신나무골 카페에서 중식으로 연잎밥을 먹고 있는데
제주 교구청에서 신앙체험수기 공모에서 소망상을 받게 되었다며
오는 주일 교구청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순례기간 중이라 불가함을 말하자 가족동반 교구장님과 식사도 하는데
아쉽다는 답변을 들었고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했다.
25. 가실성당
낙산 가실 성당은
병인박해 후 경상도 북부 지역의 전교 활동 중심지다.
여러 차례의 본당 분할을 하며
경상도 지역의 신앙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1년 김천 본당을 분가시킨 것을 시작으로, 점촌·퇴강·왜관 본당 등,
영남 서북부 지역에 자리 잡은 수많은 본당의 모태가 되었다.
가실 성당은 우리나라에서 열한 번째,
대구대교구에서 계산 성당에 이은 두 번째라는 오랜 연륜을 지녔다.
대구 첫 본당인 계산 성당의 전신인 칠곡 신나무골 연화 학당처럼,
가실 성당에도 신학문과 구학문을 가르치던 학당이 있었고,
한국 천주교회사의 영광과 아픔을 한몸에 품고 있다.
26. 비산(날뫼)성당
비산성당은 1928년 6월 12일 계산성당 날뫼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했다.
병인박해 때 1867년 관덕당 형장(현 관덕정 순교기념관)에서 참수 당한
이윤일 성인이 1869~1912년 40여 년 동안 비산성당 인근
비산동 날뫼 뒷산에 안장된 것으로 전해지면서 순례지로 지정됐으며,
'성 이윤일 요한의 사랑과 순교의 길' 순례코스를 마무리 하는 성당 입니다
성 이윤일 요한의 사랑과 순교의 길 (이하 성 이윤일 요한 길) 은
1867년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 순교하고 형장 근처에 임시매장 됐던 성인의 유해를
2년 뒤 후손들이 대구 날뫼 뒷산(현 대구시 서구 비산동)으로 이장하고자
성해를 모시고 이동한 경로를 순례길로 조성했다
순례 코스는 관덕정순교기념관을 시작으로 주교좌 계산성당-달성공원-
북비산네거리-원고개 시장-기념비(성인 무덤 추정지)를 거쳐
비산성당에 이르는 약 3.6㎞ 구간이다
비산성당 외벽 담장에는 출토된 청동기 유물과 날뫼전설,
청어샘전설, 원고개길 등 비산동에 내려오는 설화부터
순교자 이윤일 성인의 일대기, 비산성당의 역사,
근대 경부선 철로 주변 길이었던 비산동의 이야기까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변천사가 담긴 벽화가 그려져 있다.
27. 복자성당
대구 신천동 복자 성당에는
1868년 8월 14일 울산 동천 강변 장대벌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허인백(許仁伯, 1822~ 1868, 야고보), 김종륜(金宗倫, 1819~1868, 루카),
이양등(李陽登, ?~1868, 베드로) 3위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며,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해서
각 교구별로 기념 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대구대교구에 순교자 현양 기념 성당으로서
건립된 성당이 복자 성당이다.
각각 김해, 공주, 서울 태생인 세 순교자는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집과 전답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경상도의 교우촌으로 피난해 온 이들이다.
천주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정처없이 이리저리 떠도는 생활을 해야만 했던 이들의 애환은
오늘날 후손들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울산 장대벌에서 한날 한시에 순교의 월계관을 받은 이들의 시신은
처형 직후 형장 근처의 강둑 아래 구덩이 속에 묻혀 있다가
경주 산내면 진목정 앞산에 합장됐다.
그 후 1932년 5월 29일 감천리 묘지로 옮겨졌다가
1974년 10월 19일 비로소 대구 복자 성당 구내로 모셔져 오늘에 이른다.
28. 경상감영과 옥터(대안 성당)
경상 감영은 조선 시대 경상도 지역의 행정 중심지이며
천주교인들에게는 신앙을 증언한 곳이자 순교한 순교지이다.
1815년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남부 지방에 을해박해가 일어나자,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일월산 곧은정, 우련밭에 있는
신자들이 붙잡혀 감영으로 이송되어 취조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는 장사(杖死)하고,
최봉한 프란치스코, 김시우 알렉시오, 서석봉 안드레아, 김흥금,
김장복, 안치룡 등은 경상 감영 옥에서 옥사〈獄死)하였으며,
살아남은 7명은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또한 1827년 정해박해의 여파로 상주 잣골, 상주 멍에목, 상주 앵무동,
봉화 곰직이에 살던 신자들이 체포되어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들 가운데 박경화 바오로, 김세박 암브로시오, 안군심 리카르도등은 옥사하였고,
남은 3명은 1839년 기해박해 때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1860년 경신박해 때에도 서태순 베드로를 비롯하여 10여 명의 신자들이,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이윤일 요한과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
서인순 시몬 등 많은 순교자들이 옥실이를 한 곳이다.
을해박해 순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2016년에
7인의 순교복자비를세우고,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경상감영공원
대안성당(옥터)
대안성당은 감영의 터에서 순교한 많은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당이다.
순교지인 감영 터가 공원화되었기에 가장 가까운 곳에 건립되었다.
비좁은 도심에 세워진 성당인지라 마치 호텔처럼 세워졌다.
29.관덕정순교기념관
을해박해·정해박해로
관덕정·경상감영 옥터 등에서 복자 20위 순교
한때는 ‘관덕당’이라고도 불린 관덕정 순교터는 대구읍성 남문 밖
아미산 자락 신천(新川) 지류 변에 있다.
평상시엔 군사들 훈련장이었고,
때론 군관과 별무사를 선발하던 곳이었다.
동시에 국사범의 처형장이었는데, 서학, 곧 천주교 신자들도
관덕정에서 순교의 화관을 썼다.
관덕정에서 피를 흘린 순교자는 17위다.
이 가운데 지난 8월 시복된 11위 중 김희성(프란치스코)과
구성열(바르바라) 등 7위는
을해박해로 체포돼 1816년 12월 19일에 순교했고,
이재행(안드레아)과 박사의(안드레아), 김사건(안드레아) 등 3위는
1827년 정해박해 때 체포돼 12년 간이나 잡혀 있다가
기해박해 때인 1839년 5월 26일 순교했다.
또 마산교구에서 시복을 추진한 박대식(빅토리노)은
병인박해 때인 1868년 10월 12일에 피를 흘렸다.
당시 관덕정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듬해
친일파였던 경상북도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 박중양이
고종황제의 윤허 없이 대구읍성을 허물면서 관덕정도 사라졌다.
신천 지류 하천변도 복개돼 도로로 변했다.
지금은 관덕정 순교터로 고증된 곳에 지하 1층에 지상 3층의
한옥 누각 양식의 관덕정순교기념관(관장 최호철 신부)이 들어서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관덕정길 11이다.
이 기념관은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해
대구대교구 성지 개발 사업에 따라 건립됐다.
1986년에 착공해 1991년 5월에 축복식을 가졌다.
515㎡(155.78평) 부지에 건축 연면적 997㎡(301.59평) 규모다.
교구는 축복식에 앞서 그해 1월 이윤일(요한) 성인의 유해를 봉안했다.
지하 경당엔 유해실이 있고,
그 곁에 순교 전시실이 있어 순교 신심을 전한다.
30. 계산 주교좌대성당
경상도 지역 최초의 성당이며 현 대구대교구 주교좌 성당이다.
1893년 당시 남산동으로 불리던 현재의 계산동에 설립되었다.
경상도 지역 성당이 설립된 것은
개항 직후의 박해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1882년이었고,
이때 그 전담 신부로 임명된 사람은 1877년에 입국하여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로베르(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신부였다.
그러나 그는 즉시 경상도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지 못하고
강원도에 머물며 이곳 신자들을 방문해야만 하였다.
로베르 신부가 강원도를 떠나 경상도 북부의 칠곡 신나무골에 정착한 것은
1885년이었고, 이때부터 이곳 교우촌은
경상도 지역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거점이 되었다.
1887년에 로베르 신부는 전해에 맞이한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1859~1915, 하비에르)
보좌 신부에게 신나무골을 맡기고, 장차 대구읍내로 진출하기 위해
새방골[新坊谷, 현 대구시 서구 죽전동, 상리동]의 대밭골[竹田]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로써 ‘대구 성당’이 설립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현 계산동 성당의 전신이다.
31.성모당
대구 성모당은 1917년 7월 착공하여 1918년 8월 15일 완공되었고, 10월 13일 축성되었다.
1911년 조선대목구에서 남방 지역을 관할할 대구대목구가 분리 · 설치되면서 부임한
초대 감목 안세화 드망즈(安世華, Florian Demange) 주교의 허원이 계기가 됐다.
가진 것은 하나도 없이 오직 가난만을 나눠 갖고 온 안 주교는
교구에 꼭 필요한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 증축을 이뤄주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하여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워서
모든 신자들이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허원을 드렸다.
안 주교가 허원을 드린 지 2년 만인 1913년 12월 4일 대구본당(계산 주교좌본당)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등의 협력으로 주교관을 완공했고,
1914년 10월에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건립했다.
그러나 계산 주교좌성당 증축은 이루어지기 어려워
성모당 건립도 자연히 늦어질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중 계산 주교좌성당 보좌 소세(Hyppolyte Joseph Sacet) 신부가
중병을 앓아 선종 직전에 이르렀다.
안 주교는 수많은 치유의 기적을 보인 성모님께 소세 신부를 낫게 해주면
주교좌성당 증축 전에 성모동굴을 봉헌하겠다고 새로 약속했다.
소세 신부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1917년 7월 31일부터 성모동굴 공사를 시작,
1918년 8월 15일 공사를 마쳤고, 10월 13일에 성모당을 축성했다.
동굴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대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께서 교구를 위하여
하느님께 청한 3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킨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라는 뜻이다.
대구 성모당(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9호, 1990년 12월 15일 지정)은
전국적으로 확산된 성모신심의 중심이다.
1973년부터 5월 성모성월이면 대구 시내 각 본당별로 교구청 성모당에서 열고 있는
‘성모의 밤’행사는 전국적으로 성모신심 운동이라는 새로운 기도양식에 불을 붙였다.
프랑스 루르드의 영적(=기적) 샘물은 특히 치유의 기적을 많이 낳기로 유명한데,
대구 성모당 역시 간절히 빌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알려져 있다.
식민지 시절, 학병으로 끌려간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도
대구 성모당에서 아들 김수환 신학생의 생환을 간절히 기도드렸고,
김 추기경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32. 성유스티노신학원
1914년 10월 3일 대구에서 개교한 신학교.
개교 이래 67명의 사제를 배출하면서 교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45년 3월 19일에 폐교되었다.
드망즈 주교의 노력으로 1914년 10월 3일 개교한 신학교는
기부자의 요청대로 학교 이름을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정하고,
첫 신입생으로 주재용 등 용산 성심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7명의
대구 대목구 소속 신학생들을 포함하여 57명을 받아들였다.
신학교의 학제는 용산 신학교와 같이 라틴어 교육 중심의
보통 교육 과정(소신학교 6년)과 철학 및 신학 과정(대신학과 6년)이었으며,
대신학과의 소신학과는 각각 2학급으로 구성되었고,
신입생은 3년마다 50명 내외를 선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18년 2월 23일에 주재용이
성 유스티노 신학교 출신의 첫 번째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처럼 사제 양성 교육 기관으로 꾸준히 성장하던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1940년대 들어 폐교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당시 한국 내의 신학교는 서울·대구·덕원 등에 3개가 있었는데,
이 중 정식으로 인가된 것은 1935년 2월에 인가된 덕원 신학교뿐이었다.
이에 용산 신학교는 총독부의 무허가 학교 폐교 조치에 따라
1942년 2월 16일 폐교되었고,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폐교의 위협 속에 있다가 1944년 12월 23일의 서품식을 끝으로
이듬해 3월 19일 폐교되고 말았다.
그 후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신학과 학생 7명은 덕원 신학교로 전학하였고,
철학과 학생들은 1945년 2월 23일 ‘경성 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가
인가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공부하였으며,
부제품을 받은 4명은 대구교구 사제 휴양소에서 최민순(崔玟順, 요한) 신부의 지도로
수업을 받다가 1945년 12월 15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편 신학교의 건물과 부지는 1945년 3월 31일 일본군 제218부대에 징발되었다.
33. 성직자묘지
1915년 대구 교구청 내에 조성된 성직자 묘지이며,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이셨던 드망즈(안세화) 주교님이
교구 내 프랑스 선교사들을 위한 묘지로 쓰기 위해 조성한 곳으로,
이곳에는 초대 교구장인 드망즈 주교를 비롯한 7명의 주교와 6명의 몬시뇰,
63명의 사제와 2명의 차부제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묘지 입구에는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이는 ”그의 운명을 돌이켜 보며 네 운명도 같다는 것을 기억하라,
어제는 그의 차례요 내일은 네 차례다.“(집회 38.22)에서 따온 라틴어이다.
이곳에서 만난 순례객 중에는 전국 성지 순례 2번을 완주하고
3번 째 하고 있다는 순례자도 만났고
할아버지, 아들, 손자 3대가 함께 순례하는 모습도 보았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외국인 순례자 중에는 10번 이상 순례하는 사람도 있었고
장애인도 많이 보았다. 순례를 하면서 성령의 이끄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 순례를 마친 사람들은 다시 순례하고싶은 마음이 드는 모양이다.
묘역내에는 큰 화강암 십자가가 보이는데 그 아래에는
“그때 하늘에서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마태 24.30)라고 적혀 있다.
묘비에는 "ICI REPOSE" 또는 "HIC JACET" 라는 말이 적혀져 있는데.
"여기에 누워 안식을 누리다"라는 뜻이다.
묘비 위의 십자가에 새겨진 'RIP" 는 "평화의 안식을 누리소서" 라는 말이다.
34. 새방골성당
대구 최초의 성당이자 대구대교구 순례지 성당
새방골은 와룡산기슭에 자리 잡은 작은 부락으로서
전설에 의하면 달성군 신당리 금호강하류에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돌풍이 불어 집이 날아와 떨어져
살고 있는 곳이 지금의 새방골이라 한다.
처음 함양조씨(1가구)가 개척하고 살았으나
임진왜란 때 왜란을 피해 진주강씨가 정착하게 되어
그로 인해 새로 집이 생겼다고 해서 새방골이라 한다.
그 후 함안조씨, 옥산전씨가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해서
경주이씨, 경주김씨 등이 모여들어 부락을 형성하고 ‘새방골’이라 칭했다.
새방골 성당은 천주교 대구대교구 소속본당으로서
프랑스 선교사 김보록(金保祿 Robert, Achille Paul, 1853~1922) 신부가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 이후 대구본당의 초대신부로
칠곡 연화리의 신나무골을 거쳐 1888년 이곳에 옴으로써 형성된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성당이다.
새방골에는 1860년부터 이재영 고스마, 그의 4촌 이권필과
아들 이규혁(족보에는 이규복)시몬이 살고 있었다.
이재영은 1868년(무진년) 병인3차 박해 때 31세의 나이로
서익순(38세; 서상돈의 삼촌)과 정 바오로(25세)와 함께
절두산 한강에 익사당하는 순교의 영광을 받은 이 공사가의 4촌이다.
이재영의 아들 이장언(1861~1934)방지거는 대구읍내 뽕나무골(대구 계산성당부근)
이방지가(절두산순교자 이 공사가의 여동생; 최정복의 외조모)의 당질(堂姪)이요
문장이 좋아 김보록 신부의 복사를 맡았다.
당시 선진국이었던 프랑스인이었던 김보록 신부는
낯선 생필품을 많이 지니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비누는
이 지방민들에게는 여간 신기한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냄새도 좋고 또 자그마한 것이 쉬 닳지도 않고
거품이 너무 쉽게 잘 이는 것을 본 신자들이 신부님께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고, 신부는 사봉(Sabón:비누/불어)이라고 대답한 이후로
이 지역에선 비누를 ‘사븐(사분)’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된 것도
바로 이곳에서 생긴 일화이다.
김보록 신부의 발자취가 서린 이곳 성당마당엔
그의 이름을 딴 ‘보록정’과 공동체형성 120주년을 기념해서 흉상을 건립했으며
또 해마다 ‘보록제’를 열어 초대신부의 유지를
계승발전 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오늘 2번째 순례지 신앙고백비에서 만난 김 루시아 부부는 천사였다.
초면인데도 오랜친구같이 친근한 모습이었는데,
당신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성지순례를 한다고 했다.
집이 새방골성지 옆이라며 새방골에서는 숙소를 제공한다고 했다.
대구에 마땅한 숙소를 정하지 못했기에 새방골 성당에서 숙박하려고
순례를 하면서 몇 번 새방골에 전화를 해도 통화가 되지않아
루시아 자매에게 연락을 하니 4시경 집에 도착해서 알아보겠다고 했다.
4시경 전화가 왔는데 현재 성당 리모델링 공사로 자재가 들어가 있어
숙소제공이 당분간 안되니 자신의 집에서 묵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우리)을 만났으니 기꺼이 당신집에 모시고 싶다고해서 고맙다고 했다.
마지막 코스로 새방골로 정하고 그곳에서 주일미사(토)를 참례했다.
신부님이 미사 전 직접 성가지도를 하시는데, 70대 이상 되신 교우들이
성가를 잘 불렀다. 템포도 빠르고 힘차게~
루시아 자매께 물어보니 신부님이 교우들에게 잘 한다고 격려하며
열정적으로 사목을 잘 이끌어 가신다고 했다.
미사 후 공지사항 시간에 우리 부부를 소개하고 박수를 받았다.
공사때문에 숙소를 제공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씀과 함께~
루시아 자매(73세)집에 가니 방에 금침 이불을 펴놓았다.
서로 피곤하니 일찍 쉬자고 하여 잠시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방에 있는 책장을 보니 온통 영성서적과 성경필사노트였다.
그분들은 우리들이 예수님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임마누엘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아내의 말이 '그 동안 코로나라는 핑계로 우리집에 손님 잠자리 제공에 인색했는데
앞으로는 루시아부부처럼 기꺼이 제공해야겠다' 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방문 앞에 사과 20여개와 간식으로 먹으라고 떡을 싸 놓으셨다.
모범적인 신앙인 아니 천사를 만난 날이다.
책장 빈 공간에 5만원을 넣은 봉투와 감사의 편지를 남겼다.
2시간 후 순례중 전화가 왔다.
당신들은 지나가는 천사들을 모신 것인데 받을 수 없다며 돌려줄테니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강력히 요청하셨다.
정 그러시면 성당 리모델링하는데 쓰시라고 했더니
우리들 이름으로 봉헌하겠다고 하셨다.
제주에 도착해 밀감을 1상자를 보내드렸는데
맛있다고 하시며 감사의 표시로 순례책자를 보내주셨다.
새 책을 구입하여 보내려고 했는데 책방에 책이 없어서
당신이 보시던 책(견출지가 붙어있음)을 보내셨다.
정말 천사같은 분으로서 이웃 사랑이 넘치는 분이다.
김수환 추기경 생가에서는 신부님으로부터 책 선물도 받고,
신나무골 성지에서 점심을 먹는 중에는
신앙체험수기 소망상을 받게되었다는 연락을 교구청으로부터 받았다.
산티아고 순례 31일 여정 중에도 수 많은 천사들을 만난 기억이 있다.
특히 천사 개(엔젤)의 길 안내를 받은 일까지~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항상 도움을 받고, 또 주기도 하면서
길고 힘든 순례길을 걸었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
분주한 순례길이었지만 단풍길과 억새꽃을 즐기며
천사들을 만난 은총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