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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레위기 제4강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말씀 / 레위기 4:1-6:7, 6:24-7:10
요절 / 레위기 4:31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것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은 무엇일까요? 가난도 질병도 실패도 무거운 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거운 짐은 바로 죄의 짐입니다. 죄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죄를 짓게 되면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죄로 인해 괴롭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깨뜨리고 나와 이웃과의 관계도 무너뜨립니다. 인간의 죄는 단순히 개인의 마음속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공동체의 거룩함까지 훼손합니다. 그렇다면 죄를 지은 우리 인간에게 희망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물론 인간은 죄로 인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들을 심판하기 전에 먼저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속죄제와 속건제입니다. 이 두 제사는 앞서 살펴본 번제, 소제, 화목제와는 달리 죄를 범하고 깨닫게 되었을 때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적인 제사였습니다. 이 제사들은 단순히 죄인의 죄책감을 없애 주는 제사가 아닙니다. 죄로 인해 손상된 거룩한 질서를 회복하고 죄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누리고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하도록 하는 제사입니다. 우리는 속죄제와 속건제를 통해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됨과 동시에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느끼게 됩니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의 죄보다 크신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의 허물보다 깊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누리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4장 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여기 ‘그릇 범했다’라는 말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경우를 말합니다. 무심코 실수로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죄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잘 몰라서 그런 경우라 할지라도 성경은 죄가 아닌 것으로 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을 고의로 대적하는 경우와 부지 중에 범한 죄를 똑같은 책임을 지우고 똑같이 다루진 않습니다. 그러나 죄는 죄이기에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잘 몰라서 또는 의도하지 않게 죄를 지었을 경우라도 깨닫게 되면 자신에게 죄 없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겸손히 무릎 꿇고 잘못을 시인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몰라서 그랬다고 해서 죄의 결과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운전자가 실수로 신호를 위반해 사고를 냈습니다. 운전자는 사람을 다치게 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다쳤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임을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민감하게 깨닫고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을 수 있는데 이를 인식하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에는 죄를 깨닫게 되는 여러 사람의 경우가 나옵니다. 3절에 보면 제사장, 13절에 보면 온 회중, 22절에 보면 족장, 27절에 보면 평민이 나옵니다. 이 경우 모두 죄를 지은 후 다른 사람이나 어떤 상황을 통해서이든 또는 개인의 양심을 통해서이든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된 경우입니다. 사실 죄를 깨닫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자기방어 기질이 나옵니다. 그러나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고 회개하지 않으면 죄에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될 수밖에 없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관계의 악순환 속에 고통당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깊이 깨닫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깨닫고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용서와 회복의 길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속죄제와 속건제를 살펴보면서 몇 가지 핵심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죄인의 책임이 클수록 속죄의 절차도 엄중했습니다. 제물과 절차가 달랐습니다. 제사장이 죄를 지었을 때는 흠 없는 수송아지를 드립니다.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때도 수송아지를 드립니다. 족장이 죄를 지었을 때는 숫염소를 드리고 평민은 암염소나 암양을 드립니다. 또 피를 바르거나 뿌리는 데 있어서도 달랐습니다. 제사장이나 온 회중의 죄를 위한 속죄제에서는 피를 성소 휘장 앞에 뿌리고 분향단의 뿔에 바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족장이나 평민을 위한 속죄제에서는 제단의 뿔에 피를 바르고 나머지 피는 제단 밑에 쏟았습니다. 여기서 보면 제사장과 온 회중의 속죄제는 족장이나 평민의 속죄제보다 제물뿐만 아니라 더 엄중한 피 의식이 요구됩니다. 특히 제사장이 죄를 지으면 흠 없는 수송아지를 드려야 했고 성소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분향단 뿔에 발라야 했습니다. 왜 이렇게 구별했을까요? 4장 3절을 보십시오.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드릴지니” 이 말씀에서 보면 제사장의 범죄가 일반 백성에게 죄를 짓게 함을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집례하는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죄는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맡기신 책임이 클수록 그 책임에 대한 영적 경각심도 커야 합니다. 목회자와 성경 선생, 교회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면 공동체도 말씀을 가볍게 여기기 쉽습니다. 영적 지도자가 자신의 죄에 대해 무뎌지면 다른 사람들도 죄에 대해 무뎌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가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보고 겸손히 회개하면 다른 사람들도 겸손과 회개와 순종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많이 알고 가르친다고 해서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수록 더욱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책임 맡은 자로서 레위기 말씀이 크게 도전되고 경각심을 가지게 합니다. 제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기에 앞서 늘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고 자신을 먼저 가르치기에 힘써야겠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두 딸에게 한마디 가르치면 ‘아빠는 그렇게 안 하잖아’ 이런 말이 돌아올 때마다 뜨끔하고 ‘나 자신을 먼저 가르쳐야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목자로서 부모로서 말씀을 맡아 양들에게 가르치는 성경 선생으로서 죄에 대해 누구보다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고 누구보다 무겁게 자신의 죄를 다루고 깊이 회개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자녀이든 양들이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면 먼저 우리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앞에서 자신을 먼저 가르치고 자신을 먼저 살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속죄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한 속죄의 은혜를 기억하게 합니다. 4장 29절을 보십시오. “그 속죄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제물을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요” 제사장이 죄를 범해 속죄제를 드릴 때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합니다. 온 회중이 범죄 했을 때는 회중의 장로들이 제물로 드리는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합니다. 족장이 범죄 했을 때는 제물로 드리는 숫염소 머리에 안수합니다. 일반 평민들이 속죄제를 드릴 때는 속죄 제물로 드리는 암염소나 암양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그리고 제물을 잡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제물이 죽어가는 것을 봅니다. 자신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생명이 희생되는 엄숙한 광경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깨닫게 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속죄제를 드릴 때 제사 드리는 사람은 어떤 은혜를 입게 됩니까? 4장 31절을 보십시오.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것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먼저 속죄 제물의 기름은 모든 경우에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속죄 제물의 기름을 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피의 절차와 기름을 제단 위에서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과정을 통해 제사장이 속죄 제사 드리는 사람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 사람이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4장을 보면 20,26,31,35절에 계속해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라는 말씀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여기서 ‘사함을 받으리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살라흐’인데 구약 성경에서 이 동사는 특별히 하나님의 용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사람은 제물을 드리고 제사장은 속죄 의식을 집례하지만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제물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제사장에게 독립적으로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방식대로 속죄제를 드릴 때 그의 죄를 사해주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얼마나 큰 감사요 은혜입니까? 죄 사함을 받지 못할 때 그 영혼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파괴된 관계 속에서 오염되고 더럽고 추한 상태로 죄 가운데서 고통당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영원한 멸망과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죄인들에게 속죄제를 통해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크고 감사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죄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이라는 자기 인식과 더불어 죄인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 속죄제의 궁극적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구약시대 속죄제는 반복해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었음을 인식할 때마다 가축을 잡고 제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단번에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2절은 말씀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구약의 제사는 반복되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단번에 이루어진 영원하고도 완전한 제사입니다. 구약의 제단에서는 죄인을 위해 짐승이 죽었지만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는 죄인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동시에 죄인들을 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할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담당하셨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4장 11,12절을 보십시오. “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것의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사르되” 이것은 제사장을 위한 속죄 제사를 드릴 때의 특징입니다. 온 회중을 위한 속죄제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름은 제단에서 하나님께 태워드리고 나머지 제물 전체는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으로 가져가 불살라야 합니다. 여기 진영 바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골고다 언덕을 생각나게 합니다. 속죄 제물이 진영 바깥으로 나가 완전히 불살라져 처리되는 건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연결됩니다. 히브리서 13장 11,12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레위기의 속제 제물을 예수님과 매칭시킵니다. 속죄 제물이 진영 바깥으로 나가 모두 태워지는 것처럼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문 밖 해골이라 일컬어지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추한 죄가 다 태워지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속죄 제물의 피가 속죄를 이룬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정결하게 하고 속죄를 이루어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죄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값진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예수님의 속죄는 충분합니다. 우리는 죄가 없는 완벽한 사람이니까 성실한 사람이니까 깨끗한 사람이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 충분히 속죄를 이루어 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속죄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속죄의 은혜가 소나 염소나 양을 드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레위기 5장에서 특별히 감동적인 부분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규정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차상위 계층이나 기초생활수급자들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5장 7절을 보면 어린 양을 속죄 제물로 드릴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은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속죄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드릴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5장 11절을 보면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속죄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약 2.2리터의 곡식 가루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가난한 사람에게도 속죄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경제적 형편에 따라 제물을 달리 드리도록 하는 규정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께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물의 가격보다 죄인이 속죄의 길로 나아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물론 속죄제는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대로 드려야 했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속죄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도 속죄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그런데 고운 가루는 피가 없는 속죄 제물입니다. 속죄제는 피를 통한 제사인데 왜 고운 가루로 드리는 속죄제도 허락하셨을까요? 이 사실은 속죄의 효력이 단순히 피라는 물질 자체에서 자동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시고 받아주시는 속죄의 방법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만 이것이 피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속죄제는 피 의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곡식 속죄제는 특별히 가난한 사람을 위한 예외적 규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제적 능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실패한 사람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더 죄인인 사람과 덜 죄인인 사람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일 뿐입니다.
넷째, 죄 사함의 은혜는 진정한 회개와 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5장 1-4절에 보면 구체적인 죄의 사례가 나옵니다. 증언해야 할 사실을 알고도 증언하지 않은 죄, 부정한 것에 접촉하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가 나중에 알게 되는 경우, 경솔하게 맹세한 죄 등을 언급합니다. 그런데 이런 죄를 깨달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5장 5절을 보십시오.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속죄제가 단순히 제물을 드리는 행위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고 고백해야 했습니다. 죄의 고백이 왜 중요할까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변명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잘못했습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참된 회개가 시작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지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도록 도우십니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술로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이상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려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단순히 나쁜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섯째, 참된 회개는 행동으로 뒷받침됩니다. 속죄제가 죄로 더럽혀진 사람과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받는 문제를 강조한다면 속건제는 하나님께 범한 잘못이나 이웃에게 끼친 손해에 대한 책임과 배상을 강조합니다. 5장 15,16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 잘못을 범한 사람은 흠 없는 숫양을 속건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또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손해를 보상하고 그 가치에 오분의 일을 더해 갚아야 합니다. 6장 2–5절에서는 이웃이 맡긴 물건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는 경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잘못을 범한 사람이 단지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훔치거나 속여 얻은 물건을 돌려주며 본래 물건의 가치에 오분의 일을 더해 배상하도록 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배상과 책임을 강조하실까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만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삶에도 실제적인 상처와 손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회개는 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책임을 감당하고 깨진 관계와 손해를 회복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고 해서 내가 저지른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이웃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회개는 실제적인 삶의 변화와 책임 있는 행동 그리고 이웃을 향한 존중과 관계 회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여섯째,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속건제물이 되십니다. 이사야 53장 10a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우리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주셨고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대신 담당해 주셨습니다. 구약시대 속건 제물은 흠 없는 숫양으로 바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흠 없는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징계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고대에 엄청난 빚을 다 갚아 빚 문서가 제로가 되게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속건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내가 이러 이러한 일에 잘못하였노라!” 인정하고 자복하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고 빚이 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죄를 인식하고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깊이 자복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임을 인식하고 회개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통한 완전한 속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원한 속죄 제물, 속건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회개는 이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삶의 변화와 책임 있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이제는 감사와 사랑으로 주님을 예배하고 동역자들과 양들과 이웃과 내가 속한 공동체를 섬기는 우리의 일상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