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위대한 유산 74434 공식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부활한연개소문
중국의 기록에서 찾은 동이족 역사의 증거들
1) 중국민족의 조상은 바로 동이족이다. -중국 고사변-
2) 3황 5제의 8대 임금들이 숙신(주:조선의 옛 이름)에서 나왔다. -중국 산해경-
3) 태호복희의 성은 풍(風)씨이며, 고대 동이족이다. -1989년판 중국 상해 출판사, 역대 제왕록-
4) 황제는 백민(白民)에서 났고, 동이족에 속한 사람이다. -중국 초사:楚詞-
5) 은나라의 (건국)시조 설은 동이족이다. 은나라는 이(夷:동이족)의 나라이고, 주나라는 화(華:중국 漢:족)의 나라이다. -중국 사마천 史記-
6) 요임금은 황제헌원의 5세손이다. -중국 사마천 史記-
7) 순임금은 風에서 태어났고 負荷로 이주하였으며 鳴條에서 죽었다. 풍,부하, 명조는 모두 동이족의 땅이며 순임금은 동이족이다. -맹자:孟子- 離婁章句 下에서-
8) 주나라를 세운 문왕(文王)은 기주에서 태어났고 필영에서 죽었다. 그곳은 서이(西夷:동이족의 한 지파)의 땅이다. -맹자:孟子- 離婁章句 下에서-
9) 공자는 스스로 “구(邱:공자의 자)는 은나라의 후예다”라고 말했다. -공자세가-
공자는 은족이다. 곡부에서 태어났다. -예기:禮記 3편 단궁 상-
10) 진(秦)나라의 선조는 황제. 전욱. 고양씨이며, 묘족의 후예다. 진나라와 조(趙)나라는 모두가 모계혈통이나 그 모계의 아버지는 전욱이다. 소호(小昊)씨는 영씨성을 가진 족으로, 진나라 조상의 할아버지가 소호씨이다. -사기(史記) 진 본기(秦 本紀)-
11) “중국의 고대사는 모두 동이족의 역사다” -중국 북경대학교 고고학과 엄문명 주임교수의 증언-
12) 천자의 호칭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으니,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예로부터 천자라 한 것이다. -중국의 학자 채웅이 저서 독단에 남긴 기록-
13)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 이는 곧 뿌리이며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한다고들 한다. 모든 것은 땅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도로써 다스리기 쉬워서 군자의 나라이자 죽지 않는 나라(不死國)이 된 것이다. -중국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14) 이는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며, 활 궁(弓)자와 큰 대(大)에서 따온 글자로, 그 사람들은 어질고 오래 살며, 죽지 않는 군자가 있는 나라이다. -중국 설문(說文) 자해(字解)-
15)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순리(順理)를 따르는 성향이 있으나, 오직 동이(東夷)만이 큰 것을 따르니 대인이다. 이(夷)의 풍속은 어질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살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곳은) 죽지 않는 군자가 있는 나라이다. 살펴보면 그 곳은 하늘도 크고 땅도 크며 사람 역시 크다. -중국 설문(說文): 대부(大部)-
16) 동이족은 체격이 크고 용감하다. 그러면서도 남의 것을 빼앗는 일이 없다. -중국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
17) 동방의 사람들은 남자는 전부 허리에 요대를 차고 모자를 쓴다. 여자는 전부 색옷을 입고 항상 공손하게 앉는다. 그들은 상대방 명예를 존중하여 훼손하는 일이 없으며 사람이 환란을 당하는 것을 보면 죽을 곳이라도 뛰어들어 도와준다. -중국 동방삭 신이경-
18) 중국인들은 서남북 사람들이 버러지.동물과 같다고 보았다. 오직 동방인에 대해서만 “천성이 유순하고 서로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으며 가르치기를 좋아한다. -중국 예기(禮記) 왕제 편-
19) 치우(천황)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 -중국 사마천 사기-
20)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古天子之名이다. -중국 이십오사(二十五史)-
21) 삼묘족(三猫族)의 나라를 구려(九麗)라 하고, 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 -중국 민족사:왕동령-
22) 동이사람인 신농과 황제헌원의 시대에, 동이족의 갈래인 여묘족이 중국의 남부 땅까지를 차지하여, 대저 한 옛적에는 양자강과 한수지역에 여(黎)의 땅이 있었다. -중국 학자 임혜상, 중국 민족사, 상권 제4장 동이계-
23) 한(漢)족이 아직 중국땅에 들어오기 앞서, 중국의 중부와 남부는 본시 동이겨레의 갈래인 묘족이 살던 땅이었다. 그런데 한(漢)족이 들어온 뒤로부터 (동이족과 한족은) 점점 접촉하게 되었다. -일본학자 조거룡장, 출전: 겨레역사 6천년-
24) 세석기 시대의 문화부족이 맨처음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방에 살았는데, 그들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염제신농의 본족이다. 그런데 이 문화부족이 서전 우공편에서 말한 동이겨레의 갈래인 도이. 조이. 우이. 내이. 회이와 은나라의 갑골문자로 적은 이방, 토방, 길방, 귀방. 강방과 주나라 때 이(夷), 적(狄), 험윤(?允), 진한 때 호(胡), 맥(貊), 흉노(匈奴), 위, 진 때 오환(五桓), 선비(鮮卑)등의 원종족이다. -중국학자 서량지-
=============================================================================================================================
고대 차이나의 왕들은 모두 동이족
중국인들은 고대 중국의 임금이라 하여 <삼황 오제>를 받들고 있다. 삼황 오제는 삼황 즉 <태호 복희씨, 염제 신농씨, 황제헌원씨> 와 오제 즉 <소호금천씨,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임금, 순임금> 을 말한다.
이들은 중국문화,종교의 창시자들로 이들이 동이족이라면 중국의 종교와 문화는 다름아닌 우리 민족의 신교문화로 부터 파생된 것이다.
배달국의 5대 환웅 태우의(즉위 BC 3512)는 1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다의발은 대통을 이어 6대 환웅이 되고, 그중 막내인 태호복희는 중원으로 진출, 현 하남성의 진陳에 도읍하여 문명을 개척하였다.
복희씨는 삼신산에 올라가 제사하고, 천하에서 괘도를 얻어 천부경을 바탕으로 한 팔괘, 즉 한역을 만들었으니 이는 곧 동양 철학의 근본을 마련한 것이다. 한역은 훗일 중국 주역의 모체가 된다.
<태호복희씨 관련 문헌기록>
태호복희씨
“역법은 사실 동이가 창시자이며, 소호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중국의 서량지 교수-
"환웅 천황에서 5대를 전하여 태우의 환웅이 있었다. 아들을 12명 두었는데 장자는 다의발 환웅(6대 환웅)이라 하고 막내는 태호라 하니 복희라고도 한다." -태백일사-
밀기密記에 이르기를,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직을 세습하고 뒤에 청구와 낙랑을 거쳐 진으로 옮겨갔다. 그의 후예들이 풍산에서 나누어 살았으므로 풍씨로 성을 삼았다. 지금 산서성의 제수濟水에 희족羲族의 옛 거처가 남아 있다.”
“대변경에 이르기를, 복희는 신시로부터 나와 우사가 되었다. 신룡의 변화를 보고 괘도를 만들고 신시의 계해로 시작되는 역법을 갑자로 시작되는 것으로 고쳤다. 복희의 무덤은 지금 산동성 어대현 부산鳧山의 남쪽에 있다.” -태백일사-
한편 복희의 부인 혹은 누이동생이라고 하는 여와는 황토를 반죽하여 인간을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이러한 복희와 여와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 농경와 의약의 시조로 불리고 있는 염제신농이 등장하게 된다.
염제신농은 배달국 8대 환웅 안부련(BC 3240)의 신하인 소전의 아들로서 중원의 남방으로 진출하여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게 된다. 또한 팔괘(八卦)를 겹쳐 육십사효(六十四爻)의 점(占)을 보는 점술을 고안해냈고, 저자(시장)를 세워 백성들에게 교역을 가르쳤다고 한다.
즉 그는 중국의 농업 ·의약 ·음악 ·점서(占筮) ·경제의 조신(祖神)이며, 중국문화의 원천으로 알려져 있다.
<염제신농씨 관련 문헌기록>
염제신농씨
“웅씨에서 갈라져 나간 사람 중에 소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안부련 환웅 말기에 소전은 명을 받들어 강수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신농은 여러 가지 풀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그는 뒤에 열산으로 옮겨갔다.” - 태백일사-
“신농은 열산에서 일어났는데, 열산은 열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신농은 소전의 아들이며 소호와 함께 고씨의 방계 지류이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치우 천왕과의 싸움에서 패한 뒤 그는 치우 천왕에게 귀의하여 청구국 고유의 천부인 3개에서 유래한 신선도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신선도는 후대의 노자와 장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도교道敎를 일명 신선도교神仙道敎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 뿌리가 청구국(배달국)의 신선도에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기- 황제의 반란과 치우천왕의 평정 (탁록대전)>
치우천황 목각상
서기전 2707년(갑인년) 우리 민족 불세출의 대영웅 자오지 천황이 배달나라 제 14세 한웅 신시 전통을 이었다. 이 자오지 천황이 바로 치우천황(단군 14대)인 것이다.
그런데 당시 중국대륙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탁의 북쪽에 대효(大曉)가, 동쪽에는 창힐이, 그리고 서쪽에는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있었다.
이때 황제헌원은 각각의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 서로를 치려했으나 치우천황의 제후국들이어서 이마저 성공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때 기주(冀州)의 염제신농의 나라가 유망(楡罔)대에 이르러 정사가 과격해지더니 제후들이 서로 다투고 민심마저 흩어지며 세상이 어렵게 변해버렸다. 그러자 유망을 도와 섭정을 하던 헌원(軒轅)이 반란을 일으켜 판천(板泉:上谷) 벌판에서 유망을 시해(弑害)하였다.
탁록대전
이에 치우천황은 헌원을 응징하여 유망의 원수를 갚기로 결심하여, 그 유명한 탁록대전이 시작된다.
이들과 치후천황은 70여 회의 전쟁을 했다. 그러나 치우(후)천황에게 번번이 짐으로 항복하게 되었다.
치후천황은 헌원을 쥬신의 수석 제후국왕인 황제로 임명. 살아남을 수 있는 영지를 주었다. 하지만 헌원이 황제로 임명됨으로써 중국의 영토가 중국인들의 손으로 되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치우천황 대에 자부선생(紫府先生)이란 위대한 학자가 있었다. 그는 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고도 하는데, 하루는 장기간 연구한 경서인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치우천황에게 전해 주었다.
이것은 배달국 초기에 신지씨가 발명한 녹서(鹿書)로 씌어진 연구저서로서 세 편으로 나뉘어졌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여기에 주를 달고 구분하여 신선음부경(神仙陰符經)이라 하였다. 선교와 도교의 기초가 된 저서이다.
<황제헌원에게 선도를 전파한 자부선생>
옛날에 황제黃帝가 동쪽으로 청구靑邱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 자부紫府 선생을 만나 뵙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으며 이로써 만신萬神과 어울렸다. -포박자抱朴子-
자부紫府 선생이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을 만들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궁궐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칭찬하시고 삼청궁三淸宮을 세워 그곳에 기거하게 하시니 공공共工·헌원軒轅·창힐倉詰·대요大撓의 무리가 모두 와 배웠다.- 태백일사-
<황제헌원씨에 관하여>
염제신농의 아버지인 소전의 후손 지파중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공손의 후손중에 황제헌원黃帝軒轅(BC 2692~2592)이 나왔다.
(소전少典(염제신농의 아버지) → 공손씨公孫氏(소전의 후손) → 황제헌원)
"황제(黃帝)는 백민(白民)에서 태어나고...그는 동이東夷족에 속한 사람이다." -중국: 초사-
삼황三皇이후의 오제五帝는 그 근원이 모두 삼황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다음과 같다.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
소호금천 (BC 2598 ~ BC 2514)
전욱고양 (BC 2513 ~ BC 2436) ; 황제헌원의 손자
제곡고신 (BC 2435 ~ BC 2365) ; 황제훤원의 증손자
제요도당 (BC 2357 ~ BC 2258) ; 요임금이라고도 함. (요임금 25년에 단군왕검조선 건국.)
제순유우 (BC 2255 ~ BC 2208) ; 순임금이라고도 함.
"창의(昌意)는 황제헌원씨의 아들로, 창의(昌意)로부터 7세가 순(舜)이다." -사마천 사기-
즉 황제 헌원씨의 8대손이 순임금이라는 것이다.
배달국의 고시씨高矢氏 --->소전少典(염제신농의 아버지) ---> 공손씨公孫氏(소전의 후손) ---> 황제헌원(공손씨의 후손) ---> 전욱고양(五帝중 한사람. 황제헌원의 손자) ---> 제곡고신(오제五帝중의한사람.황제헌원의증손자) ---> 설(제곡고신의아들; 은나라를 건국한 성탕의 선조)
위에서 보듯이 <황제헌원씨> 와 <순임금>이 동이東夷인이고 <소호금천씨>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임금> 등도 모두 황제헌원씨의 자손이니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고대 임금이라 받드는 <삼황오제> 는 모두 동이인이라하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그밖에 우리 민족이 중국에 영향을 주었던 기록들도 존재한다.
<9년 홍수때 단군께서 우임금에게 도움을 준 기록>
갑술 67년(서기전 2267)에 단군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虞司空: 후에 우임금)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고 경계도 따져 정했다 -단군세기-
당시 요순시대의 중국천지가 9년 간 계속된 대홍수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무렵, 동방 고조선의 천자 단군성조는 105세 되시던 갑술(서기전 2267)년에 태자 부루를 중국 양자강 남방에 위치한 도산(塗山)에 보내 도산회의를 주재하도록 하고 고조선의 제후였던 순이 특파한 우(禹)에게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비법”을 전수케 하셨다(『吳越春秋』, 『歷代神仙通鑑』).
중국이 동이로부터 독립한 날 쌍십절. 쌍십절은 10월 10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 날 중국인들은 폭죽을 터트리며 이 날을 기린다. 그러나 이 날이 바로 중국이 쥬신으로부터 독립한 날이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관포지교(관중과 포숙)라는 한자성어를 들어 보왔을 것이다.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를 이렇게 말하곤 한다. 훗일 관중은 재상이라는 자리에 앉게 된다. 그러나 이 관중으로 인해 중국은 동이로부터 독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은 비로서 쥬신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된다. 이 날이 바로 쌍십절인 것이다. 관중은 훗일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재상으로 기록 되어진다.
이처럼 중국인들이 자기네 조상이라고 떠받드는 반고라는 자가 이미 거발한 한웅천황이 배달국을 세울 초창기에 서쪽으로 갈라져 나간 사실이라든가, 태우의 한웅천황이 선도수련법을 체계화한 일이라든가, 치우천황이 나라의 영역을 중원의 핵심 지대로 확장했다든가 하는 업적은 우리의 기록뿐만 아니라 지나의 기록에도 뚜렷이 나와 있으므로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지나의 삼황오제 즉 태호복희, 신농씨, 황제헌원(이상 삼황), 소호, 전욱, 제곡, 요, 순(이상 다섯 제왕인 오제)이 모조리 배달족이었다는 사실은 지나의 상고사 자체가 우리 민족의 상고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역력히 입증해 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추세는 그후 하,은,주,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나라 대에까지 일관성 있게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문화를 대표하는 유교와 도교의 근원이 황제헌원이 배달국의 자부선생에게서 전수받은 삼황내문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그 당시 배달국의 문화가 얼마나 찬란했으며, 거의 일방통행식으로 동양 문화를 이끌어왔는가를 입증해 주고 있다 하겠다.
중국 역대 왕조의 성씨 계보
1. 서설
역대 중국의 왕조는 배달겨레의 왕조이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차이는 간단히 말하면, 한국인은 옛 한국, 배달나라, 단군조선으로 정통성을 이어 온 반면에, 중국인은 배달나라의 웅족(곰족)으로부터 이어져 내려 오면서 동이족, 서이족,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 만주족 등이 혼합된 복합족인 것이다. 물론 동이족, 서이족, 거란족, 여진족, 만주족은 배달겨레, 단군조선 겨레이다.
2. 중국 역대 왕조의 성씨 계보
가. 진제국(震帝國) : 서기전 3528-서기전 3218. 시조는 태호복희(太?伏羲). 태호복희는 배달나라 한웅(桓雄. 제5대 태우의라 함)의 작은 아들. 배달나라의 우사(雨師)를 지내고 나중에 진제국 시조가 됨. 풍(風)씨의 시조임. 진제국은 배달나라 제후국임.
나 유웅국(有熊國) : 시조는 소전(少典). 웅족(熊族)으로 염제신농의 아버지. 후손 공손씨(公孫氏)가 이음. 공손씨는 황제헌원의 선조. 유웅국은 배달나라 제후국임.
다. 염제국(炎帝國) : 서기전 3218-서기전 2698(2333). 시조는 신농(神農)씨. 신농은 웅족으로 강(姜)씨의 시조임. 배달나라의 우가(牛加)였으며, 나중에 염제국을 세웠음. 서기전 2697년에 염제국의 후계국으로 단웅국이 세워져 서기전 2357년에 단군왕검이 비왕으로 섭정하다가 서기전 2333년에 조선 개국. 배달나라 제후국임.
라. 웅국(熊國 또는 有熊國) : 서기전 2698-서기전 2357(2224).
- 시조는 황제헌원(黃帝軒轅). 공손씨의 후손. 공손은 곰족의 후손이라는 말의 이두식 표기임. 즉 웅족임. 원래 공손씨였으나 나중에 희(姬)씨로 바꿈. 치우(치우천황)와 탁록지전을 벌인 인물로 중국 역사의 기록상 실질적인 시조로 기록되고 있음. 그러나 배달나라의 제후국의 하나에 불과함.
-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김(金)씨의 시조. 황제헌원의 아들이라고도 함. 성은 已씨. 황제헌원 이전에 소호(少昊)라는 사람이 있으므로 소호금천씨는 황제헌원의 아들이 아닌 소호의 후손일 가능성도 있음. 소호(少昊)는 소전(少典)과 더불어 웅족임.
- 전욱고양(顚頊高陽), 제곡고신(帝嘗高辛), 제지(帝摯), 요(堯), 순(舜)으로 이어짐.
마. 당(唐) : 서기전 2357-서기전 2284. 요(堯)임금의 나라를 당나라라 함. 요임금은 제곡고신씨의 아들이고, 소호금천씨의 증손자이며, 황제헌원의 현손자가 됨. 즉 웅족임. 성씨는 이기(伊祈)씨임.
바. 우(虞) : 서기전 2284-서기전 2224. 순(舜)임금의 나라임. 순은 맹자(孟子)에서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음. 순임금은 요임금으로부터 선양받았다라고 기록됨. 순임금의 아버지인 유호씨(有戶氏)는 단군조선의 중신(重臣)으로 아들 순과, 순의 동생 유상(有象) 등을 인솔하여 요임금을 치러갔던 인물임. 순임금이 요임금의 뒤를 이어 중국의 천자가 된 후 동생인 유상과의 형제간 전쟁을 하였으며, 유호씨와 유상의 무리인 우(禹)에게 패하였으며 이어서 우가 하왕(夏王)이라 자칭함. 순을 전욱고양씨의 후손이라는 기록에 의하면 황제헌원의 먼 후손이 되어 웅족이 됨. 성을 요(姚)라고도 함.
사. 하(夏) : 서기전 2224-서기전1766. 시조는 우(禹). 전욱고양씨의 손자라고 하는 기록에 의하면 황제헌원의 현손자가 되며 웅족이 됨. 우의 성은 사(?)씨. 사(?)씨는 태호복희의 후손의 성씨라고도 하므로 이 경우 한웅족(桓雄族. 배달나라 天王族)이 됨.
아. 은(殷) : 서기전 1766-서기전 1122. 시조는 성탕(成湯). 성은 자(子)씨. 제곡고신씨의 아들인 사도(司徒) 설(契)의 후손임. 즉 웅족임. 동이족임. 한편 은을 물리친 주(周)는 서이(西夷)라 함.
자. 주(周) : 서기전 1122-서기전 249. 성은 희(姬)씨. 희씨는 황제헌원의 성씨이므로 황제헌원의 후손이 되며, 제곡고신씨의 아들인 후직(后稷)의 후손임. 웅족임. 서이(西夷)라고도 함.
차. 진(秦) : 서기전 249-서기전 206. 원래 영(?)씨이나, 진시황은 여(呂)씨의 자손임. 영씨는 전욱고양씨의 후손임. 웅족이 됨. 여씨는 동이족의 성씨임.
카. 한(漢) : 서기전 206-서기 263(265). 류(劉)씨의 나라임. 류씨는 요(堯)임금의 후손임. 요임금은 웅족의 후손이므로 류씨도 웅족의 후손이 됨.
타. 신(新) : 서기 8-서기 23. 왕망(王莽)은 한무제(漢武帝)에게 사로잡힌 흉노족의 왕의 후손임. 흉노족 왕을 휴도왕이라 하는데 김(金)씨임. 소호금천씨의 후손이 됨. 즉 웅족의 후손. 우리나라 김씨는 왕망이 후한에게 멸망하면서 한반도로 이동한 일족으로 소호금천씨의 후손임.
파. 진(晉) : 서기 265-서기 421. 사마(司馬)씨. ?
하. 수(隋) : 581-618. 양(楊)씨. * 고구려 장수 양만춘 있음.
거. 당(唐) : 618-907. 이(李)씨. 노자의 아버지가 한(韓)씨를 이씨로 바꾸었음. 한씨는 원래 희(姬)씨로 주(周)나라의 왕족임. 희씨는 황제헌원의 성씨이므로 웅족의 후손이 됨.
* 요(遼. 거란) : 907-1125. 시조 야율아보기(阿保機). 아보기는 아버지(<-아파오치)의 이두식 표기. 아버지는 가장(家長). 거란족은 설(契)의 후손이라고 전함. 웅족의 후손이 됨.
너. 송(宋) : 960-1279. 조(趙)씨. 전욱고양씨의 후손으로 영(?)씨이기도 함. 전욱고양씨는 황제헌원의 손자이므로 조씨는 웅족의 후손이 됨.
* 금(金. 여진) : 1115-1234. 시조는 아골타(阿骨打)로 김(金)씨임. 고려 초기에 김준이라는 사람이 여진족으로 가서 세력을 잡음. 아골타는 아버지(<- 아뼈치)의 이두식 표기.
더. 명(明) : 1368-1644. 주(朱)씨. 송(宋)나라 주자(朱子)가 있음. * 명나라 시조 주원장이 고주몽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음.
* 원(元) : 1206-1368. 몽골족은 원래 단군조선의 갈래임.
러. 청(淸) : 1616-1912. 애신각라(愛新覺羅)씨. 원래 김(金)씨. 시조 누루하치의 누루는 누렇다라는 뜻의 누루이므로 황금의 금(金)을 가리키고, 하치는 김알지의 알지처럼 아기, 후손이라는 뜻임. 김수로왕의 후손이라고 함.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 애신각라는 신라(新羅)를 사랑하고 잊지 말라는 뜻으로서 성씨로 삼은 것임. 만주족의 선조인 여진족의 금(金)나라도 김(金)씨의 나라임.
3. 한국은 줄기나라, 중국은 가지나라
위에서 보면, 중국의 역대왕조는 배달, 조선 겨레가 세운 나라이다. 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의 나라는 중국 직계의 나라가 아니다. 중국의 실질적인 시조는 황제헌원이라고 기록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배달나라의 왕비족인 웅족으로 배달나라의 제후에 불과하였다. 배달나라 천왕을 한웅(桓雄)이라 하는데, 천왕의 아들을 단군이라 부른다. 그래서 단군은 배달나라의 정통을 이은 임금이 된다. 즉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은 배달나라의 홍익인간 이념을 실현하는 정통성을 계승한 나라이다. 반면, 요임금의 중국은 배달나라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갈래 나라가 된다. 황제헌원은 공손씨(公孫氏)의 후손이나 성(姓)을 어머니 성인 희(姬)로 바꾸었는데, 모계성(母系姓)을 쓴 것이 된다. 중국의 여러 역대 왕조의 시조가 여(女)자가 있는 성을 쓴 것으로 보면, 모계를 중심으로 한 사회였음을 엿볼 수 있다. 황제헌원의 희(姬), 순임금의 요(姚), 하나라 시조 우(禹)의 사(?), 주나라의 희(姬) 등이 그 예이다. 순임금도 아버지가 있었으나(高씨라고 함. 고씨는 웅족임.) 아버지 성씨를 따르지 않았다. 순임금의 아버지는 바로 단군조선의 중신(重臣)이었는데, 순이 아버지로부터 이탈했기 때문이다. 주나라의 희씨는 물론 황제헌원의 후손으로서 희씨이다. 은(殷)나라는 남자성씨인 자(子)씨를 썼다.
4. 결어
중국의 역대 왕조의 뿌리는 배달겨레이다. 배달겨레가 아닌 왕조가 없다. 중국의역사서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왕조 중에서 특히 중국의 줄기라고 볼 수 있는 나라는, 중국의 실질적인 시조라고 하는 배달나라 제후국인 황제헌원의 나라, 요임금의 당(唐)나라, 우(禹)의 하(夏)나라, 주(周)나라, 한(漢)나라 등이 될 것이다. 그 뒤 여진족이 세운 나라인 금(金), 만주족이 세운 청(淸)은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대진국(발해)의 후예를 기반으로 하여 신라(가야) 김씨가 세운 나라인 것이다.
이상에서 한국과 중국의 인종학상의 차이점은, 한국은 옛한국(桓國), 배달나라(檀國), 단군조선(檀君朝鮮) 이후로 정통성을 일관성 있게 이어 온 나라이며, 중국은 배달나라의 제후국에서 출발하여, 배달나라에서 이탈하면서 단군조선과 병립하게 된 후 점차 뚜렷이 구별되어 온 배달의 가지나라가 된다.
단지, 한국과 중국간에 언어학상의 문제가 뚜렷이 남아 있는데, 차후 소개하기로 한다
덧붙이자면 한족 본래의 영토는 지금의 허난성(河南省)과 산시성(陝西省) 일대입니다. 다른 민족의 땅을 야금야금 먹어치워서 오늘날의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된 거죠. 그리고 남부 중국의 한족은 좡(壯)족과 베트남인 등과의 혼혈이라 순수한 한족이 아닙니다. 지금의 광둥성(廣東省)과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그리고 하이난(海南) 섬은 오래 전에 베트남 민족의 영토였습니다. 우리가 만주를 잃은 것과 같은 격이죠. 베트남도 프랑스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 계속 중국에 괴롭힘을 당해서 중국이라면 치를 떱니다
첫댓글 요즘 동북공정때문에 관심가지고 둘러보다가 좋은자료같아서 퍼왓습니다.. 길더라두 대충 봐주세용 ㅎ
위에 소개된 역사가 꼭 맞는 것이라 저는 확신 합니다. '지나(支那)'가 서북공정으로 티벳을 해치우고 이제 동북공정이란 사기극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 저 야단인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대한민국 통일이후 당연히 대륙의 일을 거론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지나인들을 발악하게 하는 것이지요. 일본의 사기극은 지나의 그 것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나의 역사 왜곡은 이미 3000년이 넘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위와같이 지나쪽 사료에도 나와있는 것을 식민/사대사관에 물든 우리 역사학자란 사람들이 모른척하고 있습니다. 없는 것도 찾아서 밝혀야 하는 것이 학자의 책임이요, 본분인 것을 이를 방기하는 것 또한 친일매국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 백성 모두는 정신이 죽은 역사와, 정통성없는 군사정권들에의해 한 번 더 왜곡되어진 역사아닌 역사를 배웠고, 지금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주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주에 무덤이 몇개가 있고, 부여에 금관이 어쩌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님이 저 대륙을 호령하며 사시던 모습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이 비좁은 땅에서 살던 것이 아니라 바로 저 대륙을 호령하던 그 '정신'을 배우는 것이 진정한 역사공부이자. 언젠가는 반드시 되찾아야 할 우리 것입니다. 이를 위한 선결 과제가 바로 친일매국문제 입니다. 이 것이 정리되지 않고서는 역사의 전진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그러면... ...
저쪽 서토에~ 있는것이죠~~
중국에서도 상고사 공부를 하는 학자들은 그 누구 한명도 자신들의 역사가 모두 우리민족의 역사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정치적으로 그러한 내용을 숨기는 것이죠. 지금 밝혀지고 있는 금석문(금문, 석문)만 가지고서도 해석을 하면 모두 우리민족의 역사라는 것이 밝혀진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풀지 못했던 금석문들이 우리나라 경상도 사투리를 대입하므로써 모두 풀린다는 사실까지 이미 중국의 학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치적인 문제로 숨기는 것이죠... 그러한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겠죠.. 또 그러한 진실을 언론쪽에서도 많이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할테구요...
이제사 우리 민족의 장엄하고 위대한 대륙인 이라는 사실이 알려 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반갑기 그지 없음니다. 중국에서 유학시절 우연히 접하게된 동이족 대하여 긴 시간 공부를 하게되었음니다....