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 대천(춘천) 산책길 복구를 바람
1. 어느 해 여름
태어나서 아홉 살까지 살았던 연산초등학교 뒷동네는 주변이 온통 풀밭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뒤로 황령산 물만골 골짜기에서 제법 큰 도랑이 집 앞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단층 슬래브 집 마당엔 할아버지께서 늘 전지해서 예쁘게 잘 키운, 어른 키만 한 사철나무와 측백나무 몇 그루가 있었지요. 서너 살 무렵부터 세발자전거를 타고 좁은 마당을 빙글빙글 돌며 놀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습니다.
어느 해 여름 장마가 한창이던 날 온종일 비가 억수같이 내렸습니다. 집 마당 옆을 흐르던 도랑물이 넘실대기 시작했고 성난 도랑물은 금세라도 집을 삼킬 듯했지요. 성난 도랑물은 동네 어른들이 고생해서 쌓아 올린 돌 축대를 무너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물가의 나무가 위태로워졌지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쏟아지는 빗속에서 나무를 지키기 위해 밧줄을 묶어 안간힘을 다해 당겨보았지만 거센 물살의 힘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정성스럽게 키운 나무 두 그루가 도랑물 속으로 휩쓸려 떠내려가는 모습은 아직도 제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릴 적 큰비 오던 날의 또렷한 기억을 갖고 있을 겁니다. 평소엔 얌전하던 도랑이 큰비가 내리면 얼마나 무섭게 변하는지,작은 아이의 눈에 자연의 힘은 호기심의 대상이었지만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2. 아름다운 산책로, 나의 월든 호수
높이 634m 장산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흘러가는 대천(춘천)은 길이가 짧고 급경사여서 침식작용에 의한 자갈과 모래가 많이 생성되었고, 이것이 해운대해수욕장의 아름다운 백사장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복개천이 되면서 동백섬과 우동 마린시티 사이로 흘러나와 바다와 만나지만 옛날에는 해운대 해변으로 춘천의 물이 흘러들었습니다. 장산과 춘천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최고의 관광지인 해운대는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매일 걷는 출퇴근길의 중간쯤에 잠시 쉬어가는 <중2보도교>가 있습니다. 해운대중1교회 뒤 롯데캐슬마스타 2차 아파트 부근은 대천인공호수에서 거의 직선으로 내려오던 춘천이 한 번 크게 휘어가는 곡각지점입니다. 하천의 폭이 조금 넓어지며 큰 물줄기는 둘로 갈라져 마치 한강의 샛강처럼 작은 강줄기가 되고, 그 주변은 나무와 억새풀이 잘 자라서 새들과 물고기들의 서식지가 되었습니다. 신시가지를 가로지르는 대천(춘천)의 구간 중에서 가장 풍경이 좋은 곳입니다. 사시사철 예쁜 꽃들이 돌아가면서 피고 온갖 새들이 나뭇가지 사이를 깡충깡충 뛰면서 지저귀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저는 이곳을 ‘나의 월든 호수’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3월의 중순으로 접어들자 대천(춘천)변에 노란 개나리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해운대문화회관을 지나면 시작되는 천변 산책로는 대천(춘천)의 양편으로 조성되어 장산 입구 대천인공호수까지 이어집니다. 그린시티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된 해운대신시가지의 한가운데를 대천(춘천)이 흐르고 있어서 풍수적으로 해운대신시가지는 배산임수의 명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금정산과 더불어 부산 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장산으로 오르는 이 천변 산책로는 지금 대부분의 구간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만, 매일 산책하는 동네 주민들은 통행에 크게 지장이 없는 곳을 잘 알기에 주로 장산 방향 우측 산책로를 걷고 있습니다. 시민안전을 책임져야 할 구청에서도 주민들의 통행을 완전히 통제할 뜻이 없어 보입니다. 그만큼 이 산책로가 소중하고 아름답기 때문일 것입니다. 길이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3. 큰 피해를 입은 산책로를 보면서
지난여름의 큰비에 장산계곡의 조경용 너른 바위들이 무너지고 대천호수에 많은 토사가 쌓였습니다. 호수 바닥이 너무 높아져 모래톱이 드러나고 준설이 필요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계곡의 바위들은 어떻게 할 것이며 대천호수의 준설은 또 어떻게 할 것인지 해운대구청의 고민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나무와 꽃들 사이를 걷던 아름다운 산책로도 지난여름의 큰비로 인해 중간중간 무너져 내려 출입을 막아놓고 있습니다. 해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또 몇 년에 한 번은 크게 망가져서 대대적인 보수가 필요한 상태가 되곤 합니다. 주민들의 눈에는 이런 일들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보일 것입니다. 해마다 반복될 수밖에 없는 보수공사를 또 해야 하나? 해운대 주민이라면 당연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의문입니다. 그렇다고 망가진 모습 그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으니 제가 담당부서의 책임자라도 참 난감할 것입니다.
지금 대천(춘천)은 산책로 제방을 조성하기 위해 쌓아 올렸던 바윗돌과 그 바윗돌을 묶었던 그물과 철망이 큰비에 부서져 떠내려 오다 엉겨 붙어서 자연스럽게 중간중간에 보를 만들고 있습니다. 튼튼하다고 여겨졌던 콘크리트 옹벽들과 그 아래 큰 바위들이 거센 물줄기의 위력 앞에 버티질 못했습니다. 산책로 주변 구간은 바윗돌들이 무너지고 쓸려 내려가 있고, 시민들의 안락한 산책을 위해 탄성 재질의 포장재를 깔아놓은 산책로도 그 아래 흙과 자갈, 돌들이 쓸려 내려가 공중에 떠 있습니다. 그리고 산책로는 아니지만 물길 주변의 콘크리트 옹벽들도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상태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복구를 하는 것이 최선인가요? 도대체 그 예산은 얼마나 들어가게 될까요? 수억? 수십억? 그리고 다음 큰비에 그것이 다시 망가지면 어쩌나요?
바위를 묶었던 그물과 철망들이 떠내려 오다 자연보를 형성한 곳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오리 가족이 놀고 있는 그곳이 작은 물고기와 크고 작은 새들의 서식지가 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파괴된 자연은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고 생명들은 놀라운 적응력으로 거기에 깃들어 살게 됩니다. 하천의 물이 막힘없이 흐르는 곳에서는 물풀들도 물고기들도 살기가 어려워집니다. 빠르게 흐르다 물길이 막혀 돌아가고, 그러다 잠시 고여 있다가 다시 흘러가기를 반복하면서 자연스러운 생태환경이 만들어집니다. 설마 위에서 굴러 내려온 그 많은 돌들을 포클레인으로 다시 주워 담아 원래의 자리에 되돌려 놓을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그리고 그 위를 더 두꺼운 콘크리트로 다지고 다져서 큰비에도 쓸려 내려가지 않는 튼튼한 제방을 만드실 생각은 아닌 거지요? 혹시나 해서 물어봅니다.
4. 자연에 깃들어 사는 지혜
제가 어릴 적 살았던 물만골 아래 연산초등학교 뒷동네를 흐르던 작은 하천은 지금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더군요. 도로를 만들기 위해 모두 덮여 복개천이 되어 버렸습니다. 복개천은 죽은 하천입니다. 맑은 물이 흐른다 한들 햇살을 받지 못하는 하천에 새들과 물고기가 살 수가 있겠습니까? 2호선 장산역부터 해운대 해변 앞을 지나 동백섬 옆으로 흘러서 바다와 만나는 춘천 구간은 이미 오래전에 복개되었습니다. 차가 다녀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곳도 서울의 청계천처럼 다시 살아있는 하천으로 회복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파트 사이를 흐르는 지금의 대천(춘천)은 더없이 소중한 시민들의 자산입니다.
장산에 내린 빗물들이 모여 해운대 바다로 흘러가는 춘천. 대천이 아름다운 것은 그 곁을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어서일까요? 춘천의 사계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일 때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중2보도교> 옆 작은 카페의 의자에 앉아서 잠시 심호흡을 합니다. 작은 새들이 종알종알 지저귀는 소리와 졸졸 흐흐는 물소리, 휘리릭 바람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이따금 지나가는 울긋불긋 예쁜 옷으로 차려입은 등산객들의 대화 소리까지 어울리면 이 풍경에 빠져들어 아침의 충만한 행복감을 누립니다. 꼭 부드러운 산책로를 걸어야 하나요? 멋들어진 하천 옆 예쁜 산책길은 우리의 욕심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조금 떨어져 걸어야 풍경은 더 아름답습니다.
망가진 산책로를 어서 복구하지 않느냐고 구청을 탓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급한 복구가 그리 중요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복구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많은 주민들의 의견을 들은 뒤 천천히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지구환경과 기후의 변화로 집중호우와 태풍은 더 잦아지고 더 강력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재해를 극복하고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둑을 쌓고 인공 못을 만들고 돌과 시멘트로 튼튼한 제방을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즐겨 이용하는 도랑 옆 산책로는 원래가 인간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 땅을 잠시 빌려서 이용했을 뿐입니다. 큰비가 오면 그곳은 물이 흘러가는 원래의 물길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길을 영원히 사람의 길로 만드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 위를 덮어서 복개천으로 만드는 방법이 아니라면. 최소한의 예산과 최소한의 정비와 보수만으로 춘천의 산책길을 보수하는 편이 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크게 망가진 장산 방향 좌측 산책로는 아쉽지만 포기하는 것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큰비가 오면 또 망가질 것으로 예상하고 일을 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절대 무너지지 않는 콘크리트 옹벽은 보기 싫다고 이미 오래전에 다 뜯어내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무엇이 최선일까요? 해운대구청의 슬기로운 복구 안을 기대합니다.
이동호 / 편집위원, 탑서울치과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