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성의 드러남
장성숙/ 극동상담심리연구원, 현실역동상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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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부부가 내게 딸을 상담해달라고 부탁했다. 뭐 때문이냐고 묻자, 얼마 전부터 딸이 심각할 정도로 우울해한다고 하였다.
예전에 그 가족과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내 눈에 비쳤던 딸의 모습은 어두웠고 동생인 아들은 까불까불했다. 그 당시 어머니는 딸이 내게 고분고분하게 대답하지 않는다고 퉁을 주었고, 아들을 바라보는 눈에는 사랑이 뚝뚝 떨어졌다. 눈에 띌 정도로 딸과 아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그 어머니에게 나는 딸을 더 신경 쓰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딸의 상담을 부탁할 때, 나는 ‘터질 게 터졌구나!’ 하는 안타까움을 금하기 어려웠다.
그 딸은 대학교를 마치고 나서 번듯한 직장을 잡기가 어려웠는데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악착스럽게 돈을 모았다. 어느 정도 모인 돈으로 월세가 높지 않은 곳에 작은 커피집을 차렸다. 하지만 막상 영업을 시작하였으나 예상치 못한 악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돈을 다 날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시작된 우울증으로 그 딸은 자살을 꿈꾸게 되었다.
그 딸과 이야기하면서 발견한 점은 가족과 아무런 연대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바람 부는 벌판에 홀로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는 커피집을 차릴 때 부모와 상의하지 않았고, 임대차 문제가 생겨 어이없는 일을 당할 때도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표면상 부모와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부모는 딸이 태생적으로 자립심이 강한 아이라고 여겼고, 그러한 딸이 듬직하다며 친인척에게 자랑까지 하였다. 아들은 부모에게 아쉬운 소리를 많이 하는 편인데, 딸은 일체 그러한 말을 하지 않아 똑 부러지게 사는 사람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딸은 천애 고아처럼 허허벌판에서 허우적거리는데, 그러한 딸을 부모는 듬직하다며 자랑하고 있었다니….
나는 그 딸을 상담하며 세상의 일이란 뭐하나 그냥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절로 하였다. 어렸을 때 그녀가 부모에게 충분히 기대지 못하는 것 같더니, 그것이 결국 오늘날 부모와 자녀 간에 이런 소원함을 낳았다는 사실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그 부모가 내게 딸의 상태가 어떠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들에게 다소 쓴소리를 했다. 어려울 때는 도움을 청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딸은 도무지 아쉬운 소리를 할 줄 모른다며 어떻게 키웠기에 그러냐고 그 부모의 무심함을 꼬집었다. 그들도 딸이 자기네를 든든한 의지처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면서도 딸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게 감기지 않는 성향을 보였다고 하였다. 즉 태생적으로 아들은 연했던 반면에 딸은 뚱 하는 기질을 가졌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하는 그들에게 각자마다 다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경우든 자녀가 정서적 안정성을 확보하는데 밑거름이 되는 애착 관계를 소홀히 하는 것은 부모의 실책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타고난 각자의 기질이 어떻든 사람이 좋다는 것을 알아야 아쉬울 때 도움을 청하고, 그래야 위기를 벗어나는 것 아니냐고 하였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그들의 딸은 사람을 믿거나 가까이하지 않고 홀로 삭막하게 살아가는 불쌍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제야 그들은 딸이 남동생에게 까칠하게 굴어 야단을 많이 쳤었다고, 지금 생각하니 그런 딸의 태도가 질투나 불안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몰랐었다고 실토했다. 그러면서 자기네들이 이제부터라도 어떻게 하는 게 좋으냐고 물었다. 그리하여 나는 늦은 감이 있어도 예전에 기울이지 못했던 관심이나 애정을 기울이라고 당부했다. 딸이 이미 어른이긴 해도 정서적으로는 아이와 다름없으므로 그것을 채워주어야 딸이 우울감을 떨쳐내고 성장해나갈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딸을 다시 키우듯 얼러주라고 한 것이다.
다시금 갖게 되는 의문은 사람들이 흔히 믿듯이 ‘이 세상에 우연이나 요행이라는 게 있을까?’ 하는 것이다. 수많은 조건이 끼치는 영향을 다 헤아리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우연이나 요행으로 간주하지, 실은 이 세상의 어느 하나도 허투루 생기거나 허투루 지나가는 것 같지 않다.
그 딸에 대해서도 일찍이 그 부모에게 좀 더 신경 쓰라고 조언한 적이 있었는데, 20년이나 흐른 뒤 우울증을 앓는 그 딸을 보면서 ‘여지가 없구나!’ 하고 묵직해지는 심정이다. 아무리 미세한 것들이라 해도 쌓이고 쌓이면 그 영향력은 나타나게 마련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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