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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학교 장년교과 보충교재(예언의 신 인용구들)
“내 생애가 언제 끝나든 상관없이, 내 저술들은 끊임없이 말할 것이며, 그것들의 역할은 세월이 지속되는 한 계속될 것이다. …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말씀들은 계속 살아서 백성들에게 말할 것이다.”(편지 371, 1907)
(1) 이 자료는 대총회 안교부가 매기마다 안교 장년교과와 함께 매일의 공부 내용과 연결하여 새로운 통찰력과 신선한 관점을 얻도록 돕기 위해 관련 예언의 신 구절들을 모은 보충교재(Ellen G. White Notes for the Sabbath School Lessons)를 한글판으로 바꾼 것입니다. (한글번역본이 없는 경우는 게시자가 번역함)
(2) [활용방법] 매일의 교과를 공부한 후, 그날에 해당하는 부분을 연결하여 묵상하면 큰 유익이 됩니다.
<2026년 제2기 – 하나님과 함께 자라가는 삶>
예언의 신 인용구들 제6과 기도의 용사들
<5월 2일/안, 서론>
◎ 하나님께서는 천연계와 계시(성경)을 통하여 그분의 섭리와 성령의 감화로써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것들만으로는 넉넉지 않으니, 우리는 우리의 심정을 그의 앞에 토로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영적 생명과 힘을 얻기 위하여 우리의 하늘 아버지와 실제적 교제가 있어야 한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그분을 사모하기도 하고 그분의 업적과 그분의 자비와 그분의 축복에 대하여 묵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려면 우리의 실생활에 대하여 그분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마치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그 심정을 펴놓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어떠하다는 것을 하나님께 알리기 위함이 아니요,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내려오시게 함이 아니요, 우리가 그분에게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그분의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분은 저희의 매일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고 저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에게 맡겨 버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제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하신 그분의 보증은 또한 우리에 대한 보증도 된다.
예수님 자신도 사람들 사이에 거하실 때 자주 기도하셨다. 우리 구주께서는 그분의 의무와 시련을 위하여 굳세게 나아갈 수 있도록 그분의 아버지께 새로운 능력의 공급을 구한 탄원자와 간구자가 되신 사실은 그분도 역시 우리와 같이 궁핍하고 연약하였던 것을 증거한다. 그분은 범사에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연약한 한 형제로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히 4:15)는 자시니 그분의 품성이 악을 물리치셨다. 그분은 죄악 세상에서 심령의 투쟁과 고민을 당하셨다. 그분의 인성은 그분에게 기도가 필요하게 하고 기도가 특권이 되게 하였다. 그분은 그분의 아버지와 교통하는 가운데서 위안과 기쁨을 얻으셨다. 인류의 구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도 기도의 필요를 느끼셨은즉 하물며 연약하고 죄가 많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은 더욱 열심히 항상 기도할 필요를 느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풍성한 복을 우리에게 주려고 기다리신다. 무한한 사랑의 샘에서 마음껏 마시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우리가 기도를 그렇듯 적게 하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 중에 아무리 비천한 자라도 진정으로 하는 기도를 들으시려고 고대하시고 기뻐하시지만,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고하기를 매우 싫어한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사랑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그리워하시고 저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주려고 하시지만 그들이 그렇듯 기도를 적게 하고, 그렇듯 믿음이 적으니 이것을 볼 때에 하늘의 천사들이 시험에 빠지기 쉬운 불쌍하고 무능력한 인간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천사들은 하나님 앞에 경배하기를 좋아하며 그분에게 가까이 있기를 좋아한다. 저들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을 저희의 최고 기쁨으로 여긴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도움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 세상의 자녀들은 성령의 빛과 그분과 교제함이 없이 행하기를 만족히 여기는 듯하다. (정로, 93-94)
<5월 3일/일, 신실한 다니엘>
◎ 다니엘의 원수들은 이제 여호와의 종을 해하기 위하여 완벽하게 파 놓은 함정에 대하여 기뻐하면서 다리오왕의 어전을 떠났다. 이 같은 음모를 꾸미는데 사단이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선지자는 그 나라를 다스리는 높은 지위에 있었으므로 사단은 다니엘의 감화력이 지도층을 주관하는 자기의 지배권을 약화시키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방백들을 충동하여 시기하고 질투하게 한 사람들은 사단의 대리자들이었고 다니엘을 멸할 계획을 하도록 작용한 자들도 그들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악의 도구가 된 방백들이 이 계획을 실천하였다.
선지자의 원수들은 다니엘이 확고부동하게 원칙을 고수하는 일이야말로 그들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다는 보증으로 여겼다. 그들은 다니엘의 품성을 평가함에서 실수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금령을 만드는 그들의 악의에 찬 의도를 알았으나 조금도 그의 행동을 바꾸지 않았다. 그에게 기도가 가장 필요한 지금 왜 그가 기도하기를 멈출 것인가? 차라리 그는 생명 그 자체를 버릴지언정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그의 소망을 버리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방백들의 수령으로서 의무를 수행하였고 기도의 시간에는 그의 방에 들어가 평상시의 규례를 따라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문에서 하늘의 하나님께 그 소원을 아뢰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하나님께 충성함으로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를 멸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자들 앞에서 그는 하늘과 자기의 관계가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행위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왕이 명하는 모든 사항에 대해서 그는 기꺼이 순종할 것이었다. 그러나 왕도 그의 금령도 그를 만왕의 왕께 대한 충성의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이 선지자는 담대하면서도 침착하고 겸손하게 어떠한 세상의 권력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선언하였다. 우상 숭배자들에게 둘러싸인 다니엘은 이 진리에 대한 충성스러운 증인이었다. 의에 대한 다니엘의 굴하지 않는 집착은 그 이교 궁정의 도덕적 흑암 가운데 빛나는 밝은 빛이었다. 다니엘은 그리스도인의 담대함과 성실함의 가치 있는 모본으로 오늘날 세상 앞에 서 있다.
방백들은 하루 종일 다니엘을 감시하였다. 세 번 그들은 다니엘이 그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세 번 그가 음성을 높여 하나님께 열렬히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왕의 앞에 그를 송사하였다. 왕이 가장 존경하는 충성스러운 정치가 다니엘이 왕의 금령을 무시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왕에게 “왕이여 왕이 이미 금령에 어인을 찍어서 이제부터 삼십 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넣기로 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강조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이 일이 적실하니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대로 된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왕이 가장 신임하는 고문의 행동을 다리오에게 고하였다. 그들은 “왕이여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 그 다니엘이 왕과 왕의 어인이 찍힌 금령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하루 세번씩 기도하나이다”라고 무고하였다. …
다니엘이 구원받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시련과 우울한 때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장래가 희망으로 빛나고 저희가 처한 환경이 소원하던 대로 되었을 때와 똑같아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사자 굴 속의 다니엘은 그 나라 대신들의 수령으로서 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지자로서, 왕 앞에 섰던 동일한 다니엘이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최대 시련의 때도 하나님과 사람의 빛과 은총이 그에게 비추던 번영의 때와 똑같을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도달하여 영원한 실체를 붙잡는다.
하늘은 의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가깝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충성스러운 백성의 이해관계를 그분의 것과 동일시하시고 몸소 그분의 성도들의 고통에 동참하시므로 누구든지 그분의 택하신 사람들을 해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해하는 것이다. 육체적 해와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가까이 있는 그 능력은 또한 더욱 큰 해에서도 구원하기 위하여 가까이 있으며 하나님의 종이 모든 환경 아래서도 성실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승리할 수 있게 한다. (선지자, 540-543, 545)
<5월 4일/월, 기도의 자세>
◎ 허락은 광범하고 무한하며 허락하신 이는 미쁘시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우리가 구하는 바로 그때 받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잘못이 너무 많고 앞에 것을 잘 보지 못함으로 어떤 때에는 우리에게 복이 되지 못하는 것을 구한다. 그래서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우리가 영적으로 밝아진 눈을 가지고 그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볼 수 있다면 우리 자신도 원하게 될 것-을 주심으로 우리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 우리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듯한 때라도 우리는 그 허락을 굳게 붙잡아야 할 것이니 대개 응답의 시기가 확실히 오게 되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꼭 그 방식으로 응답되고 또한 우리가 원하는 꼭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지혜로우시므로 잘못하실 리가 없고, 지극히 선하심으로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실 것이다. 그런즉 비록 기도가 즉시 응답되지 않을지라도 그분을 의지하기를 의심하지 말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그분의 확실한 허락을 믿으라.
우리가 믿음을 가지기 전에 우리의 의심과 두려움에 붙잡혀 우리가 밝히 알 수 없는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면 의혹이 더욱 커지고 깊어질 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무력한 그대로 의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겸비하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무한한 지식을 가지신,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창조하신 만물을 그분의 뜻과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분에게 우리의 소원을 고하면 그분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실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기도로 말미암아 무한하신 분의 마음과 연락된다. 비록 기도하는 그 당시에는 우리 구주의 얼굴이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를 보고 계시는 현저한 증거는 볼 수 없을지라도 그분이 그렇게 보시는 것은 사실이다. 비록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만지시는 것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그분의 손은 사랑과 긍휼로서 우리를 안찰하신다. (정로, 96-97)
◎ 우리는 가정 안에서 기도할 것이요 무엇보다도 은밀한 기도를 등한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니 대개 그것이 심령의 생명인 까닭이다. 기도를 등한히 하면서 영혼이 번영할 수는 없다. 가족 기도와 공중 기도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홀로 조용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앞에 우리의 심령을 내어 놓을 것이다. 은밀한 기도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만이 들으셔야 한다. 호기심을 가진 자의 귀는 이러한 기도의 호소를 들을 것이 없는 것이다. 은밀한 기도는 심령이 주위의 영향과 소란으로 방해받지 않는다. 그 심령은 차분하면서도 간절하게 하나님을 향해 손을 뻗을 것이다. 은밀한 것을 보시고 중심에서 나오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에게서 나오는 그 감화는 쾌하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침착하고 단순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은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며 또 사단과의 투쟁에서 자신의 심령을 강하게 하고 붙들고 나아가기 위하여 신령한 빛을 수집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의 요새이시다.
그대는 골방에서 기도할 것이요 그대가 매일의 업무를 행할 때도 그대의 마음을 자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도 이렇게 함으로 된 것이다. 이렇게 하는 묵상 기도는 좋은 향내와 같이 은혜의 보좌 앞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 심지가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는 자는 사단도 능히 정복할 수 없다.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기에 부적당한 시간이나 장소는 없다. 아무것도 우리의 마음을 열성 있는 기도의 정신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거리의 사람이 많은 곳에서나 일에 종사하고 있는 중에라도 우리는 옛날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왕 앞에 자기의 소원을 아뢴 것처럼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분의 지도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마음 문을 열어놓고 예수께서 하늘의 손님으로 우리 마음에 들어와 계시기를 초청해야 할 것이다. (정로, 98-99)
<5월 5일/화, 주와 동행하며 대화한 에녹>
◎ 에녹은 사랑받은 제자 요한처럼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대표자였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에 세상에 있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기별이 위탁되었다. “아담의 칠세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 한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유 14~15). 에녹이 전파한 기별과 그의 승천은 에녹의 시대에 살던 모든 사람에게 설득력 있는 논증이었다. 이것들은 므두셀라와 노아가 의인들이 하늘로 옮겨질 것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논증이었다.
에녹과 동행한 하나님은 우리의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분은 오늘날처럼 그 당시에도 세상의 빛이셨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칠 교사들은 없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인인 노아와 에녹이 있었다. 복음은 레위기의 규례들 가운데 주어져 있다. 그때처럼 오늘날도 무조건적인 순종이 요구된다. 우리가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세상에는 오로지 두부류—순종하는 자와 불순종 하는 자—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활동으로 말미암아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변장하신 채로 끊임없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명심할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나는 너를 돕기 위해 그대의 오른편에 서 있다” 우리는 죄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해 주는 그분의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아무도 그들의 의사에 반하여 강요할 수 없지만, 그들을 납득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갖고 계신다. (승리하시는 그리스도, 63)
◎ 성경은 에녹이 65세에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이후로 그는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 이전의 세월 동안에도 에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켰다. … 그러나 그의 첫 아들이 태어난 이후에 에녹은 더 높은 경험에 도달했다. 그는 하나님과 더욱 밀접한 교제를 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충분히 깨달았다. …
우리에게 에녹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 그의 주변에 너무도 편만해 있던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그의 빛은 저 타락한 시대로 비춰나갔다. 에녹이 그 당시 부패의 와중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면 왜 오늘날 남녀들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단 말인가?
우리 중 많은 사람이 다소 이런 경험을 안다. 우리는 슬픔과 질고 가운데서 우리가 매우 연약하다는 것을 알지만, 또한 예수님이 바로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체휼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실 것을 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이신 분과 교통할 수 있다. 그분은 바로 우리 곁에 계신다. 우리는 그분이 내려 오시도록 하기 위해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돕기 위해 바로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하늘 혹은 하늘의 사물들에 대하여 궤념치 않는 사람들과 함께 거리를 걸어갈 때,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바라보는 것보다 더 귀중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다. 그분은 이 시대의 도덕적 흑암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역경들과 세상의 사악함에 대해서 그분께 말씀드릴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 중 그 어떤 것에도 우리는 방해를 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과 대화할 수 있다. 우리는 에녹이 하나님과 대화했듯이 예수님과 대화할 수 있다. 그는 그가 당하는 모든 시련을 주님께 말씀드릴 수 있었다. …
에녹은 의로운 품성을 형성했고 그 결과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다. 주님께서 두 번째 오실 때에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 중에 들게 될지 알고 싶어한다. 우리는 시련이나 어려움 없이 걸어갈 깨끗한 길을 만들려고 노력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바른 관계에 둠으로써 그리고 그분께서 그 결과들을 처리하시도록 맡겨드림으로써, 우리가 전적으로 주님 편에 서 있는지, 정욕으로 인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이 되고 있는지 알기 원한다. (승리하시는 그리스도, 42)
<5월 6일/수, 경건한 지도자 모세>
◎ 히브리 사람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그분의 음성을 청종하겠다고 엄숙한 언약을 세운 지 며칠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산 앞에서 공포에 질려 떨면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라고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 아직도 하나님의 영광은 회중이 볼 수 있는 시내산 꼭대기에 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서 다른 신들을 구했다. “저희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숭배하여 자기 영광을 …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시 106:19~20). 자기 자신을 친절하신 아버지와 전능하신 왕으로 나타내신 그분께 대하여 어떻게 이보다 더 큰 배은망덕을 보일 수 있겠으며 이보다 더 대담한 모독을 돌릴 수 있겠는가!
산에 있던 모세는 진영에서 일어난 배도에 관한 경고와 지체 없이 하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였다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초기에 그러한 움직임을 제지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 일이 최고 절정에 달하도록 묵인하신 이유는 반역과 배도로 받을 형벌 가운데서 한 가지 교훈을 만민에게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세우신 그분의 언약이 무효가 되었으므로 그분은 모세에게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특별히 섞인 무리가 걸핏하면 하나님께 대해 반역하였다. 그들은 또한 그들의 지도자에 대하여 불평하고 그들의 불신과 고집으로 그를 슬프게 하기 일쑤였다.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은 몹시 힘이 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었다. 그들의 죄는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아 갔으며 공의는 그들의 멸망을 요구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망시키고 그 대신 모세로 하여금 큰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고 제의하셨다.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하시기로 뜻을 정하셨다면 누가 그들을 위하여 간구할 수 있겠는가? 죄인들이 그들이 당할 운명에 빠지도록 버려두지 않을 자들은 얼마나 적은가!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만을 구원해 주시겠다고 제안하실 때, 안락하고 명예로운 지위를, 망은과 불평만을 보답으로 받게 될 많은 수고와 부담과 희생의 운명과 기꺼이 맞바꾸려고 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모세는 좌절과 진노밖에는 나타나지 않은 곳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아냈다. 그는 “나대로 하게 하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금지하는 뜻이 아니요 중재하도록 격려하는 말이며 자기의 기도밖에는 아무것도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다는 암시로서, 만일 그와 같이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용서하시리라는 뜻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하였다. (부조, 317-318)
<5월 7일/목, 모세가 백성을 위해 중보하다>
◎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십계명이 주어질 때 그것을 들었고 그 후에 우상숭배에 빠졌으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셨다. 그분은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10)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광야에서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을 배운 그 사람, 한 양을 죽도록 버려두기보다는 추위와 폭풍을 무릅썼던 사람은 그의 보호 아래 맡겨진 백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께 그들을 포기하지 마시고 그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간청했다. …
모세는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출 33:15)라고 선언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의 좌우명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오 나의 지도자이시다’였다. 그는 다른 나라의 왕처럼 어떤 존숭도 받지 않았다. 거듭거듭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금의 그는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 덕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이 승리를 거둔 온갖 전쟁에서 그 승리의 영예를 자신들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을 위해 이기게 하신 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리라”(출 33:14)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이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이 만족했으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탄원을 거듭했다. 그는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라고 말했다. 모세가 주제넘다고 견책을 받았는가? … 그분께서는 이 능한 믿음의 사람을 취하셔서 바위틈에 두시고 그에게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
모세가 백성에게 돌아왔을 때 그들은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이는 그가 하나님과 대화했었고 그의 얼굴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났”(출 34:29)다. 백성과 이야기할 때, 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거만하고, 주제넘고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닌 겸손하고 신실한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능한 자이다.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이 개인적인 경험을 얻기 바라신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올수록, 그분의 사랑스러우심과 생애를 그들이 더욱 가까운 곳에서 바라볼수록 자신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점점 더 겸손해질 것이다. 자아에 대한 평가가 낮으면 낮을수록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더욱더 또렷해질 것이다. 사람들이 성화되었다고, 거룩하다고 주장할 때 이 주장보다 더 명확하게 그들이 거룩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는 없다. (승리하시는 그리스도, 116)
<5월 8일/금, 더 깊은 연구>
◎ “에녹이 어떻게 동행했는가?” (승리하시는 그리스도, 43).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눈이 뜨일 수만 있다면, 그대는 심령에 감명을 끼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선한 천사들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롭게도 우리에게 보내신 그 진리의 기별을 효력 없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악한 천사들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세상의 부패로부터 우리를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 하나님께 끊임없이 간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안전하지 않다. 우리 구주께서는 이 마지막 날의 형편이 어떠할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 불법이 성할 것이나 성령 하나님의 감화에 마음을 여는 영혼들은 이 타락한 시대의 부패를 견디어 낼 힘을 얻을 것이다.
에녹은 하늘로 옮겨지기 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그리스도인 품성을 온전케 하는 데 그 당시 세상의 형편은 오늘날보다 유리하지 않았다.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했는가? 그는 그가 하나님의 면전에 있다는 것을 항상 느끼도록 그의 마음과 심령을 훈련했으며, 낭패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그를 지켜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할 어떤 길도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는 “주님의 길을 가르치사 저로 실수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께서 제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요? 나의 하나님, 주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기도하곤 했다. …
우리는 다윗과 함께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라고 기도하길 원한다. 많은 사람은 진실을 보지 않으려고 그들의 눈을 감는다. 그들은 그들의 생애와 품성의 결점들을 보기를 원하지 않으며, 그대가 하나님의 율법에 관하여 언급하면 그들은 불편해한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자신들만의 인간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들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그대가 하나님 율법의 첫 번째 큰 대적인 사단에게 기만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그분께서 우리를 판단하실 유일한 표준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
태초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죄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거의 말살시켰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산 모본을 주시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여호와의 길을 지킬지를 알려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형상이셨다. 아름답고 흠 없는 그분의 품성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본으로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연구하고 모방하고 따라야만 하며,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분의 사랑스러우심과 아름다움을 우리의 품성 가운데로 들여올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어둠의 세력과의 싸움을 통해 아담이 잃어버린 자제력과 하나님의 사랑을 되찾게 된다.
◎ “에녹의 믿음은 언제나 분명했다” (승리하시는 그리스도, 48).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유 14).
에녹은 하나님의 활동적인 일꾼이었다. 그는 안락과 편안을 찾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한가하게 명상하거나 자신의 행복을 얻고자 노력하는데 쓰지도 않았다. 그는 홍수 이전 시대의 쾌락을 좇는 이들이 끊임없이 열중하던 축제와 오락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가 살던 시대에 많은 사람의 마음은 세속적인 쾌락들, 탈선하도록 그들을 유혹하는 쾌락들에 온통 빠져 있었다. 그러나 에녹은 대단히 진지했다. 그는 세속적인 사람처럼 한가하게 거리를 배회하거나 오락의 장소 근처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타락한 사람들과 결코 평범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으라고 경고하는 기별자로 설 때를 제외하고는 죄인들과 행악자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에녹은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자아희생의 생애를 살았다. 그는 너무나 타락하여 후일 주님께서 홍수로 멸망시키신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는 불경건한 자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걸었으나, 그들 중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목적과 사업과 소망이 단지 이 세상에만 머물지 않고 영원을 향해 있는 사람으로서 그들과 함께 했다. 그는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들이 그의 고백과 신앙에 의문을 품을 만한 어떤 이유도 주지 않았다. 진지한 말과 결정적인 행동으로 그는 자신이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한 동안 은둔한 후에 그는 불경건한 자들과 섞이면서 그들에게 악을 멀리하고 선을 선택하도록 권면하곤 했다. 하나님을 위해 신실히 일한 일꾼으로서 그는 그들을 구원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세상에 경고했다. 그는 죄인들의 구주요, 죄인들의 유일한 희망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선포했다.
에녹은 재림교인이었다. 그는 백성의 마음을, 그리스도께서 각인의 일을 심판하시러 두 번째 오실 때인 하나님의 큰 날을 바라보도록 이끌었다. …
에녹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우리의 의지를 그분의 의지에 굴복시켜야 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기꺼이 가고, 그분을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버리신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난관들을 정복하고,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흠 없이 지키는 일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진실되다는 것을 드러낸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편안한 자리, 가장 가벼운 짐을 찾지 않는다. 그들은 가장 일하기 어려운 곳, 그들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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