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법상 조사료는 농산물로 인정받지 못해 이를 농지에 야적하는 것도 금지돼 있다. 이 때문에 국산 조사료를 원료로 하는 섬유질사료공장 관계자들은 곤포사일리지를 보관할 곳이 없어 정상적인 공장 가동이 어렵다고 고충을 호소하고 있다. 한 섬유질 배합사료 공장에 조사료 곤포사일리지가 수북이 쌓여 있다.
○○지역에서 섬유질사료인 완전배합사료(TMR)공장을 운영하는 A씨는 요즘 영업을 계속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이 많다. A씨는 경종농가들이 재배한 조사료작물로 섬유질사료를 만들어 한우농가들에게 공급하는데, 곤포사일리지 형태로 된 조사료작물을 논 등에 쌓아놓은 것 자체를 놓고 툭하면 불법 시비에 휘말리기 때문이다.
A씨는 “사료 원료를 보관할 장소가 없어 공장 가동을 중단할 처지에 몰렸다”며 “농업인들이 농지에서 생산한 조사료가 왜 농산물이 아닌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정부는 축산농가의 사료비 절감을 통한 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국산 조사료 이용을 적극 장려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현행법상 조사료와 사료작물은 농산물로 인정받지 못해 대다수의 섬유질사료공장 운영자들은 A씨와 같이 속을 태우고 있다.
‘농어업·농어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에 따르면 ‘농산물은 농업활동으로 생산되는 산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것’이라고 규정돼 있다. 이와 관련된 대통령령에서도 농업활동의 범위를 농작물재배업·축산업·임업으로 한정해 놓고 있는데, 농작물재배업에 포함된 작물을 식량작물·채소작물·과실작물·화훼작물·특용작물·약용작물·버섯·양잠업 및 종자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게다가 축산업의 정의에서도 동물의 사육업·증식업·부화업 및 종축업으로 한정해 놓고 있는 상태다. 다시 말해 청보리·이탈리안라이그라스·호밀 등 가축 사료용으로 재배한 조사료 작물은 농업활동으로 생산한 산물, 즉 농산물이 아니고 축산업에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각지대’에 방치된 셈이다.
축산단체의 한 관계자는 “곤포사일리지를 농로나 농지에 야적하는 것은 농산물이 아닌 물품으로 농지를 이용해선 안된다는 농지관련법 규정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며 “반면 볏짚은 식량작물 재배에 따른 산물인 만큼 농로에 야적하는 행위가 허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조사료 작물이 법적으로 홀대받는 것은 이뿐만 아니다. 농업진흥구역 안에서 할 수 있는 행위를 규정한 농지법 시행령엔 미곡종합처리장(RPC), 농산물산지유통시설(APC), 사료제조시설 등을 설치할 수 있도록 명시돼 있다. 하지만 이들 시설의 허용 면적은 RPC와 APC는 3만㎡(9000평)까지인 반면 사료제조시설은 3000㎡(900평) 미만(지자체나 생산자단체가 설치하는 사료 제조시설은 1만㎡(3000평) 미만)까지만 들어설 수 있게 차별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의 조사료 이용 정책에 힘입어 농업진흥구역 안에도 조사료를 주원료로 하는 섬유질사료공장이 속속 들어서고 있지만 허용된 부지가 너무 좁다보니 공장 관계자들은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연간 생산량이 3만t 규모인 섬유질사료공장의 경우 원료로 써야 할 곤포사일리지는 2만4000t이다. 이는 섬유질사료공장은 원료의 80% 이상을 의무적으로 국내산 조사료를 사용해야 정책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농림사업시행지침 규정에 따른 것이다.
보통 곤포사일리지는 600㎏들이 1개당 1㎡의 보관장소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연간 생산량 3만t 규모의 공장은 곤포사일리지 보관 부지만 4만㎡(1만2100평) 정도가 필요하다는 게 공장 관계자들의 공통된 얘기다. △△지역의 섬유질사료공장 대표는 “1만㎡에 섬유질사료공장을 지었어도 3000㎡는 기계시설·농기계보관창고·사무실 등으로 사용해야 한다”며 “이를 제외한 7000㎡(2100평)에 위험을 무릅쓰고 3~4단씩 곤포사일리지를 적재해도 1만6000t을 넘기기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축산단체들은 한우산업이 국제 경쟁력을 갖추려면 값비싼 배합사료 위주의 사육방식에서 벗어나 국산 조사료 이용을 늘릴 필요가 있다며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법 조항이 우리 축산업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반드시 시정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역축협의 한 조합장은 “조사료를 농산물로 인정하지 않으면 현재 조사료 재배농가 등에 직불금 등 정책자금을 지원하는 것도 불법이 될 수 있다”며 “현실과 동떨어진 법 규정은 하루빨리 뜯어 고쳐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농협은 농업진흥구역 내 조사료 시설 허용면적을 늘리는 것을 올해 농업·농촌 숙원사항 과제 중 하나로 선정하고, 현재 관계법령이 개정될 수 있도록 농정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광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