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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의 대표 음식 중 하나 - 되네르 케밥, 느끼하지 않고 고소하면서 굉장히 맛있습니다.
위의 양고기 덩어리는 독특한 양념을 한 것인데(음식점마다 약간씩 다름) 기다란 숯불(요
즘은 주로 전기 히터)옆에서 빙빙 돌면서 기름이 빠져내려 갑니다. 긴칼로 갈색으로 변한 껍
데기를 썰어서 따로 접시에다 서빙하기도 하고 터키빵(에크맥) 가운데를 쪼개서 넣고 양파,
토마토,피클 등을 버무려서 햄버거처럼 먹기도 합니다. 맥주 한잔과 이거 하나면 점심 한끼는 든든하지요.
[ 이스탄불의 명소, 히포드롬 ]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 블루 모스크 등 동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유적들이 즐비한 구시가지 한가운데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히포드롬 광장이 있습니다.
* 이스탄불의 히포드롬 광장
히포드롬은 고대 그리스어 히포드로모스를 영어식으로 읽은 것입니다. 히포드로모스란 히포스(말)와 드로모스(길 혹은 경주)를 합친 말, 즉 경마장을 말합니다. 전차 경주도 했으므로 고대의 레이싱 트랙이라 할 수 있고, 전차경기장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로마에서는 키르쿠스(Circus)라고 불렀고, 이는 영어단어 서커스의 기원이 됩니다.
자고로 경주가 스펙터클하고 스케일이 크려면 경기장도 그만큼 크고 아름다워야 했습니다. 이런 대규모 경기장들에서는 말이나 전차경주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구경거리나 행사들이 치러졌습니다. 그래서 근대 이후에도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 극장, 스타디움, 레이싱 트랙, 경마장 따위에 히포드롬이라는 이름을 붙인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 히포드롬 상상도
이스탄불의 히포드롬은 현재 정식 명칭이 ‘술탄 아흐메트 광장’인데, 서기 203년에 처음 건설되었고, 로마제국의 수도가 이곳 콘스탄티노플아런 이름으로 옮겨오면서 확장되었습니다. 지금은 좁아졌지만 당시에는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습니다. 관중들의 응원열기가 너무 거세 간혹 폭동으로 번지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광적인 축구팬인 홀리건의 원조인 셈입니다.
히포드롬은 시민들이 모여 경기도 보고 정보도 나누었습니다. 또한 이곳은 정치적 의사를 표시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경기를 관람하러 나온 황제에게 시민들이 함성이나 야유로 지지나 반대의사를 표했고, 이곳에서의 시위로 물러난 황제도 있었습니다. 서기 532년의 ‘니카 반란’시에는 3만 명의 시민이 잔혹하게 학살되기도 했습니다.
히포드롬 광장은 오스만제국 시대에도 정치 1번지였습니다. 시민들이 소통하는 곳이었고, 반란군의 소집 장소였습니다. 1826년 6월에는 술탄에게 맞선 예니체리 반란군이 이곳에서 전멸 당했고, 1909년에는 군인들이 이곳에서 시위를 일으켰습니다. 이곳은 2천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시민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호흡한 해방구이자 수많은 반란군의 무덤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이스탄불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으로 변신한 히포드롬 광장에서는 유서 깊은 기둥 3개를 볼 수 있습니다. 광장 북쪽에 있는 기둥은 이집트 카르나크 아몬 신전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집트 오벨리스크’라고 불리웁니다. 광장 북쪽 끝에는 19세기 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오스만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에게 선물한 분수대가 있습니다.
오리엔탈 특급 열차로 이스탄불까지 운반되었다고 합니다.광장 한가운데는 큰 뱀들이 서로 엉켜 있는 청동 기둥이 서 있습니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그리스인들이 제작한 전승기념비입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서 뜯어다가 가져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 청동 기둥
* 니카 반란
비잔틴 제국(동로마제국)이 다스리던 당시 서기 532년 1월, 수만 명의 시민이 소피아성당 건너편 히포드롬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주먹을 하늘로 치켜들며 “니카! 니카!”를 외쳤습니다. “이겨라! 이겨라!”라는 함성이었습니다. 시민들을 열광케 했던 전차 경기와 검투사 대결의 함성이 어느새 반정부 구호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황궁에 불을 지르고 소피아성당도 파괴했습니다. 도시는 불길에 휩싸였고 황제(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성난 군중을 피해 숨기에 바빴습니다. ‘니카 반란’이라고 불리는 큰 난리가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들은 부자들에게 관직을 팔아 비자금을 마련했는데, 이 중 일부로 시민들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하고 각종 축제와 운동 경기를 열어 사회의 안정을 꾀했습니다.
백성들의 관심을 돌리는 데는 스포츠만큼 유용한 것도 없어서 광장의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이륜 전차 경기는 시민들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이를 없애버린 것입니다. 공짜 급식도 없어지고 무료 전차경기도 열리지 않자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피신하려던 황제는 강하게 대처하라는 황후 테오도라의 말에 따라 군대를 동원해 시위자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3만 명의 시민들이 그 자리에서 죽었고, 히포드럼의 대리석 바닥은 피로 흥건히 젖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인구의 1/6이 한꺼번에 학살당한 것입니다. ‘니카 반란’은 인기에 영합한 선심성 정책을 되돌리는 데는 엄청난 희생이 지불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난 유스티니아누스는 시골 촌놈이 졸병부터 시작해서 황제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인 삼촌인 유스티누스 1세에 의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불리어 가서, 제국 통치의 숨은 실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삼촌의 죽음과 동시에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어,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히포드롬 전차경기장의 벌거벗은 무희 출신의 왕비 테오도라의 뛰어난 조언으로 제국을 다스리는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명장 벨리사리우스와 환관 나르세스를 기용하여, 게르만 민족대이동 결과 5세기경에 잃은 옛 서쪽 로마의 영토 재정복의 꿈을 실현시켰습니다. 이로써 동로마제국은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및 에스파냐 남부를 탈환, 지중해를 다시 ‘그들의 바다’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라고 일컬어지는 <로마법 대전>을 완성했으며 이시도로스, 안티미오스 등 당대의 으뜸가는 건축가를 발탁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성소피아 성당을 세웠습니다.
[ 걸출했던 테오도라 황후 ]
삼촌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강력한 영명한 황제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비잔틴 제국을 혼자서 다스리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테오도라 황후라는 대단히 총명하고 활기가 넘치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황제가 크고 작은 일을 결정하는 데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테오도라는 처음부터 황후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녀의 부모는 콘스탄티노플의 거대한 경기장인 히포드롬에서 서커스단을 운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곰 조련사였습니다. 어린 테오도라는 투기장의 뜨거운 모랫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아버지가 곰을 조련하는 것을 구경하였습니다.
곰이 묘기를 부리고 나면 그녀는 사과나 꿀 같은 맛있는 것을 곰에게 주기도 하였습니다. 나이가 좀 더 들자 테오도라는 서커스단의 광대가 되었습니다. 얼굴에 흰 칠을 하고 벙어리 흉내를 내었습니다. 구경꾼들은 테오도라의 연기를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테오도라는 연극에도 출연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는 유명한 배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꽃을 던지고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테오도라는 그렇게 대성공을 거둔 뒤, 비잔틴 제국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하고 가장 비싼 숙소에서 잠을 자고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장 귀한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어느 날 테오도라는 기독교를 알게 되어 기독교도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과는 다른 조용하고 평화로운 인생을 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배우 노릇을 그만두고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털실 짜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앉아서 양털로 실을 짜서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어느 날 털실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들고 시장 길을 걷던 테오도라는 황실 근위대의 행차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얼른 옆으로 물러서서 행렬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를 보았습니다. 아직 그는 황제가 되기 전이었습니다. 테오도라는 그를 보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길가에 서 있는 테오도라를 유스티니아누스도 보았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행렬을 마치고 그녀가 누구인지 수소문하고 다닌 끝에 그는 테오도라의 집을 찾아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했고 특히 테오도라가 총명한 점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둘은 이내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였습니다.
삼촌이 죽고 황제로 등극한 유스티니아누스의 옆에는 테오도라가 있었습니다. 황후 칭호인 아우구스타로 불리던 그녀였지만 이 칭호는 공동 통치자를 의미하기도 하는 말이었습니다. 비록 그녀는 공동 통치자가 아닌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조력자이자 부인이었지만 뛰어난 수완을 발휘해 로마 제국 부활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에 그녀를 실질적 통치자로 여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능력자라는 인정을 받은 셈이죠.
그녀의 능력과 강단이 어땠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황제가 된 5년 후인 532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전차 경기장인 히포드롬을 방문한 유스타니아누스 1세 부부는 매우 성난 시위대와 마주치는 황당한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월드컵 경기가 열려서 대통령이 참석했는데, 관람객들이 대통령 죽여라 하면서 국빈석을 에워싼 상황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 히포드롬 상상도
위에서 얘기한대로 공짜 급식과 무료 관람을 금지한 황제에게 대든 것입니다.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탈출하려고 항구로 도망쳤습니다. 테오도라는 그 자리에서 '자줏빛 옷(당시에는 오직 황실에서만 입을 수 있어 제위를 상징했다)은 가장 고귀한 의복이며 이를 걸친 황제가 도망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수치라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를 몹시 꾸짖었습니다. 어린 마누라 구박에 얼마나 자존심 상했을까 싶습니다마는...
18년이나 어린 부인의 호통에 자극을 받았는지 정신을 번쩍 차린 유스티니아누스는 다시 수도로 돌아가 벨리사리우스 장군에게 단호히 반란을 진압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 진압 과정에서 거의 3만 명의 시민이 학살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황후의 인기는 더욱 추락해버렸습니다.
사람들에게 동로마 제국의 실질적 통치자는 테오도라다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깊이 박혀있기 때문에 테오도라가 대 학살극을 주도했다고 믿은 겁니다.이런 사람들의 편견 탓에 대학살극의 주연이란 오명을 뒤집어쓰면서 생전에 대중에게는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 시녀들과 함께...테오도라
천하디 천한 출신 성분에 창녀이자 무희로 일했던 경력(?) 탓에 백성들은 테오도라를 음란하고 방탕한 여자라고 혐오했고, 이탈리아 지역과 콘스탄티노플에 전염병(흑사병)이 퍼지자 테오도라의 음란함 때문에 하늘이 천벌을 내렸다라는 이야기까지 돌았습니다. 그래도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살아온 성장 과정과는 별개로 매우 유능했기 때문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단적인 예로 여권 신장법과 창녀 보호법을 제정하는 등 시대를 앞서나간 페미니스트로서, 또는 남편을 대신해 외국 사절단을 접견하는 외무부 대신으로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를 평생 보좌했습니다. 다만 자기 주관이 강해서 자신과 남편의 의견이 다르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유스티니아누스의 생각을 꺾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총명했지만 드센 여자였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렇게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바가지를 긁어대고 반대 의견을 들이대서 유스티니아누스가 많이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테오도라가 있었기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정복 사업과 법전 편찬, 소피아성당 건축 등 역사에 남을 다양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서기 548년에 테오도라가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유스티니아누스는 17년 간 진정한 친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테오도라 사후엔 높게 평가받는 업적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도리어 대규모로 벌인 정복 사업이 후유증을 일으키기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테오도라 사후 마지막 17년 동안 그 동안의 공적을 까먹어야 하는 상황을 보며 죽은 부인을 많이 그리워했을 겁니다. 니카 반란의 진압 사건대문에 일반 백성들에게 욕을 많이 얻어먹은 테오도라였지만 사후에는 그녀의 공적이 입에 오르내리면서 인기가 급상승했다고 합니다. 테오도라는 계층을 막론하고 동로마 제국의 여성들이 가장 많이 쓰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 세계적인 터키 음식, 케밥 ]
‘케밥’의 원래의 뜻은 '불에 구운 양고기'며 터키의 대표적인 음식입니다. 가령 한국의 불고기도 터키어로는 "케밥" 이죠. 굳이 풀어 쓰자면 '간장으로 양념한 한국식 케밥‘ 정도 되겠습니다. 터키는 역사적·문화적 배경이 다양하므로 음식 종류도 많습니다. 드넓은 중앙아시아 땅을 누비던 유목 민족의 후예로 짧은 시간 안에 쉽고 간편하게 해먹는 음식에 익숙합니다.
* 엄청난 크기의 되네르 케밥, 요것도 점심시간에 싹...
케밥도 그 과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케밥의 재료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아나톨리아 지방에 정착하면서 술탄의 밥상에 같은 음식을 반복해서 올려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따라서 그 재료와 조리법이 점차 풍부해졌습니다.
* 이스켄데르 케밥, 본인이 무척 좋아했던 음식이었습니다.
'케밥'이 음식 이름인데다가 '밥'으로 끝나기 때문에, 처음 들으면 밥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술 더 떠, 개밥이라고 장난으로 부르는 개념없는 터키에 관광으로 온 한국인들도 가끔 있습니다.
케밥 종류는 1,000여 가지에 이를 정도로 다양하고 각 지방마다 특색이 다릅니다. 숯불 회전구이인 되네르 케밥, 꼬치구이인 쉬쉬 케밥, 요쿠르트 소스와 함께 먹는 이스켄데르 케밥 등이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터키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는 되네르 케밥이 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되네르 케밥
쉬쉬 케밥은 이즈미르가, 이스켄데르 케밥은 부르사가 특히 유명합니다. 그 외에 터키 내에서 유명한 케밥이라면 각 지역의 명칭을 딴 우르파 케밥, 카잔 케밥, 아다나 케밥과 에르주룸의 자으 케밥, 흑해 지방의 오르만 케밥, 카파도키아의 사지 카부르마 등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통틀어 모두 케밥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똑같은 되네르 케밥이라도 터키에서는 에크멕이라는 바게트 비슷한 빵을 갈라 그 안에 고기와 야채를 끼운 것을 주로 먹지만 독일에서 파는 되네르 케밥은 햄버거 형태를 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주로 먹는 얇은 빵에 고기와 야채를 넣고 둘둘 만 되네르 케밥은 터키 현지에서는 '뒤륌' 이라고 부릅니다.
* 쉬쉬케밥
그 외에 쉬쉬 케밥에도 무엇을 꿰었는가에 따라 수십 가지의 조리법으로 갈라지며 똑같은 조리법으로 만든 케밥도 지방에 따라 재료와 맛이 달라집니다.
* 고기를 다져서 익힌 쾨프테, 요것도 가끔 먹으면 입맛을 싹 돌게합니다.
짭짤하고 구수합니다.
보통 케밥하면 빵에 고기와 야채를 넣은 음식이라 생각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케밥은 접시 위에 올려놓고 서빙됩니다. 터키에서는 모든 식당에서 음식을 시킬 때 빵(에크멕)이 함께 곁들여져서 나오는데 이 빵은 무한 리필되며 무료입니다. 되네르 케밥은 세운 채로 조금씩 익혀가기 때문에 기름이 빠져나가 콜레스테롤 함량이 적고 담백한 맛을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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